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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문(文)-화(化), 그리고 ‘적(的)’의 논리 - 한국적 문화신학의 형성을 위한 한 가지 시도

제목 : 문(文)-화(化), 그리고 ‘적(的)’의 논리 - 한국적 문화신학의 형성을 위한 한 가지 시도
발표 : 이찬수 박사(종교문화연구원장), 2009년 10월 16일 한국기독교학회 제 38차 정기학술대회에서

1. 문화, 일반적 정의

문화(文化)란 무엇인가? 어원상으로 문화(文化)는 서한(西漢, 기원전202-기원8) 시대부터 통용되던 ‘문치교화’(文治敎化)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왕이 문덕(文德)으로 세상을 다스리면서 계도하는 것을 뜻하는 용어였다고 한다. 무력(武力)이 아니라 문력(文力)으로 감화하는 통치 행위에 어원적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근세에 들어 영어 culture 또는 독일어 Kultur의 의미에 노출되고 영향을 받으면서 인간이 산출해놓은 가시적 문명 혹은 문물의 차원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서양식 문물 혹은 생활양식을 염두에 둔 “문명개화(文明開化)”라는 용어가 유행하다가 그 줄임말로 ‘문화(文化)’라는 사실상의 신조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오늘날의 문화라는 말에는 서양 인류학자들의 시각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문화(culture)란 기본적으로 “공동생활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소산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가령 영국의 인류학자 타일러(Edward B. Tylor)는 문화를 이렇게 정의했다: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및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인간에 의해 획득된 기타 모든 능력과 습관들을 포함하는 복합 총체이다.” 비슷한 의미로 홋지(H. M. Hodges, Jr.)는 문화를 “한 사회의 성원들이 학습한 행동양식, 전통, 의식 및 믿음의 총체”로 정의했다. 그러다보니 우리말 사전에서도 이들의 정의를 거의 그대로 모방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문화 : 인류가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놓은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의 성과이며, 의식주를 비롯하여 기술, 학문, 예술, 도덕, 종교 등 물질적인 문명에 대하여 특히 인간의 내적 정신 활동의 소산.”

이러한 규정은 물론 다양한 인간적 행위와 그 소산에 대해 연구한 뒤 내린 훌륭한 결과보고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문화라는 것을 인간 활동의 가시적 소산 총체 혹은 현재 쌓여있는 외적 대상물의 차원으로 제한시켜버릴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내적 정신 활동의 소산이라는 해설을 달고는 있지만, 문화라는 것을 자칫 특정 시점에서 관찰된 대상들의 축적물 수준으로 보게 만들거나, '문물'이나 '문명'과 혼동하게 만들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보다는 좀 더 깊은 정의가 필요하다.

다소 광범위해질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 논문에서는 문화에 대한 좀 더 근원적인 정의를 통해,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론과 신론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는 한 가지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문화라는 낱말의 역사는 ‘문치교화’나 ‘문명개화’를 근간으로 한다 해도, 문화라는 동적 현상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 동적 현상이 벌어지고 축적되어가는 ‘논리’와 ‘구조’의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문화는 인간 계도의 수단이 되는 ‘문덕’조차 그 자체 안에 감싸고 내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적이고 근원적이며 광범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문화를, 인간의 외적 실재로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경험들이 상호소통하며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된 뒤 다시 개개인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로 보고서, 이 근거가 작용하며 문화적 현상들을 형성해가는 과정과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정립해보려는 것이다.

2. 문화-내-존재

흔히 문화를 정치, 경제, 사회 등과 구분하면서 인간이 산출해온 관찰 가능한 특정 영역이나 대상들로 간주하곤 한다. 예술 작품이나 예능 영역을 의미하는 협의의 차원에서 사용하는 경향도 크다. 하지만 문화는 인간 활동의 특정 영역이나 범주가 아니다. 문화라는 말의 쓰임새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과 관련지을 수 있을 만큼 광범위하다. 정치에도 문화가 있고, 경제와 사회에도 문화가 있다. 예술에도 문화가 있다. 게다가 종교문화, 건축문화, 교통문화, 의복문화, 음식문화, 세부적으로는 밥상문화, 김치문화 등등, 문화라는 용어와 개념은 인간 활동이나 소산의 거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 분야들의 하위 개념은 아니다. 인간과 관련된 거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세계다보니, 인간의 어떤 언행도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이 새로운 문화를 산출한다지만, 그 새로운 문화 역시 알게 모르게 기존 문화에 영향을 받으며 그 안에서 형성되고 성립된다. 그만큼 문화는 인간에 의한 관찰 대상이자 인간 정신의 소산물이면서도 인간 정신 활동 일체를 근거 짓는 원천이다.

인간은 문화를 대상화하고 전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만한 주체가 못된다. 인간은 문화라는 것을 온전히 대상화할 수 없도록 애당초 그 안에 철저히 붙들려 있다. 인간은 전적으로 문화 ‘안’에 있다. “세계-내-존재”라고 하는 하이데거의 인간 규정을 살짝 바꾸면, 인간은 “문화-내-존재”(Being-in-the-Culture)인 것이다.

