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 김은수(전주대 선교신학대학원장/선교학)
행사명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앙과직제위원회 주최 '에큐메니칼 신학 토론회 - WCC에 대한 오해와 이해'
일시 : 2010년 3월 25일
자료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or.kr
4) 1973년 방콕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 - ‘사회적 책임’의 선교 신학적 전개
1972년 12월 27일에서 1973년 1월 12일까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열린 이 대회는 선교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구원(Salvation)을 주제로 개최되면서 세계교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대회의 공식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은 한국에서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한편으로 생물학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삶과 함께 영적이고 인격적인 삶이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지 어느 한편만을 말하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오류가 내포되어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비크(A.Sovik)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완전히 정신적이며 내적이고 피안의 세계의 일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은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부른 유명한 정의를 초래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종교가 분명히 위안은 되지만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투쟁에서 효과적인 힘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경향, 즉 정신적이고 내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기독교의 사회, 윤리, 정치적인 국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를 정당 정도의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으며 정치 제도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지지를 주장하게 되어 정치제도를 절대화하거나 우상화할 가능성이 있다.”
같은 의미에서 방콕대회의 제2분과는 다음과 같이 구원을 정의한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셨고 그 안에 우리가 참여하는 구원은 분열된 이 세계 속에서 통전적 삶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삶의 갱신과 신성의 충만함 속에서 참 인간성의 확장으로서 이해한다.(골 2:9) 그것은 영혼과 육체, 개인과 사회, 인간과 탄식하는 피조물의 구원을 말한다.(롬 8:19)” 따라서 이와 같은 통전적 시각에서 방콕대회의 주제였던 “오늘의 구원”은 “정체성, 인간화 그리고 해방”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정체성(identity)으로서의 구원
구원된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라고 소비크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문화와 단절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는 문화적인 정체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방콕대회의 제1분과에서는 구원의 주제로서 “문화와 정체성”이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은 기독교적인 정체성 안에서 수용해야만 할 신적인 선물이고 인간적 획득물이다... 그리스도의 인간되심은 한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일어났다. 즉 유대인으로 나셨고 한 특정한 종족의 일원이셨다. 그럼에도 예수가 오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일은 우주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겟토화는 하나의 反문화적 시도로 이해된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은 각자의 토착적 문화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는 모든 문화를 포괄하며 변혁시키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긴장이 상존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문화적 갈등과 변화의 문제로서 종교혼합(syncretism)의 부작용을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의 사신은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새로운 대답이 요구된다. 한 가지 구체적인 대답의 시도로서 방콕에서는 상황화된 흑인신학을 들고 있다.
과거 19세기의 기독교 선교는 서구적 문명화와, 그리고 구원은 서구적 문화와 자주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방콕대회는 다음과 같이 추천한다.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는 선교회들의 선교적 참여가 어떤 척도와 방법으로 문화적 제국주의를 반영하고 있거나 혹은 교회들이 그들의 문화와 구분하지 않고 그 연결성 속에서 강요하고 있는지를 가능한 비판적으로 평가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와 문화사이의 관계를 명쾌하게 구분 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의 정체성 확보와 문화적 겟토화를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 물론 우리들의 구원과 기독교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정신, 영혼 그리고 세상저편의 영역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문화와도 단절됨이 없이 그 정체성을 확보 할 수 있어야 한다.
(2) 인간화(humanness)로서의 구원
성서적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전권(Vollmacht)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산업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삶의 질의 향상이 구원으로 표시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흔히 현대 산업국가의 세속화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그러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방콕대회의 준비를 위한 서구의 많은 보고서 및 논문들은 사회문제의 해결과 구원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행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인간이 완전히 제외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고린도전서 3:9)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와 봉사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도록 부르신다. 그러므로 세계의 복음화와 인간화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속하며 보충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기독교 신앙의 이 두 가지 차원의 분리를 브라텐(C. E. Braaten)은 서구교회가 자주 저질러온 “이원론적인 시각”이라고 비판하였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인간성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 새 인간(Neu Mensch)이 되셨다. 왜냐하면 “아담”은 히브리적 사고에서 개인으로서의 인간뿐 아니라 전체 인류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비크는 인간임(being human)의 문제를 인간됨(becoming human)의 문제로 보고 있다: “인간됨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화해, 용서받음 그리고 새로 태어남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표시인 화해는 동시에 이웃과의 화해, 그 이웃과 형제로서 사는 능력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한일서 4:29)
이러한 맥락에서 방콕대회는 선교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의 선교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으로서, 믿음과 그리스도의 인식 안에서 자라도록 돕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인간성(Humanitaet)을 보이고 나누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의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은 참된 의와 거룩함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새사람을 입는 것(에베소서 4:24)으로 이해된다.
