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 김경호 목사(들꽃향린교회)(2009.10.18 제 13주기 심원추모강연회에서 발표)
출처 : 심원 안병무 아키브
III. 갈릴리 예수의 공동체
일반적으로 교회의 출발 기점을 오순절 사건으로 본다. 안병무의 글 중에도 교회의 탄생, 발동을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설명하는 글도 있다. 안병무의 글이 연대기적으로 발표되지 않아 그의 초기 사상과 후기 사상의 변화 추이를 점치기는 어려우나 필자는 글의 강조점으로 보아 초기의 글로 판단한다. 그러나 후기에 안병무는 교회의 출발점을 오순절 사건에서 훨씬 소급하여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했던 민중으로 소급한다. 안병무는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위에 기초해서 신조화, 교리화, 교권화, 사크라멘트화(성례전화) 되어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마가복음이 엄중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은 갈릴리 민중 공동체가 제자들의 사도권을 중심한 예루살렘 교회를 비판적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안병무는 교회의 출발점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실체로 보기 이전에 예수가 민중과 함께 했던 만남, 그들이 일으킨 해방의 사건으로 소급했다. 안병무의 독특한 교회론은 교회를 ‘제도’나 ‘조직’으로 보지 않고 ‘현장’과 ‘사건’으로 본다. “예수와 민중이 만나는 현장”, “민중과 예수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서 교회의 원형을 찾는다. 그런 토대 아래서 오늘의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교회- 예수사건이 일어나는 곳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예수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 이제까지의 교회론이 예수를 인격으로 보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민중신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교회론은 예수를 사건으로 보고 “예수 사건이 일어나는 실천” 위에 세워져야 한다.
예수사건에서 출발한 교회는 당연히 오늘의 예수사건이 일어나는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 교회에 속한 개인은 오늘의 예수살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살기나 예수사건이 너무 거대한 과제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신앙인이 가야하는 마땅한 길이다. 오늘 우리들에게 아무런 방향도 보여주지 못하는 선언적 고백 뒤에 숨어서 실상은 자신의 삶 밖으로 예수를 내모는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예수사건이나 예수살기가 꼭 거대한 담론 속에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각자 교회가 속해있는 지역사회와 각자 구성원이 속한 다양한 분야를 통해 민중의 해방사건에 참여하면 된다.
필자가 강남향린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때,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 예산의 30% 이상을 선교비로 지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임대로 있는 개척교회에게 30%의 선교비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였다. 그러니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 양적성장이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다. 이런 논리의 사슬 속에서 한국교회는 저마다 자기확장과 성장위주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민중을 위한 교회’보다는 눈높이를 낮추어 ‘민중의 교회’를 지향하며,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송파구에 있는 비닐하우스 촌으로 들어가 꿈나무 학교를 운영하면서 그들의 입장에서니 그들을 억누르고 있는 잘못된 법과 정책, 지방자치단체의 관행이 보였고 그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주민과의 연대하였다.
화훼마을의 화재사건을 계기로 주민과 긴밀한 연대가 이루어지고 공동투쟁, 주소지 찾기를 위한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이를 통해 송파구내의 4개의 비닐하우스 촌 2000여명의 주민들이 주민으로서의 주민등록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따른 법적 권리를 찾게 되었다. 주민의 상당수가 기초생활대상자로 수급권자가 되고, 투표권을 찾고 마을로서의 집단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숙원이던 상수도 개설, 우편배달, 도로포장 등을 서울시와 지방자치 단체로부터 얻어냈다. 이것은 당시 교회가 가진 재화를 모두 투여한다고 하더라도, 그 열배, 스무 배를 쏟아 붓는다고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여기서 교회가 가진 돈을 나누어주는 ‘자선적 선교’, ‘시혜적 선교’를 넘어서서 법과 제도와 관행을 바꾸는 선교를 ‘해방적 선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깡통 만드는 기계가 고장 나서 찌그러진 깡통을 만들어 낼 때, 하나하나의 깡통을 펴는 선교가 시혜적, 자선적 선교라면 그 기계 자체를 수리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해방적 선교이다.
