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난 맛디아 선출방식과 총회선거제도의 개선 방안<1>
발표 : 소기천 교수(장신대 신약학)(2009년 12월 17일 생명목회실천협의회 주최 '부총회장 선거제도 개선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발표)
1. 서론
오늘 한국교회는 영적인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법에 관심이 많다. 특히 각 교단마다 부총회장 선거에 많은 부작용이 따르는 시점에서, 초기교회가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로 맛디아를 선출한 이야기는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미 제비뽑기 방식으로 부총회장을 뽑은 교단도 있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야기되고 있기 때문에, 과연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선거제도가 무엇인지 성서 신학적으로 검토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본 소고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맛디아 선출방식(행 1:12-26)이 단순한 제비뽑기 방법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입각한 추천과 투표와 인준의 삼원선출방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한국교회가 부총회장 선거 방식이 지닌 단점을 성서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종합적으로 보완하여, 추천제도와 투표제도와 인준제도라는 삼원선거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연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신 방법도 고찰함으로써 맛디아를 선출하기 이전에 이미 예수께서 신적인 부르심과 택하심과 임명이라는 삼원선출방식을 통하여 제자를 세우신 사례를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공생애의 경우(눅 6:12-16. 참고, 마 10:1-4; 막 3:13-19)에서 확인하여 보고자 한다.
이러한 예수의 방법에 관한 연구는 초기교회에서 맛디아를 선출한 방식이 예수의 가르침을 시대 상황에 맞추어서 아주 적절하게 재해석함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연구함으로써, 향후 총회부총회장 선거 방안을 개선하는데 성서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고자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초기교회가 예수의 삼원선출방식을 근거로 당시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새롭게 적용한 것을 기초로 오늘의 한국교회는 삼원선거방식을 폭넓게 연구하여야 한다.
다음은 맛디아 선출 과정을 기록한 사도행전 1장의 구절이다.
사도행전 1장 12-26절
12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서, 안식일에도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3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14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15 그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베드로가 그 신도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하였다.
16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 미리 말씀하신 그 성경 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였습니다.
17 그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직무의 한 몫을 맡았습니다.
18 그런데, 이 사람은 불의한 삯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꾸러져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졌습니다.
19 이 일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자기들의 말로 아겔다마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피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20 시편에 기록하기를 ‘그의 거처가 폐허가 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23 그리하여 그들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서,
24 기도하여 아뢰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25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 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26 그리고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맛디아가 뽑혀서,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되었다(새번역).
2. 베드로의 리더십
1) 베드로의 설교
15절에 의하면, 베드로는 120명쯤 되는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 일어섰다.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지상에 남은 예수의 11명의 제자들 가운데 여전히 수위의 자리에 있다. 13절은 11명의 제자들을 언급하면서 베드로를 가장 먼저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초기교회에서 여전히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리더십은 성도들과 11명의 사도들을 대표하여 설교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3-22절에 언급된 베드로의 설교는 몇 가지 중요한 설교의 구성 요소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설교의 청중을 분명히 앞에 놓고 있다. 이것은 설교가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베드로는 구약성서를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메시지가 구약의 가르침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약속의 말씀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베드로는 이미 청중들의 문제와 현안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설교가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넷째, 베드로는 설교를 통하여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가 단순한 영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다를 대신할 지도자를 세우려 하신다는 실제적인 지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2) 유다를 대신할 직분
