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 성전 재건인가? 해체인가?

조헌정 목사 ㅣ 2008년 11월 23

성경본문
학개 1:1-11: 요한 2:13-22

 

설교문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는 올해 4월 둘째주일부터 <오늘의 시대와 예언자정신>이란 제목을 걸고 예언자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모스로 시작을 해서 하깨에 이르기까지 열 여섯명 전체를 살펴보았습니다. 중간 중간 절기설교나 현장평화예배, 평신도하늘뜻펴기, 부목사나 외부강사들의 하늘뜻펴기가 있어 8개월이 걸려 오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20년이 넘도록 거의 매주일 하늘뜻펴기를 해왔지만, 예언서만을 갖고 연속하여 하늘뜻펴기를 해본 것은 처음입니다. 오래전부터 한번은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70년대 초 박정희유신군사독재가 가장 악랄하던 시절 반정부운동에 선두에 섰던 김재준목사님을 필두로 한 한국신학대학의 교수님들의 예언자적인 하늘뜻펴기와 강의 그리고 저항운동을 보았던 학창시절부터 가졌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꿈을 30년도 훨씬 넘어 향린교회에 부임한지 6년 되는 해에 펼쳤는데 저 또한 많은 열정이 있었던 것 같고 교우 여러분들의 호응도 높았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저의 하늘뜻펴기를 듣는 교인들도 여럿 있고 목사님이 안식년을 떠난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는 저의 하늘뜻펴기를 갖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는데, 이번 예언자 연속 하늘뜻펴기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터넷 교우 가운데 한분은 제게 보낸 이메일에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30년 넘게 설교를 들어왔지만, 단편적으로 들어왔던 예언자들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듣게 되고 그리고 다른 목사님들은 전혀 다루지 않는 예언자들에 관한 설교를 듣게 되어 고맙다는 얘기도 전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위로를 중심으로 한 개인구원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남한의 교인들은 여기에 매우 익숙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는 개인구원보다는 사회 구원 곧 민족과 민중 그리고 세상과 우주를 폭넓게 다루고 있지만, 교인들은 목사님들에 의해 개인구원의 눈으로만 성서를 읽도록 훈련받아왔고 또 그렇게 젖어왔습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활동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것이 예수 믿는 일의 최종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가르친 교회들이 성장을 하니까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이런 비상식과 잘못들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진리의 주객전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성장은 알곡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성장을 하고 암도 성장을 합니다. 성장한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닌데도 사람들은 성장하는 것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천국믿음에 기초한 개인구원의 확신 대신 회개와 심판을 선포하며 민족구원과 평등과 해방이라는 사회적 구원을 외치는 예언자들의 말씀을 8개월에 걸쳐 연속으로 전한다는 것은 실상 향린교회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향린교우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경청하여 주시고 격려하여 주신 여러분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예언자의 현실과 오늘의 현실]

 


