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65:17-20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21:1-5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게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아멘.
마태복음서 25:1-13
“그런데,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하였다. 신랑이 늦어지니,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제 등불을 손질하였다.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을 하였다.‘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신랑이 대답하기를‘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하였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멘.
설교문
찬양대단히 고맙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에 주신 말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 일서의 말씀입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원하는 것이 새 하늘 새 땅입니다. 그리고 새 사람입니다. 새 역사, 다 그걸 바라시지요. 새 것은 반드시 오는데 옛 것이 물러가야 새 것이 옵니다.
1945년 5월 4일은, 세계 역사상 유럽의 경우 세계 2차 대전이 끝나던 날입니다. 그 날 공식적으로 나치가 항복을 했습니다. 동양의 경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1945년 5월 4일에는 유럽이, 8월 15일에는 동양, 한국, 중국, 여기서 전쟁이 끝났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역사기록 중에서 5월 4일과 8월 15일은 굉장히 중요한 날입니다. 역사적으로 한 사건이 시작이 되었고 옛날 사건이 묻혔고 새 사건이 생겼습니다.
오늘 말씀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새 역사를 만들겠다. 5월 4일은 옛날 역사의 끝이고 새 역사의 시작이니라. 그런 뜻이겠죠. 이해가 되지요? 8월 15일은 옛날 역사의 끝이고, 새 역사의 시작입니다. 새 역사가 시작된 그날 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36년 동안 진실로 독립된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대했습니다. 그 날이 언젠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5월 4일 이전까지 새 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새 날은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의 시간 계산에 맞지 않는, 연대기적으로 기술해봐도 안 되는 그 날을 기다려왔습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으나 우리에게 언젠가는 주시겠다며 약속하신 하나님이 세우신 그 날, 그 날을 5월 4일 이전에, 8월 15일 이전에 살던 사람들은 그날을 역사라고 하지 않고 미래라 했고, 그 미래를 신학적으로 말하면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뜻에는 지긋지긋한 옛 역사가 끝나고 새 날의 시작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옛날 것이 끝나는 것이 종말이고 새 것이 시작하는 것이 종말입니다. 종말에 두 뜻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 우리는 새 역사를 위해서 무진 노력하고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제가 5월 4일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5월 4일에 전쟁의 역사가 끝나고,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한 일 중에 역사청산작업이 있었습니다. 뉘른베르크라는 도시에 연합군이 와서 전범재판소를 세우고, 히틀러 치하에서 무수하게 사람을 죽였던 압살, 부정에 대해서 책임자를 불러다가 법정에서 심판을 했습니다.
그 얘기를 다 드릴 수는 없지만, 당시 피고로 나왔던 사람들의 증언 중에 이런 문구가 나왔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1945년 5월 4일에, 나치가 망하고 전쟁이 끝나고, 새 날이 올 줄 알았던들 자기들이 어떻게 유태인 학살에 가담했겠습니까? 몰랐다는 얘기지요. 이렇게 짧게 부정한 역사가 끝나리라는 것을 상상도 안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옳은 줄 알고 그냥 강요되어서 그냥 하다보니까 부당한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종말이 올 줄 알았던들, 우리 역사 시간표 계산에 그 날이 계산에 들어있었던들, 누가 비극적인 일에 가담했겠습니까? 그 날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역사 계산에 맞지 않습니다.
1910년에서 45년까지 우리도 일본에 무수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고난이 급격하게 쌓이면서 그렇게 훌륭했던 우리 선조들이 소위 민족을 배반하고 친일파가 되고 일본에 승복하고 굴욕하는 치욕의 역사가 막판에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리라는 것을 1941년, 1938년에 알았던들 신사참배에 그렇게 대량적으로 가담했겠습니까? 친일하고픈 지도자들이 그렇게 나왔겠습니까? 너무나 몰랐고 계산할 수도 없었고 너무 힘들어서, 그러나 민족이 살아야한다는 충정에 아마 친일 대열에 개입했었을 것입니다.