이는 한 지역사회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전체 빈민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되었다. 이를 판례로 마침내 2009년 여름, 비닐하우스 촌에 주소지 찾기가 대법원에서 완전 승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재화를 가진 것은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 또는 기업이다. 그들이 민중의 생존과 인권을 위하여 자신의 권한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만들어가는 일은 오히려 작은 단위의 교회가 덩치가 큰 기성교회보다 더욱 발 빠르게 행할 수 있는 민중사건, 예수사건이었다.
선교: 십자가 - 자기초월, 자기 생성의 사건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라는 종말에 이를 때까지 중간시대를 살아가는 전략으로 선택된 곳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경과적 조직이고, 과정 속에 있는 조직일 뿐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대신하여 교회 자체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서도 안 되며, 자기 완결적 구조에 머물러도 안 된다.
교회는 스스로를 위해 있지 않고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며, 자기 조직이나 소유,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청중의 숫자를 목표로 삼거나, 그것을 힘의 근원으로 삼기 위해 존재할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교회 스스로 자기 완결적인 목표로 삼을 때 그 교회는 이미 예수와 상관없게 된다. 교회가 그 모인 울타리 안의 청중만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만을 위해 봉사한다면, 아무리 복음화와 전도를 외쳐도 그 교회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
안병무의 신학에서 고난과 십자가는 역사변혁의 방법론이기도 하며, 교회론으로 본다면 적극적인 선교론이기도 하다. 특히 민중운동은 그들이 힘이나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기에 그 운동의 방법은 십자가를 지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안병무는 예수공동체의 고백은 십자가라는 한마디로 집약된다고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준 사건이듯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개인이나 교회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주는 자기 초월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자기 성장이나 자기 발전적 전략을 연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병무의 선교론은 십자가 사건처럼 자기희생적 결단이 수립되고 실행되는 자기 소멸을 향한 것이며, 어떻게 십자가를 질까를 목표로 삼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가 가진 자원과 역량을 가지고,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와 민족공동체, 나아가 전 세계적 민중과 연대하여 가장 의미 있는 자리에서 가장 뜻 깊게 십자가를 지는 방법을 연구하는 교회의 자기 초월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나간 과거를 기준으로 보면 ‘자기 포기’ 또는 ‘자기 초월’이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나 미래의 기준에서 보면 새로운 ‘자기 생성’이고, ‘거듭남’이다. 그런 면에서 개인이나 교회의 자기 초월적 선교는 새로운 자기 생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것은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이 동전의 양면을 이루듯이 동시에 일어나는 자기 결단과 하나님의 은총이 만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렇듯 십자가를 지고 자기 초월을 이루는 개인이나 교회는 그 당시에는 쓰라린 고통을 겪지만, 오히려 새롭게 자기 생성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교회는 새로운 사건의 창조자, 형성자, 담지자가 되고, 비로소 교회가 새로운 해방사건의 증언자가 될 것이다. 그러한 개인이나 교회가 행한 선교의 열매와 결과는 먼 역사의 몫이며 하나님의 몫이다.
교회가 일정한 크기가 되었을 때 분가선교하는 것도 교회의 자기 초월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강남향린교회는 향린교회에서 분가한 교회이며, 들꽃향린교회는 강남향린교회에서 분가한 교회이다. 분가한 교회는 각각 성장하여 세 교회가 ‘향린공동체 협의회’를 통하여 매년 연합예배, 현장예배, 공동의 사회참여, 목회자 교육 등을 함께 실시하고 있어 한국교회 갱신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교회의 진정한 선교는 오히려 자기초월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 질수 있다는 역설적 결과의 실증이다. 십자가에서 부활로 나아가는 ‘교회의 예수 따르기’이다.
