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명 : 에큐메니칼 공동수업-지구화시대의 에큐메니칼 신학
일시 : 2010년 5월 3일
주최 : NCCK 선교훈련원
발표 : 강성영 교수(한신대 신대원장)
자료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or.kr
들어가는 말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수백 종의 각종 TV 프로그램, 인터넷 콘텐츠, 광고, 영화, 음반, 라디오, 공연예술, 신문, 잡지, 게임, 복권, 전자상거래, 스포츠, 거리공연 등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자극하고 소비욕구를 분출시키는 것들이다. 이것은 오늘날 대중문화의 소비 중심적 성격을 나타낸다.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어느덧 상업적인 문화자본주의의 부산물에 의해 일상을 지배당하고 있다. 대중문화는 가히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대중적 욕망과 소비에 기초해 있는 상업적 소비문화라고 할 수 있는 대중문화가 지배하는 현상에 대해서 소비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나는 소비사회의 은밀한 신화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형이상학과 가치를 비판하고, 진정한 인간적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해서 신학과 대중문화 특히 ‘광고’와 대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1. 소비사회의 영성
: 계명이냐? 상품이냐?(Gebot oder Angebot?)
다소 막연한 개념인 “소비사회”(the consumer society)는 전근대적 유목 농경사회 이후 근대 산업사회를 거치며 발전한 고도 자본주의 또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산업사회를 거치며 대중의 소비욕구는 가파르게 상승하였고, 단순히 삶의 기본적 욕구를 넘어서 물질적 감각적 욕구의 충족을 무한히 갈망하는 사회가 되었다. 소비사회를 그 특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1. “소비사회”는 의식주의 기본적 필요를 넘어서 “잉여와 사치”를 추구하는 소비자본주의 사회를 가리킨다. 포드주의(Fordism)의 주도하에 1920년대 미국의 산업체제는 명실상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그 다음 소비자를 양산하는 체제, 즉 ‘대중이 구매력을 갖도록 만드는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조건인 시장의 전국적 확대 외에도 ‘노동시간의 단축과 임금의 상승’이 정책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경제적 변화에서 눈에 띠는 것은 플라스틱 머니(plastic money)라고 불렸던 신용카드의 사용이 확산되며, 일반 소비계층의 소비욕구가 급신장한 점이다.
1.2. 소비사회는 생산물의 교환가치에 기초한 상품과 자본 및 생산적 노동의 관계가 아니라 소비자와 상품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하는 소비능력으로 인간의 가치가 형성되는 소비중심사회이다.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I. Kant)가 말한 바와 같이 목적 자체로서 인간을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서 상대적 가치를 가진 사물(Sache)과 혼동하는 것으로 일종의 ‘범주의 오류’에 다름 아니다.
1.3. 소비사회에서 소비대중은 상품의 소유와 소비에서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통한 욕구충족을 추구한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본질은 노동과 정신적 가치 등 모든 것이 다 시장의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상품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르크스의 비판이론은 이론적 유물에 불과하고, 현대 기호학은 모든 것이 기호적 교환과 같은 ‘모사’(simulation)의 차원으로 전락하여 실재적 가치가 다 사라졌다고 본다. 소비사회에서 소비자는 다른 이들과 다른 어떤 기호의 환영을 소비하고 싶어 한다. ‘차이화 코드’는 소비사회가 소비자를 유혹하는 차별화 기호의 놀이에 해당한다.
1.4. 소비사회의 문화산업의 하나인 광고는 매체를 통해서 소비대중의 허구적 상상적 욕구를 재생산한다. 소비자는 특정한 재화의 소비를 통해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하면 할 수 록 결핍을 느끼고 현실세계의 불만족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1.5. 소비의 패턴이 매우 발전된 사회에서는 기호와 약호의 법칙에 기초하여 상품자체가 아니라 꾸며진 사용가치, 즉 이미지와 기호가 소비되는 사회이다. 소비사회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과잉실제에 대한 욕구의 노예가 되고 인간됨의 진정한 가치와 정체성은 상품의 가치에 밀려서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광고를 통해 인간의 몸이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각인되고 상품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짱’, ‘S-라인’ 열풍처럼 섹시(Sexy)하게 보이려는 여성의 욕망은 자신의 정체성의 욕구가 아니라, 남성의 시선을 대신하는 광고 속의 카메라 앵글에 의해 규정되는 소비 인간의 전형적인 자기소외이다. “나는 소비 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1.6. 산업-상업․금융-정보․기술의 시대를 거치며 자본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였다. 탈산업사회의 시대를 지나며 문화자본주의를 향한 자본주의의 진화가 이루어졌다. 과잉소비가 정점에 달하고 이제는 “더 이상 살 것이 없다”(비디오 예술가 백남준)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은 단지 상품이 아니라 체험을 소비하고 싶은 욕구를 나타낸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체험산업이 등장하였고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1.7. 소비사회에서 자선, 자비심, 동정심과 상호부조와 같은 이웃사랑의 도덕적 행위는 소비자의 합리적 구매 행위의 규범과 치환된다. 친절과 상냥함, 따뜻한 환대와 돌봄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서비스와 모든 용역에도 어김없이 매매 행위를 통한 욕구의 충족이라는 거래가 이루어진다.