(3) 해방(liberation)으로서의 구원
방콕대회의 제2분과에서는 “구원과 사회정의”라는 주제로 구원을 인간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개인적 비참함에서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즉 포괄적인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 속에서 경제적 정의, 정치적 자유 그리고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으로 이해하였다. 사회정의와 관련짓는 이 토론에서는 특정한 차원의 역사적 우선성에 강조를 두고 있어서 인간의 영적인 차원이 경시되고 있다.
한편 오늘날 우리의 선교와 복음화의 노력이 개인구원에만 집중할 때 이 또한 그 개인과 관련된 사회적 불의의 원인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선교의 신학과 방법도 육체와 영혼, 개인과 사회로 잘못된 이분화의 개념의 영향을 받게 된다. 바로 이러한 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방콕회의에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인도의 토마스(M. M. Thomas)목사는 그의 주제 강연에서 국민들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수평적인 기대가 하나님을 향한 영적이고 수직적인 차원의 시각과 분리되지 않는 전체적인 차원에서 구원을 파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몰트만은 “방콕에서의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의 전체적인 사고가 전통적으로 육체적 구원에서 영적인 구원, 공동체적인 구원에서 개인적 구원을 분리해온 유럽인들에게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평가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제2분과 보고서는 말하기를 “우리는 자유, 정의 그리고 은총에 대한 복음의 성서적 차원을 새로이 발견해야만 한다. 복음은 항상 전체성 안에서 인간을 향해 말한다. 그것은 억압의 세력에 맞서서 해방하는 힘이고 힘없는 자를 강하게 한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약함은 죽음과 고난을 이기는 그의 해방하는 힘과 밀접히 연결되어져야만 있다.”
한편 협의회는 치유하고 해방하는 모델로서 유효한 모든 세상으로부터의 일련의 행동보고서를 제시하고 있으나 이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할 위험이 있다.
3. 로잔운동에 나타난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
1) 1974년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
로잔대회의 공식명칭은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이며, 1974년 7월 16일에서 25일까지 148개국 2,473명의 개인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스위스의 로잔에서 개최되었다. 로잔대회는 방콕CWME대회의 복음에 사회적인 성격이 포함된 구원이해에 도전하기 위한 것으로 구원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성령을 통한 거듭남이며, 따라서 영혼구원이 가장 우선되며 사회정의와 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그 이후에 자연적으로 따라와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빌리 그래함은 로잔대회의 목적중의 하나가 방콕대회에 대한 도전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대회가 진행될수록 방콕대회가 도리어 로잔대회에 큰 도전이 되어 방콕에서 강조된 복음의 사회적 성격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대폭 반영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흐름은 로잔대회의 신학적 작업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영국의 존 스토트(John R. W. Stott)목사로부터 먼저 왔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위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1966년 베를린 대회 때와는 바뀌었음을 고백하는 것에서 더욱 확실하게 나타났다. 그는 대위임을 순전히 복음화의 관점에서 배타적으로 해석하였으나, 로잔 대회 후 그의 바뀐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면, 대 위임령의 결과뿐만 아니라 대 위임령 그 자체도 복음화의 책임뿐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그의 “복음화의 성서적 기초”라는 로잔에서의 주제 강연에서 선교는 더 이상 전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아들의 파송으로부터의 내용 즉, 봉사가 포함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교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섬김의 선교”가 되어야 하며,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모든 교회의 선교는 복음전파와 함께 사회적 행위가 포함된 사랑의 봉사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선교이해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선교이해에 이르게 되었다: “선교는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표출되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파송하는 하나님이며 이것은 선교를 의미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의 아들은 사도들과 70인과 교회를 보내셨다. 그는 또한 교회에 성령을 보내셨고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을 보내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로부터 발생되며 그것은 선교의 모델이 된다.”고 결론지으며 끝으로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또한 너희를 보낸다”(요한복음 20:21)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스토트가 이해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모델에 따른 교회의 참여에 있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선교에서 발전된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의 이러한 신학은 복음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파송에 근거한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또한 남미에서 온 참가자들에 의해 강하게 뒷받침되었는데 먼저 에쿠아도르에서 온 파딜랴(Rene Padilla)는 복음선포와 사회정의 사이의 우선권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그들이 굶주림으로 희생되고 있는 자들의 숫자를 셀 수 없다면, 매분 그리스도 없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도 가질 수 없다”고 하였고, 따라서 그는 선교가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사회의 죄된 구조의 갱신을 위한 전 피조물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복음서에 선포된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방법으로 역사를 통해 실현하시는 모든 존재의 주님이시다.”