        그런데 본래 제가 이 예언서 연속 하늘뜻펴기를 향린교회에 부임 6년차부터 하겠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해야지 했던 마음속의 생각을 올해 실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늘의 시대적 상황이 저로 하여금 그렇게 내몰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적상황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활동했던 저 2천 7백여년전의 시대적 상황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자본주의와 시장경쟁주의라는 거창한 이름하에 가진 자들만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먹고사는 일이 중심이 되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러나 지금처럼 <전 국민 부자만들기>, <미국산 소고기 먹기>가 정권의 목표가 되었던 적도 없었고 <아파트평수 늘리기>와 <은퇴자금 마련하기>가 이 나라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유일한 목표인양 오도된 적도 없었습니다. 1년 전 이명박후보의 말에 모두가 현혹되어 지난 1년동안 백성 모두는 부자 되기에 위해 돌진했습니다. 구멍은 좁은데 모두가 한 구멍으로 머리통을 들이 대미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펀드투기로 쪽박을 찬 사람들이 그리도 많고, 강남에서 수백억대의 계판이 깨지면서 법적 소송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이 세계적인 추세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월스트리트저널 1면 한복판에 남한에서 펀드에 쪽박을 찬 투기꾼들과 경비원들사이에서 일어난 몸싸움을 큰 사진으로 실었습니다. 이건 무슨 말입니까?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의 어려움은 세계적 추세이긴 하지만, 가장 크게 얻어 막고 있는 나라가 남한이고 쪽박을 찬 개인이 제일 많은 나라가 남한입니다. 제일 큰 이유는 외국인들이 손쉽게 투자하고 그 단물을 쉽게 빼낼 수 있도록 모든 법규를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왜 환율이 유독 남한만이 치솟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외국투자가들의 장난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금 수십년동안 뼈 빠지게 벌어놓은 국가적 재산을 한꺼번에 몽땅 잃고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미국을 중심한 국제금융단에게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명박정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IMF나 하자고 하면서 자유무역을 외치며 법규를 더 풀겠다고 야단입니다. 아니 여러 번 제가 말하는데, 라이트급 권투선수가 아무런 제한 없이 헤비급 권투선수와 붙어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초반에 잽 몇 번을 날리겠지만, 결국 단 한방에 KO 되는 겁니다. 자유로운 투자와 무역을 위해 모든 법규를 풀겠다는 말은 외국 자본에 나라 전체를 팔아먹겠다는 말이고 백성 모두를 소작시키겠다는 말입니다.

 


        이명박내각, 소위 말하는 강부자 내각은 지금 제가 말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그런 식으로 투기를 해서 돈을 벌었거든요. 위장전입해서 아파트 투기하고 땅 투기하고 펀드해서 돈을 벌었거든요. 규제만 없었더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가자는 것입니다. 종부세폐지 하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0.7%의 소수 부자를 더 부자 되게 하면 그 사람들이 돈을 풀게 되어 경제가 돌아가고 그러면 서민들도 잘살게 된다 이런 논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자들이 더 많은 돈을 갖게 되면 난 이제 이만하면 되었다 생각하고 돈을 푸느냐 이겁니다. 천만에 만만의 말씀입니다. 부의 욕망에는 끝이 없습니다. 서민들은 돈이 생기면 그것이 곧장 생필품 소비로 연결되지만, 부자들은 돈이 많아지면 외국으로 빼내가지 여기다 두지 않습니다. 지금 달러 값이 마구 오르는데 누가 사는 것입니까? 부자들이 사지요. 왜 삽니까? 국내에 투자하려고 삽니까?

 


        2천 7백년 전 유대나라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왜 화가 났습니까? 아모스예언자가 왜 화가 났습니까? 소수의 부자들과 권력자들 때문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비를 피할 한 평의 지붕도 없는데, 부자들은 겨울별장에 여름별장에 상아로 장식한 고래등같은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3장 15절) 그래 사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기고 미투리 한 컬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넘기고 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다 짓이기고 가뜩이나 기를 못 펴는 사람을 길에서 밀쳐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습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실업자 무직자들, 특히 경기도 외곽 구석구석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실상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단속을 피해 도망을 다니다가 건물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살지만 기를 펼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아프카니스탄에서 남편은 전쟁으로 죽고 아이가 여섯이나 된 어머니가 먹을 것이 없어 두 아이를 백 불씩에 팔았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자식을 돈 백 불에 팔 수 밖에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이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활동했던 2천7백년 전 팔레스타인과 지금의 한반도는 단지 극심한 빈부격차의 경제상황만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남북분단이라는 민족분단의 상황 또한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경쟁하는 사이 남과 북의 백성들의 마음은 맹목적인 미움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저는 예언서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만큼 잘 이해할 수 있는 민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상황이 비슷한 나라는 많겠지만, 민족이 갈라서 있는 정치적 상황은 우리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깨서와 향린교회의 만남]

 


