한국염의 글 “다문화시대, 이주민의 인권과 기독교의 과제” 에 대한 논찬(2009.10.16-17 한국기독교학회 제 38차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
-황 홍 렬 (부산장신대, 선교학)-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이주노동자들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제도 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이 상당 부분 기독교선교단체/NGO들과 교회들을 통해 전개되었다. 그 결과 미흡한 점도 있지만 여러 면에서 이주노동자의 인권의 개선이 있었고, 제도의 변화도 초래했다. 2004년에는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었고, 2007년에는 산업연수제가 폐지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의식이 제자리를 잡고 제도 개선 뿐 아니라 의식의 전환이 미처 이뤄지기도 전에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사회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녀를 낳으면서 다문화가족의 자리가 한국사호에서 점점 커지게 되었다. 정부가 2006년부터 ‘다문화사회’를 정책적으로 제시하면서 기독교선교단체/NGO들도 다문화사회 담론과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2007년 2월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는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생존권이 여전히 심각한 사회문제임을 드러냈다. 한국사회는 이처럼 이주민과 더불어 산 경험이 짧고 이주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그것을 제도화 할 뿐 아니라 의식의 전환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다문화사회’ 담론으로 인해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체로 이주노동자는 귀환을 전제하는데 반해, 결혼이주여성은 정주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주노동자의 일부는 정주를 지향하고 있다. 정주를 지향하는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또는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사이에 결혼/사실혼이 이뤄지고 자녀를 낳기 시작했다. 결혼이주여성이 증가하면서 다문화가족 자녀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대적으로 이주노동자의 인권의 문제는 점차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다문화가족이나 결혼이주여성의 문제가 언론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연구자의 논문은 여성이주민(여성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의 인권상황을 다루면서 기독교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기에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연구자는 정부와 언론에서 한국사회가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한국사회는 다문화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시각에 논찬자는 동의한다. 트로퍼에 의하면 다문화주의는 다원화된 인구학적 현상, 사회문화적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가치있게 여기고 존중하려는 사회적 이념, 사회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인종, 민족, 국적에 따른 차별과 배제 없이 모든 개인이 대등한 기회에 접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정부의 정책과 프로그램이라 했다. 이것을 다문화사회에 적용하면 인구 비율이 10%에 이를 때 다문화사회라 할 수 있다. 지난 9월 3일 국토연구원이 발표한 “그랜드 비전 2050: 우리 국토에 영향을 미칠 미래변화 전망분석”에 의하면 한국사회는 2050년에 외국인 비율이 9.8%로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인구비율로 보아서는 2.2%에 불과하므로 다문화사회라 하기 어렵다. 둘째로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사회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가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여러 설문조사 결과들도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뒷받침하고 있다. 셋째로 정부의 정책과 프로그램이 사회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는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연구자의 지적대로 정부는 결혼이주여성을 동화의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다문화사회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있다.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 대책으로 다문화가족을 보고 있다. 그래서 ‘관주도형 다문화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처럼 연구자는 정부의 ‘다문화사회’를 보는 시각을 비판할 뿐 아니라 다문화담론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 “담론에 치우쳐 정작 다문화의 담지자로서 다문화의 주체가 될 이주민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데 소홀해질 우려가 있다.” 한국기독교 역시 “경제적 문화적 우월주의, 타종교에 대한 편견과 공격적 선교방식”의 문제를 안고 있어서 다문화사회로의 변화라는 시대적 도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 이주민들의 인권을 연구자는 이러한 시대적 도전 앞에서 기독교의 과제를 기독교교육적 측면과 인권선교적 측면 두 가지로 제시한다.
인권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기 위해 이주민 인권실태를 이주노동자, 이주여성노동자, 이주아동, 결혼이주여성 등으로 나눠 제시했다. 다문화사회를 위한 기독교교육의 과제로 한국교인들을 대상으로 이주민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임을 깨닫고 그들을 포용해야 하며, 그들을 차별하면 죄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오히려 그들을 바르게 섬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문화 기독교교육전문가를 육성하고 목회자의 의식을 개선하며 다문화 사회로의 변화과정에 이주민들을 동반자로 여기도록 해야 한다.
