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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주]설교자를 위한 성서 연구<1>

제목 : 설교자를 위한 성서 연구
발표 : 김창주 박사
(2009년 9월 17일, 기장신학연구소 목회와신학연구 세미나에서 발표)

출처 :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1. 내가 그의 ‘마음’(לב)을 강퍅하게(개역) 완악하게 (개정)

        마음, 혹은 심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לב는 출애굽기 4장 21절을 비롯하여 서두에서  20 차례나 언급된다. 성서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신체부위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렘 4:21). 출애굽기에 여러 차례 표현된 ‘마음’은 번역에 따라 ‘고집’(새번역), ‘억지’(공동번역) 등으로 옮겨졌으나 원문은 ‘마음’이다.

        심장은 사람이 태어나는 시점부터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신체에서 순환계의 중추기관으로서 혈액을 순환시키는 원동력이며, 주기적인 수축과 이완을 되풀이하여 혈액을 온몸에 공급하는 펌프역할을 한다. 따라서 심장이 멈춘다면 생명도 없다. 이런 점에서 심장은 인간의 생각과 지적인 행위, 즉 이해와 통찰력, 의식과 반성, 판단과 선택 등이 비롯되는 곳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강퍅해진다는 것은 선과 악의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 되고 바로는 스스로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놔주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성질을 잘 깨달았던 이스라엘은 마음이 딱딱해지지 않고 부드럽고 탄력있게 활동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강구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일 년에 한 차례, 탈무드는 7년 반에 완독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갖추고 있었다. 즉 매주 안식일에 낭독할 오경과 매일 읽어야 하는 탈무드의 ‘다프 요미’를 그날그날 읽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세오경의 경우 일 년 동안 안식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 일독을 할 수 있다.

        성서일과의 마지막 안식일을 ‘토라 심하트’라고 하는데 특별한 행사가 벌어진다. 이 때는 오경의 마지막 신명기와 창세기의 처음을 읽게 되어 있다. 신명기의 마지막 글자는 이스라엘의 ל이고, 창세기의 첫 자음은 ‘태초에’의 ב가 된다. 이 두 글자를 연결하면 심장(לב)이 된다. 토라는 처음과 마지막이 있는 일반적인 책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토라의 끝은 곧 다시 시작이라는 의미다. 마치 심장이 한 인간의 일생 동안 펌프질하며 혈액을 공급하듯이,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한 ‘토라’는 이스라엘의 심장으로서 항상 읽고 늘 가까이 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상징이다.


2. 광야 (מדבר) vs 말씀 (דבר)

        광야, 또는 사막을 가리키는 미드바르는 경작되지 않은 목초지를 비롯하여 불모지, 황야, 그리고 바위가 많은 고원지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뜻한다. 그러나 광야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에 연단 받은 곳이며,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시험받았다. 예수께서 공생애에 나서기 전에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며 수련한 장소도 역시 광야이다.

        다바르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창조할 수 있는 힘, 곧 ‘창조력’을 의미한다. 특히 말씀이라고 할 때 기록된, 입으로 명령된 것이라는 고착적인 의미로 제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창조력은 단지 구술되거나 기록된 형태로만 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드바르 → 광야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를 분석해보면 ‘말씀으로부터’라는 뜻이다. 즉 광야는 일교차가 심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맹독류의 해충과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그럼에도 왜 수행자들은 먹을 것이 구비되어 있는 안락한 집과 거처를 떠나 거친 모래바람이 숨을 편하게 쉴 수 없게 하는 곳, 음식을 먹고 잠을 자기에 불편한 곳 광야로 가는 것일까? 그러나 수행자들은 삭막한 모래 언덕과 파란 하늘만 보이는 사막에서 불편을 감수하며 수련하는 동안 하나님 경험을 하였다. 즉 수행자들이 ‘광야’로 간 까닭은 하나님의 창조력인 ‘말씀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수행자들에게 광야(מדבר)는 죽음과 공포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דבר)을 깨닫는 장소이며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고 충전하는 장소가 된다. ‘다바르’는 원래  ‘뒤에 가지런히 있다, 물러나다’는 등을 뜻한다. ‘광야’에 물러서서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듣는다면 그 말씀은 광야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모세는 십계명을 비롯한 오경의 대부분 말씀을 광야에서 받지 않았던가! 광야에서 비움으로써 오히려 말씀으로 채우는 ‘말씀’과 ‘광야’의 역설을 살펴본 것이다.

