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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교성] 정의로운 평화와 한국교회: 한일강제병합 100년...

2010년 NCCK 에큐메니컬 선교정책토론회

*발표 : 안교성(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일시 : 2010년 3월 11일∼12일
*행사명 : 2010년 NCCK 에큐메니컬 선교정책토론회
*자료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or.kr




 


“정의로운 평화와 한국교회: 한일강제병합 100년, 한국전쟁 60년, 사월혁명 50년”

 


I. 서 론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는 지난 20세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 한가운데 놓여왔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지난 20세기를 폭력의 세기라고까지 칭하였는데, 한반도는 그런 양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및 한국교회에게 있어서 평화는 가장 우선적인 요구요 과제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령, 김 용복은 “우리 민족과 인류에게는 평화 이외의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평화담론과 평화사역은 활성화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본 논문은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하고자 한다. 이에 답하기 위하여, 세 가지 세부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평화에 관하여, 한국교회의 체질은 무엇인가? 한국교회의 공감대는 무엇인가? 한국교회의 과제 및 대책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통하여 우리가 평화에 대하여 어떻게 “성찰하고, 소통하고, 행동하는지(reflect, interact and act)" 그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가 제대로 되려면, 지난 100년에 걸친 역사를 연구하는 광범위한 연구가 필요하며,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이것은 본 논문의 한계를 벗어난다. 따라서 추후 본격적인 연구를 기대하며, 본 논문은 시론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서두에서 밝힌다.

아울러, 두 가지 문제를 더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제목의 문제이다. 필자에게 주어진 제목은 “정의로운 평화와 한국교회: 한일강제병합 100년,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 한국전쟁 60년”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이것을 다소 바꿔 “정의로운 평화와 한국교회: 한일강제병합 100년, 한국전쟁 60년, 사월혁명 50년”으로 정하였다. 물론 2010년에 기념할 사건이 많지만, 이 글의 주제를 선명하게 하기 위하여 세 가지 사건을 택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일강제병합은 한국의 국제적 반평화를 상징하고, 한국전쟁은 한국의 국내적 반평화 가운데 남북관계의 반평화를 상징하고, 사월혁명은 한국의 국내적 반평화 가운데 남남관계의 반평화를 상징한다. 둘째, 각 사건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전쟁, 민주주의라는 20세기 한국사를 관통하는 주요한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셋째, 한국은 이런 격동기를 겪으면서, 수동적인 입장에서 사건의 피해자이었던 것만 아니라, 능동적인 입장에서 문제의 해결자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한국이란 명칭의 문제이다. 편이 상, 본 논문에서 한국은 분단 이전에는 한국 전체를, 분단 이후에는 남한을 가리킨다. 남북한 구분이 필요할 경우에는 남한이란 표현도 사용한다.


