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카스 한 병의 예수 - 어느 여공의 간증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씩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주 조심스럽고 신비하게 말이죠.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는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당신 자신의 입으로도 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17세에 혼인하여 세 아이를 낳고 살다가 
서른도 못 되어 남편과 사별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엄마는 새벽 네 시 반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장사하러 나갑니다.
시장 바닥에 나가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현장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때부터 어깨에 무거운 짐, 보따리를 메고 
그 넓은 시장 바닥을 돌아다닙니다.
가게나 노점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 비닐봉지를 나눠주고
일일이 수금을 하러 다니는 일입니다.
엄마의 나이(58세)나 체력에 
너무나 딸리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다 쉬는 추석날 같은 날은 
병으로 앓아눕는 날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은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등도 휘어졌습니다.
겨울에도 한데를 돌아다니므로 
두 볼엔 얼음이 박혀 발갛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너무 고달프고 힘들게 그리고 별 볼 일 없이 
살아가는 인생으로 보입니다.

이런 엄마를 보면, 나는 내 공장 친구들이, 
18시간 혹은 24시간 일할 때의 그 표정마저 없어지는 
피곤한 얼굴들이 생각납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절망과 혐오에 사로잡힐지라도 
결코 쉬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자신이 절망해 보았고, 늘 가진 자들에게 멸시당해 왔고,
그리고 자신이 비참한 지경을 겪어 왔기 때문에,
절망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알고 
멸시당하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그리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절망하는 심정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세계는 이루어져 갑니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 속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그 박동을 느끼며
그리고 우리가 인간임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느낍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힘이 있고 
그리고 지치지 않을 끈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지금 내려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어릴 적에는,
구름을 타고 옆에는 수많은 천사들을 거느린 채로 
찬란한 빛과 웅장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은빛 나는 하얀 옷을 입고 오시리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신다면 글쎄요,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서도 
서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피곤한 우리 엄마에게 
박카스를 쥐어 주실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시끄러운 우리 공장에서 멍청히 일하는 내 옆에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와서 
살짝이 내 일을 도와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터전 내 신앙, 우리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하는 삶, 
일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기장 회보 1983. 4.)
       
'구원'이란 대체 뭘까요?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신비롭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그늘 아래 있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우리 인간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흘리신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는 걸까요?

한 '여공'이 고백합니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 속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그 박동을 느끼며, 그리고 우리가 인간임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느낍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힘이 있고, 그리고 지치지 않을 끈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구원'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구원을 추상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구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고상한 신학 언어나 교리를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일하는 사람들', '역사의 숨결', '진실로 사랑하는 힘', '지치지 않을 끈기' 등의 구체적인 삶의 언어, 역사의 언어로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한이 많은 사람'인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간증을 시작합니다. '17세에 혼인하여 세 아이를 낳고 살다가 서른도 못 되어 남편과 사별'하고, '새벽 네 시 반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때부터 어깨에 무거운 짐, 보따리를 메고 그 넓은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는', '나이나 체력에 너무도 딸리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등도 휘어진', '정말 너무 고달프고 힘들게, 그리고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인생으로 보이는' 어머니.

그녀는 '이런 엄마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공장 친구들'을 떠올립니다. '피곤한 얼굴들', '절망과 혐오에 사로잡힐지라도 결코 쉬는 법이 없는', '자신이 절망해 보았고, 늘 가진 자들에게 멸시당해 왔고, 그리고 자신이 비참한 지경을 겪어 왔기 때문에, 절망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알고 멸시당하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일하는 사람들'. 그녀는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자신과 자기 주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조금씩 발견하고 깨달아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녀도 '어릴 적에는' '그리스도인 예수'가 '구름을 타고 옆에는 수많은 천사들을 거느린 채로 찬란한 빛과 웅장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은빛 나는 하얀 옷을 입고 오시리라' 꿈꾸었습니다.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그리스도론, 혹은 신성(神性)으로 충만한 영광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한때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힘겨운 '여공' 생활을 하고 고단한 '삶의 현장'을 하나, 둘 통과하면서 이제 그녀의 마음 속에서 영광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사라지고, 그 대신 고난의 예수, '일하는 사람들', '절망한 사람', '멸시당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진실로 사랑하는 힘'과 '지치지 않을 끈기'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 언제인가부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만약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지금 내려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를 생각해 보면서,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고백합니다.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서도 서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피곤한 우리 엄마에게 박카스를 쥐어 주실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시끄러운 우리 공장에서 멍청히 일하는 내 옆에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와서 살짝이 내 일을 도와 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카스' 한 병의 예수!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의 예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본질상 동격인 초월적인 능력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동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희망하며 그들을 말없이 '도와주는' 연대성과 섬김의 예수. '자신이 비참한 지경을 겪어 왔기 때문에 절망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알고 멸시당하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예수.

복음서가 이야기하는 예수는 바로 이런 예수가 아니겠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 곧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신성을 가졌다거나 뭔가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우리 '대신'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비록 만 33년의 고달프고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 삶을 통해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그 박동을 느끼며' 정말이지 '인간답게' 살아 역사와 인간에 대한 희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삶의 터전 내 신앙, 우리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하는 삶, 일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어느 누군가의 '일', 곧 노동의 산물이라는 걸 늘 기억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며 살고 계십니까. 당신의 '신앙'은 당신의 '삶의 터전' 구실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고 또 '역사의 숨결'을 감지하십니까.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당신과 이 땅의 사람들의 '구원'에 이바지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은 구원을 '일하는 삶'과 동떨어진 그 무슨 신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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