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 김경호 목사(들꽃향린교회)(2009.10.18 제 13주기 심원추모강연회에서 발표)
출처 : 심원 안병무 아키브
I.
민중신학에 교회론이 없다는 것을 민중교회 목회자들이 비판해 왔다. 이것은 자신들이 시작한 새로운 조직에 이론적인 뒷받침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민중신학에서 교회에 대한 논의는 많은 편이다. 기성교회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은 많이 제기되었지만 견고한 신학적 기반을 가진 기성교회의 교회론에 대비될 만한 체계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무슨론이나 체계를 밝히는 것보다는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실체나 존재로 신학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생성하는 사건으로 신학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신학적 체계로 세운다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민중목회자들의 이러한 요청은 나아가 이미 새로 시작된 ‘민중교회’ 또는 ‘민중신학을 토대로 한 교회’들에게 비판을 넘어 대안적이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론’이 이론적으로 디자인하듯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목회의 실천과 호흡하면서 나와야 하고, 실험과 검증을 요구하는 분야이기에 가장 재촉을 받지만 구체적으로 그림을 내놓지 못하는 분야이기도 했다.
이제까지의 교회론의 전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이 고백은 크리스천으로 입문하는 세례식과 직분자들이 임직을 받을 때, 반드시 서약을 받아야 하는 조건이었다. 이 고백은 교회의 모든 예식과 예배에 기초가 되는 신학적 전제이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선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를 인격으로 보는 토대 위에 세워지고 교회는 그러한 고백이 땅 끝까지 전파되게 하는 주체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안병무는 예수를 새롭게 본다. 예수를 인격으로 보지 않고 사건으로 본다. 이것은 신학과 교회론의 기초가 달라지는 것이다. 민중신학이 교회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을 해왔지만 교회는 바뀌지 않는다. 기본 전제,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글의 전반부에서는 예수를 사건으로 보는 신학, 특히 일반 사건과 구별되는 안병무 신학의 독특한 사건개념인 ‘지성소 사건’에 대해서, 후반부에서는 예수를 사건으로 보는 안병무 신학의 전제 위에 교회이야기를 풀어 보려고 한다.
II. 지성소 사건
예수는 사건이다.
안병무는 예수를 인격으로 파악하는 데서 서양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 벽에 부딪혔다고 보았다. 안병무는 예수를 사건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안병무 신학의 토대이기도 하며 민중신학의 토대가 되는 개념이다.
그들(서양사람들)은 모든 것-신도 예수도 성령도-을 '인격'(persona)으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냐?”하고 ‘누구냐’만 물어요. 그래서 예수도 “어떤 어떤 인격이다”라는 답을 얻고, 거기에 안주하고 말아요. 그러나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수는 하나의 사건이다!” “하나님도 사건이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인격으로 본 것은 틀렸다. 잘못 본 것이다! 이 깨달음이 내 신학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사건’이지 왜 ‘인격’이냐? 2천 년 전에 팔레스틴 갈릴리에 살았던 예수 개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사건이 중요하지......‘사건으로서의 예수’이것이 고리가 되어 나의 역사적 예수의 추구는 민중신학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서양신학의 역사는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 인간으로 보느냐?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냐? 유사본질이냐? 나아가 성령은 성부, 성자와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 삼위일체로 보느냐? 하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예수를 어떤 존재로 보느냐는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단지 말과 논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추방, 귀향, 숙청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주장을 달리하는 무리들이 서로 다른 종족을 부추기어 민족끼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행동 뒤에는 각자 서로 다른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러한 싸움은 451년의 칼케돈 신조에서 애매한 절충이 이루어졌지만 그 후에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안병무가 예수를 인격(persona)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것은 인격을 강조하면 집단성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신을 인격화하고 상(像)을 만들면, 그 순간부터 그 존재는 부자유해진다. 하나님이 상이 되면 하나님은 체포돼서 성전에도 갇히게 되고 사람과의 관계도 차단된다. 여기에 있으면 저기에는 없고, 저기 있으면 여기에 없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 차단된 것을 교류시키기 위해서 성령이라는 발상이 생겼는데, 이 성령을 또 인격, 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성령을 인격화해서 삼위일체니 뭐니 하는 것을 만들어 버리니 성령도 결국 시간과 공간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오늘에 현재한 신, 해방사건 속에 현존하는 신을 결국 성전에 가둠으로써 신을 사실상 자기 마음대로 유폐시키고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을 인격이라는 틀로 보는 것이 바로 신을 감옥에 가두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사건의 의미, 사건의 신학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은 하나님이나 예수가 가진 위격, 존재, 속성 등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해방사건, 예수께서 그 주변의 사람들과 더불어 일으키신 구원사건, 교회를 통해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의 역사는 이렇게 생동하는 기쁜 소식(Good News)을 외면하고 오랫동안 너무나도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물음들에 목숨을 걸어왔다. 그렇게 함으로 죽어버린 언어들은 더 이상 복음(Good News)이 되기를 거부했다.