II. 정의로운 평화와 한국교회

1. 평화와 한국교회의 체질

1) 1910년 한일강제병합의 의의

1910년 한일강제병합은 외면상 평화롭게 이뤄졌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하여 전쟁이나 대규모 폭동은 없었다. 그것은 당사자인 한국 및 일본이 모두 이 사건을 원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건이 19세기 중반의 정한론(征韓論)부터 시작된,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 16세기의 임진왜란부터 시작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집요한 침략정책의 절정을 이뤘기 때문이다. 이미 1895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7년 의병토벌작전 등으로 한국은 초토화되었고, 저항할 기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09년 안 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라는 단독 행위는 당시 한국이 집단적 행위를 거의 할 수 없었던 정황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안 중근이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도록 3월에 처형된 지 5개월만인 8월에, 한국은 일본의 공식적인 식민지가 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일본은 치밀한 식민지화 과정을 통하여, 강제병합이라는 한국의 국운의 단말마적인 순간을 평화롭게 넘겼을 뿐 아니라, 정당화에도 성공하였다. 이것은 소위 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평화(Pax Japonica)의 시작인 셈이었다. 이 평화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처럼, 강자의 평화요, 불의한 평화요, 무력에 의한 평화요, 제국주의에 의하여 호도된 평화였다. 당시 제국주의국가들과 제국주의국민들은,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이런 평화에 공감하였다. 한 가지 예를 보자. 친일파로 잘 알려진 미감리교 선교사 웰쉬 감독(Bishop Herbert Welsh)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서구 열강들이, [18]80년대에 그들이 조선과 맺은 조약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은둔의 왕국에 대한 지배를 선포한 것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그들이 당사자들 모두의 최선의 복지에 대하여 품었던 정직한 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사람들은 믿어야만 한다. 그들은 그런 상황을 받아들였고, 한국은 그 이후 세계가 수긍하는 가운데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민족정신은 이로 인하여 완전히 진화된 것이 아니라, 휴면상태로 들어갔던 것이다. 1919년 분출된 3.1운동은 반제국주의적 평화적 민족주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이 운동과 더불어, 중국에도 5.4운동이 일어나면서, 아시아 지역의 반제국주의운동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과 그것을 전후한 일본의 침략 및 식민지배는 몇 가지 유산을 남겼다. 첫째, 한국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전쟁 가운데 놓였지만, 특히 19세기말부터 집약적으로 전쟁을 경험하였다. 연속적인 전쟁을 겪으며, 한국인은 평화에 대한 희구보다 생존욕을 앞세우게 되었다. 전쟁과 관련된 상세한 것은 한국전쟁을 논하는 부분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둘째,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anti-imperialism) 형태로 발전하였다. 물론 한국인이 민족의식을 가진 것은 오래전부터였지만, 근대적인 면에서 민족국가(nation state)의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생겼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러한 저항(anti) 운동은 이후 한국의 주요한 정치형태가 되었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혹은 반일주의, 반공주의, 반독재주의 등, 한국인은 거듭되는 부정적인 정치적 도전에 맞서는 가운데,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자세보다 소극적이고 저항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적극적인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내는 데는 취약했다. 다시 말해, 전쟁 혹은 분쟁의 공간을 종식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평화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한국은 생존을 우선시하였고, 이에 따라 민족주의가 생존의 논리로 동원되었다. 남북한 모두 민족주의를 지배논리에 이용하였다.

북한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의 하나인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민족주의를 강조하였고, 결국 민족주의적 변형 공산주의인 주체사상을 발전시켰다. 남한은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시월유신의 이데올로기로 동원하였다. 한국에서 오래 사역했던 언더우드 3세 원일한은 이런 양상과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식민지배를 경험한 뒤 정부에 대하여 관용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교회는 자신을 한국 민족주의와 매우 밀접하게 동일시하였다. 이 민족주의는 한국전쟁과 북한으로부터의 지속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말미암은 반공 십자군적 심성에 의해서 더 강화된 민족주의였다. 그래서 해방 이후기에 “옳든 그르든 내 나라”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이런 태도는 반정부 행위를 반민족적 혹은 심지어 용공적 정서와 동일시하였는데, 심지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나타났다.

결국 이러한 생존 우선적 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성격 특히 민족주의의 정의로움에 대한 논의를 근본적으로 제한시켜왔다.
셋째, 인근국가에 의한 정복은 지역연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일본은 유럽제국주의를 모방하면서, 아시아적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아시아를 일방적으로 대상화하였다. 이러한 일본과 여타 아시아국가간의 관계에 대하여 마루가와 테츠시(丸川哲史)는 ‘일본인에게 보이지 않는 아시아’라고 표현하였다. 특히 윤 동주(尹東柱)를 예로 들면서, 일본의 식민지통치하에 태어난 조선인시인이 옥사하였는데, 이것은 식민지지배의 가혹함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식민지지배하의 인간의 ‘목소리’를 가둬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전후 아시아 평화 파괴의 장본인인 일본이 과거사 청산이나 평화 진작에 소극적임에 따라, 지역 평화 연대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넷째, 일본은 이런 식민화, 특히 동양의 식민화를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인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추진하면서, 거짓 평화를 고착시켰다. 이러한 거짓 평화의 전통은 일제시대는 물론, 전후 한국의 독재정권하에서 계속 유지되었다. 따라서 한국에는 정의로운 평화 논의 자체가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식민주의와 독재가 생성한 권위주의 문화는 한국사회가 소통에 취약한 특징을 낳았다.
다섯째, 결론적으로, 민족주의와 관련해서, 평화는 궁극적으로 독립 즉 개체성(individuality)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주었다. 곧 국제적 반평화 상태에서는 정치적 해방이 평화의 선결조건이었던 것이다.