3. 홍해바다? 갈대바다?(10:19; 15:4)

        갈대 바다(ים סוף)의 번역은 이따금 말썽이 되어 교회 안팍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열린 체제, 즉 모음이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정경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해프닝이다. 히브리어 갈대가 홍해로 번역되는 데는 라틴어 옮기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역으로 보인다. evruqra/| qala,ssh| (LXX), mare Rubrum(Vulgate). 이집트 하구에 빨간 산호층이 있는 부근을 가리키는 표현인지, 수초들이 시들 때 물의 색깔이 붉어진다는 에돔 어디쯤인지 가늠하기 어렵고 만족할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히브리어 ‘수프’를 반드시 ‘갈대바다’라고만 읽도록 하지 않는다는 데 관점을 두어야 한다. 즉 현재 확정된 모음대로 읽는다면 ‘갈대 바다’이지만 ‘바다의 끝’(소프)이 될 수도 있고, 바다를 넘어가는 ‘경계선’(사프)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물/바다와 관계를 고려하면 해석의 여지가 한층 넓어진다.

        일찍이 순자(荀子)는 물의 생리와 이중성을 잘 이해하여 백성과 군주의 관계를 물과 배로 비유하여 비유한 바 있다. 물이 배를 운행하게도 하지만 더러는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이란 가뭄에 단비가 되기도 하고 태풍의 폭우가 될 수도 있으며, 강물에 배를 띄울 수도 있고 홍수가 배를 삼킬 수도 있다. 고대인들에게 물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면서도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고센 땅에 정착할 때 이집트는 적당한 비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필요하였지만 제국이 되어 그들을 학대할 때는 이미 홍수처럼 사나워서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모세는 하나님의 사자들의 인도를 받아(14:19)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거대한 이집트 제국을 탈출하게 되었고 급기야 갈대 바다에 다다랐다. 이스라엘을 삼키려는 압제와 수탈의 이집트 제국의 ‘끝’이자 자유의 길로 갈 수 있는 ‘경계선’이며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턱’이 이른 것이다. 

        따라서 물이 갈라지는 대목(21절)과 함께 앞의 14장 19절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


19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21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하나님의 천사가 앞서 가다가 이스라엘 뒤로 옮겨간 뒤에 바다가 갈라진다. 이것은 물이 갈라진 그 곳, 즉 ‘바다의 마른 땅’을 내딛는 발걸음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일이지 천사가 앞에서 인도할 수 없다는 한계를 분명히 밝힌다.


4.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위기 24:16)

       이 규정이 실제로 유대인들에게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된 역사적인 계기가 있었다. 구약성서의 언어 히브리어는 역사적으로 볼 때 두 차례 제국의 언어를 만나 새로운 경험과 전통을 갖게 된다. 즉 히브리어는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에서 아람어를 만났고, 그로부터 약 3세기 후에 그리스어를 경험하게 된다. 그 만남과 변화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 네 글자가 있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사촌 언어라고 불리고 실제 그만큼 비슷하다. 즉 글자의 형태나 문법은 물론 많은 경우 단어까지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정복당한 약소국 이스라엘에게 유리한 점이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예기치 못한 혼란과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특히 거룩한 네 글자에 대한 읽기와 태도는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로 읽게 되면서부터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기원전 597년에 시작된 바빌론 포로는 고레스의 칙령으로 기원전 538년 일부는 귀환하였지만 기원전 450년경의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환을 기준으로 한다면 유대인들은 최소한 1세기를 훨씬 넘는 기간을 아람어 문화권에서 지냈다. 이 말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쓰던 세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아람어 세대가 적어도 3 차례 정도 흘렀다는 의미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3-4세대라면 히브리어보다는 아람어 구사가 훨씬 쉬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모국어는 아람어인 셈이다.