심광섭은 질 들뢰즈의 사건에 대한 사상을 소개한다.
플라톤에서 출발하는 서양의 주류 철학은 사건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사물이나 실체, 성질 같은 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사건은 그것이 발생하는 순간에만 존재하고, 곧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전통 철학에서 사건이란 아주 덧없는 것, 가치 없는 것, 따라서 무의미한 것이었다. 서양 철학의 주류는 기본적으로 무상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불변하는 것을 찾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서양 철학자들이 줄기차게 물어왔던 유일한 대상은 곧 변하지 않는 존재자의 실체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나 존재는 변화와 생성이며, 생명은 변화하는 사건의 지속과 우연한 창발로 구성된다.
우리가 야구장에 나가서 볼 수 있는 것은 공, 야구 글러브, 방망이, 야구 선수, 관중, 심판등이 있다. 이렇게 형상을 중심으로 보는 것은 명사적 세계보기이다. 명사적 세계보기는 사물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의도가 있고, 이와 유사한 형용사적 세계보기는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다.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양의 철학은 이러한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야구장에 나가는 것은 이러한 공이나 방망이를 보려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이 공을 치고 달려 나가는 것, 글러브로 공을 받아내는 것 등, 운동을 보고 사건을 보려고 야구장에 나간다. 이것은 동사적 세계보기이며 그렇게 세계를 볼 때 세계는 사건들의 총체가 된다. 세계는 ‘thing’의 연결고리가 아니라 ‘thing’과는 다른 비물체적인 ‘event’이다.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양 주류의 철학에서 이러한 사건이나 운동은 이차적인 존재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 허깨비, 환각, 곧 시뮬라크르라(simulacre), 곧 판타스마에 불과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서 실재는 존재의 극한, 존재의 표면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존재방식으로서의 사건들이다.
전통적인 철학이나 신학이 전체를 규정하고 규격화하고 하나의 사상적 틀 속에 정리하려는 모던한 사고라면 안병무의 사건은 포스트 모던한 사고로 그 사건이 나타날 때 그 단면 단면의 입장에 충실하게 세상을 보는 것이다. 아니 역사의 단면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 그것은 역사를 시간의 총체적인 집합체로 파악할 때, 가능한 표현인데 사실은 허상이며 관념이다.
후설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부정한다. 오직 ‘과거의 것에 관한 현재’, ‘현재의 것에 관한 현재’, ‘미래의 것에 관한 현재’가 있을 뿐이고 과거의 것에 관한 현재는 기억으로, 현재의 것에 관한 현재는 직관으로, 미래의 것에 관한 현재는 기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역사라든가 모든 시간의 총체라는 것은 허상이다. 그것은 관념이며 오직 존재하는 것은 지금 현재, 여기서 발생하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사건이다. 그것은 다른 세계,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음,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환희에 찬 사건이며 숭고함이다. 지금 무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일어나고 있는 것이 존재해야 우리의 의식은 그것에 달려든다. 의식의 작용을 선행하는 그것은 단지 발생(occurrence) 또는 일어남(happening)이다. 이 순수한 발생, 또는 일어남으로서의 ‘사건’은 아직 규정되지 않은 단순한 것, 그것은 아직 일어난 것들이 형성한 망 아래에서, 곧 기존의 의미 체계나 준거 쳬계 내에서 특정한 의미로 규정되기 전에 무엇이다.