        오늘 예언자 연속 하늘뜻펴기 마지막 시간에 하깨를 하게 된 이유는 어떻게 하면 하깨를 한번 해보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까 하고 계속 미루었기 때문입니다. 하깨예언자는 딱 3개월 반을 활동하였는데, 활동의 주목적은 성전재건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교육관을 재건할 때, 하깨서의 본문 말씀으로 건축헌금을 작정했던 적은 있지만, 지금 향린교회가 당장 성전 건축을 해야 할 상황은 아닙니다. 이 지역이 재개발로 묶여 있으니 언젠가는 교회 이전을 해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신축이든 개축이든지를 해야 하겠지만, 요즘의 경제상황으로 보아 몇 년은 더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교회 건물이 오래되어서 보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당장 건축헌금을 해야 할 만큼 시급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서는 기본으로 되어 있는 감사헌금 십일조헌금 선교헌금마저도 여기서는 매우 조심스레 언급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많은 교인들이 이미 다른 교회에서 이런 일로 상처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지난 6년 가까이 있으면서 건축헌금은커녕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강조하는 하늘뜻펴기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고, 기껏 한다는 얘기가 공동관심사 시간을 통해 창문틀 교체나 성가대 의자, 에어컨 그리고 2주전에 20년 된 피아노 교체 얘기한 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그간 부목사 사택과 4층 보수를 위해 자발적으로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하신 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점에서 여러분은 매우 행복한 교인들입니다. 교회에 와서 헌금 스트레스 안 받고 예배 시간 늦게 와도 본당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이 성전을 드나들 때마다 이 교회 건물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쓴 신앙의 선배님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민족선교 사회선교를 지향하고 국악예배를 드리면서 예산의 4분지 일 이상을 외부선교에 드릴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 건물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그 힘을 구축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지금도 방이 없어 모임을 갖지 못한 신도회들이 많지만 현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고 언젠가는 성전건축을 위해 우리의 힘을 모아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오늘 하늘뜻펴기를 하는 저의 고민은 하깨서의 성전재건이라는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고 오늘의 시대적 정신으로 재해석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전을 단지 눈에 보이는 건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관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토전서 3장 16절에서 말한 대로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라는 말씀으로 오늘의 하깨 말씀을 연계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결론부문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진 본문 말씀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재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지 어언 70년이 지났습니다. 바빌론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은 유대백성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성전재건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그들은 성전 재건 이전에 먼저 자신들이 기거할 집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 비를 피하기 위해 지붕을 얹었습니다. 지붕을 얹고 보니 창문도 내야하고 구들도 들여야 합니다. 그냥 흙돌로 둘 수가 없어 벽지도 바릅니다. 살림살이도 장만해야 하고 가재도구도 장만해야 합니다. tv 냉장고 오븐 전기밥솥 등등 이정도면 다 되었다 생각하고 이제는 성전을 지어야지 하는데, TV 김치냉장고에 새로운 모델이 나오니 유행 따라 바꿔가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집 짓는 일이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집짓는 일이 끝났습니까? 자녀들 대학 보내는 것으로 자녀걱정 끝났습니까? 죽을 때까지 끝이 없는 게 집짓는 일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유대백성들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호화로운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 참다 참다 화가 난 야훼 하느님께서 하깨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어떻게 지내 왔는지 돌아보아라. 씨는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으며 아무리 벌어 들여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니더냐? 많이 거두려니 했지만, 거두고 보니 얼마나 되더냐? 집에 들여 온 것마저도 내가 날려 버리리라. 너희가 나의 성전 무너진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집만 짓느라고 바삐 돌아다닌 탓이다. 산에 가서 나무를 찍어다가 나의 성전을 지어라. 나는 그 집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리라.”