증언: 사건과 자신의 일치
교회는 복음을 증언한다. 복음을 Good News라고 하는 것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건이 되지 않으면 소식이 되지 못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을 신조로 만들어 반복하는 것은 새로운 뉴우스가 될 수 없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불변의 신조는 복음서가 쓰여진 당시에 예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뉴우스가 될지 몰라도 오늘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뉴우스가 아니다. “김 아무개가 착한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김 아무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뉴우스가 되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일을 했고 그 일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면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증언이 된다.
예수는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 보았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누가 7:22-23)
그가 누구냐는 인격을 묻는 질문에 대해 예수는 자신이 하신 일, 사건으로 답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때 사건으로 말한다(참조, 누가 4:18).
교회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예수 사건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오늘의 민중사건을 일으키는 주체나 중심이 되는 것은 의도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임의로 만들어 가기도 힘든 것이다. 가령 전태일 사건이나 오늘의 용산 참사와 같은 사건의 주체가 되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만큼 교회의 자기초월의 폭이 커지기 전에는 힘든 일이며,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개인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그런 사건을 당하기는 할지라도, 예수 아니라면 제 발로 찾아들어가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민중사건의 증언자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증언한다는 것은 그 사건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일치시키면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게 된다.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 일명 ‘촛불교회’가 작년도 민중의 거센 저항으로 표출되었던 촛불정국 속에서 민(民)의 대변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매번 거리 집회를 열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다가 목회자 10명과 평신도 10명이 한꺼번에 연행되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서 촛불이 사라지게 되었다. 민중 저항의 상징처럼 된 촛불을 이어가기 위해 2009년 2월부터 매주 목요일 민중이 고난 받는 사건 현장에서 현장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30회를 넘게 이어가면서 점점 더 예배 참여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직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동안의 예배는 용산 참사 현장, 순천향 병원, 기륭전자, 재능교육, 쌍용차, MBC 노조, 국회앞, 시청앞 등등에서 진행했다. 이 예배는 안병무의 새로운 교회론을 구현해 나가는 현장이다. 필자가 초안한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의 창립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최초의 천막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하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현장 중심의 성전이었고, 야훼의 법궤는 전쟁과 민족의 아픔이 있는 현장으로 이동해 다니는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출발점 역시 “예수와 민중이 만나는 현장”(안병무)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이 현장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단지 조직된 교회로 자신들의 안락한 예배 공간 안에서만 머물러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 없는 예배와 우상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민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들판으로 현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기독교가 현장으로 나와서 민중들이 아픔을 겪는 자리에 함께 하여야 합니다. 이에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고난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 찾아가서 함께 하며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대하는 사건의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갈릴리 민중으로서 그들의 해방 사건을 이끌어 가셨던 예수는 민중사건, 오늘의 민중을 해방하는 사건으로 성육하신다. 안병무는 예수의 현재화를 말하면서 “예수가 민중 속으로 항구적으로 성육한다.”고 한다. 그의 성육은 존재로서 성육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서 성육하는 것이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이 해방되는 사건 안에 나타나시고 육화하신다. 교회는 오늘의 민중이 스스로를 해방하는 주체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주인다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민중을 위해, 민중과 함께 하며, 스스로 민중이 되어, 성실하게 오늘의 민중사건에 대해서 증언해야 한다.
신학: 민중사건의 전거(典據)
오늘의 민중 사건은 예수사건의 전형 아래서 그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고 자신의 해방을 지향하는 민중의식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늘의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이미 일어난 선험적 사건인 성서의 사건이 베풀어 주는 장 속에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자리잡을 때이다.
오늘의 사건들은 발생하자마자 곧 바로 무의미와 무관심의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오늘의 사건은 너무 빠르게 회전되어 그 자체가 무의미한 허공 속으로 던져질 정도의 속도를 이미 획득하고 있다. 한 사건에 대한 이해를 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어떤 언어도 사건의 회전속도를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기술문명은 물질을 가공할 만한 속도로 회전시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매일매일 우리에게 던져지는 사건들의 폭탄세례는 어떤 사건에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건과 이벤트에 심각한 중독에 걸려있는 대중은 더 이상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 사건의 의미는 없고 사건들만이 난무 한다.