20절은 베드로의 설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는 유다를 대신할 직분에 대해 이미 시편에 예언된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제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할 때가 되었다고 설교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주로 활용하였던 미드라쉬 성서해석 방법으로 상호본문성에 입각하여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석의의 실제이다. 문제는 유다를 대신할 직분을 세우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목적이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으므로, 베드로는 22절에서 유다를 대신할 직분을 세움으로써 초기교회와 더불어 부활을 증언할 증인을 세우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교를 마무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직분이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초기교회는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하여 뭇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
17절에서 ‘직무’란 단어는 25절의 ‘직분’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디아코니아를 가리키는데, 다른 말로 ‘봉사’라는 뜻이다. 이는 유다 대신에 뽑힐 사람도 사도로 봉사할 직무 혹은 직분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20절에 나오는 ‘직분’이라는 단어는 디아코니아라는 단어 대신에 에피스코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디모데전서 3장 1절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직분을 가리킬 때 사용한 명사이다. 역시 에피스코페에서 유래된 명사가 에피스코포스인데, 이러한 지도자와 감독을 뜻하는 단어는 사도행전 20장 28절, 빌립보서 1장 1절, 디모데전서 3장 2절, 디도서 1장 7절, 베드로전서 2장 25절 등 여러 곳에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단어의 용례를 중시할 때, 유다 대신에 뽑힐 또 한명의 사도는 초기교회에서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직분을 맡을 지도자, 감독, 혹은 감독자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베드로전서 2장 25절은 ‘영혼의 목자’와 ‘감독’을 예수와 동일시함으로써, 신약성서에서 에피스코포스의 위상을 가장 드높이고 있다. 바로 이 단어가 영어의 episcopal로 번역된 것이다. 총회에서 에피스코포스는 총회장에 견줄 수 있는 직분이다. 이 점을 중시할 때 당시 베드로전서에서 최고의 영적인 지도자는 사도이면서 동시에 감독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그 직분의 모델은 예수에게서 비롯된다.
3. 기도로 세움
1) 기도처
마가 요한의 다락방은 처음에 120명가량의 성도들이 묵고 있던 장소, 곧 쉬는 장소, 혹은 쉼터의 역할을 한 곳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의 거처가 초기교회에서 기도하는 장소로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다. 12-14절은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 성내로 들어온 성도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이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사용된 ‘묵다’ 혹은 ‘머물다’란 동사는 고린도전서 16장 6절과 마찬가지로 장기간 체류하는 장소를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라는 점에서, 우리는 초기교회에서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120명가량의 성도들이 장기간에 걸쳐서 함께 투숙하며 지내던 삶의 공간이 채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지 않아서 기도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한 마음으로 기도
14절에 의하면, 당시에 기도하던 사람들 중에 여인들과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서 함께 기도하기를 힘썼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호모쒸마돈이라는 부사는 로마서 15장 6절에 사용되는 것 이외에는 모두 사도행전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단어인데, 그 뜻은 한 장소에서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합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24절에 나오는 기도도 베드로의 대표기도가 아니라, 모인 모든 회중이 한 마음으로 드린 합심기도라는 사실을 복수형태의 분사와 동사가 보여주고 있다. 곧 24-25절의 기도는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드린 공중기도이다.
4. 가능성 있는 집단
과연 유다를 대신할 또 한명의 사도는 숫자상으로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문제도 숫자상으로 볼 때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다. 22절과 25-26절은 다양한 숫자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특히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그 수는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1) 12명
이것은 열두 사도의 숫자이다. 가장 좁은 의미의 숫자이다. 그런데 바사바, 유스도, 요셉이라는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사람도 맛디아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공생애에 등장한 인물이 아니다. 비록 복음서에서 12제자의 명단이 일치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어디에도 요셉과 맛디아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다를 대신할 또 한명의 사도는 70명에게로 그 범위를 넓힐 수밖에 없다.