이제 세계의 객관적 법칙을 규명하려들거나 결정적인 원칙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철학이나 신학적 사유의 대상도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다. 의미가 생성되는 포인트가 초월한 존재나 영원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 있다. 그 순간에 발생하는 사건 만이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하는 것이 현대 이후에 철학이 사유하는 대상이다. 우리 앞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다채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사건만이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은 전체를 규정하려고 하지 않으며, 규정되기 이전에 이미 발생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사건이 예수이해의 중심이 되고 신학의 주제가 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신학함이다. 이제 신학적 사유의 대상은 초월해 있거나 변화하지 않는 본질이나 실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변화 그 자체, 생성 그 자체이며, 시간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있으며,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발생하고 있는 사건이 우리의 신학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수가 사건이다.’, ‘하나님도 사건이다’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는 말은 전혀 새로운 신학의 문을 여는 화두이고, 명제이다.
지성소 사건
안병무의 예수보기가 인격에서 사건으로 전환하면서 예수사건과 민중사건의 경계가 무너지고, 신학과 사회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교회와 현장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끼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다수 등장하였으며 그들은 자칫하면 안병무의 예수론은 예수없는 가현설에 빠질 우려가 있으며, 거룩함이라는 영역이 상실되고 종교도 없고, 교회도 없게 된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필자는 안병무의 글 중에서 수직적 체험, 종교적 경험을 중시하는 용어들을 자주 발견한다. 특히 ‘지성소’ ‘지성소경험’이라는 표현은 대표적이다. 안병무의 지성소는 장소로서의 지성소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뚫고 들어오시는 사건이다. 모세가 경험한 불붙는 가시덤불이라는 비일상적인 자연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모세가 만난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의 해방의 역사에 대해 건네주고 받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새 역사가 출발하는 일대 사건이다. 안병무도 지성소를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모세는 누미노제적 황홀경, 또는 공포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결단과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는 이 지성소에서.......이스라엘을 해방하기 위해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로 그런 명령을 받은 장소이기에 그것이 참 지성소이다...... 여기서 모세가 선 ‘거룩한 땅’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뜻, 역사적 상황의 인식, 그리고 모세의 결단이 하나가 되어 사건이 일어나게 한 것이다.”
필자는 그의 지성소개념을 그의 사건 개념과 연결시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생각되어 ‘지성소 사건’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안병무는 그의 지성소라는 글에서 루덜프 오토의 『거룩한 것』(Das Heilige)에 대해서 소개한다. 이 책이 나올 당시는 계몽주의의 여파로 이성, 합리주의가 판을 칠 때이다. 그때는 종교에서 말하는 ‘거룩한 것’ 따위는 결국 미개(무지)한 눈에서 온 것이고, 종교의 핵심은 윤리적(이상적)인 교훈이라는 결론에 주저앉았을 때이다.
이에 대해 오토는 인간세계에는 윤리적이요, 이상적인 것도 있으나 그것으로 포괄할 수 없는 엄연한 또 하나의 현실이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경험 속에 들어오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오토는 이것을 누미노제(Numinose)라고 불렀다.
