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크리스마스 때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공식 미사가 끝나자마자 한 매춘 거리로 향했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조그만 매춘여성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그가 설마 추기경이라고는 짐작조차 못한 이곳 여성들은 그를 여느 할아버지와 다름없이 대하며, 담배를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손녀딸 같은 이들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며 마치 친할아버지처럼 이들의 응석을 받아주었다"('힘있는 자 맞은 편 낮은 곳엔 늘 그가', 한겨레신문 2001.6.9.)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한결같은 벗으로 한평생 사제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김수환 추기경. 그분이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크리스마스 공식 미사를 마치고 곧바로 향한 곳은 바로 매춘여성의 집이었다. 우리는 그분의 이 작은 몸짓에 담긴 크고 깊은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하리라.
저 2천 년 전 팔레스틴의 흙먼지 날리는 가난과 소외의 땅 갈릴리 마을을 뚜벅뚜벅 거닐던 예수가 오늘 이 땅에 다시 온다면 어디로 발걸음을 옮길까? 크리스마스 성가가 은은히 울려 퍼지는 웅장한 규모의 교회를 방문할까? 이 땅의 종교 지도자들과 저명한 신학자들을 만나 교세 확장을 이야기하고 신학과 교리를 논할까? 이 땅의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권세가들이나 자본가들이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베푸는 호화판 환영 만찬에 참석할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아마도 예수는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거리로 발걸음을 뗄 것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 아파트의 숲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서울의 신림동이나 봉천동이나 창신동의 달동네를 찾아 가난한 서민들의 고달픈 살림살이 이야기에 귀기울일 것이다. 혹독한 가뭄에 시달리는 농촌을 찾아 농민들의 논바닥처럼 갈기갈기 찢긴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산간 벽지나 구석진 어촌 마을을 찾아 그곳 사람들과 변변치 못한 반찬으로나마 한 끼의 따스한 밥을 같이 먹으며 인생살이 희로애락을 나눌 것이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예수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그들의 가슴에 쌓인 한(恨)을 한순간에 풀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이 날로 심화되는 이 땅의 불평등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 세우는 놀라운 신통력을 발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역사적 모순의 핵심이며 원죄(原罪)인 남북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 철책을 일시에 제거함으로써 매스컴의 1면을 장식하는 위대한 슈퍼스타로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렇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길은 영광과 위대함과 신비스런 기적의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신적인 예수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모순과 죄로 얼룩진 인간 역사를 한순간에 구원하는 영웅의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이 땅의 낮은 곳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길이다. 그 길은 생명사랑 민중사랑의 변치 않는 마음 하나로 역사의 변두리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눈물겨운 인간애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 그는 서둘러 매춘의 거리로 향하는 작은 몸짓 하나로 오늘 우리 사회에서 교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교회의 길은 바로 예수의 길이어야 하며, 그래서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세속적 삶의 현장으로 서슴없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그 작은 몸짓에 담긴 의미일 것이다.
진정 예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다정한 벗이었다. 예수는 그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후에도 그의 지극한 인간사랑 민중사랑의 넋은 그들의 가슴에서 영영 지워질 수 없었다. 예수가 걸었던 그 길을 인간다움의 길로 기억하고 고백하며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일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진정 예수의 교회인가? 십자가 없는 영광을 꿈꾸는 반(反)예수 교회는 아닌가? 오늘 내 인생의 발걸음은 예수의 민중사랑의 길 위에 서 있는가? 두려운 물음이다.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