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규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
박형규 목사(남북평화재단 이사장)가 87년 인생을 500쪽 가까운 책으로 펴냈다. 신홍범 선생이 정리한 박형규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창비)가 나왔다. 박 목사가 구술한 것을 신 선생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해서, 박 목사가 직접 쓴 회고록에 가깝다.
책에는 4.19가 발발한 1960년부터 1992년 서울제일교회를 떠나기까지 30여년이 중점적으로 기록돼있다. 민주화 운동의 살아있는 증인답게, 어떤 페이지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한다. 그때로부터 강산이 수번이나 변했을 시간이 흐른 지금, 박 목사의 고백은 “사랑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사랑의 온화한 마음을 가지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의 한 식당에서 결혼주례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갑자기 들려온 총성을 따라가보니, 학생들이 총에 맞아 밀려나오고 있었고 피를 흘리는 학생도 보였다. 그때 그의 마음은 ‘진노’였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고 그날 종일 물결같은 군중 속에 밀려다녔다.
많은 눈물을 쏟았던 그날 이후로 그는 평탄한 목회자의 길을 버리고 운동의 일선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4. 19 학생혁명과 마주쳤을 때 한국의 교회가 죽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교회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말했다. 공덕교회 담임목사 되는 것을 거부하고 평신도운동, 기독학생운동, 기독언론운동 등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교회갱신운동을 전개했고, 학생, 지식인들의 각성만으로는 교회갱신이 어렵다고 판단해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들과도 연대하려 노력했다.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순간마다 목숨을 걸고 참여했다.
범인(凡人)은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일들을 하게 한 힘은 ‘그리스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려 했다…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행위는, 개인 영혼의 구원을 넘어 사회적인 구원과 역사적인 구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은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과 교회를 박해했다”고 그는 담담하게 회고했다. 그리곤 뜨거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이런 고백을 이어갔다. “박해 속에서 불우한 이웃의 고통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더 많이 깨닫게 되었으며, 시련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이 진리라는 것을, 사랑처럼 존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더 많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그의 마음에 점화시켰던 공분(公憤)은 결국 그것이 지닌 뜨거움과 합하여, 더 크고 치열한 사랑으로 변모한 셈이다.
목사인 그는 사랑의 반경을 사회적 약자들에게만 에우지 않았다. 돌아보니 “한때 우리를 길거리로 내몬 형제자매들도 사실은 우리와 똑같은 폭력악신의 희생자”였는 것이다. 이 ‘형제자매들’이란 그가 시무하던 서울제일교회의 일부 교인들로서, 이들은 한때 보안사령부가 심어놓은 덫에 걸려 같은 교회 교인들을 폭행하기까지 하며 교회를 분열시켰다. 박 목사는 “그들의 신앙은 보수적이었고,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힘있는 자들이 악을 행할 때 거기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할 수 없었던 것이다”고 동정하며,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보살펴주었던가 되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한 시대의 단면을 생생하게 복원해낸 이번 책은, 아직도 민주화의 도상을 가고 있는 한국사회에 살아있는 교과서가 됨직하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역시 살아있는 신앙이 뭔지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최고의 ‘자기계발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책 목차
책 머리에 - 박형규
추천사 - 함세웅