언제 우리한테 종말이 올까를 안다면 우리 삶의 계획은 전혀 달라질 겁니다. 미안하지만 모릅니다. 1945년 5월 4일을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건, 곧 ‘히스토리컬 팩트’라고 기록합니다. 역사를 기록하지만 그 전 사람들은 그것이 역사적 사실일지 아닐지 전혀 예감이 없었습니다. 계산에 맞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지나고 나서야 우리가 이런 얘기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산술적 계산으로, 시간 계산으로는 맞지 않는 사건, 옛 것이 물러가고 새 것이 오는 사건을 기록한 시점, 그 시간대를 뭐라고 하면 좋습니까? 우리 신학에서 보면, 그냥 1월부터 시작되어서 12월에 마치는 늘 예상하고 계산될 수 있는 역사를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대라고 이름합니다. 보통 연대기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고 우리의 계산을 뛰어넘는, 예측할 수 없는, 그러나 세계역사와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사건이 발생해서 종말이 나고 새 것이 시작되는 사건이, 우리의 관할을 벗어나는 사건이 있는 그런 시간대를 카이로스(kairos)적 시간대라 이름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가 원하실 때 역사하시니까 우리의 계산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시간, 심판하시는 시간, 우리의 계산에 맞지 않는 그 시간의 사건, 그 사건 속의 시간대, 그것을 카이로스라 이름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오면 세상은 끝나고 하나님 나라가 새로 시작될 것이라고. 그 시점은 우리 계산으로 들어나는 크로노스적 시간이 아니고, 1945년, 2008년이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시간대, 그 시간대에 하나님은 자기 방식의 시간대에 자기 방식대로 우리한테 역사를 해 주십니다. 카이로스라는 시간대를 우리가 역사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경제도 발전시켰고 기술도 발전시켰고 많은 것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못하는 나라들한테 또는 그런 사회에 의술도 전하고 기술도 전하고 학문도 전합니다.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노우하우(know-how),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노하우는 많이 축적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정말 인류의 역사가, 어떤 나라의 운명이, 이 세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너무 힘들게 만들고, 타락하고 있다는 경향성은 알지만 언제 구체적으로 종말이 올지, 새로운 역사가 언제 올지 그건 잘 모릅니다.
노하우는 살아가면서 만드는 역사적 실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올 중요한 노우휀(know-when)도 아십니까? 종말이 임한다는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요. 노우휀은 모르고 노우하우만 압니다. 좀 겸손하게 노휀은 모르겠습니다. 누가 이 시간대를 주관하는지 아십니까? 노후(know-who). 하나님 앞에 우리는 당신이 이루시는 시간, 심판도 하시고 은혜도 주시고 용서도 하시고 새로움을 창조하시는 그 시간대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뭡니까? 주님의 의지에 믿고 맡기겠습니다라는 고백일 뿐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비유를 들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들었는데, 비유에 보면 이스라엘 전통에 따라서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 댁에 아침에 옵니다. 와서 결혼예식도 하고, 잔치도 베풀고, 인사도 하고, 폐백도 하고, 다하고 나서 저녁때 어두컴컴하면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신부 집에 신랑이 올 때 신부를 대신해서 맞아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부 측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성경본문에는 처녀들이라고 했습니다. 처녀는 몇 명이냐고 하면, 장례식 때 동반하는 수, 결혼식 때 동반하는 수, 그리고 교회가 회당에 설립될 때 동반하는 최저 인원수가 전부 10명입니다. 그래서 10명이 신부 댁에 있으면서 신랑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랑이 적당한 시기에, 계산된 시간에 오면 좋은데,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밤에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밤에 올지도 모르니 등불을 준비하자. 열 명의 처녀들이 등불하고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막상 밤에 왔는데 너무 기다리다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잠들어서 깨어보니 열 처녀가 나와서 신랑을 맞이하긴 했는데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신랑 집으로 갈 수 있었고 등불에 기름이 있어서 불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다섯 처녀는 등불은 있는데 기름이 없어서 불을 못 붙이고 신랑한테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 틈새에 기름 사러 갔다 왔더니 신랑은 떠났고, 신랑집에 늦게 갔더니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나는 너희들이 누군지 모른다"는 신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심이 마치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등불이 뭡니까?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등불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역사도 등불입니다. 국가도 민족도 사회도 우리 자신도, 그리고 여기에 모인 모든 분이 다 등불입니다. 우리한테 중요한 건 뭡니까? 등불이 있다고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라고 합니까? 사람다워야 사람이라고 하는데, 등불이 있다고 생명체고, 등불만 있다고 역사입니까? 그게 아니라 등불은 불을 밝혀야 합니다.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불을 밝힐 원 자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걸 기름이라 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몸도 있고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사람이라면 우리 속에 혼이 있습니다. 