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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이성
일전에도 말했듯이 사람이 이성적 존재라는 것은 아직까진 거짓말인 것 같다. 겪어보는대로 사람들은 적어도 비이성적일 때가 훨씬 많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도 예외가 없다. 물론 아주 드물게 사람은 이성적 방식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인간 생활의 거의 대부분은 감정에 많이 치우쳐 있을 따름이다. 물론 동물도 감정을 지닌다. 하지만 리처드 래저래스의 명저 <감정과 이성>에서 얘기된 바와 같이 인간은 세상의 그 어떤 동물들보다도 가장 감정적인 존재이다.
감정이란 인간의 희로애락을 드러내고 있는 1차적 욕구 표현에 가깝다. 기쁨, 슬픔, 놀람, 안타까움, 반가움, 혐오스러움, 답답함, 시원함, 즐거움, 사랑스러움, 아픔, 그리움 등등 이러한 다양한 정서적 반응들인 것이다(그림 참조). 우리 삶의 그 어떤 한 순간도 이러한 정서적 반응들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우리 모두의 삶은 다같이 그 같은 희로애락의 1차적 욕구들에 기반해 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당면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이란 무엇인가? 화이트헤드의 <이성의 기능>에 따르면 이성도 일종의 욕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2차적 욕구라는 것이다. 앞의 감정이 인간의 희로애락이라는 1차적 욕구 표현에 가깝다면 이성은 거기에 기반되고 있는 2차적 욕구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서, 기쁘고 슬프고 반갑고 놀라고, 먹고 싶으면 먹고 싸고 싶으면 싸고 하는 감각적 행동 및 이에 대한 반응적 표현으로서의 감정이 있을 경우 그러한 앞의 욕구들을 치리하는 또다른 욕구가 있게 되는데 그것을 일컬어 이성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때 사람이 이성적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감정의 차원이 배제되거나 없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감정은 없어지지 않고 언제나 머물러 있다. 인간의 감정은 참거나 억눌러야 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을 정직하게 드러내되 다만 서로 불편하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는 방향을 추구할 따름이다. 다시 말하자면 진정한 이성은 인간의 감정을 억누르려 하거나 배제하려는 상태라기보다 나와 상대방의 감정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활용하는 차원으로 나아갈 때 보다 성숙한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대화와 토론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흔히 머리와 가슴의 통합을 지향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성적 토론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적응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서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충분히 감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성적이려고 할 경우에는 못내 불편해한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점에서 대화와 토론이 구분된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토론에는 대화가 깔려 있을 수 있지만, 대화는 토론을 깔고 있지 않다.
대화는 그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되는 그러한 것이다. 여기에는 정서적인 요인들이 많이 작동한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경우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골치 아픈 대화는 별로 달갑지 않다. 오히려 좋고 싫음을 얘기하는 교류를 원하는 방향이 많다. 하지만 반면에 토론은 대화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토론>이란 합리적 근거와 이유를 분명하게 묻는 대화의 한 방식인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 무슨 이유나 근거가 필요해?” 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우리가 국가 정책을 토론하는 <100분 토론> 시간에 했다고 해보라. 내가 이명박 좋아한대는데, 청계천이 좋은데, 4대강 살리기가 좋은데, 미국쇠고기 좋아한다는 데 무슨 합리적 근거나 이유가 필요하냐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 생활 속에서의 대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러한 말과 표현들을 쏟아낼 때가 비일비재하다. 감정으로서의 대화는 소통이 많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거의 안되는 경우들이 많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끼리끼리>로만 소통된다. 이를테면 “나는 우리 옆집에 사는 보수 기독교인이 더 좋아. 그 사람은 나한테 너무 친절하니까. 그 사람은 인간적이란 말야” 이런 식의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만일 정서적 생활반경에 있는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일 경우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하기가 다소 힘들 수 있다. 일전에도 말했듯이 전두환의 아들이나 히틀러의 애인은 역사를 보는 입장에 있어 전혀 다른 입장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실은 대화와 토론의 요소들이 묘하게 뒤섞여 있어 겪는 혼란이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상에는 합리적 토론을 감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서로 간에 불화를 겪게 되기도 한다.
MBTI에서 FP성향의 사람들은 머리보다는 몸이 더 먼저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지한 이성적 토론보다는 진지한 대화 및 정감 있는 삶의 교류를 더 원한다. 반대로 NT성향의 사람들은 정감 있는 대화보다는 보다 자기에게 필요한 생산적인 시간을 더 좋아하고, 여러 사람들의 분위기에 자신을 맞추려고 배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생각하는 그 틀에 맞추려는 점이 있다. 그래서 FP성향과 달리 NT성향의 사람들은 어떤 점에선 인간미가 없다는 얘길 듣기도 한다.
