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
한국 개신교에는 목사가 남아돈다. 그 이유는 여기서 설명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신학교가 많다거나 목사가 많다는 것만 가지고는 문제가 안되겠지만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 받고 있는 문제의 책임이 교회 지도자층에 있고 그 사람들은 교회 목사들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들의 신학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되고 신학교육이 목사교육을 바로 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결국 신학교 교수들의 책임 문제로 귀착되는데, 신학교 교수들이 신학을 가르치면서 목사를 양성할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의 문제이다. 신학교 교수들이 신학만 잘 가르치면 목사 교육은 절로 되는 줄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신학생들이 목사다운 목사가 되는 것이 전적으로 신학교 교수들에게 달려 있다는 말은 아니나, 신학교와 신학교 교수들이 일차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
신학생들의 입학 목적이 목사가 되겠다는 것이지만 입학하면 교수들에게서 많은 과목의 신학을 배우는 데 정력과 시간을 거의 전적으로 바치고, 목회교육을 위해서 실천신학 과목 몇 가지를 이수하고 있는 형편이다. 근래에 와서 신학교에서 실천신학 과목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이 과목들은 목회의 방법이나 기술(?)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지 목사의 자질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교단들의 신학교들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신학교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고 신학교 교수들의 학문적 수준은 높아져서 이제는 박사학위들로써만 교수의 자격이 정해져 있을 정도이다. 즉 신학교육의 지적 수준이 이렇게 크게 높아졌는데 어째서 목사들과 교계 지도층에 문제가 많아 한국교회의 사회적 위상과 권위가 하락하였는지는 우리들의 자성의 문제인데 이것이 목사들에게만 달린 문제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계 또는 교회 문제를 평신도들에게 돌릴 수는 없다.
신학교 교수들은 자신의 전문과목을 학적으로 잘 가르치는 것이 일차적 책임이어서 각자의 신학 과목을 강의하며 목사를 양육한다는 생각을 갖기 어렵고 또 그런 생각을 갖더라도 방법이 쉽지 않다. 신학교의 모든 신학 과목의 강의(교육)의 종합(synthesis)은 실천신학, 또는 목회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있지만 실천신학 또는 목회학이 신학생이 목사다운 목사가 되는 결정적인 과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목사다운 목사는 어떤 목사냐고 묻는다면 아무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목사다운 목사가 있고 그렇지 못한 목사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신학교 없이 교회감독이 자기 목사관에서 자기의 후배가 될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감독과 학생이 같이 생활하면서 학생이 감독의 사생활과 목회생활을 지켜보면서 배워갔다. 그리하여 학생이 교회 목회자의 지식과 설교, 성례전 및 기타 교인 지도 등등의 목회 방법과 경건생활을 습득하여 목회자의 자질과 습성을 키워갔다. 중세교회의 신부의 많은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생활하다가 신부로 임명되었다. 또 중세 대학이 생기기 전에는 교수와 학생이 한 집안 식구처럼 같이 생활하는 기숙학교 교육이 있었다.
신학교 교수는 교회를 목회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을 필수로 하기는 어렵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와 라인홀드 니버와 같은 분은 목회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실천신학 교수들만이라도 교회를 목회한 경험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은 실현되면 좋을 것이다.
해방 이전의 한국교회는 교단마다 단일 신학교를 가지고 신학교육을 하면서 목사를 양성했는데 한국인 교수를 구하기 어려워 선교사 교수가 많았고 신학지망생 수도 적어서 목사 배출도 소수였다. 그러나 목사 수가 적어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희소가치는 높았고, 학적 수준은 낮았으나 신학생 경건 수준은 높았고, 목회 성공률도 높았고 실패율은 낮았다.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신학의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의 논쟁을 진작(振作)시켜 신학이 교파 분열의 깃발 노릇을 하다가 1970년대에는 보수 교파 진영의 교회분열과 교권 투쟁이 신학 논쟁의 날개를 달고 나타나서 장로교 보수 교단이 무수하게 분립되었다. 이것이 한국교계의 신학춘추시대를 가져왔고 교회를 위할 신학이 교회를 분열시켜 해롭게 만들었다.
그 동안 한국의 신학교의 성장과 발전을 보면 신학교가 신학대학으로, 다시 신학대학교로 커졌는데 이것은 한국의 일반대학교의 성장과 발전에 보조를 맞추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규모와 제도는 크고 발전했으나 교육의 질이 반드시 향상하는 것이 아니었고 신학대학 또는 신학대학교들의 목사 양성의 초점이 오히려 흐려졌는지 모른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교단신학교들이 신학생들을 목사다운 목사가 되게 교육하고 감화를 주는 일에 실패한 일들이 많았는데 첫째로 교단의 교권분쟁의 희생이 된 신학교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신학교 운영이 마비되고 학장 공석이 장기화되며 이사들 사이의 분열로 심지어 국가 법정 문제가 되기도 했고, 신학생들이 두 파로 갈라져서 싸우거나 아니면 이사들과 싸우기도 하였다. 이것이 한국 교계 목사 사회의 한 반영이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교수 사회의 한 장면을 보여준 것이 있다. 학장 자리를 탐하는 신학교수들 사이의 경쟁과 다툼이 교수 간의 인화와 협력을 깨트려 신학생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였고, 때로는 학장 반대와 사태를 도모한 교수들에게 동조하는 학생들이 소란과 폭력까지 행사한 신학교도 있었으며, 이럴 때 신학생들이 갈라져 싸우기도 했다. 또 신학교 직원노조가 임금인상 투쟁을 벌여 학장과 싸우고 휴무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학장 반대 운동에 들어가 학장실을 점거하여 학장이 쫓겨나와 며칠을 피해 다니기도 한 학교가 있었다.
이러한 신학교에서 목사교육이 바로 될 수 없다. 장로교의 한 교단은 단일 신학교를 가지고 있는데, 그 교단의 농촌과 어촌의 벽지교회가 목회자를 얻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곳이 너무 많아서 벽지교회에 가서 목회할 목사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별도로 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기존의 교단신학교가 목사교육을 잘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농어촌에 갈 목회자가 따로 있고 도시교회에 가서 목회할 목사가 따로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성 어거스틴이 「교사」라는 저서에서 말하기를 선생이 학생들에게 걸음걸이가 어떤 것인지를 걸어서 보여주더라도 학생들이 그대로 걸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걸음걸이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말도 되지만 스승의 모범을 제대로 따라하기 어렵다는 말도 된다. 신학교는 한갓 직업학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길을 배우는 곳이며, 세상적인 무엇을 애써 얻으려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 아니고 나의 생과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주고 바치는 길을 배우는 곳이다. 신학교 교수들도 목사인 만큼 이 길을 위하여 살고 죽는 모범을 신학생들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살고 죽는 것이 목사들에게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