페루에서 온 에스코바(Samuel Escobar)도 이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며 복음주의자들의 전통적인 정치적 무관심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우리는 복음증거에 있어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교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증언의 사회적 환경과 복음의 사회적 연관성이 잘못되었다고 염려할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 바로 그의 사회적 환경이 강조되는 복음의 포괄성이다.” 따라서 그는 경고하기를 “삶의 매일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관점 속에서의 따름이 없는 영성은 종교적일 수는 있으나 결코 기독교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대회가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저녁 파딜랴와 에스코바 등이 주축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따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 모임에서 토의된 내용을 “로잔으로부터 로잔에 답함”이라는 제목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들은 이 성명서에서 때때로 인간의 전체성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무시되고 비성서적인 이원론이 수용되고 있다고 밝히면서 복된 소식의 전체적 차원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샬롬의 그의 왕국이 여기 그리고 지금 전 피조물 앞에 드러나고 그의 복된 소식이 눈에 보이게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바로 이것이 해방과 회복과 전체성과 개인, 사회, 세계 및 우주적 구원의 진정한 복된 소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끝으로 이를 위해 이 세대 안에 그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로잔대회의 흐름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선교신학에 있어서 사회적 윤리 확립의 필요성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그들이 채택한 15개항의 “로잔언약”에 반영되어졌다. 결국 방콕의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를 도전하기 위해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도리어 방콕대회로부터 큰 도전을 받고 복음주의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도와 더불어 사회적 책임과 봉사가 한층 더 강화되는 복음주의 선교대회가 되었다.
로잔언약은 모두 15개항으로 이루어진 복음주의 선교의 핵심적 내용으로서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이 로잔언약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동안의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 볼 수 없었던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많은 진전이 있었으며 로잔언약 제5항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회의 핵심적 토론주제가 되었던 전도와 사회적 연관성에 대해서 로잔언약은 먼저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압박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등한시하며 때때로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데 대하여 참회하고,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사회 행동이 곧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 및 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밝히고 있다(5항). 이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따로 보거나 사회적 책임은 개인의 변화에 자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로서만 보아오던 그 동안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큰 진전으로 평가된다.
제네바 WCC의 스텝이었던 호프만(G. Hoffmann)은 그의 로잔대회에 대한 보고서에서 “방콕과 로잔대회는 진리를 공동으로 추구하고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1974년 8월 11일에서 18일까지 베를린에서 열린 WCC의 중앙위원회에서는 로잔대회를 진지하게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특별히 모든 회원교회들에게 1975년 WCC 나이로비 총회를 위한 준비로서 로잔언약을 연구하여 적절한 평가를 할 수 있도록 추천하였다. WCC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수용움직임은 로잔대회가 그 어떤 복음주의대회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정치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잔대회가 사회적 참여를 위한 복음주의자들의 한 전환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로잔언약의 제5항은 바로 이러한 점을 유감없이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의 모든 압박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권념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뿐 아니라 이것을 방콕대회의 주제였던 구원(salvation)과도 관련하여 사회적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 즉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종류의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5항)고 결론짓는다.
2) 1980년 파타야 세계복음화 로잔위원회와 그랜드 래피드즈 협의회
멜버른CWME대회가 끝난 몇 주일 후 1980년 6월 16일에서 27일까지 ‘세계복음화를 위한 로잔위원회’(The Lausanne Committee on World Evangelization: LCWE)의 후원으로 “세계복음화대회”(The Consultation on World Evangelization)가 태국 파타야에서 개최되었다. 전체 참석자 수는 회의 참가자, 고문, 신학적 참관인, 평신도 및 내빈을 합하여 850여명이었고, 이 가운데는 일부 사회주의 국가(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동독)의 참가자들도 있었으며, 참관인으로는 로마 가톨릭,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 및 미국교회협의회(NCC)의 해외선교분과에서 파견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타야 대회의 주제는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듣게 할 것인가?”(How Shall They Hear?)로 정하여졌고, 이 물음은 로마서 10장 14절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그들이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파타야 대회는 지금까지 복음이 미치지 않은 17개의 구체적인 그룹에 대한 선교전략을 세우는데 집중하였다. 이 작업은 전 세계적으로 연구 분과가 조직되면서 파타야 대회 준비과정의 주요골격을 이루었고, 이를 토대로 회의는 어떻게 ‘인간집단들’(people groups)에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연구하였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20억 혹은 그 이상의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영적인 굶주림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대회가 마무리될 무렵에 실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한편으로 멜버른 대회에 참석한 복음주의자들의 집중적인 토론의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파타야 대회의 참석자 가운데 200여명이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제로 별도의 모임을 갖고 로잔위원회가 해야 할 가장 긴급한 과제로서 사회정의를 진지하게 다루어 달라는 공개편지의 요청에 대한 하나의 응답의 결과였다.