“문화-내-존재”라지만, 문화가 인간을 둘러싼 하나의 외적 배경(background)이라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문화는 인간됨의 가장 깊은 곳, 인간 본질의 핵심에 들어와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인간은 문화를 대상화하지 못한다. 물고기가 물을 대상화할 수 없듯이, 인간은 전적으로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문화 안에서 형성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객관적으로 관찰된 문화, 그에 따른 문화론에는 이미 그렇게 관찰한 이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관찰 가능한 어떤 현상에 대해 인간은 의식 이전적인 의미를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낳은 이들은 이 점을 놓쳤던 것 같다. 인류학자들의 문화론에는 인간이 문화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는 주체자라는 암묵적인 착각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화는 그렇게 관찰하는 주체를 규정하는 도리어 주체적(主體的)인 것이며, 관찰되는 순간에도 변화하는 동적(動的)인 것이다. 문화를 대상화, 객체화시키는 주체 역시 문화라는 말이다.

인간이 문화를 만드는 듯해도, 실상은 그렇게 만드는 행위도 문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문화에 대한 인간의 판단도 넓게 보면 문화 안에서 성립된다. 문화가 인간 판단에 의미를 주고, 그 의미를 자체의 질서에 따라 유통시킨다. 따라서 인간 언행의 주체는 인간이기 이전에 근원적인 차원에서 문화에 가깝다. 여기서의 문화는 후기 아날학파에서 명멸하는 다양한 ‘사건들’보다는 “지리나 기후와 같은 장기지속적인 조건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집단적인 사고방식, 생활습관과 같은 것”, 즉 “망탈리테”를 중시하며 역사학의 새 지평을 열었을 때, 그 ‘망탈리테’와 반드시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사건들을 낳는 근원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는 상통하는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역사적, 문화적 이념들이 담긴 “담론으로서의 언어”를 강조하며, 인간이 언어에 영향을 주기보다는 언어로부터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본 것도 ‘구조상’ 이와 상통한다. 인간이 사적인 언어를 개발해 타인과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특정한 공적인 언어 시스템 안에서 그 언어적 질서와 의미를 통해 의사도 소통하고 사물에 대한 이해도 얻어나가는 것이다. 웅변보다 침묵의 소리가 훨씬 큰 법이라고나 할까. 문화는 인간에 의해 이해 가능한 하나의 ‘텍스트’라기보다는 그 이해를 낳는 지평 내지 ‘콘텍스트’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 표면적으로는 인간이 문화를 낳는 듯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인간을 태생적으로 감싸고 있는 문화가 도리어 인간을 낳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임상심리학적으로 보더라도, 그리스도교인 내담자의 신(神) 개념에는 유아 시절의 문화 경험에 근거한 전통적 신 표상이 훨씬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어렸을 때의 환경이나 경험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문화 안으로 태어나고 그 문화적 질서에 맞추어 자기 정체성도 형성되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아무리 인간이 문화에 대해 주체이고자 해도, 도리어 문화가 인간 안에 태생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문화 본연의 모습에 어울리도록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하며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3. “文으로 化하다”, ‘문’의 주체성

문화의 본질은 끝없는 형성 과정에 있다. 문화는 언제나 변화하고, 변화하면서 형성되어간다. 형성의 주체가 문화이고, 과정이 문화이며, 동시에 그 지향점도 문화이다. 이렇게 주체, 과정, 지향으로 구분해놓고 본다면, 문화(文化)란 그저 하나의 낱말이기 이전에 “문(文)으로 화(化)한다”는 문장이자,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된다.

이 때 ‘문’은 그저 ‘무’(武)에 대립하는 용어라기보다는, 개인 혹은 사회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고 그 경험을 의미 있게 하는 원천, 근원적인 힘이다. 다양한 ‘화’들은 이 힘 안에서, 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이 새로운 것을 수용해 자신의 질서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으로 ‘화’하게 하는 주체 역시 ‘문’이다. 그리고 ‘화’(化)라는 과정의 목적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끝없이 형성되고 축적되면서 한 사회 안에 공유되는 그 ‘화’의 내용과 주체가 ‘문’(文)이다. 아니 ‘화’와 ‘문’은 과정과 결과의 도식이나 객체와 주체의 이분법에 있지 않다. 이들은 별개가 아니다. ‘문’은 고정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화’ 자체가 사실은 ‘문’의 속성이다. 끝없이 ‘문(文)으로 되어가는(化)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문화 현상은 언제나 생성되는 것이고, 늘 과정 중에 있다.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이다. 그 움직임, 즉 변화와 작용의 주체가 ‘문’인 것이다. ‘문’이 온갖 것들을 포섭하며 스스로 변화해간다. 그 변화 자체, 변화 전체가 문화이다.

비유하건대 화(化)가 눈에 들어온 가변적이고 가시적인 대상이라면, 문(文)은 가시적이게 하는 눈의 감각[視覺]과 같다. ‘화’가 머리 속에 그려진 이미지나 표상이라면, ‘문’은 그 이미지를 낳은 뇌와 같다. 한 마디로 ‘문’이 감각 기관이라면 ‘화’는 감각 경험인 셈이다. 물론 외계 사물에 얼마나 어떻게 노출되고 반응하느냐에 시각이나 뇌기등도 변화할 수 있듯이, ‘문’도 다양한 외부 사물을 포섭하며 그만큼 변화한다. 그럼에도 ‘문’은 다양한 현상을 포용하고 다시 다양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주체로서의 기능을 한다. 이렇게 내적 감각[文]과 외적 대상이 만나는[化] ‘접점’에서 이른바 문화의 정체성이 형성되며, 그 정체성의 사회화가 이른바 문화적 현상인 것이다. 흔히 그 현상, 즉 다양한 변화의 가시적이고 정태적인 단면들을 종합해 ‘문화’라고 규정하곤 하지만, 이미 본대로 문화는 정적으로 굳어져 있는 산물이 아니라, 끝없는 변화이고 역동적인 작용이다. “문 안에서 문으로 화하는 작용이자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문화’를 “문(文)-화(化)”라는 말로 이미지화하고, 다시 “문(文) 안에서 문(文)으로 화(化)하는 작용이자 과정”으로 풀어쓸 때, 그 깊이와 넓이를 더 잘 담아낼 수 있게 된다.