오늘의 다양한 사건들이 이렇게 무의미와 소멸의 위기 속에 있지만 성서의 사건과 예수사건은 오늘의 사건들의 소멸 속도를 넘어서서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한다. 이 사건들은 이미 확고한 의미의 장(場)을 형성하고 각각의 사건들이 그 장(場)안에서 자리 잡도록 위치를 부여한다. 성서의 사건들은 오늘 일어나는 사건들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며 의미를 부여한다. 이미 권위를 부여받은 예수사건과 성서의 사건은 오늘의 민중사건을 해석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전거가 된다. 성서의 사건과 예수사건은 그를 예배하고 따르는 무리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모형으로 오늘의 사건의 의미를 조명하며 그 사건이 전개되어질 방향을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사건들은 단지 ‘사건의 의미’를 넘어 ‘사건의 신학’을 요청한다.
고백: 사건 속에 자기를 밀어넣기
오늘의 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 위에 서있다. 세례를 받거나, 목사, 장로등 직무를 맡아 임직하는 경우 예식에서 성부, 성자, 성령, 교회에 대한 개인의 신념을 고백하고 서약해야 한다. 이것은 각 교단의 헌법과 예식서에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기독인이 되고 중요한 임직을 하는 관문에 개인의 신념을 고백하는 일이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예수를 사건으로 본다면 예수의 인격을 무엇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결단하는 개인이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관계를 무엇이라고 고백하느냐는 신도의 정체성, 임직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명사적 사고이다. 동사적 사고를 하는 민중 신학에서의 고백과 결단은 다른 모습을 가져야 한다. 개인이 예수사건에 참여하겠다는 결단, 적극적으로는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에 맞추어 ‘나는 앞으로 어떤 예수사건에 주력하고 헌신 하겠다’는 결단이 고백의 자리를 대신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건 속에 자기를 밀어 넣느냐가 개인의 결단이 되어야 한다. 밀어 넣기는 하나의 선택을 강요한다. 밀어 넣기가 요청될 때, 개인의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의 유혹들을 모두 물리쳐야 한다. 우리가 어떤 신념체계를 갖느냐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로서 그의 삶과 사건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 요청된다. 우리가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하여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식 또는 임직식 등을 현장예배로 끌고 나와서 드리는 것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예배: 사건의 현재화
진정한 예배는 사건의 예배이며 역사의 현장, 고난의 현장에서 드려지는 예배이다. 성서시대의 예배는 하나님과 만났거나 하나님의 위대한 해방 사건을 재현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시편에는 예배에 쓰였던 고백문들이 보존되어 있다. 시편에서 찬양하는 하나님의 업적은 대개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사건들이다. 창조, 출애굽, 광야의 기적, 땅과 왕국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등이다(특히 시편 136편은 그 전형을 보여준다). 예배 장소도 야곱이 천사를 만나 씨름한 곳,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 곳, 천사가 전염병 재앙을 멈추었다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등, 사건이 일어난 곳에 성전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역사적(정치적) 사건에 대하여 예배드렸다.
성서시대의 유명한 제의적 축제들 역시 하나님의 해방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들이다. 유월절, 장막절, 부림절은 직접 일어난 역사의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맥추절, 추수감사절등도 인간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축제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예배의 중심인 교회력(Lectionary)도 예수의 탄생, 현현, 수난, 부활, 성령강림 등 예수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무릇 예배는 해방 사건을 기리고, 나아가 오늘의 해방 사건에 부름 받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만나는 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해방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해방)사건을 극으로, 이야기로, 상징으로, 즉 그들의 문화적 도구-시, 노래, 춤, 연주를 통해 현재화하는 것이다. 거기서 예배 참여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게 된다. 예배에서 지나간 성서의 이야기들이 반복되지만 단지 지나간 이야기들만은 아니다. 우리는 성서의 출애굽 사건을 말하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출애굽을 생각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할 때도 그것은 동시에 우리들의 십자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나간 성서의 해방 사건을 재현하면서 미래에 우리들의 해방을 꿈꾸고, 동시에 우리가 해방을 지향하는 인격을 갖고, 오늘 우리의 해방 사건으로 연결해 나간다. 이러한 “해석학적인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과거의 사건을 반복하는 예배가 갖는 기능이요 그 안에 오늘과 내일이 함께 들어있는 신비이다. 이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오늘 그와 유사한 사건들로 재현되어야할 당위성과 필연성이다. 그것이 단지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로만 되었을 때 우리는 지나간 화석을 예배하는 것이요, 기억과 관념으로만 해방을 즐기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삶 안에는 모든 것이 해석학적인 통합으로 나아간다.