 


[시대정신의 회복]

 


        예루살렘 성전이 그냥 무너진 채로 있었다는 말은 하느님을 향한 예배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 백성들을 하나로 묶고 민족의 미래에 희망을 갖게 하는 시대정신은 무엇이어야 했을까요? 여러분이 백성의 지도자라면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개인의 행복과 성공 모두 부자되자고 부추길까요? 그건 끝이 없는 일일뿐더러 사실 구름잡기입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야훼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회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로부터 모세 엘리야 다윗 조상들의 야훼신앙을 회복하고 이 신앙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하나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성전재건이 가장 우선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하깨서에서 말하고 있는 성전재건은 단순히 무슨무슨 교회가 건물을 짓는다는 것과는 전연 상황이 다른 말입니다. 지금 하께 예언자에게 있어 예루살렘 성전재건은 백성 전체를 하나로 묶는 일이요 종교적 사건을 넘어선 시대정신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두 제 살기 바쁘다고 자기 집 짓는 일에 열중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교회 나오는 대신에 회사일과 집안일에 더 열중하라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삶에 활력이 생기고 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외부상황이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자주 모여 삶을 나누고 기도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적인 활동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 백성을 하나로 묶고 오늘의 시대정신을 회복하는 일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모두가 부자 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지금의 남한이 가져야 할 시대정신은 경제가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백성들을 분리시키고 경쟁시키고 소수의 거짓행복을 위해 다수의 불행을 자초할 따름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시대정신은 나눔과 섬김 그리고 청빈의 마음입니다.

 


        가진 자들부터 이웃을 생각하며 나눌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나라의 지도자인 대통령이 해야 할 일입니다. 경제수치 운운하는 얘기는 경제부처에 맡기고 대통령은 후보시절 약속한대로 얼마 되지도 않는 300억 재산 조건 없이 사회에 헌납하고 국민 모두를 하나로 묶어갈 수 있는 화합과 통합의 대승적 정치를 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따뜻해지며 하나가 됩니다. 그러려면 종부세를 폐지하는 쪽이 아닌 오히려 부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세율을 더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종부세라는 명칭 대신에 <이웃사랑나눔세금>이라고 명칭을 바꾸면 좋겠지요. 그러면 부자들도 사랑의 나눔을 통해 삶의 보람을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꼭 월급봉투가 두꺼워져야 우리 마음이 풍성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북한이 원수가 될 수도 없지만, 설사 원수라 하더라도 이를 품에 안는 거국적인 자세로 나아갈 때 남쪽 사람들의 마음 또한 훈훈해지고 풍성해질 것입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모든 사람들이 수입의 1%라도 나누자고 <북한동포사랑나눔세금>을 제안하면 어떨까요? 바로 이런 것이 오늘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시대정신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못할뿐더러 정반대입니다. 이명박정권은 겉으로는 경제부흥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임기가 많이 남아 있는 정치권력과 무관한 기관장들을 계속 몰아내고 자기 사람심기에 정신이 없으며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좌우이념투쟁을 끊임없이 벌리면서 언론 재갈물리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미워하는 동상을 넘어뜨리고자 밤에 가서 그 곁을 파들어 갔습니다. 계속 파 내려가면 동상이 어느 쪽으로 넘어지겠습니까? 보복과 반목 미움의 정치를 펴면 이는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순리를 쫓아야지 역리하면 안 됩니다.

 


        북한정부는 자신에게 경제적인 손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금강산은 물론이고 개성공단까지도 봉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명박정부가 자신들을 무시하고 이전에 이루었던 통일의 업적들을 다 무로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명박씨가 왜 그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것입니까? 그건 자신이 과거 CEO 하면서 명분이 아닌 이권에 따라서 이리갔다저리갔다 처신을 바꿔왔기 때문에 북한도 이권을 좇아 그러리라고 추측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북한을 몰라도 정말 모르는 것이고 사람을 몰라도 정말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의 지도자가 외쳐야 할 시대정신]

 