4. ‘문’의 초월성

이렇게 ‘문’은 스스로 끝없이 변화하면서 그 ‘문’을 공유하는 것들을 변화시키는 주체적인 것이다.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문’은 일종의 힘이다. 다양한 ‘화’들을 낳은 원천이자, 그 ‘화’들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부여하는 통일적 힘이다. 일본 교토학파의 태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가 “우리(일본) 민족의 마음 깊은 데서 생겨난 세계 사상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마음 깊은 데”도 일본적 ‘문’과 연결된 정서적 저변을 의미한다. 타나베 하지메(田邊元)가 “일본의 문화는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은 통일이 개방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분석했을 때의 “폐쇄적이지 않은 통일”도 일본적 ‘문’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문화신학자 유동식이 영성우주가 시공우주의 본체이고, 개인 안에 존재하는 영성우주가 ‘얼’이며, ‘얼’은 민족적 차원에서 ‘풍류도’로 현현해왔다고 말할 때, 그 영성우주, 얼, 풍류도는, 다소 종교적인 표현들이기는 하되, ‘문’에 대한 우주적,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표현들에 해당한다. 이 ‘문’이 다양한 ‘화’들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되, 다양한 ‘화’들에 갇히지 않는 개방적 초월성을 지니고, 다양성에 질서와 조화를 주는 통일성을 지닌다. 이 개방적 초월성과 통일성은 ‘문’의 속성이 된다. 한 사회의 근간이 되는 그 ‘문’은 다양한 ‘화’들을 낳는 근거이되, 그 다양한 ‘화’들에 갇히지 않는다. 그 만큼 초월적이고 심원하다. ‘초월적 깊이’가 있는 것이다.

한 사회 안에서 종교가 형성되고 성립되려면 이 깊이의 차원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 깊이가 인간 안에서 ‘궁극적인 관심사’로 드러나고 작용할 때, 그것을 ‘종교적인 것’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종교적인 것’이 사회화하면서 제도로서의 종교도 성립된다. 한 사회 안에서 제도화되어 일정한 영향을 행사하는 종교치고 이 깊이에 기초를 두지 않은 것은 없다. 초월적 깊이 안에 제도 종교의 뿌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제도 속에 이 깊이가 갇혀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깊기 때문이다. 워낙 깊기에 흔히 근저라는 말로, 혹은 그 어떤 외적 표현으로도 제한되지 않기에 초월이라는 말로도 표현되어 온 이것은 종교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다양한 종교적 현상들 속에서 가장 종교적인 것을 추상화해낼 수 있다면, 끝없는 ‘화’(化)의 과정 속에 있는 한국적 ‘문’(文)이야말로 한국적 종교성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틸리히가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고 규정했을 때, ‘실체’와 ‘형식’이라는 다소 정적(靜的)인 언어로 끝없는 ‘화’의 과정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겠는지 의구심도 들지만, 문화를 ‘문’과 ‘화’로 구분해 설명하려는 이 글의 의도에 유용한 것은 사실이다. 틸리히의 종교문화론을 우리의 주제에 긍정적으로 적용하자면, 이 ‘문’이 종교이고, 이른바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등은 사실상 유교문화, 불교문화, 그리스도교문화라고 불려야 할 것들이 되는 셈이다. 하나, 둘, 셋, 셀 수 있는 여러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식의 이해를 넘어 종교들을 일단 문화적 현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 속에서 특정 종교들의 이름에 제한되지 않는 ‘종교’라는 근원적이고 공통적인 가치를 추상화해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제와 다시 연결 짓자면, 한국적 ‘문’은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등의 차별적인 이름들로 불려온 배타적 인간 집단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제도 종교들은 한국적 ‘문’을 가시화시켜주는 부분적 ‘형식’은 되어도, 그 형식을 형식 되게 해주는 ‘실체’를 독점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교들은 ‘문’이라는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솟아오른 가지들과 같기에, 여러 가지들의 근본에는 질서와 통일이 놓여있는 것이다.

5. ‘문’과 종교

물론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염려하며 분석한대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정치적, 이념적 명분들이 뒤섞인 채 제국주의적 정복과 억압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빈번하고, 한국의 경우 개신교의 배타성을 중심으로 종교 제도들 간 갈등이 여전히 생겨나고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교들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있기보다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공존하고 있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 역시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여러 종교들은 모두 한국의 통일적 ‘문’ 위에서 성립되고 그에 어울리게 형성되는 현상이라는 데서 찾아진다.