또한 예배는 그 자체로 강력한 투쟁의 방법이기도 하다. 기독인은 예배로 말한다. 예배는 어느 장소, 어떤 시간에 드리느냐에 따라 때로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저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이 시대에 가장 고난 받는 현장을 찾아가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가장 절실한 예배가 될 것이며 이것은 가장 강력한 기독교적인 투쟁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제: 평등한 제자도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이 교회의 토대가 될 때, 그 고백의 진위를 가릴 절대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요청된다. 그는 ‘6개월간 더 학습하고 오라’든가 ‘이제 그만 하면 합격’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평상적으로 목사나 당회가 그런 권위를 가지며, 나아가서는 신도들 각자의 신앙정도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교회의 직분을 수여하는 권위도 갖는다.
그러나 사건이 교회의 토대가 될 때, 어느 한 개인이 주체가 되기는 힘들다. 사건은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이다. 절대 귄위자가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협력하고 손을 보태야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권을 중심으로 직제화, 권위화 서열화된 종래의 교회의 조직을 넘어서야 한다. 필자는 평신도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목사이건, 장로이건, 신도이건 모두가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용어이기에 사용한다면, 평신도가 도구처럼 되고 한낮 목회의 대상이 된다면 역동적인 교회가 되기는 힘들다. 그들 모두가 자기 삶의 중심을 두고 흔쾌하게 주인으로 설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향린교회는 20년 동안 목회자 없는 평신도교회로 존재했다. 그러나 내부의 필요에 의해 목회자를 청빙하게 되었다. 지금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협력하며 역할 분담을 잘 해나가는 모델이기도 하다. 최근 분가한 들꽃향린교회에서도 목사와 평신도간에 다음과 같이 역할분담이 이루어진다.
목회자는 가급적 오늘의 민중사건과 근거리를 유지하며 교회 공동체와 중계하는 역할, 교우들 개개인이 사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평신도가 마음은 함께 하지만 생업으로 인해 일상에서 벌어지는 예수사건과 민중사건에 일일이 참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목회자는 오늘의 민중사건과 성서사건의 중계도 시도한다. 설교와 성서연구, 예배를 통해 오늘의 민중사건을 보는 시각을 넓히며, 회중과 함께 그 안에 있는 과제들을 발굴하여 대안을 찾는 지혜를 모아간다.
평신도는 교회의 살림살이와 회의 진행, 운영일체를 맡는다. 교회의 각종 회의소집과 의장의 역할을 평신도의 대표인 운영위원들이 맡는다. 다른 직제는 아직 채용하지 않고 있어 교회내의 호칭은 모두가 님으로 통한다. 두 살짜리 어린이도 아무개님이고 목사도 아무개님이다. 최근 신학생들의 안수를 위해 장로를 선출하였다. 장로는 외적으로는 교회를 대표하고 내적으로는 6년 임기의 운영위원의 역할을 수행한다. 다른 운영위원은 2년 임기이다. 이것은 평신도 교회와 목회자 교회의 장점을 취한 제3의 모델이다.
