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박종화 목사 ㅣ 2008년 11월 2일

성경본문

욥기 14:1-6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피었다가 곧 시드는 꽃과 같이, 그림자 같이, 사라져서 멈추어 서지를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미미한 것을 눈여겨 살피시겠다는 겁니까? 더욱이 저와 같은 것을 심판대로 데리고 가셔서, 심판하시겠다는 겁니까?
그 누가 불결한 것에서, 정결한 것이 나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 살아갈 날 수는 미리 정해져 있고, 그 달 수도 주님께서는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셔서 그가 숨을 좀 돌리게 하시고, 자기가 살 남은 시간을 품꾼만큼이라도 한 번 마음껏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데살로니가전서 5:1-6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과 같이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누가복음서 17:20-23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인자의 날들 가운데서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 할 때가 오겠으나,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더러 말하기를 `보아라, 저기에 계신다`, `보아라, 여기에 계신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따라 나서지도 말고, 찾아다니지도 말아라.  
   
 
설교문

저희들이 예배드리면서 말씀도 읽고, 듣고, 찬양도 하고, 듣고, 그렇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을 들을 때에 여러분이 하시는 두 번째 찬양이 있거든요. ‘아멘 찬양’인데 그 아멘 찬양을 들을 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 말이 틀림이 없을 겁니다. ‘성가를 성가대가 부르는구나, 들어보자.’ 하고 들으시면 귀는 훌륭하겠지만 아멘 소리가 잘 안 나오시고, 비록 곡과 가사는 모르지만 함께 부르겠다고 결단하시면 그 다음에 여러분이 부르시는 2부 찬송 성가 ‘아멘’ 소리가 진동하시더라고요. 맞습니까?

음악회 가면 음악내용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마음으로 함께 따라 부를 때 그 음악이 저한테 주는 메시지는 굉장히 강렬합니다. 제가 오늘 성가대 찬양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한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우선 쓰여진 말씀이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읽으실 때 말씀은 좋은 책이고 거룩한 책이므로 앞에 두고 말씀을 읽으시면, 말씀이 전하는 귀한 이야기, 뜻 깊은 이야기가 제 가슴에 와 닿아서 제가 그 말씀을 다시 읽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을 책으로 알고 읽으시면 ‘아멘 소리’가 아마 적을 거고 말씀을 읽다가 말씀 속에 툼벙 빠져 들어가서 누가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제가 듣는 건지 하는 건지 투입되어서 읽으면 그 말씀에서 우러나는 진액이 저를 감동감화 시켜서 저는 말로 안 해도 ‘아멘’이라는 마음으로 제가 말씀을 읽습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 같은 확신을 제가 갖게 됩니다.

독서의 계절, 좋죠. 독서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읽으라는 겁니까, 바라보라는 겁니까, 쳐다보라는 겁니까? 독서는 빠지라는 겁니다. 좋으면 푹 빠져서 누가 저자인지 누가 독자인지 모를 정도로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십시오. 글 속에서의 만남, 진실된 만남은 글 속에 빠지는 겁니다.

오늘 얘기 중에 예수께서 굉장한 질문을 받습니다. 성경말씀은 많이 읽었고, 생활도 깨끗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대표적인 지성, 대표적인 도덕인, 그리고 중산층, 상류층, 이걸 다 대표하는 사람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묻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예수한테 와서 말했습니다. “좀 보여주세요.”

