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안재웅 목사(2009년 12월 31일 한강감리교회 송구영신예배)
제목 : 폭력과 공의의 이해(본문 : 에스겔 45장 9절)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이제는 그만 하여라. 폭력과 탄압을 그치고, 공평과 공의를 실행하여라. 내 백성 착취하는 일을 멈추어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다사다난했던 2009년도 몇 십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2010년 대망의 새 해를 맞는 문턱에서 이처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올 한해를 보내는 것은 물론 새 천년의 10년도 싸잡아 훌훌 털어 보내는 순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 12월 16일자를 보면 지구촌의 2000년대 첫 10년은 무엇이었나? 라고 묻고 "변화와 새로움이 뒤섞인 10년"이었다는 평가를 내린바 있습니다. 그리고 한겨레는 지난 10년을 다섯가지 열쇄말 (key words)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인터넷의 위력이 단연 으뜸이라는 것과, 둘째 미국과 중국이 세계 강대국의 위상을 차지한것, 셋째 테러와의 전쟁, 넷째 이슬람의 대두 그리고 다섯째 지구온난화를 꼽았습니다. 요즘 각종 미디어 매체들은 올해의 국내외 10대 뉴스를 앞다퉈 발표하고 있습니다. 도리켜보면 기쁜일도 많았지만 대부분 폭력과 연관된 부끄럽고 아쉽고 안타까운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난 10년과 2009년은 폭력이 활개친 시기였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 (WCC)는 2001년 부터 2010을 "폭력극복 10년 (Decade to overcome violence)"으로 정하고 모든 교회들로 하여금 폭력극복을 위해 각방으로 노력 할 것을 요청한바 있습니다.
하지만 WCC가 폭력극복 10년을 시작하던 그 해 9원 11일, 미국 뉴욕의 맨허탄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테러분자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는 충격을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3천에 가까운 많은 인명 피해를 본적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테러의 배후에는 알 카에다의 핵심인물인 오사마 빈 라든 (Osama bin Laden)이 있고 미국은 알 카에다의 테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결국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과의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이슬람의 지하드 (Jihad)를 마치 성전 (Holy War)인것 처럼 의도적으로 해석하면서 미국은 스스로 제국 (Empire)인양 기세등등 설치게 되었습니다.
폭력은 라틴어의 비오라레 (violare)에서 나온 말로 "법률이나 규칙따위를 깨뜨리고 위반한다, 불법적으로 침입 또는 함부로 통과한다, 신성을 더럽힌다"는 등 좋지않게 쓰이는 용어 입니다.
폭력은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의 의지와 욕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신체적, 심리적, 정신적인 피해를 입히는 경우를 말합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폭력은 조직전인 폭력 (structural violence)으로 국가가 법과 질서를 앞세워 무자비 하게 힘을 행사하는 경우입니다. 가령,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소리니, 옛 소련의 스탈린, 스페인의 프랑코, 니카라과의 소모사, 그리고 아시아 여러나라의 군부 독재자들을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습니다.
선진국이 후진국의 자연자원을 탐낸 나머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 수탈하는 경우도 폭력의 또 다른 추악한 모습입니다. 이런 경우 정의롭지 못한 매판세력에 당당하게 맞서는 군중도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가 없는 곳에는 항상 폭력이 따른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까마라 (Dom Helder Camara) 대주교는 폭력을 3단계로 요약했습니다.
부정의 (injustice) 로 말미암은 원초적 단계,
항거 (protest) 와 저항 (resistance)의 단계, 그리고
억압 (repression)의 단계 입니다.
결국 폭력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으로 대표되는 시민저항운동, 1956년 부다페스트의 민중저항운동, 1954년 과테마라의 대중저항운동 등은 모두 부정의 (injustice)에 항거하는 민중세력을 당국이 폭력으로 억압한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1980년 광주라는 참혹했던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가 살던 당시만 하더라도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던 나라들은 겉으로는 적어도 평화롭게 보였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흔히 "로마의 평화" 즉 '팍스 로마나 (pax Romana)' 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면을 들어다 보면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세력이 적지않게 활약했던 것을 잘 알 수있습니다.
예수는 갈릴리지역 나사렛에서 어린시절과 청년시기를 보냈습니다. 나사렛에서 수 마일 떠러진 곳에 세포리 (Sepphoris) 라는 조그만 도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포리는 반골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로마에 항거하는 저항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합니다. 로마는 세포리로 말미암아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로마는 그들을 충실하게 따르던 그리스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세포리를 평정하였습니다.
세포리에는 그리스 말과 문화를 정착시키므로서 자연스럽게 헬렌이즘 (Hellenism)이 활개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독립을 주도하는 열심당원들 (Zealots)은 이곳을 활동무대로 삼아 여전히 맹활약 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는 나사렛에 살면서 세포리에서 어떤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종종 열심당원들과 손잡고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함께 투쟁할 것을 요청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나의 나라 ( My Kingdom)는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비폭력의 방법으로 저항하라는 암시를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원수가 왼 뺨을 때리거든 오른 뺨까지도 돌려대라는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미움은 미움으로 극복될 수 없으며 폭력은 더 더욱 폭력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폭력극복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와 관용과 배려를 하다보면 구태어 폭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 입니다. 예수의 우선순위는 소외된 계층을 보살피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걸인과 병든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이들이 재기할 수있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갖도록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새로운 윤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 당시에는 원수라 하면 모든 사람들로 부터 미움의 대상이었던 외국인 이민자를 말합니다. 물론 정치적 또는 개인적인 경쟁자는 말할것도 없겠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한번 돌아 봅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우선 배려하는 크리스천 윤리가 자리잡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평화 (pax Christi)가 이미 우리가운데 이루어 졌음을 알 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이제는 그만 하여라. 폭력과 탄압을 그치고, 공평과 공의를 실행하여라. 내 백성 착취하는 일을 멈추어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렇습니다. 이땅의 통치자들의 속성은 공권력을 앞세워 제 마음대로 폭력과 탄압과 착취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폭력과 탄압을 당장 멈추라 (stop your violence and oppression now)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온갖 권모술수나 날치기 또는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범법을 더이상 저지르지 않도록 통치자의 각성을 촉구해야 합니다.
올해 까지는 통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밝아오는 새해에는 잘못된 관행이나 폭력적인 통치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모두 나서 막아야 하겠습니다. 요즘 법치는 무너지고 편법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온 나라 백성들의 원성이 점점 높아가고 있습니다. 공평과 공의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공의의 뜻은 간단합니다. 저울 눈이나 됫박을 속이는 것이 바로 공평과 공의를 깨뜨린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정의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피에르 (Abbe Pierre)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들은 사자들이요 우리는 벼룩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저들 보다 강하다. 벼룩은 사자를 물을 수 있지만 사자는 벼룩을 물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비록 힘이없어 보이는 민중이지만 이들의 저항이 지금도 도도하게 이어지는것은 그 힘의 원천이 바로 이런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지긋 지긋한 폭력과 야만의 시대는 오늘로 접고 공평과 공의가 온 땅에 넘치는 새해를 열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모두 평안을 누리는 경인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험란한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롬 8:31)
"우리는 내일을 설계하지만, 그 내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실때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 (God's permission)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우리는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온 누리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안 재 웅 목사
한강감리교회 송구영신예배
2009. 12.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