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국화로서 노래 ‘무궁화’가 애국가와 함께 애창(愛唱)을 받고 있고, 노래 ‘봉선화’도 일제시대에 무궁화 대신에 애창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무궁화의 화기(花期)는 초여름부터 늦은 가을까지다. 피고 지고 하면서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것이 반만년의 긴 우리나라 역사가 많은 왕조들의 성쇠흥망을 거치며 이어져온 것을 상징한다.
노래 ‘봉선화’는 3.1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우리 민족의 운명이 애처롭게 되었을 때 새문안교회 찬양지도자였던 김형준 선생이 가사를 짓고 홍난파 선생이 작곡하여 애창된 것인데, 일본 관원들이 이 노래가 조선민족의 비운과 회춘(回春)의 희망을 노래하는 것인 줄을 몰라서 금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봉선화는 영어 이름 ‘touch me not’(날 건드리지 말라)가 의미하듯이 떨어지기 쉬운 약한 꽃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때 친일반민 조사위원회가 조직되어 1005명의 명단을 발표하였고 한 시민단체는 친일인사 사전까지 편찬하였다고 신문에 보도되었고, 여기에 대하여 비평적인 기사도 신문지상에 나왔었다. 해방 직후에 반민특위 조사단이 600여 명의 친일인사 명단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와서 그 문제를 재론하여 국론을 분열시키는 이유가 수상할 뿐이다. 이것은 노 대통령의 힘을 입은 좌파인사들의 작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친일인사라기보다는 극진한 애국자로서 인정과 존경을 받아야 할 인사들이 많이 정죄를 받고 있는데 그 중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과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 선생이 거론되었다고 한다. 이 두 작곡가를 친일파 인사로 몰아부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이 작곡하여 온 국민이 애창하고 있는 노래를 애창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봉선화 꽃처럼 떨어지기 쉬운 약한 나라일지 모르지만 무궁화 꽃처럼 민족정신과 문화를 면면(綿綿)히 이어온 역사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좌파 인사들이 이것을 흔들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겨주었거나 우리 동족을 괴롭힌 진짜 친일파 인사들이 있었겠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애국적인 민족 지도자들과 그 중에서도 수없이 옥고도 치른 사람들까지 친일인사로서 정죄하였는데, 실은 그들은 많은 동족이 박해와 고난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일본 관헌의 압박과 위협과 강제에 의하여 일본에 협력한다는 글이나 말을 한 것뿐이다. 외국 선교사들이야 자기들이 운영하던 교육기관이나 의료기관을 폐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우리 동족과 운명을 같이 하며 고난을 같이 할 민족지도자들은 책임졌던 교육기관들을 쉽게 문닫을 수 없었다. 그 덕택으로 수만 수천의 젊은이들이 계속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교회 교단 중에 신사참배를 수용 결정한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당시 교단지도자들은 일본의 위협과 강제에 못 견뎌서 결의한 것이고, 그것으로써 지방의 교회들이 지방의 일본 관청과 경찰에 의하여 받을 고난과 박해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여전히 문을 열어둘 수 있었다. 모름지기 그때 지도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일종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만일 그때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교회를 협박하여 친일인사들로 만든 일본인들이 지금 살아 있어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친일반민족 인사들의 명단을 만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면 고소(苦笑)를 금치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진짜 친일반민파 아닌 사람들이 친일 인사로 정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위협과 강제로써 친일인사로 만든 사람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기 시작하여 백전백승을 거두고 중국 본토까지 침범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민족지도자들은 정말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일본이 미국에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켰을 때 우리 민족지도층 사람들은 일본의 패망을 이때 예견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중학교 교사는 우수한 졸업생이 일본유학을 포기하고 조선말 연구를 시작하라고 지도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일본에 협력하는 글을 쓰거나 연설을 한 사람들은 참으로 봉선화 꽃처럼 약한 존재, 떨어진 꽃잎이 되면서 조금만 견디면 봄이 되어 회춘할 것을 믿었던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갈 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들이 바벨론에 끌려 가서도 장가가고 시집가서 그 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고하였다. 무력이나 폭력은 쓸 수도 없었고 또 써서도 안될 일로 그는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키기 힘든 신앙생활을 하며 가능한 협력을 하면서 70년을 지내다가 마침내 무력 행위 없이 평안한 해방을 맞아 본국으로 돌아왔던 것인데, 이사야는 말하기를 “값없이 팔려 갔다가 돈 없이 풀려 나왔다”고 했다(사 52:3).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힘이 당할 수 없을 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구원을 믿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 민족도 그렇게 한 것이다.
일제시대 일본의 압정에 시달려서 박해와 고난과 수모와 옥고를 치르다가 마지막에 가서 부득이하게 일본에 협력하는 일을 했다고 해서 그들 때문에 우리가 불이익이나 피해를 입은 일이 무엇인지 물어볼 만한 일이다. 민족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공동체가 겪은 고난에 동참해야 하고 그 고난이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상관할 것이 아닌데, 현재 일시적으로 누리는 권세를 휘둘러서 지난 날의 역사를 편견을 가지고 심판하는 것은 오만한 행위이다. 이러한 오만한 자는 반드시 비하될 날이 오는 것이다. 일생의 말로가 비참하였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무덤을 찾아가 친일인사 명단을 보고한 행사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이 없지 않다.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