목회자들이 독점하였던 강단은 모두에게 열려있고 평신도도 설교에 참여한다. 성례전에서도 향린공동체가 함께 하고 있는 예식문은 만인사제론에 근거하고 있다. 평상적으로 목사가 선포하는 부분은 오히려 신도들이 선포하고, 목사는 진행의 사이사이 연결을 시도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교회는 평신도가 자기 소리를 말할 수 있는 제도와 분위기를 만들고 권위적 구조를 없애야 한다.
IV.
안병무는 현실교회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실제 그는 교회에 대해 많은 애정을 쏟았다. 향린교회와 한백교회를 설립하고 강남향린교회도 필자와 함께 공동설립자가 되어 시작하였다. 그때는 건강이 좋지 않을 때였으나 초기에 한 달에 한 번씩 강단을 맡아 주셨다.
안병무에게 바람직한 교회관이란 개인이 이룰 수 없는 것을 교회가 이루어가는 것이다. 개인이 좋은 뜻을 가져도 그가 가진 조건이 허락하지 않고, 개인의 상황이나 의지, 능력으로 접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교회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거룩한 무리들이 모이는 집단이고, 집단의 인격을 갖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역사의 몫을 집단의 인격, 집단의 의지, 집단의 실행으로 할 수 있다. 의로운 마음을 가진 개인들이 자기 삶에서 이루지 못한 콤플렉스를 동기로 삼아 새로운 교회의 선교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교회에 대한 적극적인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이글의 전반부에는 그의 적극적인 교회론을 담을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토대를 밝혔다. “예수는 사건이다”는 명제, 이를 동사적 표현으로 하면 “예수는 민중의 해방(구원) 사건을 일으킨다”는 명제는, 그가 쏟아내었던 이런저런 교회에 대한 비판 속에 숨어있는 중심이며 또한 새로운 교회의 기본 전제이다. 그러나 그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론은 내용적으로 ‘지성소 사건’임을 보았다. 그리스도 고백 위에 서있는 교회가 분명한 그리스도 중심성을 갖는데 비해 민중신학의 ‘사건에 토대한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 사라지고, 거룩하고 종교적인 영역이 사라져 버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안병무 신학에서 사건은 어떤 거룩함 보다 더욱 거룩한 지성소 사건이다. 그의 지성소 사건은 하나님(예수), 인간, 자연, 역사가 함께 생성되고 일어나고 만나는 융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민중사건을 종교의 영역 안에 제한하여 지성소사건으로 협소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민중사건이 가지는 심오한 깊이를 말하는 것이요, 신앙인의 자기 결단으로 그 자리에 서는 것이다.
후반부는 “예수는 사건이다”, “예수는 민중을 해방(구원)하신다”는 새로운 명제를 토대로 하여 교회이야기를 풀어본 것이다. 이 교회이야기는 현실의 교회 모습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 다소 래디칼(radical)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 그린 교회이야기는 하나의 명제를 토대로 하여 세운 단순히 이론적인 구상이 아니다. 필자가 향린, 강남향린, 들꽃향린으로 이어지는 목회 경험과 예수살기, 촛불교회,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등의 기독교 사회운동의 경험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것은 현장의 교회론이고 현장의 보고이기도 하다. 결코 실천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과격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게 나아가야 할, 그리고 우리의 사고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한 근본적인 교회의 이야기이다.
또한 이러한 경험이 특수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교회론이다. 보편성이란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특수한 고백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으며 기독교 선교에도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민중신학을 주객도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맞지 않는 틀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단론에 빠지고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지 못한다. 새 논리로 떳떳하게 새로운 신학의 틀을 말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의 무의미하고 강요된 틀에 식상해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떳떳하게 새로운 신학, 새로운 운동, 새로운 교회로 초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것은 아주 혁명적인 교회이다. 수많은 모순을 가진 채 그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늘의 교회는 쏟아지는 비판에 직면해 있으며 이미 쇠퇴해 가고 있다. 새로운 교회의 출현 없이는 기독교가 존재키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안병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새로운 신학은 오늘의 교회가 새롭게 설 수 있는 그루터기이며 우리의 희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