누미노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주 놀라운 사건으로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경이의 대상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힘으로서 때로 공포의 대상 또는 진노를 나타낸다. 또 하나는 경탄의 대상이다. 이것은 인간을 황홀경에 넣고 모든 사물을 꿰뚫어 새롭게 보게 하므로 생의 의미를 전적으로 전환시킨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향 전환을 전개한다. 이런 것을 한마디로 하면 ‘거룩한 것’ 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안병무는 이성위주의 사고가 ‘거룩한 것’의 자리를 박탈하고 ‘세속화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성속을 구별하고 ‘성’이란 이름 밑에 특정한 공간과 시간을 구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정한 종교계층의 특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허구성마저 뒷받침 해주었다. 이런 현상을 제거하는데 세속화 신학이 필요했다.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을 일정한 데만 제한함으로 역사와 세계의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상대화했고, 결과 이른바 속세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으로 버려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세속신학은 성서에 엄연히 존재하는 지성소적 요소를 폄하해버리고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져 버렸다고 비판한다. 안병무는 오토의 ‘거룩한 것’을 ‘지성소’라는 용어로 새롭게 설명한다. 지성소란 후기 유대교에서 성전 안에 안치된 제단인데 이것은 거룩한 것의 상징에 불과하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산(그리심산) 위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라며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요한 4:21,23)라고 한다. 이것은 지성소가 이미 공간적인 장소가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지성소는 영과 진리가 현존하는 곳과 때이며, 그것은 일상성과 구별되는 장이다.
모세가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은 것은 호렙산이라는 곳이 구별된 공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세가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명령을 들은 사건이 일어났기에 그 곳은 거룩하다. 그것은 동시에 그가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할 장소 또는 순간을 가리킨다.
모세는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누미노제의 경험과 더불어 중대한 명령을 받는다.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에게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출 3:10)는 명령을 듣는다. 모세는 누미노제의 황홀경, 또는 공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것은 결단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모세가 선 거룩한 땅, 모세의 지성소는 그 백성을 구하겠다는 그의 생애의 새로운 사건의 출발점이요, 결단의 자리이다.
모세의 경험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경험이 있다. 모세는 일찍이 자기 동족이 매 맞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관리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거룩한 울분을 잠재워야 했다. 모세는 광야에서 평범한 가장의 생활을 접고, 불붙는 가시덤불의 사건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사건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결단을 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모세의 지성소 이며 지성소 사건이다.
안병무 자신이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성서가 말하는 사건이란....평면적인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면적인 것 속에 뚫고 들어오는 수직적인 것을 말한다. 즉 평면적인 것에 수직적인 것이 뚫고 들어와서 터지는 일이 사건이라고 성서는 생각한다. 예수 자신의 죽음도 평면적인 것으로 해석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사람이 나를 죽이는 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구나”하고 생각했다. 즉 하느님이 간섭해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이다. 호리존탈(horizontal)한 것에 버티칼(vertical)한 것이 마주치는 거기서 스파크가 일어난다. 이것이 사건이다.
후기의 안병무는 민중의 사건 속에서 예수 사건을 본다. 그러나 그의 수직적인 것은 수평적인 민중사건 속에 용해되고 녹아들어가 그 속에서 불꽃을 일으킨다. 그것은 안병무가 화산맥이라고 표현한 예수사건, 하나님사건이 분출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것을 역사적으로 크게 보면 사건이고 화산맥이지만 각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성소 사건이다. 그것은 인간이 종교적인 결단을 하는 자리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다.
안병무는 자신의 ‘지성소’ 개념을 루덜프 오토의 누미노제와 구별 짓는다. 누미노제는 현실과 병행하는 이원론에 빠지는 것이며, 다시 성속의 담을 쌓는 것이다. “단순한 누미노제는 지성소 일 수 없다. 까닭은 그것은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주로 ‘감정’이라는 유동적인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누미노제는 비록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숭고한 경험이지만 그것의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전 생애, 전 인격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토의 누미노제가 단지 종교적인 영역에 있다면 안병무의 지성소는 그 종교적 체험이 역사의 삶으로 자신의 일상으로 다시 뚫고 나오는 곳에 있다.
역사가 빠진 누미노제는 자기 황홀경에 취해 그저 공포 아니면 경탄에 잠몰될 뿐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외면하는 신비주의자이거나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것을 본 것 같이 신비한 데 집착하여 청중을 자기가 경험했던 황홀경으로 유도할 뿐, 역사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안병무는 이렇게 말한다. “이른바 사회참여, 사회정의, 인권을 내세우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런 것들이 바로 사회현상의 사회과학적인 관찰에서만 알고 배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 이야기에서 배울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는 말씀을 듣는 현실이다. 나는 이것을 ‘지성소의 경험’이라고 한다. 지성소! 내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하는 엄숙한 장소, 때!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고, 침범할 수도 없는 지고의 자리! 이런 절대의 경지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에 빠지지 않는다.”