         히브리어 נקב는 ‘모독하다,’ ‘저주하다’는 뜻이지만 아람어로는 (이름을) ‘부르다,’ ‘칭하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 규정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경우로 한정되는데, 아람어로 읽으면 그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는 금지명령이 된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십계명 말씀과 강력한 아람어 버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4:16)가 이전보다 더욱 엄격한 계명과 규정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경건한 유대인들은 ‘거룩한 네 글자’를 부르기는커녕 읽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호칭이 필요하였고 마침내 아도나이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구약성서에 거룩한 네 글자 יהוה가 총 6,823 차례 언급된다. 유대인 독법에 의하면 네 글자에 아도나이의 모음이 붙여 있지만 읽을 때는 그대로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발음해야 한다. 그렇지만 히브리 전통과 독법을 모르는 중세 번역자들이 ‘여호와’로 표기하면서 본래 발음과 다른 이상한 이름이 되었다. 그러면 ‘아도나이’와 네 글자가 연속으로 쓰일 경우는 어떻게 발음하는가? 이 때는 ‘엘로힘’에 들어있는 모음을 붙여서 ‘아도나이 엘로힘’으로 읽어야 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 ‘아도나이’라는 발음조차도 불경스럽게 여기고 그 대신 하쉠, 또는 아도-쉠 등으로 읽는다. 또한 글자로 표기할 때는 G -d 로 쓰기도 한다. 이와 같은 거룩한 네 글자에 대한 존경은 새로운 전통을 낳았고 본래의 발음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5. ‘자유의 길’에 서 있는 이스라엘: 비하히롯, 믹돌과 바알스본 사이(14:2)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룻길을 가서 믹돌과 바알스본 사이, 곧 ‘비하히롯 앞’에 장막을 치고 첫 날 밤을 보낸다. 이 세 지명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거니와 설령 알아낸다고 해도 그 자체가 큰 의미는 없다. 그렇다면 왜 성서 기자는 이렇게 알듯 말듯한 지명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믹돌, 비하히롯, 그리고 바알스본으로 상징되는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믹돌은 ‘높은 탑’이나 ‘망대, 요새’를 의미하며 이집트어를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믹돌은 이스라엘이 종노릇하던 당시 세계 최고의 지배 세력인 이집트와 그들의 군사 시설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 바알스본은 고대 가나안의 주신 ‘바알’과 그의 거처와 예배 중심지로 알려진 ‘사본’(수 13:27), 혹은 사폰산(Zaphon)을 가리키는 말이 결합되었다. ‘사본’산은 가나안 족의 올림푸스 산이라 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바알스본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하여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될 우상 ‘바알의 본 고장’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비하히롯은 무슨 뜻일까? 비하히롯은 ‘비 + 하히롯’의 결합 형태로서 ‘비’는 실제 발음으로 ‘피’에 해당하고 의미는 ‘입구, 또는 현관’을, 그리고 ‘하히롯’은 자유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자유의 입구’라는 뜻이 된다. 이스라엘이 종살이 하던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은 곧 종의 멍에를 벗어내고 자유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속박의 공간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서 자유를 만끽할 수 없다.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뒤에 있는 믹돌의 기억, 즉 자신들을 압제하던 제국의 흔적이 자유를 방해하기도 할 것이고, 또한 앞에 있는 바알스본이 만끽할 수 있는 자유에 유혹을 드리울 것이다. 이집트에서 나와 자유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불안한 자유인, 아직도 유혹의 덫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자유를 얻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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