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출애굽기와 원어설교 I
발표 : 김창주 박사(2009년 9월 10일, 기장신학연구소 목회와신학연구 세미나에서 발표)
출처 :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1.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 인’(שׁבעים)이더라(1:5; cf. 창 46:27)
5살: 글자를 배우며 성서를 읽는다
10에 미시나, 13에 모든 계명을, 15에 탈무드를 배우며, 18에 결혼,
20에 생계에 종사하고 (弱冠)
30에 강해지며 (而立)
40에 모든 것을 이해하며 (不惑)
50에 조언할 수 있고 (知天命)
60에 장로가 되고 (耳順)
70에 흰 머리가 나오고 (古稀)
80에 특별한 힘을 보여주며 (望九)
90에 몸이 구부러지고
100이면 세상을 떠나도 좋다.<Abot 5:21>
다음은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숫자를 정리한 것이다.
10: 열 가지 말씀(출 34:28; 신 4:13, 10:4)
두 손가락의 합, 완전과 새로운 시작, 절대성, 이해력 등을 의미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 십계명, 다윗의 하프 10줄, 카발라 세피로트
cf. ‘만물을 포괄하며 만물의 경계를 이루는 어머니’ 피타고라스
12: 고대 세계에서 12 궁도, 12달, 성서의 야곱 12 아들, 12 제자, 희랍신화의 헤라클레스 12 과업 등에서 보듯 순환과 질서, 그리고 힘의 작용을 상징한다.
20: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20년(창 31:38): 손가락 발가락의 합계로서 한 사람의 총체
성막 뜰의 기둥(27:9-10)
30: 요셉이 총리에(창 41:46); 사울, 다윗의 왕에 오른 나이(삼상 13:1; 삼하 5:4)
회막에서 봉사할 수 있는 나이 (민 4:3)
아비멜렉의 아들 30, 성읍이 30 (삿 10:4)
예수의 활동 시기 서른 살쯤이었다(눅 3:23)
40: 노아의 홍수 40일, 광야에서 40년, 모세의 미디안 40년, 구름 속에서 40일, 예수의 광야 40일 시험 등등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며 영적인 의미에서 정화의 과정(purification)이며, 동시에 ‘새로운 내일’을 위한 도약과 연단의 시간이다. 랍비들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어 태아(embryo)가 된 시점을 40일로 본다.
50: 하나님이 요구한 최초 의인의 숫자 50명(창 18:24),
50년은 희년(레 25:10), 일생을 50으로 보고 적어도 일생에 한 번 희년을 경험하도록
레위인의 회막 봉사 50세까지(민 4:3)
동침한 처녀에게 몸값 50세겔(신 22:19),
성막의 기본은 50규빗 정사각형 2개,
엘리야가 선지자 50명씩 굴에 숨겨(왕상 18:4)
신약에서는 50은 ‘인생을 충분히 경험한 나이’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 8:57)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요 21:8)
60: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60만 (출 12:37)? 그러나 정확하게는 603,550(출 38:26; 민 1:46)
회막 기둥이 모두 60개, 화목제로 쓰인 제물이 숫양 숫염소(민 7:88)
“솔로몬의 침대는 용사 60인이 호위”(아 3:7; 6:8), 성안에서 만난 60명의 평민(렘 52:25)
위에서 보듯이 완벽한 방어, 곧 하나님의 보호를 가리킨다.
30배 60배 100배(막 4:8)?
70: 안정적인 가족 단위를 가리키는 숫자
노아의 후손 70명? 신약에서는 제자 칠십(눅 10:1,17)
이집트의 야곱 혈속 칠십인(출 1:5, 창 46:27),
이집트 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요셉을 애도(창 50:3)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출 24:1,9, 민 11:24, 겔 8:11), 열조 칠십인(신 10:22)
기드온의 아들 칠십인(삿 8:30),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삿 9:2), 아합의 아들 칠십(왕하 10:1,7)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
또한 70은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주는 기한(사 23:17, 렘 25:11, 29:10, 단 9:2, 슥 1:12)
일반적으로 ‘70인역’으로 알려진 헬라어 구약성서는 원래 72명의 현자가 번역에 참여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70인역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유대교의 ‘70’에 관한 숫자의 상징이 들어있다. 즉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의 혈족 70, 혹은 계약을 맺을 때 하나님을 경배한 장로 70, 심지어 예수가 70명의 제자를 파송한 것 등에서 알 수 있듯 70이 하나님의 비밀(divine secret)을 간직한 숫자로 받아들여졌다.