2) 한국전쟁의 의의

한국전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민족의 비극이었지만, 특히 네 가지 유산을 남겼다. 첫째, 한국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전쟁에 노출되고 동원되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그리고 한국전쟁. 이런 연속적인 전쟁의 절정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또한 한국사회는 이외에도 반란, 파병 등 다양한 형태로 전시상태와 연결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한국인은 생존을 절대적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전쟁이 한국과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여하튼 생존이 최우선시 됨에 따라, 생존을 위하여서는 심지어 평화까지 희생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이것은 20세기후반에 본격화된 국가안보 논리에서 다시 나타났다. 가령, 한국교회의 경우, 최대의 적이며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지는 북한에 대하여, ‘북한선교’ 개념은 수용하면서도 ‘평화통일운동’ 개념에 대해서는 심한 저항감을 보였다. 가령,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경우, 통일교육 문제가 교단 내 분쟁의 소지로 발전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전쟁과 전쟁 위협이라는 극한상황 하에서, 전쟁의 심리가 자리 잡았다. 특히 일본 군국주의 및 한국 군사독재정부를 경험하면서, 군사문화가 한국의 주류문화 가운데 하나로 뿌리내렸다. 교회 및 선교 분야에서도 군사적 용어와 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즉 신학용어로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militant church)라고 부르는데, 한국교회의 경우, 전투적인 교회를 넘어서서 호전적인 교회(bellicose church)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평화운동 및 평화신학이 발달되지 못하거나 소외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둘째, 반공주의가 한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 논리가 되었고, 국가의 국시 및 교회의 교리 수준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북한의 생존위협이 절대적으로 감소하지 않은 한,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정 두희는 해방공간 즉 해방 후 한국전쟁 전에는 다양한 사관을 가진 역사서술이 가능했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남북 분단이 적대적으로 고착되자 우리나라에서도 냉전적 사고가 학계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특히 반공 이념이 절대적이던 그 시기에 이 땅에 유물사관이 자리할 공간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역사 현실 뿐 아니라, 역사 해석에서도 다양성이 존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부와 교회가 전반적으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형편에, 교회가 이 분야에 있어서 예언적 기능을 하기가 극히 어려웠고, 반공주의의 역기능에 대한 비판은 매우 제한되었다.

셋째, 한국전쟁은 한국을 최빈국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생존에 대한 애착은 더욱 커졌다. 이런 상황은 경제성장이 한국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공약이 되게 하였고, 한국을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물론 한국사회에 있어서 자본주의 발달에 대한 논의는 학자 간에 차이가 난다. 민족사관을 지닌 학자들은 내재적 발전론을 강조하면서, 17,18세기부터 자본주의가 이미 발전한 것으로 주장하는 한편, 식민사관을 지닌 학자 특히 일본학자들은 타율적 발전론을 강조하면서, 일본식민시대부터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주장한다. 하여튼 자본주의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경제 논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2007년 대선에서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개념까지 나타났다. 윤 계섭과 윤 정호가 주장하듯이, “1965년 이후 30년 동안 연평균 8.7%라는 가파른 성장률을 기록했던” 경제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졌다. 매년 3%내지 4%의 성장률로 잠재성장률인 5%에도 못 미치는 실적을 남겼다.” 물론 당시 IMF사태를 벗어나는 중이었던 상태라는 것도 고려해야겠지만, 여하튼 이런 상황에서 경제논리는 정치논리마저 좌우하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한국교회도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한국교회에서, ‘풍요의 복음(the gospel of prosperity)’과 같은 신분 상승형 메시지가 우세하였고, 교회구성원 특히 교회지도층 그중에서도 평신도지도층은 중상층이상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가 이 분야에 있어서 예언적 기능을 하기가 극히 어려웠고, 자본주의의 역기능에 대한 비판은 매우 제한되었다.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 반공주의와 자본주의는 사실상 비판의 면제대상이 되어왔고, 반공주의 및 자본주의의 역기능을 타개하기 위한 정의로운 평화 운동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넷째, 결론적으로, 이데올로기와 관련해서, 평화는 궁극적으로 화해를 성취해야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주었다. 즉 국내적 남북 간 반평화는 타자에 대한 인정, 공존 가능성의 수용, 다양성(diversity)의 관용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타자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가 우선적 과제이다. 원칙적인 면에서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만큼, 남한은 북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우파정권이었던 노 태우 정부 하에서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사회에 북한에 대한 심리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점을 고려하지 않는 한, 남북갈등은 남남갈등으로 비화한다. 바로 이 점에서 화해신학이 19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유행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활성화되지 못하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3) 사월혁명의 의의