물론 한국 사회가 신앙의 자유와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민주주의 체제 하에 있기 때문이라거나, 그리스도교도든 불교도든 한국인은 대체로 유교적 질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 공존이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분석도 사회적 차원에서는 적절하다.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를 수용해 성립시키는 정서조차도 더 근원적으로는 한국적 ‘문’에 담긴 원천적 질서 안에서 형성된다. 한국인이라면 설령 적극적으로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는 한국적 ‘문’이라는 공통성, 보편성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깊은 정서 안에는 다양한 문화들이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융(C.G.Jung)의 표현대로 하면 ‘집단무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고, 유식불교(唯識佛敎)의 표현대로 하면 집단적 ‘아뢰야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 아뢰야식에 저장된 과거의 온갖 업의 자취가 현세 이후의 삶을 결정짓는다고 하듯이, 사람들은 의식의 층을 결정짓는 무의식적 문화의식, 라파이유(Clotaire Rapaille)의 표현마따나 “문화적 무의식”을 지닌다. 불자든 그리스도인이든 누구든 “문화적 무의식”이라 할 만한 보이지 않는 문법적 질서 체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적 ‘문’이 지닌 초월적 통일성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경험하고 있기에,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와 같은 표면적으로는 이질적인 듯한 종교현상들이 실상은 공존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한국의 ‘문’ 안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의 ‘문’이 다양한 종교들의 옷을 입고 스스로를 외화(外化)하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문화들은 이 한국적 ‘문’의 중층적 현현이다. 다양한 종교들은 모두 이 ‘문’과 연결되어 있기에, 종종 벌어지는 외적 갈등들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교 문화적 현상들은 그 뿌리에서부터 배타적이거나 대립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화’의 근원이자 지향점이 되는 ‘문’을 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한국 문화가 그리스도교를 향해 변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반대로 그리스도교가 한국 안에서 한국의 ‘문’에 영향을 받으며 그에 어울리게 구체화되어가는 것이다.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가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혁자”(transformer of culture)로 보았지만, 사실상 니버가 얘기하는 그리스도 역시 문화의 변혁자이기 이전에 문화에 의해 변혁됨으로써 정체성이 부여되는 문화 내적 개념이다. 한국 문화 안에서 한국 문화에 의해, 정확하게 말해 한국의 ‘문’ 위에서 ‘문’에 의해 생명력을 부여받기 이전에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교’란 없다. ‘문’에 의해 생명력이 부여되면서 ‘그리스도’라는 ‘화’가 비로소 성립되고 한국적 ‘문’의 깊은 질서에 어울리게 유통되어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각도에서 다소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전통적으로 ‘혼백(魂魄)’ 개념이 한국인의 사후를 설명하는 문화적 문법처럼 이미 작용하고 있었기에 그에 근거에 그리스도교의 영육(靈肉) 이원론 개념이 수용 전개될 수 있었고, 불교적 극락, 천당, 지옥 개념이 있었기에 그리스도교식 천국이나 지옥 개념으로 발전되어나갈 수 있었으며, 염라대왕 앞에서의 심판 개념이 있었기에 하느님 앞에서의 심판 개념으로 이어나가고, 전통적으로 하늘 신앙이 있었기에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으로 확장 심화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교가 한국의 문화적 형식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혼백이나 극락 등이 인생의 기원과 목적을 설명하기 위한 한국식 형이상학의 표현이라면,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며 살아온 한국인의 삶은 한국적 ‘문’의 구체화이며,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문화적 구체화에 힘입고 빚짐으로써만 한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좀 더 구체적으로 살필 것은 ‘문’이 ‘화’하는 근거 내지 ‘문’과 ‘화’의 관계이다. 이미 본대로 ‘문’과 ‘화’는 이분법적이거나 이질적이지 않다. 다양한 ‘화’들은 그 구체적 다양성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문’의 자기표현이기도 하다. 다양한 ‘화’들은 이미 그렇게 작용하게 해주는 힘, 즉 ‘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시각을 바꿔 인간 편에서 분석하면, 칸트가 설명하고 있듯이, 다양한 ‘화’들은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되는 대상들을 그 대상들로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인간 안에 주어진 선험적 종합 능력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양한 ‘화’들은 구체적 생활공간과 같은 물질적 기반과의 협동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 안에 솟아오르는 ‘문’의 힘에 종속되기만 하지 않고, 그 ‘문’의 힘을 자신 안에 주어진 선험적 인식 능력 안에 소화해냄으로써 다양한 ‘화’들, 이른바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세계 안에 태어나고 던져지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은 “문화-내-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엄연한 현실이다.

6. ‘화’의 불교적 근거, 불성(佛性)

이제까지 ‘문화’를 “문(文)-화(化)로 이미지화하고, 좀 더 길게 “문(文)으로 화(化)하다”라는 문장으로 풀며 해설했다. 그런데 이러한 “문(文)-화(化)”론은 따지고 보면 새로운 것이 아니다. 불교의 불성론(佛性論), 천성(天性) 또는 천명(天命)에 근거한 유교적 인성론(人性論), 그리스도교 신론 내지 육화론 등의 구조도 사실상 “문 안에서 문으로 화한다”는 “문-화”론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양한 종교 사상사를 통시적으로 종합해보면 드러난다.