2. 이집트(מצרים)
이집트는 히브리어로 미츠라임이다.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창 10:6). 그 후예들이 정착한 곳이 다름 아닌 이집트, 미츠라임이다. 어원을 따라가 보면 ‘억압하는 자, 원수,’ 또는 압제당하는 ‘고통’ 등을 의미하기도 하고, 지형적으로는 거대한 벽이 양쪽에서 짓누르는 형상의 ‘협곡’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집트는 나일강의 장대한 물줄기가 부딪히는 비옥한 하류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집트’는 이제 지형적인 상징에서 ‘나일강의 양안,’ ‘두 물줄기,’ ‘경쟁 상대,’ ‘이중 압박’ 등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Biblical Hebrew E-Magazine. January, 2005>
또한 이집트는 4대 문명의 발상지인 나일강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고대 이집트 문명을 지칭하는 왕조 혹은 지명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이집트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선진국으로 각인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차적인 의미, 즉 이집트가 의인화 되어 ‘억압, 구속, 제약, 속박’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집트는 ‘종 되었던 집’(13:3, 20:2; 신 5:6, 13:5; 수 24:17)이라는 관용어로 쓰이게 된다. 현재 이스라엘의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우리는 이집트에 파라오의 노예였다’(신 5:15, 15:15, 24:22)고 기록하여 끊임없이 그 사실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이집트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럼으로써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며 대상이었다.
3. 십브라와 부아(1:15), ‘사타구니’(1:16)
(자리를) 살펴서(개정), 잘 살펴서(새번역), 사타구니(공동)
개역이나 새번역은 번역하지 않고 건너간 단어이나 공동번역은 ‘사타구니’로 옮겼다. 원래는 돌(אבן)의 정관사 +양수(האבנים)이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그 두 돌’이라는 뜻이 된다. 개역과 새번역은 이 단어가 여성의 은밀한 신체 부위를 암시하는데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아예 빼고 옮기는데 비하여 공동번역은 약간 변형시켰다.
학자들 사이에 다소 이견이 부딪히는데 여성 생식기의 완곡한 표현이라고 보는 견해와 해산할 때 산모의 통증과 해산을 돕는 기구(birthstool)라는 의견이 갈린다.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출산을 나타내는 형상은 여성이 무릎을 꿇는 자세이다.<어서가거라, 55>
이 때 두 사람의 산파는 십브라와 부아이다. 십브라는 ‘아름답게 되다,’ 부아는 ‘향기롭게 빛나다’는 뜻이다. 특히 부아는 우가릿 문헌에서 영웅 ‘다니엘,’ 혹은 ‘다넬’의 딸 이름으로 등장한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던 산파들은 이집트 바로의 명령을 어기면서 히브리 아이들을 살려내는 생명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4. 방주인가? 갈대상자인가?(2:5)
창세기 6장 이하에 언급되는 노아의 ‘방주’와 출애굽기 2장에서 어린 모세를 태워 보냈던 ‘갈대상자’는 히브리어의 같은 단어 테바(תבה)의 번역이다(창 6:14, 7:1,9, 8:6,9, 9:18; 출2:3,5). 구약성서 오직 두 곳에 등장하는 이 낱말은 그 번역의 확연한 차이 때문에 두 개의 다른 낱말로 생각하기 쉽다.
노아와 모세는 홍수와 홍해 바다로부터 가족과 백성을 구원해낸 민족적 영웅이다. 즉 노아는 300x50x30 규빗 크기의 3층으로 건축된 거대한 방주에 8 식구와 각종 동물을 태우고 40일 동안의 홍수에서도 살아남았다. 한편 모세는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역청과 나무 진’을 바른 허술한 갈대 상자에 실려 강물에 떠내려갔지만 바로의 딸 ‘비티아’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다.
‘상자’나 ‘관’ 등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테바’는 이집트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의 노아와 그의 가족, 각종 동물을 태웠던 커다란 ‘방주’와 출애굽기의 갓난 아이 모세를 태웠던 작은 ‘갈대상자’는 크기에서 비교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 테바에는 배의 방향을 조종할 수 있는 조타장치가 없다. 이것은 테바가 오로지 강물의 흐름과 바람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상자는 그 안에 몸을 싣고 있다고 해도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없다. 오직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
5. ‘부르짖다’(זעקה)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זעקה) 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3:7)
소리 질러(kra,zw)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 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더 소리 질러 (ma/llon kra,zw)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
히브리어 ‘체아카’는 단순히 ‘소리 지르다, 격렬히 고함치다’보다는 저 멀리 하늘에서 하나님이 들릴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에 해당한다. 예수께서 ‘큰 소리’(fwnh.n mega,lhn) 지르시고 운명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막 15:37), 그것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모든 힘을 다하여 지를 수 있는 최후의 탄원이었다.
매미는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소리를 내어 운다. 그런데 도시에 사는 매미 소리와 산중에서 우는 매미 소리의 크기가 다르다고 한다. 도시의 각종 소음은 수컷의 울음소리를 암컷에게 전달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목청껏 소리를 높여야만 암컷에게 소리가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종족보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도시의 매미가 크게 울어 자신을 알리듯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과 소경 바디매오는 더욱 더 소리 높여 도움을 요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