해방 후 민족적 비극은 분단, 전쟁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은 독재로 신음하였다. 한국인, 특히 학생들은 사월혁명을 통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이 혁명은 근대화의 과제는 경제적 근대화뿐 아니라, 민주적 근대화(혹은 사회적 근대화)라는 점을 분명히 해주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한국은 독재정권이 단지 외국인에서 내국인으로 바뀌는 과정을 경험하였다. 따라서 한국은 정치적 해방뿐 아니라, 경제적 해방 및 사회적 해방이라는 연속적인 해방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한국에서 혁명 등 사회개혁 운동은,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공산혁명이 아니라, 주로 유산계급 출신의 소수지도층이 주도하는 자본주의형 혁명이었다. 심지어 한국공산주의운동도 일부는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사월혁명 역시 몇 가지 유산을 남겼다. 첫째,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한국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계급을 뛰어넘어 전사회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1987년의 6.29운동은 좋은 예가 되겠다. 따라서 여러 가지 역경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경제적 근대화와 민주적 근대화라는 두 가지 과제를 모두 상당부분 이룩했다. 물론 경제적 근대화와 민주적 근대화의 상관관계와 그 역사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둘째, 민주화의 주체에 대한 논의가 추후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민주와 민중이라는 문제가 나타났다. 민중담론은 두 가지 면에서 한계를 나타냈다. 하나는 운동 차원에서였다. 민중담론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운동을 다변화한 것이 사실이지만 저변화하지는 못했다. 엘리트 위주의 기존 사회개혁 운동의 시각에서 소외되었던 경제적 하층계급의 시각이 반영되고, 이들 스스로 민중운동에 참여하고, 나아가 일부는 지도자로 등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민중담론은 민중성의 양면성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접근하지 못하였다. 가령 한국교회의 경우, 민중은 민중교회와 오순절교회라는 외견상 상반되는 두 가지 종류의 교회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민중교회운동의 바램과는 달리, 남미의 경우처럼, 민중교회는 가난한 자를 택하였지만, 가난한 자들은 오순절교회를 택하는 모순이 나타났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민중성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민중운동이 기존의 사회개혁 운동의 특성인 엘리트 지도층의 참여 문제를 완전히 불식하지 못하였다. 가령 민중신학의 경우, 민중성을 띤 엘리트들 즉 민중신학자, 민중목회자, 민중기관목사 등의 존재가 민중신학 및 민중선교에 대단히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민중담론의 계급성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학문적 차원에서였다. 민중담론이 학문적 명확성을 다소 결여한 탓에, 심정적 설득력은 큰 반면 인지적 설득력을 그렇지 못했다. 가령 이 기동은 민중사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4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①‘민중론’과 ‘계급투쟁론’의 문제, ②‘현재성’과 ‘실천성’의 문제, ③민중․민족 주체의 ‘근대화론’의 문제, ④정치사적 파악의 몰각, 그 밖의 문제들 등이다. 이 자리에서 이런 것들을 설명하거나 논쟁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민중사학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이 민중신학이나 민중선교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기로 한다. 여하튼 오늘날 민주화와 민중담론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이 선진국 특히 경제선진국에 편입되는 전환기에 있기에, 민중의 얼굴이 경제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또한 한국이 다민족(다인종)․다문화․다종교 사회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민중의 얼굴이 인종적으로도 변하고 있다. 오늘날 기존의 민중선교가 새로운 민중을 찾아서, 장애인, 다문화사회 등으로 대상을 달리하고 있으나, 이전의 민중담론에 나타났던 애매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셋째, 결론적으로,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평화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실현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2. 평화와 한국교회의 소통

이상에서 평화와 한국교회의 체질에 대하여 다소 비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비관적인 문제는 한국교회의 정체성보다 한국교회의 소통에 더 심각하게 나타났다. 오늘날 소통 문제는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라 하겠다. 가령, 최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 명박 대통령은 업무수행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만, 소통에서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한국교회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한국과 한국교회는 세 가지 분야에서 소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 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간, 한국교회 내. 다시 말해, 한국교회는 화해자, 소통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의 소지를 제공하고, 문제거리가 되는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특히 평화담론과 관련하여 어떤 문제점을 드러냈는가?