정신이 있습니다. 도덕이 있고 윤리가 있습니다. 이 세계 역사에는 그냥 눈으로 보는 역사가 있는가 하면, 역사를 움직여 가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흐름이 있습니다. 이 흐름을 시대의 정신이다, 역사의 정신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오늘 성경말씀에 “영이라고 하여라. 그 힘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영이라고 하여라. 정신이라고 하여라. 그걸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여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과 육이 합해야 되는데 육이 움직여 가지만, 육을 움직여가는 가장 바탕에 있는 것은 영이요, 혼이요, 하나님의 입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말씀 전체의 핵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 때는 너희들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결정하신다고. 그날이 언제 올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그 날 올 때 맞이할 수 있는 영적인 힘, 도덕적인 힘, 살아있는 생명의 힘, 그것만 갖추고 있으면 언제면 어떠냐고. 예수님의 초점은 올 세계의 종말, 역사의 종말을 자꾸 계산한다고 힘들이지 마라.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언제 오든지 맞이할 만한 역량 계발함이 더 중요하다.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올 때를 종말이라 이름합니다. 종말을 여러분이 아무리 상상하셔도 계산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크로노스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그 날을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종말을 기대하고, 새로움을 기대하고, 새 예루살렘을 기대하고, 지금 고난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등불을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기름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태도가 중요합니다. 기름의 내용이 뭡니까? 성경말씀에는 그걸 "믿음"이라 이름합니다. 그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해서 서로 사랑을 펼쳐가는 "사랑"이라 이름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기름의 내용입니다.
인간은 뭡니까? 살아가는 역사 속에서 속에 있는 가장 귀한 인간성, 사랑이 있는 마음, 정신, 혼, 이것 없이 정신 빠진 인간들, 혼이 없는 역사, 도덕이 마비된 사회, 그건 예수님 보시기에 진정한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얼마나 얼굴을 닦든지 간에 얼굴 속에 들어있는 생명의 혼, 그걸 찾으면 언제 죽어도 언제 끝이 와도 당신들은 일어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을 찾으십시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종말은 이미 오늘 속에 있으니 "오늘에서 종말을 준비하고" 기름만 마련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세상이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 옮겨가도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종말에 관심 있는 여러분, 종말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 결정은 이미 역사 속에서 뿌리내리고 역사를 주도해가고 있습니다. 지금 기름만 준비하십시오. 이 역사를 올바른 역사로 만들어 가십시오.
예수께서 마지막 승천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름타고 가시면서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구름타고 올라가는 이 모습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평생에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시간대 안에 예수님이 올 줄 알고 사실은 모두 탈세상적 종말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시집 장가도 가지 말자. 재산도 갖지 말자. 공부도 하지 말자. 오직 하늘만 바라보고 경건하게 살자. 그래서 초월적, 내세지향적 경건운동이 초대교회 때 굉장히 떴습니다.
한 세대 지났습니다. 두 세대 지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습니다. "너희들이 죽기 전에",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 시대가 가기 전에", 도대체 "이 시대"가 뭘까 하고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시대"는 한 평생 80년, 두 평생 160년, 그게 아니고요, 하나님이 정하시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의미했습니다.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크로노스적 시간이 아니고, 카이로스적 시간을 의미했는데, 그 뒤로 오신다던 예수님께서는 안 오시고 그 분의 몸인 "교회"가 생겼읍니다. 기다려야죠, 선교해야죠, 이런 역사 속에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하나님의 재림이 유보됐다. 하나님의 재림이 연기됐다. 그렇게 우리가 표현합니다.
중요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 끝 날이 역사 속에 들어와서 역사를 움직여가는 힘이 되었다. 언제까지 역사를 움직이고 역사를 끝장낼지, 그것은 우리 속에 들어 온 종말이라 이름하는 하나님의 시간대가 결정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결정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희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우리를 움직이는 힘, 그 힘이 종말적 힘입니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 힘이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를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준비만 하시면 됩니다. 불 켜라고 할 때 켜면 됩니다. 불이 켜지면 옛날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새 것이 올 겁니다. 여러분 불이 켜지면 옛날 것 기억지도 말랍니다. 사라져 버리게 하겠답니다. 그 대신 새 날을 맞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겠답니다. 새 역사로 변화시켜 주겠답니다. 어떻게 변화하면 됩니까?