이 별도의 모임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파타야 대회 직전 윤리와 사회에 대한 World Evangelical Fellowship(WEF)위원회가 런던 근교 하이 레이(High Leigh)에서 열린 두 차례의 회의의 영향이었다. 첫 번째는 발전에 대하여, 두 번째는 삶의 스타일에 관한 것이었는데 여기에서 제 3세계 대표들의 강한 주장이 반영되었다. 두 번째 회의에 대해 쉐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런던 회의의 실제적인 내용은 단순한 삶, 청지기 또는 자선을 훨씬 넘어 정확하게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 억압들에 대한 신적인 심판,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신 방식, 그리스도를 위한 고통의 감수 그리고 정치적인 구조들의 변화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지원을 언급했다. 이러한 주제들이 복음주의 진영에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언급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반성은 파타야에서 별도의 모임을 갖은 이들 200명에게 이어졌고, 이들은 “지구 도처에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복음 선포의 큰 장애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문제를 파타야 대회는 진지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또한 공개편지는 로잔위원회가 복음주의자들이 어떻게 억압과 차별을 지지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를 묻고 회개를 촉구하며 성서적 진리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다. 남아프리카에서 온 한 참석자는 이 편지 속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전하여 주었다: “우리는 신앙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남아프리카 내외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도리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인종차별을 지원하고 있는 이 사실을 슬픔과 눈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러한 결과로 로잔복음화위원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공개편지에 서명했던 대표자들로부터 이들이 제기했던 질문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들의 요청을 검토하기 위해 회합을 가졌다. 그리하여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계를 논의하기 위한 “신학 협의회”가 계획되었고, 이 협의회는 LCWE와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의 공동 후원 아래 1982년 6월 19일부터 25일까지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드즈에서 전 세계 27개국에서 온 50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위에서 제기된 기본적인 기독교적 의무들 간의 관계를 토의하였다. 이 모임은 1974년 채택된 로잔언약 가운데 제 4항(복음전도의 본질)과 제 5항(기독교적 사회적 책임)에 명시된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내용을 지지하면서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 그랜드 래피드즈 협의회의 결과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Evangelism and social Responsibility: An Evangelical Commitment)”이라는 표제로 출간되었다. 이 보고서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연합되는 보다 기본적인 한 방법, 즉 복음에 도달”하였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복음은 뿌리이며,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그 열매들”이기 때문이며, 이 복음은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마 4:23, 막 1:14,15, 눅 4:43)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하였다.(38쪽)
그랜드 래피드즈 보고서는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장은 간략하게 예배와 감사에 대한 요구를 말하고(19쪽), 곧 이어서(제 2장) 세계 복음화에 대한 현재적 필요성과 요구를 다루고 있다(20-23쪽). 즉 1974년 로잔 세계복음화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27억 이상이 복음화 되지 않았으나 8년이 지난 1982년 현재에는 도리어 그 숫자가 늘어나서 30억을 헤아리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며 가장 긴급한 과제로서 세계 복음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계속해서 말하기를(제 3장) 세계의 약 8억의 사람들 혹은 전 인류의 5분의 1이 절대빈곤 인구이며, 이들은 대부분 기본 생필품이 부족하여 하루에도 수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현실도 결코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24-27쪽).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으며 그 필요성이 절실함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제 4장)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그 어느 것 하나도 기독교인의 포기할 수 없는 기본적인 의무임을 밝히고 있다(28-37쪽). 그리고 이 보고서는(제 5장)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하나로 연합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서 복음에 도달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이 복음은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말한다.(38-46쪽) 또한 이와 관련하여 역사와 종말론(제 6장)을 취급하고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을 말하고 있다(47-54쪽). 끝으로 행동을 위한 지침을 제시하면서 보고서를 마치고 있다(제 7장).