첫째, 한국에서 연합과 일치 특히 평화담론을 이야기하는 측이 다수가 아닌 소수라는데 가장 큰 문제가 있다. 한국교회 초기에 선교연합이 이뤄졌으나, 장로교와 감리교에 머물렀다. 해방 후 장로교의 분열을 통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한국교회는 급속도로 축소되어, 한국교회의 소수가 되었다. 그 후 회원이 늘었으나, 이런 사정은 바뀌지 않았다. 최근 들어, 정교회와 오순절교회가 참여하였으나, 기존의 정체성을 획기적으로 바꾸지도 못하였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지도 못한 상태이다. 소수가 웬만한 논리적, 감성적, 도덕적 설득력 없이 다수를 바꾸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둘째, 평화담론은 참여하는 사람의 정체성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것은 몇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하나는, 몰트만이 이야기하였듯이, 평화가 정의를 가져오기보다 정의가 평화를 가져온다면, 따라서 정의문제가 평화문제에 선행하거나 최소한 동반한다면, 개인적, 사회적 변화 없이 평화가 도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상황이 과격하였다. 가령 영국의 경우, 노예해방운동 등 도덕운동이 성공하기 위하여 복음주의자들이 근 한 세기에 걸쳐,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장기적인 전략을 수행하였다. 이에 비해 한국은 민주화의 요구와 이에 대한 응답이 1960년대에서 1970년대 혹은 1980년대라는 2-30년대 안에 집약적으로 이뤄져야했기 때문에, 과격화된 저항운동의 모습을 띠게 되었고, 이것은 평화담론의 비평화성에 대한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이런 식의 급격한 평화담론은 주창자의 도덕성과 상대방의 비도덕성을 동시에 지적하는 도덕적 논란에 말려들기 쉬운 것이었다. 비도덕적이라고 비난받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행동에 나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참여는, 이런 변화에 선행된 것이 아니라 후행된 것이었고, 그나마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계열 내에서는 소수였다. 다른 하나는, 정체성의 변화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변화이고, 따라서 소기의 목적인 행동 변화보다 정체성에 대한 시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평화담론은 통일담론으로 발전하였는데, 통일담론은 불가불 북한의 정체성과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경우, 일반학자들 가운데서도 한국전쟁의 성격, 특히 기원에 관하여 다양한 입장이 있고, 이것은 정치적 입장과 연결하고 있어, 정치적으로 매우 첨예한 사안이다. 김 학준은 6.25전쟁의 복잡성으로 인하여 전통주의, 수정주의, 신전통주의, 신수정주의 등 네 가지 해석 가운데 “어느 한 해석만이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해석은 전적으로 그르다는 인식을 갖는 것은 이 전쟁의 본질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학문적 포용성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기존의 기독교 통일담론에서 북한, 한국전쟁, 남한의 성격과 정체성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 없이, 통일담론이 전개되면서, 한국사회 및 한국교회의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통일담론은 남북갈등을 해소하기 이전에 남남갈등을 증폭시키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남한)교회는 북한교회와는 달리 일치된 통일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남한교회는 상호 간에 이런 다양성을 평화적으로 소통하는데 성공적이지 못했다.
셋째, 한국교회의 평화담론은 민주화운동, 통일운동과 더불어 발전하였고, 이 시기는 정권교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예언적 기능은 대폭 약화되었다. 한편으로 문민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기독교 민주화세력이 직접적으로 정치참여를 시작하면서, 예언자보다 자파의 대변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에 대한 대응으로 보수진영이 정치행동을 시작함으로써 교회는 사회의 공공기관의 성격보다 이익단체로 부상하였으며, 이들 역시 예언자보다는 자파의 대변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보수진영의 이러한 성향은 현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평화담론을 포함한 기독교의 전반적인 담론들의 객관성, 예언성에 대한 신뢰가 실추하여,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대하여 지니는 사회적 지도력이 축소되었다.