예수는 두 가지로 답변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 사람이 눈으로 못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없으나 하나님의 나라는 살 수가 있다.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수도 있고 상상할 수도 있고 마실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볼 수는 없다. 첫 번째 답변입니다. 두 번째 답변은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은,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싶은 당신들 속에 있다. 위치를 확정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하기까지 세상의 모든 역사에는 질곡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고,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오늘 욥의 이야기 한번 보실래요? 하나님을 잘 믿었던 욥이라는 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었지요? 불치병입니다. 재산도 다 날아갔지요? 가족과 친척이 전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갔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 같지요? 인간은 절망이고, 그래서 욥은 항상 하는 말끝마다 절규, 분노, 그렇습니다. 그 중에 한 구절 읽어봅니다. 제가 봉독해 드린 말씀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인간이란 도대체 산다고 하는 것이 길이도 짧고, 짧은 길인데도 불구하고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제가 감히 고백하겠습니다만 잠시 피었다가 시드는 꽃 같습니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그림자 같습니다. 제 인생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욥이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앞에 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저 기왕에 만드셨으면 숨 좀 돌리게 살게 해 주세요. 숨쉬기도 어렵습니다. 살아남아 있는 이 시간, 제가 숨 쉬는 순간순간 중에 한 시간만 내가 부리고 있는 종들처럼 마음껏 살게 마음껏 먹어도 보고 마셔도 보고 말도 해 보고 그냥 마음껏 살 시간 한 시간만 좀 주세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혹시 이런 절규 속에 여러분 동조하십니까? 남의 이야기처럼 소설처럼 읽지 마시고 혹시 제가 상황은 다르지만 이런 상황 속에 빠져서 앞에 계신 하나님, 뒤에서 밀어주신다는 하나님, 옆에서 지켜주신다던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한 시간만 지켜주십시오, 하고 절규해보고 싶었던 적은 없으십니까?

이런 욥의 절규의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욥 앞에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옆에도 계신데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발 가까이 오셨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계신 거리와 욥이 절규하는 거리가 육안으로 볼 땐 짧을 수 있지만 욥한테는 너무나도 멉니다. 한 시간도 할애해 주지 못하는 전능하신 하나님, 병 고쳐준다고 하면서 저를 이렇게 질곡 속에 쳐 박게 하는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왜 이러십니까? 긴 시간 아닙니다. 한 시간만 주세요. 질병, 제가 죽겠습니다. 한 시간만, 한 시간만 좀 주세요. 그런 절규하시는 거 들어보셨지요? 하나님은 욥에게 여전히 거리를 둔 객관적인 실체로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앞에 옆에 뒤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바리새파 지도자들이 예수한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요?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의 대답입니다. “너희들도 여전히 욥과 똑같이 하나님을 거리에 두고, 상당 거리에 두고 하나님 나라를 앞에 두고 질문하는구나. 바리새파 형제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객관적 실체로 객관화된 진실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객체가 아닙니다. 합리적, 이론적 틀로 설명되어서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나라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멀리 두고 사시는군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군요. 합리적 이성의 틀로 만들어 가시는군요. 아무리 해본들 여러분, 그런 나라는 당신들에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객관적 실체로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이상하고 멀리 있는 동화 속의 나라로 만들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은 뭡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당신 속에 있소이다. 여러분 안에 있소이다.” 그 이야기를 예수께서 하십니다. 하고 싶은 말은 뭐냐고 하면, “하나님이 누군지 아십니까? 내가 하나님이요. 내가 지금 육신의 몸을 입고 와서 당신들하고 살려고 하는데 왜 나와 그렇게 거리를 두십니까? 내가 하나님 나라니까, 내가 하나님이니까, 날 만나면 하나님 만난 걸로 해 주세요.” 예수님은, “내가 당신들 속에 있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들 속에 있고 싶으니 나한테 믿음만 주세요.” 예수를 믿어야 예수가 들어가지요. 예수님 대답입니다. “날 초청해서 당신들 안에 있게만 해 주면 내가 여러분에게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언제 올지 모르고 도적처럼 오려는데 여러분이 꼭 갖춰야 할 게 있습니다. 그 때와 그 장소는 개의치 마십시오. 여러분은 믿음과 사랑이라 이름하는 갑옷을 입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날 보고 여러분 안에 존재하라고 초청하는 것 자체를 제가 믿음이라고 그랬습니다. 날 믿어야 여러분을 초청할 거 아닙니까? 날 초청하세요. 믿으세요. 한 가운데 있고 싶습니다. 그러면 제가 들어가서 여러분한테 제 몫을 드리겠는데 그걸 ‘사랑’이라고 하십시오. 나를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 나라를 객관적 실체와 물상화 하지 마십시오. 나는 함께 사는 당신들 속에서 함께 역사하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보냈습니다. 욥의 시절, 바리새파 사람들의 시절, 예수가 오기 이전의 시절에는 하나님이 거리를 두고 계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었지만 제가 온 이후로부터는 하나님이 당신들 속에 같이 있습니다. 거리를 좁혔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설명하십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본시에 하나님이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육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카네이션’,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 예수님은 육신의 몸이 되어 한 인간으로 오셨다더라. 예수라는 사람, 그 예수는 언제 우리한테 인카네이션 합니까? 이 세상에 몸 입고 온 것이 인카네이션입니까? 육의 몸을 입은 겁니까? 저한테는 언제 제 몸을 입고 오신답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역사적 실체로 오시지만 저 한 사람 한 사람한테도 제 속에 육의 몸을 입고 제 가운데 중심이 오시겠답니다. 그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지, 그렇지 않은 예수는 저의 소설, 작품, 표현, 이런 것들의 대상일 뿐 저의 구세주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내가 그대들 속에 들어가서 그대들과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함께 정좌하고 싶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이 있으면 내가 당신들 질병도 살려냅니다.” 살려내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믿으면 사는데 살리는 힘을 나는 사랑”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이 합하면 그걸 가리켜서 예수 믿는 신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예수께서는 뭘로 나타내 보이시냐면 ‘십자가 진실’로 나타내 보이십니다. 여러분, 십자가 구원받지요? 십자가가 뭡니까? 예수께서 찢기신 몸, 흘리신 보혈, 그게 십자가입니까? 그게 뭘 이야기합디까? 오늘 예수님 말씀입니다. 십자가란, 십자가의 죽음이란, 십자가의 고통이란, 나와 함께 하는 인간 여러분들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질병에, 모든 고통에, 죽음까지 포함하는 모든 좌절에 최대 변수가 가장 큰 모습이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저한테 있겠다는 말은 여러분, 나만큼 고난의 극치에 당할 수 없을 겁니다. 죄도 없으면서 죽어야 하는 아픔. 십자가란 제가 경험할 수 있는, 제가 꼭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좌절과 고통의 최고 극치의 표현이 십자가라는 겁니다. 이 표현을 가지고 저한테 오셔서 내가 십자가를 지고 여러분과 함께 이 고통의 세월을 감내하겠습니다. 저를 여러분, 고통의 큰 그릇으로 받아주십시오. 그러면 그걸 제가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주세요.