가령 불교에서는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어 “불타”(佛陀, 깨달은 이)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의 깨달음은 불타의 창작물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주어져있던 깨달음의 성품, 즉 불성(佛性)의 구현이라는 것이 불교적 해석이다.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이 ‘화’를 ‘화’되게 해주는 ‘문’의 자기 구체화이듯이, 싯달타의 깨달음도 싯달타 이전부터 선행하며 싯달타에게 작용하던 보편적 원리, 질서, 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원리 내지 힘을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이라 불렀고, 그 ‘불’의 본질에 근거해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다양한 초월적 불타 개념들도 산출시켰다. 그리고 싯달타는 본래부터 존재하던 불성의 구체화, 즉 ‘화신불’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가시적 현상들을 그 원천으로서의 ‘문’과 연결 짓는 작업은, 역사적 불타에게서 비롯된 깨달음[佛]의 세계를 그에 선행하면서 그를 그 되게 해준 바탕, 즉 불성(佛性)의 작용으로 해설하는 대승불교의 논리와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문’ 안에서 ‘문’으로 ‘화’하는 ‘문’의 작용으로 보는 문화론은 소소한 일상의 세계도 근원적으로는 불성 안에서 불성의 모습에 어울리게 작용하고 구체화되는 것이라는 불교적 논리와 닮아있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나 “산천초목실개성불”(山川草木悉皆成佛)과 같은 핵심적 구절들은 이를 잘 나타내준다. 세상만사가 서로를 조건으로 해서 일어난다는 초기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에서 더 나아가 삼라만상 자체가 불성[性의] 자기 일으킴[起]이라는 화엄 성기설(性起設)은 가시적 ‘화’들이 모두 그 근원이 되는 ‘문’의 작용이라는 “문(文)-화(化)” 이론과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역사적 존재 안에서 알려진 원천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그 역사적 존재를 역사 내 제한적 존재로 머물지 않게 하듯이,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을 통해서 알려진 근원적 ‘문’의 힘이 그 다양한 현상들을 그저 단편적 파편들이 되지 않도록 질서와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7. ‘화’의 유교적 근거, 천명(天命)

이런 식의 논리를 유교에서는 오랫동안 천명(天命)에 근거한 인성론(人性論) 내지는 만물과 인간의 감응(感應) 이론에 근거를 두고 설명해왔다. 가령 공자가 인간의 본성을 하늘의 명으로 본(天命之謂性) 이래, 맹자(孟子)는 “성인(聖人)과 나[我]를 동류(同類)”로 간주했고, 그에 따라 “누구라도 요순이 될 수 있다”(人皆可以爲堯舜, <孟子>, 告子 下 2)고 선언했다. 이것은 천명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사물 사이의 감응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명나라 유학자 왕양명(王陽明, 1472-1529)도 만물과 일체(一體)가 되는 것은 본성 안에 갖추어진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인(大人)이 천지만물을 자신과 한 몸으로 삼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의도해서가 아니다. 마음의 인(仁)이 본래 그와 같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렵고 근심스럽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그의 인(仁)이 어린아이와 한 몸[一體]이 된 탓이다. 어린아이와 동류(同類)이기 때문이리라. 조수(鳥獸)가 슬피 울고 벌벌 떠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할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그의 인(仁)이 조수와 한 몸이 된 탓이다. 조수에 지각이 있기 때문이리라. 초목이 베이고 부러진 것을 보면 안 된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그의 인(仁)이 초목과 한 몸이 된 탓이다. 초목에 생의(生意)가 있기 때문이리라. 기왓장이 깨지고 망가진 것을 보면 애석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그의 인(仁)이 기왓장과 한 몸이 된 탓이다. 이것이 한 몸이 되는 인(仁)이란 것이다. 소인(小人)의 마음에도 그런 것은 반드시 들어있는데, 하늘이 명한 본성(天命之性)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스스로 그렇듯 영명하며 어둡지 않다.(<大學問>)

왕양명에 의하면, 사람이 사람은 물론, 짐승, 초목, 심지어 기왓장과도 교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어짊(仁)이 하늘의 명령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늘의 명령에 뿌리를 두기는 만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만물과 교감하며 인간은 하늘과 합일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화’들이 ‘문’ 안에서 ‘문’에 맞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과 구조상 유사하다. 인간과 하늘이 합일한다지만, 단순히 인간이 하늘과 정적으로 굳어진 본질을 공유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명과의 대화를 추구하는 현대 유학자 뚜웨이밍이 발전적으로 정리하고 있듯이, “하늘과 인간의 합일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적인 과정이다.” 당연히 동적인 과정 내지 관계는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이 하늘의 명에 따라 내적으로 합일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식으로 만일 ‘문덕’으로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교화하는 사람과 교화되는 사람, 수단으로서의 문덕과 문덕이 적용되는 사람 등의 원천적 합일 때문이다. 이미 하늘과 연결되어 있기에 하늘과의 합일이 가능하다는 말이며, 인간이 하늘의 성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품의 본성적 체계에 태생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연결 지으면서 그리스도교 신론의 구조를 보기로 하자.

8. 그리스도교적 ‘화’, 육화(肉化)

불교 논리에서도 그랬듯이,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하느님 나라, 한 마디로 ‘신’을 선포했지만, 후대 신앙인들은 예수를 높이면서 예수가 신이 “사랑하는 아들”, 신의 “외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철학과 만나면서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그리스도” 차원으로 확대되었다가,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교회가 제도화하고 난 뒤에는 하느님과 “동일본질”(homo-ousious, 칼케돈 공의회, 451년)을 지니는 분으로 규정되었다.