3. 평화와 한국교회의 과제

이제까지의 평화담론은 그 중요성에 비하여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일반 사회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데 역부족이었다. 이것은 이전의 평화담론이 주로 사변적이거나,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구체적인 요구를 발견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가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의 변화(the change of context)는 과제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맥락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첫째, 한국사회는 다민족(다인종)․다문화․다종교사회로 변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민족주의적 시각, 특히 단일인종중심의 민족주의적 시각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 점에서 민중교회운동이 다문화사회와 이주자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한국사회는 후기공산주의시대(the age of post-Communism)를 맞이하고 있다. 물론 북한 등 몇몇 공식적인 공산국가가 존재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언은 기정사실이다. 이것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시각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가령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설립 이유로 시대적 변화를 내세우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10년사>>에 의하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한국교회의 전 교단을 하나로 묶어서 정부나 사회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자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공산권이 무너지고 있는 마당에 하루속히 하나의 연합체를 조직하여 남북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북한 선교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데에도 뜻을 모았다.” 또한 “공산권이 무너지면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KNCC 같은 단체는 필요 없게 될 날이 올 것을 예측하고 전 교회 및 기관을 하나로 만들자는 데는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이론의 여지가 있겠으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주장을 요약하면, 결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새로운 지도력, 세계정세의 변화, KNCC의 투쟁적 성격 등이 새로운 토착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사회는 선진국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이 고령화 사회가 되는 등 인구구성이 바뀔 뿐 아니라, 민중의 얼굴이 바뀌고 있다. 다시 말해, 민중의 얼굴이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바뀌는 격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기존의 민주화운동 및 민중운동의 시각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가령, 다른 발제에서 다루고 있지만, 평화운동은 생명운동과 연결된다. 그러나 평화운동과 생명운동이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예로, JPIC(Justice, Peace, and the Integration of Creation,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선진국은 창조질서의 보전과 평화를 강조한 반면, 후진국은 정의와 개발을 강조한 상반된 입장을 노정한 바 있다. 한국이 선진국대열에 동참하는 과도기에 있는데, 한국이 스스로를 서구선진국과 동일시하느냐, 비서구중후진국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한국교회의 과제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평화담론과 평화사역의 과제에 대하여 제시하기 전에, 이전의 평화담론을 잠시 회고해보자. 가령, 오 충일은 “평화를 위해 한국 교회가 해야 할 과제들”에 대하여 5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1) 먼저 한국의 교회는 성서적 신앙에 입각하여 평화의 신앙, 평화의 신학을 정립하여야 한다. 2) 교회는 평화교육을 해야 한다. 3) 교회는 먼저 하나 되어야 한다. 4) 모든 기독교운동은 평화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민주화운동, 민중운동, 민족운동 등) 5) 평화의 날, 평화기금, 평화상의 제정이다. 오 충일의 주장은 오늘날도 시의적절하다. 그 말은 25년 전에 제시된 과제가 여전히 수행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상의 5가지 과제를 계속적으로 추진함과 동시에, 현시점에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평화운동, 보다 광범위하게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과 홍보가 필요하다. 가령, 세계교회협의회는 용공주의로 거듭 매도되어왔다.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가장 먼저 한국전쟁을 문제 삼았던 국제기관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토론토 선언(The Toronto Statement)”을 통하여 침략행위를 정죄하였다. 이 선언문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계교회협의회의 의장이었던 중국대표가 극적으로 사임한 바 있었고, “후에 세계교회협의회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고 공격받았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당시 세계교회협의회는 용공기관이 아니라 반공기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운동이나 기관에 대한 꼬리표를 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극복하기 위하여 교육과 홍보가 필요하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20세기 후반의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 특히 개신교 에큐메니칼 교단이 모두 참여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 교회 분열로 인하여, 그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과 성공회는 교회 내적으로는 다양한 입장이 있더라도 교회 외적으로는 단일한 이미지를 줌으로써,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김 수환 추기경이 서거 후 민주화 운동의 대표자로 부각되고, 한국사회의 존경받는 지도자로 부상한 사실은 두 가지 점을 시사한다. 하나는 한국사회가 한국교회에 바라는 요구 가운데, 교회의 건전한 사회참여, 혹은 정의로운 평화운동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의 비정치성이란 주장을 교회 내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적극적인 홍보를 통하여 평화담론이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민주화운동 및 통일운동과 그 운동들에 기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고, 이에 대하여 한국사회 및 한국교회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홍보 및 교육 등이 요청된다.