안병무가 사건, 민중사건, 예수사건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냥 평범하고 간헐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를 거는 지성소 사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안병무에 대한 비판들
안병무의 사건에 대한 개념은 전혀 새로운 세상보기의 차원이다. 사물을 규정하고 그 속성을 파고드는 명사적 세상보기가 아니라 어떤 사건이 일어나느냐는 것을 보는 동사적 세상보기이다. 이것은 사물을 보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안병무에 대한 비판 중에 눈에 뜨이는 몇 가지 비판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비판들은 주로 전통적인 신학을 수호하려거나 현실교회의 목회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나왔다. 이러한 비판들은 전통신학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사고, 명사적 세상보기로는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안병무의 신학은 도저히 그러한 틀로는 분석할 수 없는 사건의 신학, 동사적 세상보기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세상의 말이다.
순더마이어는 “지금은 민중교회 안에 일상성이, 습관적이고 평범한 일상생활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일상성이다. 무엇이 일상성이며, 어떻게 일상성이 일상성을 초월하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신학은 어떤 특수한 사건에 기초한 안개속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안병무의 신학을 비판한다.
그러나 안병무의 사건, 그의 지성소 사건은 단지 일상성과 반대되는 개념의 단속적이고 간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일상성이 완전 정지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사건이며, 일상적 궤도를 뒤덮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성 속에 스며들어 모든 일상성에 생명을 부여하고 일관된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원초적인 경험이며 힘이다. 사건은 모든 일상적 경험들의 근본에 있어 그것들을 움직이고 일상화해나가는 동력으로 전 생애, 전 인격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성소 사건이다.
안병무의 신학이 예수를 사건으로 보는 시각은 필연적으로 예수를 집합적으로 본다. 예수 사건이란 예수와 민중이 함께 일으킨 사건이다. 예수 혼자 일으킨 사건이 아니다. 여기서 서구신학의 중심주제인 예수는 구원의 주체이고 민중은 구원의 객체라는 ‘주객의 이분법적 도식’은 탈피된다. 오늘의 사건 현장에서 민중은 구원받아야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구원해야할 구원의 주체이기도 하다. 이런 명제는 “민중메시아론”으로 불리웠다.
민중 메시아론은 몰트만을 비롯하여 민중 신학을 하는 젊은 세대들에 의해서도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특히 전통적 신학과 민중 신학의 조화를 시도하는 입장에 있는 신학자와 민중교회 목회를 하는 일선 목회자들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민중 신학의 논리가 바로 민중 메시아론이었다.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은 안병무의 민중 메시야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원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의지에 역행하는 가운데서 당하는 억압과 착취의 수동적 고난이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민중이 고난당하는 백성일 뿐 아니라, 그의 고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리스도론에 관한 질문들이 제기되며, 그 민중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것을 민중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하나님의 고난당하는 종과 같이 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 민중이 그의 고난을 통하여 스스로를 구원한다면, 이 고난 자체를 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민중은 어떻게 투쟁할 수 있는가? 민중이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자 하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누가 민중에게 질문한 일이 있는가?"
몰트만의 비판은 전통적인 존재론적 사고, 주객 이분법적 사고이다. 그에게 구원은 반드시 누가 누구에게 주어야 할 것이며, 구원을 주는 주체와 구원을 받는 대상은 명백하게 구별되어 있다.
당시 민중교회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에게도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이원돈은 민중 신학자들이 민중을 너무 이상적 존재로 본다며 민중이 가진 죄성도 함께 보아야 민중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서 민중은 구원받을 대상임을 역설했다.