여기에도 동일한 논리가 함축되어 있다. 역사적 예수가 우주적 그리스도이거나 하느님과 동일본질을 지녔다는 논리적 이유와 신앙적 근거는 근본적으로 예수가 선포한 ‘신’에게서 찾아진다. 예수가 선포한 신이 정말 신이려면, 그리고 그 신이 정말 우주적인 창조주이려면, 그 신을 선포한 예수에게도 한 치의 거짓과 오류가 없어야 하며, 따라서 예수 역시 우주적 그리스도, 즉 신과 같은 차원의 존재일 수밖에 없어야 한다는 논리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 안에서 그 구체성의 근원이 되는 보편적 범주인 하느님 혹은 로고스를 찾아 구체성의 의미를 확장, 심화해온 것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른바 ‘육화’(肉化)의 논리를 구체화온 역사를 지니는 셈이다.

물론 그것은 예수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논리나 사건이 아니라, 원칙적으로는 전 인류에, 더 나아가 삼라만상에게도 적용되는 일이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세 1,1) 말하고,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만물이 창조와 생성 이전부터 선재하던 말씀과 원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전한다: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생겨난 것 치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그런 식으로 요한복음에서는 하느님과 삼라만상의 원천적 연결성을 본다. 그 연결선상에서 하느님은 모든 유한한 사물들과 무관한 분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도리어 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 된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6)

하느님은 만물이 나오고 통하고 지향하는 곳이다. 이러한 신론은 “문 안에서 문으로 화하는” “문-화”론과 유사한 구조를 하고 있다. 게다가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다”(로마 11,36)면, 신학은 만물을 관통하며 만물과 관계 맺는 신을 다루는 논의가 되고, 그 논의의 전제는 삼라만상과 신의 원천적 연결성이다. 그 전제에 충실할 때 만물의 존재 이유가 온전히 확보된다. 하느님과의 원천적 관계성 안에 있는 만물은, 비록 논리적이고 존재론적으로까지 하느님에 선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피동적 객체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만물은 태생적으로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까닭에 그분의 생생한 성품을 충실히 반영한 사실상 주체들이 된다. 뚜웨이밍의 다음과 같은 발언도, 만일 그가 유학자라는 선입견을 괄호에 치고 읽는다면, 고스란히 신학의 언어로 들린다.

대지, 몸, 가정 공동체에 깃든 신성성(神聖性)을 깨닫는 것은 변화를 향한 첫걸음이며, 이렇게 변화된 관념을 통하여 외부세계는 ‘대상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주체들이 교섭하는 장소’로 변환될 수 있다.

세계가 주체들의 교섭 장소가 된다는 말은, 세계가 진정한 주체인 신성성을 충실히 반영해내고 있다는 뜻이며, 그렇기에 다양한 사물도 그저 수동적 객체가 아닌 신성성의 다른 이름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적 표현으로 하면 세계가 하느님의 ‘육화(肉化)’이며, 하느님의 육화인 만큼 세계는 ‘신화(神化)’의 과정에 있다는 뜻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느님 안에 안긴 세계는 그 소소한 일상사마저도 “하느님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일상 자체가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신적으로 고양되고 승화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고린 15,28)이 되시는 까닭이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종파 내지 종교들의 외적 차이는 만물의 근거가 되는 하느님의 풍요로움을 증거해주는 수단이 된다. 유불도와 같은 다양한 종교들이 한국적 ‘문’의 구체화이듯이, 하느님은 종파적 차이를 불문하고, 이미 그 일상적 실존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바울로가 아레오파고 법정에서 변론했듯이,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분(사도 17,22-27)이며, 사실상 찾을 수 있도록 추동하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하느님은 유다인만의 하느님인줄 압니까? 이방인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과연 이방인의 하느님도 되십니다”(로마 3,29) 하는 바울로의 선언은 하느님의 원천성과 보편성을 적절히 집약해주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물론 여러 종교들을 동일하게 하느님이라는 우산 아래에 두고, 하느님이라는 대지 안에 안을 수 있는 성서적 근거들인 셈이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모두 하느님을 딛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어디서든 작동하고 있는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문화-내-존재”이듯이, 하늘을 보좌로 삼고 땅을 발판으로 삼는(이사 66,1)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에 힘입어 살아간다. 그렇게 하느님 안에 있기에, 존재론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성 속에 있기에, 비로소 인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범재신론(panentheism)은 오늘날 더욱 확대되어야 할 대안적 신론이다.