래피드즈 신학위원회는 사회에 대한 선교적 의무를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서 멜버른 회의에서 강조되었던 가난한 자를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다. 보고서는 천국에서 그들이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라면(계7:16), 우리는 오늘 주린 자들을 먹여야 하지 않는가? 라고 묻고,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되어야만 한다(눅 4:18-19, 7:22)고 주장하였다(52,42쪽). 이에 관한 성서적 근거로서 보고서는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들과 동일화한 마태복음 25장의 심판의 날에 관한 비유를 들고 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환영을 받은 “양” 또는 “의인”들은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 헐벗고 병든 자들, 나그네들과 옥에 갇힌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섬겼던 자들이기 때문에 이 비유의 주요 메시지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제공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50쪽).
또한 선교의 두 가지 과제로 인식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가장 잘 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본 래피드즈 신학위원회는 이 복음이 예수에 의해 가난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선포(누가 6:20)되었음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이는 파타야 대회를 결론짓는 “태국선언”(Thailand- Erklärung)에서도 이미 언급됨으로서 예상된 것이기도 하다. 태국선언은 “굶주리고 억압받는 자들을 섬겨야 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한 도움과 정의를 추구해야 하며”(제 3항)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서 동일화”(제 4항)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래피드즈 신학위원회는 모든 복음주의자들에게 “선한 일에 열심을 내도록”(딤 2:13,14)하고 “고난 속에서 용기를 갖도록(딤후 4:6-8, 계 2:25)” 권면하게 되었고, 주님의 “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게 되었다(54쪽). 이와 같은 사회적 참여에 대한 요청은 하나님 나라를 장차 기대해야할 미래로만 이해하지 않고 현재적으로 해석함으로서 예수를 통해 획득된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차원을 세계의 각 상황 속에서 실천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로 평가될 수 있다.
4. 끝맺는 말: 신학적 차이와 전망
에큐메니칼 선교와 로잔운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많은 접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차이는 여전히 있다. 대회의 공식문서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다음의 두 가지의 신학적인 근본 차이를 지적할 수 있다.
1) 성서해석학의 문제
성경의 권위에 대한 로잔언약의 제2항을 보면 성경은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있어서 착오”가 없으며, “정확 무오한 법칙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배경에는 1846년에 결성된 복음주의 연맹(Evangelische Allianz)의 축자적 영감설에 기초하고 있다. 즉 영감은 저자에게 하나님이 감동을 불어넣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들 자체가 문자적으로 감동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존 스토트(J. Stott)는 복음주의자와 에큐메니칼과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성서해석학이라고 지적하고,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을 기계적인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믿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성서의 기자를 기계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취급하셨음을 상기해야만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 근본주의적인 성서관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책임은 물론 전 피조물의 구원을 갈구하는 오늘의 선교적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데 있어서 많은 장애와 제한을 가져올 수 있다.
2) 역사의 신학적 이해
근본주의적인 성서이해는 전체적인 세계의 역사로부터 성서에 국한된 특수한 구속사를 분리하게 된다. 이것은 교회 중심적인 역사이해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크람(Thomas Kramm)은 복음주의자들의 구속사적 교회 중심적 시각은 교회가 선교의 중심이라는 사고로 귀착되기 때문에 교회자체가 선교의 목적이 되고 만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설립이 선교의 유일한 목표가 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물의 구주라고 고백한다면, 그의 통치 역시 우주적이어야 하고(빌립보서 2:10),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라면 결코 교회 역사를 세계 역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에큐메니칼 역사이해는 모든 사회적인 변혁을 포함한 세계역사 자체를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나타남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가진다. 따라서 이 현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에 책임적으로 살고 하나님의 샬롬을 이 땅위에 그대로 나타내기 위하여 해방과 혁명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이해는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까지도 이 땅위의 모든 역사와 일치시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복음주의 역사이해는 이 세상을 가능하면 빨리 떠나야만 하는 눈물의 골짜기로 이해한다. 따라서 오직 비판적인 시각 안에서 구원사와 세상역사와의 종말론적인 긴장이 극복되며 세계선교를 위한 역동적이며 통전적인 올바른 역사이해에 도달될 수 있다.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니칼 운동과 로잔 운동에 나타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선교적 과제로서 공동의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세계를 위한 에큐메니칼 협력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해는 과거에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개인적이고 수직적인 관계의 일방적인 강조와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적 차원을 무시한 미래의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는 것에서 변화된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선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현재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적극적인 상관관계에서 파악함으로서 하나님의 선교의 종말론적인 차원을 획득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