2) 70명
여기서 70명이란 숫자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구성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태복음 10장과 누가복음 10장에 언급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전도여행에 파송한 제자들의 숫자를 의미한다. 특히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환영한 무리들을 “제자의 온 무리”(눅 19:37)라고 명할 정도로 제자도의 의미를 확대해석하고 있다. 이 숫자에 유다를 대신할 인물로 후보자에 오른 두 명, 곧 요셉과 맛디아의 이름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120명
120명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가량 되는 신도의 숫자이다. 현재 이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은 대부분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다(참고 행 1:11, 22). 역시 이 숫자에 유다를 대신할 인물인 요셉과 맛디아가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
4) 500여 형제들
이 숫자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의 숫자이다. 역시 이 숫자에 유다를 대신할 인물인 요셉과 맛디아가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상의 가능성 있는 집단 중에서 12명을 제외하고 나머지의 모든 숫자는 초기교회에서 요셉과 맛디아가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 동안에 있었던 12명의 숫자에는 들지 않았던 사람을 뽑는 상황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요셉과 맛디아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 중에 한 사람이거나 70명 혹은 500여 형제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결코 요셉과 맛디아가 초기교회의 성도들이 전혀 모르는 의외의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22절에서 ‘늘 우리와 다니던 사람’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볼 때, 우리는 유다를 대신할 또 한명의 사도는 초기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 곧 누가 보아도 ‘아, 이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할만한 영적인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 자격
25절에 사도로 선택될 수 있는 영적인 지도자의 자격 요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 예수의 공생애 시절에 열두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지만, 이제 시간이 흘러서 초기교회에서는 상황이 바뀌어서 어느 정도 영적 자격을 갖춘 사람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이 거론되는데,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나누어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정리할 수 있다.
1) 섬기는 일과 사도직을 맡을 사람
25절 상반절에서 섬기는 직분과 사도직을 동일시한 것은 아주 의미있는 표현이다. 여기서 사도직이 봉사의 직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초기교회의 형성과정에서 사도행전 6장 2-4절처럼 접대와 말씀 사역을 구분하여 독립적인 전문성을 유지한 경우보다는, 25절처럼 사도직과 봉사직을 공통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을 언급한 것은 교회의 직무에서 모든 직분이 본질상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2) 직분을 완수할 사람
25절 하반절은 유다가 상반절에서 언급한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버리고 제 길로 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한 번 직분을 받았으면, 끝까지 그 사명을 완수할 책임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버리고’라는 동사 파라바이노는 ‘길을 잃어버리다’라는 뜻으로 사도직의 본질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 점에서 유다는 사도의 본분을 저버리고 자신이 좋은 뜻을 따라 어긋난 길을 갔다. 마태복음 15장 3절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신의 전통만을 중시하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범하다’란 동사가 파라바이노로 ‘범죄하다’ 혹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다’란 의미이다. 이 같은 단어가 요한 2서 1장 9절에서 복수 분사형의 파라곤 대신에 파라바이논으로 표기된 이문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용례를 비추어 볼 때, 초기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아니한 자를 범죄자로 간주하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직분을 맡는 데만 급급하였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온전하게 봉사의 직무를 완수하지 않은 자를 경고하는 표현이다.
3) 배반하지 않을 사람
16-20절은 유다의 배반을 비판하는 구절이다. 특히 16절에서 유다를 가리켜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사도라고 평가한 것은 너무나도 부끄럽고 불명예스러운 표현이다. 더구나 18절에서 유다의 죽음에 관해 언급하면서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고 설명한 내용은 배반한 사람의 말로와 자살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유다 대신에 직무를 맡게 될 사도는 결코 배반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상의 석의적 고찰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내용은 다음에서 거론될 맛디아의 선출방식이 결코 인간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단순한 일이 아니며, 그 일의 근거에는 사람보다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원리를 전제하고 있다. 이렇게 유다를 대신할 맛디아를 선출하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20절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유다에게 하나님의 벌이 내리기를 소망하는 시편의 구절들이 인용되고 있으며, 24-25절은 선출의 마지막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6. 선출방법
1) 사도들 중에서
22절은 유다 대신 뽑힐 사람을 아주 제한하여, 25절과 26절에 각각 ‘사도’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 분명하게 제안하고 있다. 사도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이다. 신약성서에서 사도는 메시지를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요 13:16; 빌 2:25; 고후 8:23). 그래서 사도라는 칭호 대신에 ‘열둘’이라는 표현도 많이 등장한다. 열둘이란 예수께서 택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12명의 사도들을 일컫는다. 이점에서 신약성서에서 사도는 대부분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쓰인다.