이런 식으로 불교, 유교, 그리스도교 등 다양한 종교들은 “문(文)-화(化)” 이론과 상통하는 구조를 하고 있다. 어쩌면 문화 안에서 형성되고 성립되는 종교 현상이 “문-화”의 논리를 따르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교문화, 유교문화가 한국문화를 반영하는 한국문화이듯이, 그리스도교 문화 역시 한국 “문-화”의 논리를 반영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9. ‘적’(的)의 논리

한 사회 안에 종교가 새로 전해진다는 것은 이미 마련되어 있던 문화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문화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 문화 안에 사는 사람의 경험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사람의 경험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타고난 능력이 새로운 것을 낯선 것으로 물리치지 않고 자신 안에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개인의 경험들이 서로 만나고 사회화하면서 종교는 이른바 문화가 되고, 그런 식으로 종교로서의 정체성도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문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서는 종교는 몸을 입지 못한다. 그리스도교 역시 한국의 문화 안으로 들어오면서 시대성과 구체성을 입는다. 그렇게 입어진 시대성과 구체성이 그리스도교 ‘문화’이며, 동시에 한국 문화이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가 되려면 문화적이어야 한다. 물론 한국으로 들어온 그리스도교는 민족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이기도 하고 윤리적이기도 하며 예술적이기도 하고 때론 과학적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는 민족이나 정치, 윤리, 예술, 과학 자체는 아니지만, 민족적, 정치적, 그리고 예술적, 과학적이다. 그런 식으로 문화적이다. 민족 문화, 정치 문화, 예술 문화 등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문화라는 옷을 입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한국적 ‘문’의 초월적 깊이도 살려내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의식 안에서도 현실화되려면 ‘종교’라는 것이 폐쇄적 실재가 아니라, 한국의 ‘문’ 안에서 그 ‘문’에 어울리게 구체화되는 개방적 실재라는 사실에 눈떠야 한다. 간단히 전술한대로, 종교가 하나 둘 셋 셀 수 있는 명사적, 자기 폐쇄적 실재가 아니라, 그러한 종교적 실재를 촉발시킨 깊이의 차원, 즉 ‘문’과의 관계성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당연히 다양한 ‘화’들의 차원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다양한 ‘화’들은 ‘문’의 반영이기에 통일적 뿌리를 지닌다. 종교라는 것은 타자에 대해 폐쇄적인 ‘명사적’ 실재가 아니라, 타자와 관계 맺고 그에 개방적인 ‘형용사적’ 실재라는 것이다. 가령 ‘그리스도교’라는 명사적 실재가 자기 폐쇄적이고 완결적인 느낌을 준다면, 형용사형 어미가 붙은 ‘그리스도교적’은 자기 안에 폐쇄되지 않으며,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 되게 해주는 근원을 독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적’ 자세는 그리스도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문’에 개방적이다. 그리고 ‘화’의 흐름이 그렇듯이 늘 과정적이고 관계적이다. 흔히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명사로만 간주하고 대문자 ‘Christianity’로 그 고유성을 나타내지만, 사실상 그 고유성은 ‘그리스도교적’이라는 형용사적 개방성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형용사적 개방성이 그리스도교가 한국의 ‘문’에 뿌리를 두면서 형성되는 원리를 적절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자어 ‘적’(的)은 그리스도교가 한국의 ‘문’ 안에서 그 ‘문’과 관계를 맺으며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가는 모습을 잘 담아낸다. ‘적’이라는 창문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한국의 깊이를 보게 해주고 그리스도교와 한국 문화를 연결시켜준다. 이와 관련하여, 정신분석학자 위니캇(D.W.Winnicott)이 문화의 위치를 외적 실재와 개인의 내면 양쪽을 넘나드는 중간지대 경험에서 찾은 적이 있는데, 그 중간지대 경험이라는 것이 본 논문의 문화론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문’과 ‘화’를 연결 짓고자 하는 의도는 풍성하게 해준다.

한국 문화를 수용하는 그리스도교‘적’ 자세의 그 ‘적’에는 그 ‘적’을 매개로 하는 상관적 실재들의 자기 부정이 들어있다. 그리스도교가 상이한 문화와 만나 그 문화에 자기 부정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그 문화 역시 자기 부정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해서 더 풍성한 ‘문’으로 ‘화’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적’은 대단히 종교적인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한국 문화가, 정확히 얘기하면 한국적 ‘문’이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갈 때 그리스도교는 한국적 몸을 입게 되고, 추상적 교리 체계인 신학이 자기를 개방하고 끝없이 변화해 굳은 도그마가 되지 않을 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로부터 공감과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10. 신적이고 인간적인