둘째, 한국교회의 예언 기능의 회복이 필요하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한국교회의 평화담론의 예언성과 객관성이 담보된다. 왜냐하면, 거듭 이야기하듯이, 정의와 평화는 함께 가기 때문이다. 즉 “정의가 없는 평화는 박제된 거짓 평화이다.” 한국교회는 오늘날 좌우파 모두 매우 정치화된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대항적 예언도 필요하지만, 자파에 대한 공감적 예언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것은 불필요한 정치대립을 피하면서도, 각 그룹의 건전성을 유지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회개혁운동은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 등 비기독교운동이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이러한 비기독교 사회개혁운동에 기독교적인 평화담론을 제시할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 기독교의 새롭고 설득력 있는  평화담론을 비기독교운동에 지속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한국에서 최근 들어 평화주의 운동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과거 함 석헌 등 평화주의자가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국가안보 논리의 입장에서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이 운동은 지지받지 못했다. 교회도 전반적으로 평화주의보다는 의로운 전쟁 논리를 수용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평화주의 운동이 과거와 다른 점은, 퀘이커파나 여호와의 증인 등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당사자뿐 아니라, 다른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에 공감대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령 김 두식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예민한 문제를 들고, 평화주의에 대한 일반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한국교회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기존에 평화담론의 거의 유일한 담지자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제는 다변화되는 평화담론의 지지자로서, 중개자로서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넷째,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평화담론과 평화사역을 위한 시의적절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원 일한이 반공주의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을 참고할 만하다.

우리가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경제만 혹은 정치만 혹은 국가안보만 혹은 종교만 관심을 갖는 반공주의는 이러한 분야 가운데 한 가지만 관심을 갖는 공산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악한 사람이 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사실, ‘반(anti)’이란 매우 약하고, 방어적이고,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태도이며,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강한 ‘친(pro)’적인 태도이다...(중략)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최선의 내부적인 방어는 강력한 민주정부, 즉 정직하게 운영되고, 모든 국민들의 복지를 우선시하고, 비판과 수많은 다양한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는 민주정부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반공주의자가 되는 것 이상으로, 친민주적, 친사업적, 친자유적(pro-democratic, pro-enterprise, pro-freedom)이 되어야 한다.