        제가 월요일 한국교회협의회 총회 통일세미나에 논평자로 참여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사 어느 경우에나 마찬가지이지만 남북대화에도 역지사지가 필요하다. 현재 막힐대로 막혀 있는 남북경색은 이명박정권의 615공동선언과 10.4정상회담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 기인하고 있다. 이명박정부는 삐라살포는 민간인에 의한 것이기에 자유국가에서 이를 통제하기 어렵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보았을 때는 평화로운 촛불행진을 경찰의 물대포와 곤봉을 동원해 억압한 사실과는 전연 앞뒤가 맞지 않는 해명이다. 수십만 시민들의 자유로운 목소리는 공권력으로 막으면서 기껏해야 수십명에 불과한 자유주의 총연맹을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의 삐라살포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관하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반미단체에서 미국에 그런 삐라를 뿌렸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때도 자유의 이름으로 방관할까요? 그리고 이들 기관들이 국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는 민간기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이 얘기를 북한을 다녀온 강기갑민노당대표께서 지난 수요일인가 하시더군요. 제가 먼저 말했으니 다행이지 잘못하면 이것도 북과 내통하고 북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여 국가보안법에 걸릴 뻔 했습니다.

 


        또 이명박대통령은 비공개 안보각료회의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북한 정권에 화가 나서 북에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였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된 얘기이며 유치한 논리입니까? 자신은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상대방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할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이제 오바마정권이 출범하면 곧 클린턴전대통령이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할 예정인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이명박정부는 그야말로 외톨이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3주전 북한을 방문할 때 김포공항에서 북한의 고려항공기를 이용했습니다. 아직 비행기가 활주로에 앉아 있을 때 스튜어스들이 노동신문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창문으로 보이는 밖은 분명 남한 땅인데 북한의 노동신문을 버젓이 읽는다는 사실이 무척 새삼스러웠습니다. 1면 사설에 ‘2012년을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시기’라고 하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캠프의 한국팀장을 맡고 있는 프랭크 자누치 또한 2009년에 워싱톤과 평양에 외교대표부를 설치하고 2010년에는 북미정상회담과 3자 또는 4자간 종전회담을 하고 2012년에는 북미수교와 종전선언 및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012년은 주체 100주년이 되는 해로 북한정권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해이지만, 오바마정권에 있어서도 재선이 있는 해로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북한이나 미국이 모두 무언가 어떤 정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해입니다. 게다가 2012년은 남한에서도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이것이 모두 우연은 아니라고 봅니다. 배후에 분명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습니다. 우리도 이 해를 잘 준비하여 남북통일을 향한 우리의 기도를 함께 묶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깨 예언자가 성전재건을 통해 모래알 같이 흩어진 백성들을 하나로 묶고 미래에 희망을 제시하였듯이 지금 이 나라의 이명박대통령이 높이 외쳐야 할 시대정신은 남북화해와 나눔의 정신입니다.


[예수시대에 필요한 정신/성전해체]

 

        그런데 하깨예언자에게 있어 성전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미래를 열어가는 시대정신이었지만, 같은 예루살렘 성전이 예수님 시대에 오면 이 성전은 백성들을 편 가르고 억압하는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의 본산지로 변합니다. 성전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의 613개의 세세한 항목으로 변질시켜 백성을 옭아매는 바리사이 율법주의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 율법은 세상을 선민과 이방인으로 구분합니다. 유대 백성을 의인과 죄인으로 나눕니다. 돈 있는 자는 구원받는 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구원받을 수가 없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은 분리됩니다.