‘적’은 닫힌 명사가 아니라 열린 형용사이다. 그리스도교는 한국 문화의 이 ‘적’을 통해 들어온다. 한국 문화가 스스로를 열어 그리스도교를 수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한국의 종교, 문화적인 그리스도교가 된다. 그리고 한국 문화는 이른바 전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고 거기에 몸을 입힘으로써 그리스도교식 우주와 교감하고 소통하는 창문을 얻게 된다. 그렇게 한국 문화도 함께 변화하고 풍요로워지는 것은 물론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가 한국 문화 안에 자신을 전달해 한국 문화를 그리스도교화하는 것이라고 해석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 문화를 그리스도교화한다고 하기에는 그리스도교보다 한국 문화가 더 크고 그 ‘문’은 더 깊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세계가 훨씬 더 크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담긴 형이상학적 전제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라는 추상의 것이 한국인에게 구체적 몸을 입는 것은 한국 문화의 질서 안에 편입되고 포섭될 때이다. 그렇게 한국 문화적 경험을 하면서 그리스도교가 구체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자체란 없다. 한국 문화 안에 들어옴으로써 그리스도교적 피와 살을 입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그리스도교가 있고, 유럽 그리스도교, 일본 그리스도교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가 한국 문화를 수용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그리스도교‘적’ 행위도 그런 방식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적’을 보지 못하는 한, 한국 문화의 정수를 보지 못하며, 그리스도교의 형성과 성립 원리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을 보지 못하는 한, 종교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의 판단 역시 핵심을 놓치거나 핵심에서 빗겨간다. ‘적’은 내 안에서 너를 보는 자세이다. ‘적’으로 인해 자기 우월적이고 배타적인 태도가 극복되고 타자에게서도 이상적인 가치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만큼 대립을 넘어 타자를 존중할 수도 있게 된다. 위선적인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적인’ 사람을 불교 ‘안’에서도 볼 수 있게 되고, 여느 불교인 못지 않게 ‘불교적인’ 사람을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볼 수 있게 된다. “스님보다 더 스님다운 신부님”, “목사님보다 더 목사님다운 스님”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대화신학자 스위들러(Leonard Swidler)는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에 신선한 변화를 요청하고 제안한다. 즉, 예수는 “참 하느님이자 한 인간”(Deum vere et hominem vere)이라는 명사 중심의 오랜 신앙 정식(451년 Chalcedon 공의회의 표현)을 예수는 “참으로 ‘신적’이고 참으로 ‘인간적’”(vere divinus et vere humanus)이라는 형용사적 차원에서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예수의 신성을 살리면서도 다른 신‘적’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타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배타적 태도를 수정하고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고유성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참으로 ‘신적’이고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표현에 들어있는 ‘적’(的)은 타자에 대한 개방성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가는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11. 적(的)과 즉(卽)

‘그리스도적’, ‘불교적’에서의 이 '적'(的)이라는 표현은 관찰된 종교 현상들이 결코 서로 대립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개방성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가는 관찰자의 태도까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적’은 대화 상대에 대한 이해 속에서 재이해된 대화 주체와 기존의 대화 주체 사이에도 적용된다. ‘적’이라는 형용사적 개방성은 관찰자 자신도 변화시켜준다. ‘적’이 관찰 주체와 대상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다리가 놓이는 것은 ‘자기’라는 기존의 밀폐된 창문이 열릴 때에만 가능하다. 그 ‘적’ 안에 타자를 포용하는 공간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적’은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 내지 문화 사이에서는 물론, 더 나아가 세계의 ‘구성 원리’가 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간의 상호 소통은 이 ‘적’이라는 창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적’은 일종의 ‘매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적’ 자세는 한국의 ‘문’과 그리스도교를 잇는 매개이다. 매개이되, 제삼의 공간이나 별도의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다. 자기를 비우고 부정하는 데서 만들어지는 타자수용의 장소이며, 자기 비움의 행위이자 비워짐 자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적’은 매개이되 매개 아닌 매개, 교토학파 철학자 타나베 하지메(田邊元)가 즐겨 쓰는 표현대로 하면 “절대 매개”이다.

참으로 신‘적’인 것은 신으로서의 배타적 자기 정체성을 비워 타자를 수용하는 틈을 만들어놓을 때 성립된다. 그런 ‘적’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와 네가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모습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필립 2,6-9)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기에 다시 높이 올라가게 되었다는 케노시스 신학은 ‘적’의 논리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사례가 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할 때의 그 ‘죽음’도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자기가 긍정되며, 자신의 가치를 이웃 안에서도 발견할 때 자신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적’의 원리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내놓고 낮추는 ‘적’으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한국적인 것이 되고 한국의 그리스도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한국이 서로를 떠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적’은 자기 부정을 통해 타자를 수용하고 그럼으로써 자기를 살아가게 해주는 논리를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와 한국의 사이 혹은 중간[中]을 배타하는 배중률(排中律)이 아니라, ‘사이’ 혹은 ‘중간’을 용납하는 용중률(容中律)이 되는 것이다. ‘적’의 논리는 용중률의 논리이다. 사이를 용납함으로써 ‘너’를 ‘나’ 안에 용납하고, 그렇게 ‘나’도 살아가게 된다. ‘적’의 논리는 그렇게 자기를 살아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자기를 자기되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기와 자기의 동일성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즉’(卽)이기도 하다. ‘적’은 나와 너의 '사이(inter)'이면서 동시에 나의 ‘중심(intra)’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의 종교문화가 형성되어가고 그 문화적 다양성을 구성하는 여러 종교적 현상들도 성립되는 것이다. 이들 종교 현상들의 자기정체성[卽]은 ‘적’(的)이라는, 타자에 대한 개방성 속에서 형성된다. 다양한 종교 현상들이 ‘적’이라는 열린 틈을 통해 서로를 수용하고 있기에, 불교문화를 통해서도 숨어있는 유교문화, 그리스도교문화를 볼 수 있고, 그리스도교문화를 통해서도 숨어있는 유교문화, 불교문화를 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불교문화, 그리스도교문화 등은 한국적 ‘문’ 자체는 아니지만 그 ‘문’의 성격을 대변할 수 있을 깊이를 지닌다. 한국 종교문화의 부분이면서 그 부분의 모습으로 한국 종교문화의 전체의 성격을 반영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부분과 전체가 ‘적’이라는 틈을 통해 서로를 만난다. 그렇게 ‘적’의 논리는 궁극적으로 종교와 문화의 상호동일성 혹은 상즉성(相卽性)까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종교문화에서 그리스도교적 모습을 드러내주고, 다양한 ‘화’들이 하느님 안에서 원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참으로 그리스도교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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