즉 정의로운 평화를 주장하는 평화담론에서 소극적인 비판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제는 보다 구체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 내의 다양한 사회선교 및 문화선교기관의 평화담론의 노력들을 수렴하며 지원하며 소통케 하는 역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이런 노력은 지역적으로 나아가 세계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과거 한국교회가 중진국일 때, 주로 아시아교회와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아시아교회와의 연대는 물론, 세계화의 관점에서 한국교회와의 연대를 유의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세계선교를 통하여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세계선교를 평화운동과 접목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 가운데 평화운동, 특히 민주화운동에 참여로 인해 추방당했던 전례가 있다. 물론 한국선교사에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는 의문이다. 신학적 기여 외에도, 한국이 경제적 능력에 비하여 국가인지도에서 국제적인 영향력이 미흡하기에, 과거 서구교회가 국가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평화운동에 참여한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 평화운동의 다변화와 저변화가 필요하다. 가령 기독교영성가로 잘 알려진 헨리 나웬(Henri Nouwen)은 다양한 평화집회에 참석한 바 있다. 민권운동, 반핵운동, 반전운동 등에 꾸준히 참여하였다. 헨리 나웬과 같은 인물에 대한 새로운 소개를 통하여, 영성과 평화운동의 접목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견 기존의 전투적 평화운동과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나 평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기관들의 연대를 통하여 종합적인 평화운동을 보여주고 전개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들을 통하여 평화운동이 기독교 일부의 사역이 아니라, 기독교 전반과 관련된 운동이며, 평화의 영성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영성이라는 것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하여 기독교 각계가 평화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관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또한 교회는 단순히 평화운동가가 아니라, 평화의 영성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기관의 면모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평화적 평화운동을 지역교회 차원에서 실천하고 교육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각 회원교회와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진행하는 폭력 극복 관련 프로그램이 대부분 지역교회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것이 현실인데, 이러한 프로그램의 실제적인 보급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결국 교회가 평화의 영성을 체질화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일곱째, 평화담론과 평화운동은 역사에 대한 재해석 혹은 역사의 화해 없이 완성될 수 없다. 특히 한국의 평화운동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분열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위한 역사가 필요하다. 베르너 우스토프(Werner Ustorf)가 선교역사의 맥락에서 주장하였지만, 평화담론에도 적절한 주장이 있다. “기억술(기억을 보전하며 창조하는 기술)의 상이한 방식이 존재하지만, 중요한 것은 타자의 기억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화담론이 또 다른 거짓 평화가 되지 않으려면,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방의 목소리도 들어주는 역사를 수용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각자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역사가 아닌 나의 잘못을 고백하는 역사를 쓰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역사가 새로운 공통된 역사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의 화해는 화해의 역사로 이어져야 한다. 특히 20세기말 첨예한 갈등을 경험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유고슬라비아(후에 크로아티아)에서 화해에 관한 뛰어난 저술들이 나왔다는 사실은 한국의 미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지 않는 한, 정 두희가 남북한 역사학에 대하여 결론지은 것을 원용한다면, 갈등의 양 당사자는 “‘역사’를 공유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만을 공유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III. 결 론

본 논문은 평화담론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지 않았다. 본 논문은 다만 왜 한국교회에서 평화담론과 평화사역이 활성화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였다. 이를 위하여 평화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정체성, 소통, 과제들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교회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및 전쟁, 민주주의라는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회적 주제를 직면하면서, 어떻게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또한 한국교회가 평화운동에 헌신하면서도, 어떻게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본 논문은 평화운동의 발전과 지속을 위하여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할지를 살펴보았다.

한국교회는 평화운동의 단순한 운동가가 아니라, 평화의 영성을 지닌 하나님의 기관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화평케 하는 자로서,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하고 체득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를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그 길을 가셔서 평화를 이루셨듯이, 오늘 한국교회는 동일한 소명, 동일한 운명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평화운동의 관점에서 다시 이해하고 전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고난의 역사를 지녔다. 그러나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한국은 놀라운 역사적 복원력을 보여 왔다는 것이다. 가령, 1910년의 한일강제병합이 있은 지 10년 뒤인 1919년 한국은 3.1운동을 일으켰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운명에 확실히 동참하여 민족교회의 면모를 과시하였고, 이런 현상을 애덤스(Daniel Adams)는 한국교회의 교회성장의 패러다임이 교회론에서 민족주의로 바뀌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곧 평화운동이 교회성장을 가져왔다는 해석이다. 또한 1950년의 한국전쟁이 있은 지 10년 뒤인 1960년 한국은 사월혁명을 일으켰다. 한국교회는 비록 해방 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특혜를 누리며, 한편으로는 어용기독교의 모습을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운동에 소홀하였지만, 이후 한국기독교의 일부나마,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에 투신함으로써 그 빚을 어느 정도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당시 한국교회는 교회성장과 평화운동을 별개로 전개할 수밖에 없었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당면한 경제적 근대화와 사회적 근대화에 모두 동참한 셈이었다. 1979년과 1980년 연이은 민족적 혼란은 약 10년 뒤인 1987년 6월 직접민주주의로 환원되는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1997년 IMF사태라는 초유의 경제적 위기에 봉착했지만, 오늘날 한국은 완전히 그 위기로부터 회복하여 선진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이제 한국은 고도 성장을 이룬 복지국가가 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국내적으로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여 새로운 평화운동을 전개해야 하고, 국외적으로 여전히 다양한 고난에 빠진 나라들의 평화운동, 특히 그곳의 민중들을 위한 평화운동의 책임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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