인권선교의 과제는 룻기를 통해 본대로 이주민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고, 이주민 보호를 위한 법을 제정하고, 그들을 격려하여 식탁공동체를 이루며, 성의 착취로부터 보호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고 스스로 서도록 연대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연구자의 논문의 의의는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 과정에서 한국기독교를 향한 도전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여성이주민을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바로 세워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한국기독교가 바로 세워지는 길을 인권선교와 기독교교육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논찬자는 연구자의 기본 입장에 동의하면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몇 가지를 보완하고자 한다. 우선 문제점으로는 연구자가 다문화사회 담론이 이주민의 주체화와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고 염려한 대목이다. 물론 서구의 다문화주의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다문화주의 담론은 그 자체가 이주민의 인권, 특히 문화적 권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주민에게 가하는 차별은 곧 이주민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요청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이주민의 문화적 권리를 무시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다문화주의 담론은 문화적 권리의 주체가 개인인가 집단인가 하는 문제, 소수자의 문화적 생존권의 문제 등이다. 소수집단의 문화적 권리, 문화적 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가? 인정한다면 문화적 다수자와 평등하게 그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가? 차이의 존중이 관용이나 사적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정치의 영역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이 담론은 이주민의 인권의 핵심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정치철학적 입장이 같은데도 문화에 대한 입장이 일치하지 않는데 다문화주의 담론의 복합성이 있다. 개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공화주의 입장을 지닌 베리(문화집단에게 특별한 권리부여는 집단 내부가 동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이해관계에 어긋날 수 있다) 와 테일러(문화의 동등한 가치에 대한 인정은 인간의 평등함에 대한 인정이다)는 소수자의 문화적 권리에 대해서는 비판과 지지로 나뉜다. 자유와 평등, 기회의 균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관점을 지닌 거트만(문화적 생존권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우선 원칙과 모순되지 않을 때만 가능)과 킴리카(인종과 민족에 근거한 집단권리의 인정이 사회적 문화라는 매개를 통해 자유주의의 개인우선원칙과 양립할 수 있다),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입장인 케이텝(근대가 성취한 인간해방은 자유로운 인간인데 강한 집단 소속감이 개인을 지배하고 문화집단에 대한 소속감에서 자아를 찾는 것은 허위적이다)과 라즈(소수자의 문화에 대한 관용과 차별금지를 넘어서 다문화주의를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문화가 개인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역시 문화적 권리에 대한 입장이 비판과 지지로 나뉜다. 하버마스는 다문화주의를 집단적 정체성의 인정을 위해 투쟁하는 권리이론으로 보고, 소수자의 문화도 다수 구성원들의 인정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변형의 힘을 통해서만 보존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다문화주의 담론은 소수자/이주민의 문화적 권리를 다루는데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 확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만큼 인권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연구자는 다문화 담론형태로 용공로 이론과 샐러드 볼 이론, 그리고 연구자가 제안한 비빔밥 이론을 제시한다(각주 5번). 그런데 앤드류 성 박은 동화모델, 융합모델, 문화적 다원주의 모델, 삼중 용광로 이론, 그리고 통합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다문화 담론 형태 중 다문화주의 담론은 위에서 제기한 대로 정치철학적으로 동일한 입장에서도 다문화주의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하는 만큼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어 다문화 담론을 단순히 용광로 이론, 샐러드 볼 이론으로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다.
연구자는 이주민의 인권확립을 위한 기독교의 과제를 기독교교육과 인권선교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러한 대안을 제시하는 관점이 포교론적 관점이 아니라 했다. 포교와 선교가 다른 것인지 아니면 포교적/선교적 관점은 인권선교와는 무관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돈 선교’의 문제가 ‘선교’라는 용어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가기 보다는 ‘인권선교’나 ‘생명선교’와 같은 대안적 선교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다문화사회 교육의 대상은 이주민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인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교육내용과 관련해서는 한국사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이주민을 위한 다문화교육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다문화교육은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다문화사회 교육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산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는 ‘영화로 떠나는 아시아여행’프로그램을 통해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 시민들에게 아시아 영화를 통해 자기 나라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은 이주민을 문화적 소수자로부터 다문화사회를 향한 문화적 주체로 세우는 의미있는 활동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에서 한국인만 교육대상이고 이주민은 다문화의 담지자이기 때문에 교육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디아코니아 신학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디아코니아 신학의 핵심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고정될 때 양자가 모두 ‘영적 강자’나 ‘내적 장애인’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상호나눔과 상호섬김의 관계, 대안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주민은 ‘문화적 다리’로서의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주민과 한국인 모두가 다문화사회로의 진입과정에서 상호배움과 상호섬김의 과정에서 상호변화가 요청된다고 본다. 이주민들은 자신의 ‘비참과 고난’을 통해 자신의 ‘역사의 기억과 문화’를 함께 한국사회에 가져옴으로써 문화적 ‘다양성의 씨앗’이 한국사회에 뿌려짐을 인식해야 한다. 즉, “그들은 고국에서는 잊혀진 존재이고, 새로 정착한 우리 사회에서는 차별과 억압을 받기도 하지만, 이 두 사회의 문화 사이에 다리를 만들고, 두 민족과 두 문화 사이에 만남의 장소를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들어가는 말에서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나라가 개발도상국이라고 한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에 이주노동자가 많이 들어오게 된 이유는 한국이 자본수출국이 돈 1992년 이후이다.
몇 가지 보완할 점으로는 우선 연구자가 의식적으로 기피한 용어인 다문화가족과 관련해서이다. 여성이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여성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의 인권이 중요한 관심사이지만, 다문화가족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여성과 외국인 이주노동자 남성으로 이뤄진 다문화가족 역시 인권의 차원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부부 사이에 태어나는 다문화 가족 자녀는 결혼이주여성이 낳은 자녀와 큰 차이 없이 사회에서 학교에서 차별을 받을 수 있다.
이주여성의 선차별적 인종차별적 상품화와 관련해서 연구자 역시 “이미지 고착”의 문제를 제기했다. 언론매체를 통해 ‘결혼이주여성은 돈 주고 사온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되어 다문화가족의 부부로서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부부들이 주위의 시선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주여성 가운데 피해 여성의 인권을 지켜야 하지만 자기들에 대한 편견으로 덧칠해진 이미지 때문에 열심히 살려고 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의 인권이 남편의 가족이나 친구들, 이웃에 의해 짓밟히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문제도 함께 연구자가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면 좋겠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오히려 종교/기독교의 순기능이 있다는 논문이 있다.
기독교 교육에 대해 보완할 것은 여성이주민들의 현실을 인식하고 지원할 수 있는 여성주의적, 다문화적 시각을 반영하는 예배공동체와 교육공동체의 형성, 기독교교육커리큘럼의 구성 등이다.
룻기와 관련해서 성서 읽기를 통해 모든 헤게모니적 주장들을 해체하고 타자//나그네/이주민들이 이 땅을, 지구를 가정으로 함께 나누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다문화가족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방 여인에게 더 개방적이 되었고, 결혼을 결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처럼 다문화가족은 한국사회가 다문화사회로의 전환 과정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