누가복음 11장 49절과 에베소 2장 20절과 3장 5절은 사도를 선지자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 18장 20절은 사도를 선지자뿐만 아니라 성도와도 동일시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성도 중에 자칭 사도라는 사람이 등장하기도 한다(계 2:2). 바울도 이러한 전통에서 자신을 사도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 2, 4, 6, 22-23절과 16장 4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인 ‘사도와 장로들’이란 표현에 의하면, 사도는 분명히 장로들과 구분되는 직분이다. 특히 고린도전서 12장 28-29절은 사도를 선지자와도 구분되는 직분으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사도를 교회의 직분 중에서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직분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은 사도가 장로와는 엄격하게 구별되는 직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고린도후서 11장 5절과 12장 11절은 ‘큰 사도들’(소위 ‘슈퍼 사도’)에 관해 언급하지만, 바울이 자신을 그들과 비교할 때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평가하는 것을 볼 때 사도의 지위에는 차별이나 경중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갈라디아 1장 17절은 ‘먼저 사도된 자’(소위 ‘선임 사도’)에 관해 언급하는데, 이것도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이는 큰 사도들이건 혹은 먼저 사도된 자이건 간에 하나님 앞에서(Koram Deo) 영적인 사역을 수행하는데 차이가 없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이러한 평가는 사도들이 영적 은사를 수행함으로써 저마다 부르신 이인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함으로써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사람도 섬기는 중도(Via Media)의 위치에 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은 사도의 표를 언급하면서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은 신약성서가 사도의 직분이 지니고 있는 초월적인 기능에 대해서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도는 자신이 감당하는 사역에 필요하다면 능력으로 역사하는 기적까지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영적인 인물이 되어야 한다.
이상의 내용은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사도 중에서 뽑을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사도들은 사도이기 이전에 성도이며, 성도는 성도이기 이전에 사람이므로 모든 사람이 사도로 세워질 수 있는 가능성 앞에 서있다. 그러나 영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은 성도 중에서 흔하지 않으므로,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2) 두 사람을 앞에 내세움
23절은 결정적으로 열둘 중에 공석으로 있는 하나의 자리인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절차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 ‘내세우다’는 우리말 동사는 히스테미를 원형으로 사도직을 선택할 목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책임을 맡긴다는 뜻에는 차이가 없지만, 불행하게도 헬라어 원문에 두 가지 이문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 에스테산은 복수 3인칭 동사로서 120명쯤 되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이 배수공천의 원칙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두 명의 후보자를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둘째, 그러나 이문에 에스테센은 단수 3인칭 동사로서 13-22절에 걸쳐서 길게 설교한 베드로가 역시 배수공천의 원칙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두 명의 후보자를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변수이다. 헬라어 원문을 복원하면서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두 명의 후보자를 내세우는 것이냐, 아니면 베드로와 같은 단 한 사람이 두 명의 후보자를 내세우는 것이냐의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네슬-알란드판이 본문으로 채택한 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경우에 의외로 두 명의 후보자를 내세우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쉽게 결정할 수 있다. 곧 네슬-알란드판은 복수 3인칭 동사인 에스테산을 원문으로 채택하는데, 이는 24절에 나오는 프로슉사메노이라는 단어가 복수 분사형인 것을 주목할 때, 베드로 한명이 아니라 120명쯤 되는 집단이 유다를 대신할 두 명의 후보자를 배수공천하여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후보자가 사람 앞에 내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Koram Deo) 내세워진 추천제도인 배수공천제도이다.