이어 민중 신학자들 내부에서도 이러한 비판들이 터져 나왔다. 민중 메시아론에 대한 임태수, 박재순, 권진관등의 비판이 이어졌다. 송기득은 이런 비판들에 대해 민중 메시아론은 존재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윤리적, 기능적인 면에서 메시아의 역할을 한다는 말이라고 명백하게 정리했다.
“그것은 민중이 곧 예수라는 말이 아니고, 민중이 예수가 했던 메시아의 구실을 한다는 말이다......오늘날 우리의 역사를 담당하고 역사변혁을 추동하는 것은 온통 민중의 몫이며, 민중의 역할이다. 이런 뜻에서 오늘의 메시아는 민중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예수가 했던 메시아의 구실을 민중이 대신한 셈이다. 이런 뜻이라면 ”민중은 예수다“라는 명제를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존재론적 신학’은 주체가 되는 ‘존재이해’로부터 시작한다. 탁월한 존재규명으로 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세계의 지평으로 기획 투사한다. 이것은 문법적으로는 명사적 세상보기로 나타나며, 모든 세상을 한꺼번에 규정하고 정리하고 규격화하려는 사고이다. 모든 것의 최종근거를 규명하고 모든 것을 개념으로 장악하려는 자세이다.
그러나 ‘사건의 신학’은 주객도식을 거부한다. 민중사건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서 구원의 주체도, 구원의 객체도 서로 상생하고 일어나며 발생한다. 지성소 사건에서 야훼는 비로소 야훼로 자신을 계시하고 일하신다. 하나님은 비로소 하나님이 되며, 모세는 비로소 모세가 되고, 역사는 비로소 역사가 된다. 가시덤불은 불속에서도 계속 자기의 모습을 소멸시키지 않고 가시덤불로 남아 사건의 전달자가 된다. 가시덤불은 비로소 가시덤불이 된다.
예수사건과 오늘의 민중사건은 바로 지성소 사건이다. 지성소 사건을 통해 수평적인 것에 수직적인 것이 뚫고 들어오고, 순간적인 사건 속에 불멸의 것이 일어난다. 지성소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탈 은폐되어 나타나고, 드러내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사람들 안에서만 드러난다. 그들로 인해, 비로소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조건 아래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얻게 된다. 그 사건 아래서 비로소 새로운 자아가 생성된다. 지성소 사건 안에서 우리는 ‘자기포기’나 ‘자기초월’을 넘어서 ‘자기생성’을 경험한다. 비로소 역사는 해석되지 않는 사건의 혼돈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잡아 흘러간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에게 자기를 맡긴 자녀들의 뜻을 이루고 가고, 자연은 거기서 자기 존재를 충만하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그 사건 자체를 있게 하는 사실(fact)이다. 박종철 사건으로 예를들어 말하면, “탁하니 억하고 죽은 사건”이 팩트(자연)이다. 그것은 단지 의미 이전에 발생한 사건일 뿐이다. 이 사건이 지성소 사건이 되는 것은 여기에 천심(天心)이 동하고 인심(人心)이 동하여 역사가 방향을 잡아 마음을 얻게 될 때, 지성소 사건이 된다. 이 팩트로서의 사건(자연)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손잡고 역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의와 처분권 밖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동적 사건이기도 하고, 자기 결단으로 참여하는 능동적 사건이기도 하며,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룩한 사건이며, 자기 결단의 사건이며, 역사의 주체로 서는 사건이기도 하다.
지성소 사건은 하나님, 인간, 역사, 자연의 네 주체가 비로소 자기 몫의 됨됨이를 찾으며 서로 일으키고 발생하며 하나로 어우러지는 사건이다. 네 주체를 동사적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일어나고(자연), 드러내고(하나님), 내맡기고(인간), 나아간다(역사)”이다. 이 네 가지 행위가 한 사건 안에서 서로 섞여지고 뭉쳐진다. 이 네 가지 주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지성소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성소 사건 안에서는 이 네 주체가 누가 주체이고 객체인가를 따지지 않고 어우러진다. 주객의 틀 자체가 무너지기에 그렇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게임의 규칙이 다르다. 단지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