반면에 NT성향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체계화해서 보려는 습성들이 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체계화하고 설계를 하는 창작의 작업들은 주로 NT성향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요인들이다. 어떤 것을 정리 체계화하고 도표화하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 있다면 NT성향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나 개인적으로는 감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부터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사람들에게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요소들이 왜 잘 먹히지 않을까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 같은 분명한 감정 차원의 중요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은 인간의 감정은 참거나 억눌러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표현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감정 표현을 효과적으로 하게끔 도와주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저 감정을 내지르는 식으로만 표현할 경우 솔직한 표현이란 점에선 좋으나 서로 간의 소통 및 교통정리가 되기 힘들어서 더 많은 시간낭패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감정은 서로 인식하고 활용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억누르거나 참거나 혹은 그저 마구 쏟아내버리거나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성의 역할은 자기만의 감정을 넘어서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인식하게 함으로써 서로 간에 최선의 소통 방식을 찾고자 함에 있다.
시간이라는 치료제
흥미로운 점 하나는 감정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시간>이라는 놈 앞에서는 여지없이 설득당해진다는 점이 있다. 제 아무리 반갑고 좋게 보이는 사람의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그것의 논리적 측면까지도 고찰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인류 역사의 수많은 경험 사례들 속에서 숱하게 발견되고 있다.
교황을 섬기고 좋아하는 사람은 천동설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이고 그와 충돌하는 지동설 주장에 대해선 혐오스러워할 것이다. 이것이 처음의 반응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불충분한 점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만일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기독교를 주장할 경우 처음에는 사랑스럽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흐를수록 가까이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것의 친밀한 정서적 감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을 인지하게 된다. 이처럼 시간 앞에서는 정말로 장사 없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이드가 얼마나 대단한 학자인지를 지금에 와서는 누구나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 프로이드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프로이드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는 매우 거만하고 독선적인 평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당시 프로이드의 이론을 처음 접한 학계의 반응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로이드가 자신의 학설을 처음으로 발표했을 때 많은 학자들은 혐오스러운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를 사랑하는 근친에 대한 성적 얘기들로 채워진 그의 이론은 기존의 통념에서 볼 때는 혐오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학계는 그나마 그래도 최선의 이성적 판단을 추구하는 터라 서서히 그의 이론에 대한 타당성을 냉정하게 평가하게 되면서 프로이드의 공헌들도 인정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프로이드의 경우는 좀더 나은 경우다. 세상의 많은 학자들 특히 시대를 앞서 간 천재들의 삶은 불운하게도 그 시대가 알아보지 못하고 그가 죽은 다음인 후대에 평가되는 경우들이 훨씬 많았었다.
감정과 이성의 경우들 역시 시간적 차이를 지닌다. 그때그때 매순간마다 느끼는대로만 좋고 싦음의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한다면 어쩌면 우리의 삶은 무법천지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래서 좀더 그러한 불편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적으로 좀더 넓고 길게 보면서 우리의 현재 행동방식을 고양시킬 필요 역시 있는 것이다.
천재들은 시대를 앞서서 내다본 통찰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영불편스럽고 싫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냉정하게 곱씹어보면 볼수록 그것의 효과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란 놈은 그만큼이나 서로 간에 끓고 있는 모든 감정의 흥분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완화시켜주는 탁월한 효과제인 것이다. 나는 현재의 기독교가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이 결국은 세기연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이천 년 기독교의 역사는 분명히 바뀌게 되어 있다. 결국은 시간 문제인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자신의 현재 감정을 남으로부터 충분히 이해받고 싶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도 역시 소중하게 봐주고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이때 서로의 감정이 충돌할 경우 결국은 합리적 이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기연은 바로 그 점에서 굳이 배설적 역할로만 만족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보다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지점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그저 동아리나 잡다한 놀이터로 그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보다 깊고 넓게 두루두루 고루고루 얘기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과 요구들에 대해서 서로 간에 잘 표현했으면 한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들은 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아내이고 남편이며, 자식이고 부모님이다.
그래서 그들과 겪게 되는 이러한 불편을 우리들은 후대에까지 물려주어야만 하는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까지도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기독교를 물려주고 싶은 것인가?
바로 그런 점에서 현재의 세기연이 해야 할 일들과 가야할 길은 많다고 하겠다.
여전히 참여하고자 하는 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