3) 기도
한 사람을 선택할 목적으로 두 명의 후보자를 내세웠지만 누구를 뽑아야 할지 결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므로, 24-25절은 다시금 기도를 하기에 이른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온 상황이지만, 구체적으로 한 명의 사도만을 선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님께 기도를 드린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 여기에 사용된 프로슉사메노이라는 단어가 복수 분사형이므로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다시 한 번 마음을 합하여 기도를 드린 것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사람의 힘이나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기위해 주님의 뜻을 묻는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라고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부르면서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을 부르는 시점부터 기도의 목적을 분명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모범적인 기도의 모습이다. 흔히 기도를 드리면서도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을 부르지도 않고, 더구나 아무 목적도 없이 습관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많은가? 유다를 대신할 한 명의 사도를 세워야 되는데, 모든 점에서 자격을 갖춘 두 명의 후보자를 배수공천해 놓고 있는 상황에서 회중의 마음이 나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선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뭇 사람’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쯤 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우선 이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두 명의 후보자를 놓고 한 명을 결정하기 전에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결과적으로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출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120쯤 되는 성도 전체이다. 이들은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오랜 시간동안 자리를 함께 하면서 마침내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이고, 나중에는 함께 묵는 자리가 되고, 마침내는 한 마음이 되어 사도를 선출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헬라어 원문 상에는 우리말 성경 번역에 없는 단어 하나가 ‘주님’ 앞에 나란히 붙어 있다. 그것은 쉬라는 2인칭 대명사로서 기도를 들으시는 주체이신 주님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면서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렇게 주님을 간절하게 부르는 모습은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습관적으로 ‘주님, 주님!’하면서 주님의 이름만을 되풀이해서 부르는 모습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너, 베들레헴아!’라는 표현이 나오는 마태복음 2장 6절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대상을 정확하게 지칭하는 셈족 계통의 전형적인 어법이다. 이러한 표현이 들어간 것은 유다를 대신할 사도 한 명을 뽑는 상황이 다급한 시점에서 기도의 대상을 올바르게 찾는 모습이다. 흔히 다급한 상황을 표현 할 때, ‘오 주님!’이라는 형식이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용례이지만, 본문에서는 ‘당신 주님!’이라는 표현을 아주 예외적으로 사용하여 바로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도를 하면서 해결해야할 문제를 올바르게 가지고 나아가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는 모습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을 분명하게 부른 후에 이어지는 기도의 내용도 주님께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를 드림으로써 궁극적인 선택권도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인 아나데이크뉘미는 신약성서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만 등장하는 동사로 ‘감춘 것을 밝히 드러낸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10장 1절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70명의 제자를 세우는 일이 마치 복잡한 실타래를 푸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복음 전도의 임무를 맡기시고 그 일에 필요한 사도들을 ‘임명하신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사도행전이 경륜신학인 불레-신학에 입각하여 모든 인사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섭리가운데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신학적 내용이 들어있는 표현이다.
흔히들 신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기도’란 주제를 간과하기 쉽다. 맛디아를 선출하기에 앞서서 기도를 드린 것은 누가-사도행전의 특징인 기도의 신학이라는 주제와도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다. 누가-사도행전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일깨운 학자는 빌헬름 오트(Wilhelm Ott)이다. 그는 누가를 일컬어서 ‘기도의 복음서기자’(the evangelist of prayer)라고 할 만큼, 누가-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기도란 주제를 파헤쳐 주었다. 그에 의하면 누가의 우선적 관심은, 기도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거룩한 역사를 가능케 하는 도구이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기도는 그리스도교 운동의 출발점에서부터 중대한 요소였고, 교회의 성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행 2:42, 47). 이러한 실마리를 푸는 단계에서 맛디아 선출 과정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는데, 초기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기도에서 그 궁극적인 해답을 찾았다. 기도를 드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간섭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일이기에, 초기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기를 기다리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기도의 사실들을 중시할 때, 맛디아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강력한 선택의 수단이었다. 어떤 인간적인 방법이나 수단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기도만큼 강력한 도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4) 클레루스=클레로스
26절 상반절은 맛디아 선출 과정에서 신적인 도움을 의지하는 기도를 충분히 드리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다음에, 고대시대에 편재하던 인간적인 선출방법인 제비를 사용하여 결정을 내렸다. 기도가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방법이었다면, 제비를 사용한 방법은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뿐만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도 광범위하게 의사결정의 수단으로 인정을 받았던 인간적인 결정방법이었다.