다시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가슴은 믿음과 사랑으로 하고,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머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이라 이름하는 투구를 쓰고 하나님을 기다리세요.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우리한테 오셔서 십자가라는 진실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같이 고난당하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최고로 아파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같이 죽으시는 그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죽이고 토해내어 부활이라 이름하는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희망, 소망의 실체입니다. 객관적으로 이론화하지 말고 그 사실을 먼저 내 중심에서 받아드리십시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과 피에 동참하면 저의 아픔과 슬픔을 그리스도께서 같이 지시고 동시에 우리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죽음을 죽이는 죽음을 누르고 죽음을 짓누르는 새롭게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부활의 능력을 떡과 포도주의 진심으로 동참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성만찬을 그런 상징으로 알고 받으십시오. 눈으로 안 보이나 그것이 바로 내가 살 수 있는 신앙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를 물을 때 우리는 일상에서 잘 표현을 안 합니다. 그랬다가 일이 크게 닥치면 하나님이 계시냐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묻습니다. 1755년에 지금으로 보면 작은 사건이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굉장히 큰 사건이 생겼습니다. 리스본에 지진이 생겨서 그 때 7천명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수천명이 매몰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신학, 철학, 문학을 하던 모든 사람들이 도대체가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몰라서 서양사상사에 최초의 논쟁이 생겼습니다. 라이프니츠라 이름하는 철학자가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리스본 지진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판단과 이성과 인간의 자기를 뛰어넘은 엄청난 사건인데 그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디계시냐, 하고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나서 아무리 던져도 안 되어서 라이프니츠가 철학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리스본의 지진은 악이 저지른 사건이다. 악이 따로 있었나? 아니, 연구해 보니까 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신이 만든 `선`이라 이름하는 세계에서 선이 조금씩 조금씩 부족하면 부족한 부분에 악이 등장하고, 선이 완전히 없어지면 악으로 둔갑하고, 악이란 선의 반대가 아니라 선이 부재하는 것을 악이라고 해야 합니다. 저는 굉장히 철학적 사고를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래 어둠과 빛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빛을 만들었는데 빛이 없는 것이 어둠이지요. 하나님이 선하게 만들었는데 선이 없는 게 악이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선을 되찾아야 하는 겁니다. 이것을 도덕적, 윤리적 결단이라 이름합니다.