최근에 여러분 혹시 언론보도를 통해서 접하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기독교 윤리 실천운동 본부하고 CBS, 국민일보, 몇 군데가 합쳐서 리서치를 했는데, 그 중에 재밌는 사실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믿는 사람 말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문을 던졌습니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카톨릭입니다 35.2%’, ‘불교입니다 31.1%’, ‘개신교는입니다 18%’. 그렇다면 “가장 호감 있는 종교는 어딥니까?” 하고 물었더니 불교, 가톨릭, 개신교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톨릭 신자보고 “당신들은 어떤 교파, 종교가 가장 호감 있으십니까?” 당연히 가톨릭이겠지요. 85%정도가 가톨릭임을 좋아하고, 개신교는 1.1%에 불과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을 되게 싫어하는구나, 하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반면에 개신교 신도들은 가톨릭을 11.1%정도 좋아하고, 10배입니다. 자기 종교는 80%가 좋아했습니다. 불교를 빠뜨렸습니다. 불교신자보고 어느 종교가 좋냐고 하니까 불교신자들 말이 64.9%가 불교가 제일 좋대요. 가톨릭은 24.5%로 꽤 높습니다. 개신교는 1.7% 정도입니다.
하나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가톨릭신자도 불교신자도 개신교는 싫답니다. 개신교 신자들만 자기들이 좋대요. 개신교가 좋대요. 이거는 억지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데 오늘 우리 교회 상황을 보면서 개신교가 가진 기름의 양은 얼마일까요? 말라비틀어졌습니다. 1.1%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천주교 처녀한테 가서 신랑이 오시니 기름 좀 채우자고 하면 신자들이 그럴 것입니다. 장사한테 가봐라. 가는 사이에 문은 닫힐 것이다. 불교 가서 꾸어 올 수도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물었더니 통계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교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이 일치를 않기 때문에. 두 번째, 타종교에 대해서 관용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세 번째, 재정 운영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 가지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 꿈의 나라, 역사 속에 있는데요, 우리 역사에 들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까 우리는 지금 그 나라를 역사 속에서 요리 좀 하십시다. 잘못된 건 밝히고요, 새 것 갖다 놓고 우리 스스로를 새롭게, 스스로를 새롭게,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아름답게, 그 말을 오늘 성경말씀에는 “새 창조” 라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이 말하는 창조는,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 그런 대립개념 속의 창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창조는 첫 시작일 뿐 창조는 계속됩니다. 지금도 계속됩니다. 한 사건을 통해서 새 역사가 이루어지면, 한 사건을 통해서 새 사람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새 창조라고 불렀고, 예전 것은 기억하지 않고 새 사람이 되어라. 새 역사를 이루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냥 웃고 지나갑시다. 어느 목사님한테 들었는데요, 구역장님들은 아시지요. 제가 말씀드렸으니까. 경기도 광주에서 이 목사님이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사가 앞에다가 불상을 잘 해 놓고 다녔답니다. 그래서 ‘아, 굉장히 기도하고 다니나보다.’ 하고 물었대요. “절에 자주 가십니까?”, “아휴, 한 번도 안가요.”, “근데 왜 불상이십니까?”, “제가 택시 몰면요, 뒤에 앉으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총력전도인지 뭔지 해서 그렇게 예수 믿으라고 하고 귀찮게 하길래 불상 달았더니 안 그럽디다.” 불교신자들 가운데 가끔 시주 안 주려고 나 교회 다녀요, 그런 사람들이 있을텐데, 택시기사가 불상을 갖다놔야 안심할 수 있고 좋다는 것. 농담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드는 나라가 아니고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크로노스적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계산이 아니고 언제 어떻게 올 지는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우리는 오늘 과거 것을 깨고 새 것을 마련하는 그런 역사적 결단만 하면 됩니다.
잠언 16:1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계획을 만듭니다. 그러나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라고. 계획 속에 하나님의 결정을 정신사적으로, 속으로, 우리의 가장 핵심을 뚫는 방식으로, 현실에 임하시면 여러분은 새로운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결단 속에 섭리를 내리셔서 인간이 한 계획대로는 아니지만 하나님 방식대로 역사를 바꾸어 놓습니다. 결단하시면 됩니다. 다음 주일에, 대림절에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데 우리 한번 새로운 결단합시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를 바꿔주옵소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주옵소서. 그리고 과거는 잊어주옵소서. 새 역사를 만드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합시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