제비를 의미하는 헬라어는 클레로스이다. 본문에는 단수형인 클레로스와 복수형인 클레루스가 모두 등장한다. 26절 상반절을 사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두 명의 후보자들]에게 제비들을 던졌고 그 제비가 맛디아에게 이르렀다
여기서 제비를 뜻하는 복수형 클레루스와 단수형 클레로스는 언어유희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러 개의 제비들이 던져졌지만 맛디아에게 모아졌을 때는 하나의 제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투표를 시작할 때 클레루스로 표현된 제비들은 120명쯤 되는 성도들의 손에 각각 들려진 것들이었지만, 투표가 끝난 후에는 모든 제비들이 하나가 되어 클레로스로 표현된 제비 하나만 맛디아에게 이르게 되었다. 시작할 때는 여러 개의 제비였지만, 마지막에는 하나의 제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맛디아를 선택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뭇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된 증거이기도 하다. 복수형인 클레루스에는 아무런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므로 단지 사람들이 의사표현을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개의 제비를 의미하지만, 단수형인 클레로스는 그 단어 앞에 붙어 있는 정관사를 통해서 바로 그 제비가 맛디아에게 이르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본문에 나타난 제비의 쓰임새는 전무후무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원래 제비뽑기는 다음의 그림과 같이 여럿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잡게 하여 거기에 미리 적어 놓은 기호나 글에 따라 승부나 차례 따위를 결정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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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문은 단지 제비를 이용하여 맛디아를 선출한 방식이므로, 제비뽑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다. 본문은 120명쯤 성도들이 제 각기 제비를 던졌지만, 결과적으로 다음의 그림과 같이 하나의 제비가 되어서 맛디아를 선출하는 결과를 나았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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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맛디아 선출 방식은 준비된 제비에서 하나를 뽑는 방식이 아니므로, 근본적으로 제비뽑기와 다르다. 클레로스가 우리말로 제비로 번역되고 영어로 lot로 번역된다고 할지라도, 맛디아 선출방식이 로또의 당첨방식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문에서 제비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투표와 같다는 점에서 투표제도를 보여준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 각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향해도 표를 던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늘의 투표 방식과 다른 점은 본문에서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저마다 제비(클레루스)를 던졌는데, 신적인 만장일치의 결과로 하나의 제비(클레로스)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클레루스가 클레로스로 되는 방식은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다. 어떻게 저마다 제비를 던졌는데, 결과가 단 한 개로 나타날 수 있는가? 클레루스=클레로스가 맛디아 선출 방식이 지니고 있는 신비스런 모습이다. 어떻게 여러 개의 제비가 하나의 제비로 변할 수 있는가? 본문은 120명쯤 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제비를 하나로 만드셔서 맛디아를 선출하게 하셨다는 사실만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5) 열한 명과 함께 사도에 포함됨
26절 하반절은 선출된 맛디아를 열한 사도가 인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열한 사도는 초기교회에서 가장 정통성 있는 영적인 지도자들의 모임이다.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열두 사도에 단 한자리가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 자리에서 맛디아가 선출됨으로써 열두 사도로 이루게 될 초기교회의 가장 중요한 영적인 자리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6절 하반절은 다음과 같이 사역을 할 수 있다.
그[맛디아]가 열한 명과 함께 사도에 포함되었다.
여기서 ‘포함되었다’는 동사는 슁카탚쎄피조마이로서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이곳에만 등장하는 단어이며 ‘함께하도록 (투표로) 선택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역시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이곳에만 등장하는 다른 동사인 카탚셒피조마이와 함께 ‘(투표로) 가입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맛디아가 최종적으로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서 열한 명의 사도와 함께 하도록 가입되었다는 의미이다.
제비로 선택된 맛디아는 결과적으로 열두 명의 사도의 수에 가입된 것이다. 그가 열두 명의 사도의 수에 가입될 때, 이미 존재하던 120명쯤 되는 성도들과 열한 명의 사도에 의해 인준을 받는 절차를 다각적으로 거친 것이다. 이는 맛디아 선출과정이 보여주는 인준제도이다. 곧 한편으로 맛디아는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쯤 되는 성도들로부터 충분히 인정받는 사람이었기에 최종 후보자 두 명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투표로 최종 결정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제각기 던지 제비가 하나의 제비가 되어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맛디아 선출방식이 예수의 방법과는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다음의 항목에서 간단하게 되짚어 보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