 


        본래 야훼 하느님은 온 우주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광야에서는 이동하는 법궤를 따라 백성들 가운데 계신 분이셨고 예레미야가 외친 새 계약과 같이 백성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새겨진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성전 사제들은 이 야훼 하느님을 성전 안의 지성소 골방에 가두어 버리고는 백성을 통제하는 하나의 기제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성전에 와야 하고 양과 비둘기를 비롯한 제물을 가져와야 하고 그리고 성전세를 바쳐야만 합니다. 그리고 왔다하더라도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사제를 통해서만이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래 채찍을 들어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예루살렘 성전의 벽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유와 해방의 야훼 하느님을 본래의 모습으로 풀어놓으라는 명령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을 처음 지어 바친 솔로몬 왕조차 그 헌당 기도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자리잡으시기를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하느님 야훼여, 소인이 이곳을 바라보며 올리는 기도를 부디 들어주십시오. 소인과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할 때 부디 들어주십시오. 당신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열상 8:27-30절) 본래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한 장소로서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기도의 장소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백성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이 하느님이 거하시는 집이라고 하더니 급기야는 하느님을 골방에 가두고 나서부터는 인간이 하느님을 조정하는 불신앙과 부패와 억압의 본산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은 이 성전을 숙청하십니다. 그런데 세 개의 공관복음서가 성전숙청을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일에 일어난 예루살렘 권력집단에 대항하여 죽음을 자초한 하나의 클라이맥스 사건으로 보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이를 맨 처음에 두어 예수님의 오신 사역의 목적이 바로 이러한 성전의 지배 이데올로기 지배체제를 무너뜨리게 오신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흘 안에 세우는 몸]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의 부활의 몸으로서 성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율법과 성전제사였습니다. 인간의 제도가 아닌 위로부터 오는 힘에 의해서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 ‘이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유대인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8장 23절)

 


        제자들을 향해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한 말을 믿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14장 11, 12절)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깨달았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7장 12절) 여기서 하나가 되게 하여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끼리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예수께서 아버지가 하나인 것 같이 우리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까? 전자가 아닌 후자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들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명제가 얼마나 귀하고 명예롭고 거룩한 명제인지를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 황제의 아들과 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황제가 받는 명예를 다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잘 대접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황제를 대접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누구의 아들과 딸이라는 말은 사실 누구누구와 동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인간 스스로를 ‘하느님의 딸 혹은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였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아 내지 못하였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대로 하면 그 자는 제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외칩니다.(19장 7절) 그러면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뭐라고 불렀나요? 아브라함의 자식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직접관계가 아닌 간접관계를 통해서만이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었고, 감히 ‘야훼 하느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고 에이미]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나는 나다’라고 말하는 ‘에고 에이미’라는 말을 여러 번 발설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문이다.’ ‘에고 에이미’입니다. 예수를 잡기 위해 유다와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로마경비병들이 겟세마네동산으로 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누구를 찾느냐?’ 하자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자 ‘내가 그 사람이다’하고 나섭니다.(18장 5절) 여기서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희랍어성서로 보면 ‘에고 에이미’로 되어 있습니다. 이 ‘에고 에이미’라는 희랍어를 히브리어로 옮기면 무슨 단어가 되나요? ‘야훼!’입니다. 이는 곧 예수께서 ‘나는 야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을 하느님과 하나된 ‘야훼’라고 부르셨고 우리 또한 하느님과 하나가 될 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곧 우리 또한 ‘야훼’인 것입니다.

 


        사실 저야말로 오늘의 십자가에 처형당할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이것이 요한복음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처음 ‘성전을 허물어라 사흘 만에 내가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그 의미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시기 바랍니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다 때가 있습니다. 성전을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습니다. 하께 예언자는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가는 시대정신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을 분리시키고 백성들을 이간질시키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있어 성전은 무슨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이웃을 하나로 묶어가도록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분리하도록 하고 있습니까?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으로 자기 멋대로의 자유를 말함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나눔의 자유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허무시는 것은 진정한 성전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자유와 해방의 시대정신으로 회복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흘 안에 세우시겠다는 부활의 몸입니다. 이 사흘은 어떤 사흘입니까? 그건 죽음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손과 발을 묶기 위한 투쟁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흘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호적상의 길이가 어떠하든 우리는 모두 사흘을 사는 존재입니다. 이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살았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통해 그 부활의 몸에 접붙임을 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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