1 나를 키운 기독교 가정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 유치원과 초등학교도 기독교 계통으로 / 일본의 오오사까로 / "천황 사진에 절할 바엔 차라리 죽겠습니다" / 제2의 고향 진영에서 겪은 소작료 충격 / 결혼에 얽힌 이야기들 / 일제로부터 받은 모진 고문 / 해방후의 사회적.사상적 혼란을 겪으며 / 부산대학 철학과에 입학하다 / 두가지 극단 사이에서 고민하며 / 군속이 되어 유엔군사령부로 / 문익환 목사와의 첫 만남 / 되찾은 신앙, 새로운 결단
2 신학을 찾아서
토오꼬오신학대학 4학년에 편입하다 / 신학사상을 찾아서 / 윤창섭 형과의 우정 / 강원룡, 김관석 목사와의 첫 만남 / 귀국 후 공덕교회 전도사로 / 내 삶의 진로를 바꾸어놓은 4.19 / 유니온신학교로 유학길에 오르다 / 유니온에서 만난 신학자들 / 본회퍼,니묄러,그리고 씨몬느 베이유 / 유니온신학교 시절의 추억
3 도시빈민 속으로
한일굴욕외교 반대운동 / 교회갱신운동에 뛰어들다 / 한국기독학생회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발족 / 김관석 목사를 NCCK의 총무로 / "기독교사상"의 주간이 되다 / 예 할 것은 예,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 / 김동리 선생과의 찬반 토론 / 도시빈민선교를 시작하다 / 교회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선교로 / 주민조직 이론의 선구자 알린스키 / 기독교방송의 상무가 되다 / 전태일의 죽음이 준 충격 /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방송에서 발언할 기회를 주다 / 언론을 향한 중앙정보부의 탄압 / CBS를 사직하다 /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만들다 / 지학순 주교의 용기와 침묵시위 / 갈 곳 없는 방황 속에 피어난 우정 /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이웃사랑도 할 수 없다 / 서울제일교회 임직식에서 흘린 눈물
4 유신체제와의 대결
유신체제와 민주주의의 죽음 / 오르지 않는 횃불-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 내란예비음모라니!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 / "성경과 찬송가로 내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 유신체제에 대한 계속되는 도전 /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다 / "금잔디다방이라면 아시겠습니까?" / 학생들을 공산주의로 몰아가다 / 미친 권력의 무더기 사형선고 / 항소를 포기하고 영등포교도소로 / 나가면 더 좋고, 못 나가도 좋고 / "젊은이들의 호소를 저버리지 맙시다" / 일본의 크리스천들, "뉴욕타임즈"에 전면광고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NCCK 인권위원회의 탄생 / 다시 교회로 돌아오다
5 민주화운동의 수난
민중교회의 탄생 / 민중신학의 탄생 /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선교자금 사건 / 점점 힘을 잃어가는 유신정권 / 목사가 감옥 가는 것은 당연한 일 / 실패한 '빨갱이 만들기' 시도 / "목사님, 그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마십시오" / "신앙에 따른 종교활동은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과의 만남 / 얌전했던 아내가 민주투사로 변하다 / 기장 청년회 전주시위 사건 / 종말을 향해 치달은 유신체제 / 박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듣다
6 민주화를 또다시 막아선 신군부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안타까운 두 김씨의 분열 / 이국땅에서 들은 광주민주항쟁 / 일본인 벗들의 눈물겨운 도움 /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 민주화운동을 도운 국제네트워크 / "광주민중항쟁을 선동했다던데..." / 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맡다 / NCCK 인권위원장이 되다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목숨을 건 단식 /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생명 / "대통령에게 망명을 권해도 되겠습니까?"
7 아직도 봄은 오지 않았다
"박형규를 서울제일교회에서 추방하라" / 전대미문의 주일예배 방해 / 60여 시간의 감금과 살해위협 / 백주에 테러를 당하다 / 길거리로 쫓겨난 서울제일교회 / 노상예배를 시작하다 / 서진룸쌀롱 살인사건과 서울제일교회 / 폭력에 맞서는 십자가 행진 / 패배감이 기쁨으로 변하는 신비 /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 예배장소이자 민주화운동의 터전 / 폭력을 이기는 비폭력 / 6월항쟁의 감동 / 또다시 실패한 대선 후보단일화 / 길 위의 예배를 끝내다 / 서울제일교회를 떠나다 /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 / 그후의 박형규 목사
회고담을 정리하고 나서 - 신홍범
영문 약어 / 참고문헌 / 수주 박형규 목사 연보 / 인명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