저는 아주 좋은 철학적 명제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생각 속에 선한 생각을 계속 갖고 있는데 혹시 저한테 악한 생각이 묻어날 때, 이렇게 반문해 보시지요.
‘악이 나한테 침투했구나.’ 그게 아니고, ‘내가 누려야 할, 생각해야 할 선이 줄어들었구나, 그 틈새에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혹시 이런 상황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해 주시려고 하는 것이냐 하면 ‘선을 행하라. 지진난 것은 인간의 잘못은 아니지만 이걸 통해서 인간들이여 부족한 선을 채워서 악이 침투할 공간을 줄이고 없애라.’ 이런 논란이 많이 전개되어 왔습니다. 볼테르 같은 불가지론 철학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것 까지는 주인이셨지만 이 세상을 운영하고 다스리는 데에는 손을 떼시고 인간에게 위임하셨다. 그런데 악한 인간 때문에 지진뿐이 아니고 인간의 모든 역사에서 악이 등장하고 있다.” 하여튼 신앙인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악과 선에 문제가 우리 사고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1940년대 신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600만 유태인을 죽인 홀로코스트 사건 때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계십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드리겠습니다만 답변이 나왔지요. 신앙계에서, 기독교계에서. ‘하나님은 가스실에 계셨다.’ 하나님은 매 맞을 때 함께 매 맞았다. 하나님은 거기서 우셨다. 하나님은 거기서 죽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사람을 위로하러 지금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신다. 중요한 발상은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얼마나 거리가 인간사회와 멀었습니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가스실에 있을 정도로,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있을 정도로 하나님은 육신을 입었다. 이 고백이 가스실 이후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멀리서 만나는 게 아니라 제 안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자꾸 객관적 실체로 이론하시기 보다 그 하나님을 제가 받아서 이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해 보십시오. 조금 주관적 신앙입니다. 그러면 제 마음대로 하나님을 녹여도 됩니까? 하나님을 주관화 시켜서 내가 만든 신으로 되어도 됩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모셨을 때, 제가 교만하여 가장 높은 하나님으로 추앙받고 싶으시면 그 순간 제가 사교회 지도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도하시는 방식 보실래요? 가장 높은 데 계신 분이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우리의 죄악을 끌어안는 방식으로 그 분은 주인되셨습니다. 가장 낮은 데 처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모실 때 눈물의 자리로 고통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위에 앉아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주관적 미신, 주관적 자기주의를 우리가 만들 가능성을 하나님께서는 차단하고 계십니다. 그 분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믿음을 주시면 제가 사랑으로 대신 드려서 여러분을 구원에 이르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라 이름하는 엄청난 소망의 현실을 내가 함께 드리겠습니다. 십자가에 비참한 낮은 곳에 오시면 희망의 꽃이 피게 하겠습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시고 상징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떼는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걸로 하나님 나라를 먹고 마시세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제 안에 계십니다.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십자가 안에 우리가 있기를 바라고, 십자가는 또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을 합친 희망의 투구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보내려 하지 말고 오늘 모십시다. 제가, 우리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 속하기로 해 봅시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역사를 객관적으로, 온 우주적으로, 세계 역사적으로 역사하시는지 거기서 한 번 깨달아봅시다. 하나님이 주시면 함께 있고 싶다는 호소입니다. 호소 받아들이시지요. 믿으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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