1.8. 지구적 차원에서 소비의 양극화는 환경의 재앙에 준하는 사회적 비극을 양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의 세계의 가장 큰 윤리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세계은행이 정한 국제빈곤선의 기준에 약 12억 명이 사람들이 못 미치고 있다. 이들은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 그리고 이 12억 명 중에 약 8억 2600만 명이 문맹이며, 부국은 100명 당 1명, 빈국은 5명당 1명의 유아가 5세 이전에 사망한다. 막을 수 있는 질병으로 매일 3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한다. 부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77세인데 반해 사하라 이남에서는 48세이다. 이것이 소비사회의 그늘에 가리어진 소위 “절대빈곤”의 현실이다.
1.9. 소비사회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소비 양극화와 절대 빈곤 같은 사회악뿐만 아니라,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온난화와 기후변화, 중금속 배출로 인한 수질오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사막화와 생물학적 종의 감소 등 생태악이 자연과 인류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문화지체(cultural lag)의 문제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이다.
광고가 조작해 내는 이미지의 과잉실재(hyper-reality)에 가려진 오늘의 소비사회에서 인간들에게 감흥을 주고 삶에 자극을 주는 것은 상품(Angebot)이지 더 이상 "네 이웃을 돌아보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Gebot)이 아니다.
2. 소비사회의 인간상
: 하나님의 형상 VS. 소비인간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1932/33년 겨울학기의 베를린 대학의 강의 “창조와 타락”(Schöpfung und Fall)에서 창세기 1-3장의 신학적 해석을 통해 ‘신학적 인간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미 1930년 베를린 대학 사강사 취임 강연에서 한편으로 문명의 건설과 다른 한 편으로는 전쟁의 파괴가 자행된 세기 초에 신학과 철학의 과제는 “인간에 대한 물음을 날카롭게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는 창세기 처음 세 장을 신학적 인간학의 기초 텍스트로 삼았고, 전후(前後) 지속된 정치 사회적 소요와 경제적 불안과 정신적 황폐화로 인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삶의 근본적 토대로서 "윤리의 기초를 어디에 어떻게 놓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창조와 타락』은 바로 교의학과 윤리학의 연결점으로 인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추구하고, 위기의 시대에 참된 삶의 방향과 가치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이 강의에서 동시대성의 문명과 사회의 문제를 인간성의 위기에서 찾았고, 그 회복과 치유를 위해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서적 대답을 추구하였다.
본회퍼는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을 ‘한계’(Grenze)에서 찾았다. 성서의 창조기사를 가로지르는 붉은 선과 같은 것이 곧 선악과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 17) 본회퍼는 이 한계선을 ‘현실성의 한계’, ‘현존의 한계’로 본다. 그리고 이 한계성이 피조성의 진정한 자유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아담은 뱀의 유혹,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열매를 따먹은 후 선악, 즉 토브(tob)와 라(ra)의 이원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욕구의 충족으로서 쾌락이 충만한 상태인 선과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가득한 것으로 악을 인식하는 자기분열 속에 놓이게 되었다. 아담은 주어진 한계선을 거부하고 신과 같이 되려는(sicut deus) 욕망에 사로잡혀 스스로 “창조주-인간”이 되어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
소비사회의 인간은 본회퍼가 말한 ‘신과 같이’ 되려는 인간형과 같다. 한계를 상실한 인간은 지칠 줄 모르는 욕구에 사로잡혀 타자를 욕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소비인간의 전형이다. 이제 본회퍼의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 인간과 소비사회의 인간을 대비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타인과 다른 생명체들과 더불어 살도록 지어졌으나 소비인간(homo consumptor)은 자기를 향한 병적 욕망에서 상품 이외에 모든 관계를 절연하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타락 후 인간의 삶은 자유의 축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노동하고 해산의 수고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소비인간은 향유를 위해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소유를 갈망해야 하는 운명적 굴레를 짊어진다.
-피조 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어진 자기 존재의 근원을 알기에 한계를 깨닫고 겸허히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존재지만, 소비인간은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 ‘신과 같이’(sicut deus) 되어 자기의 운명과 피조세계의 창조주로 군림하고자 한다.
-소비사회의 인간은 참다운 주체다움을 가진 자유인이 아니라 상품이 주는 과잉실재에 대한 허위욕구에 매인 종속적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타자를 위해 자신의 욕구를 제한해야 한다는 한계를 아는 인간이 지만, 소비사회의 인간은 한계를 너머서 욕구의 충족을 추구하는 지칠 줄 모르는 탐욕의 화신이다.
-하나님 없는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있는 인간은 그의 욕구와 충족 가능성, 즉 원함(Wollen)과 할 수 있음(Können)의 일치만을 추구한다. 그에게 자유는 ‘타자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지배와 전횡일 뿐이다.
-피조 된 인간은, 아담이 생을 함께 살아가게 될 타인을 환성으로 대하고 감사한 것처럼, 자기 앞에 나타난 “한계의 육체적 현현”인 타인을 은총으로 받아들이지만, 시장인간은 타인의 존재에 대해 증오감을 품고, 병적 욕망 속에서 타인을 저주로 대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세계 안에서 정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주체적 삶을 살지만, 소비인간은 소비에 익숙하도록 본능을 자극하는 광고의 호명(interpellation)을 통해 수동적 주체(소비시민)로 형성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공동체를 통해 샬롬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지만, 소비인간은 개인의 욕구에 사로잡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에 의사주체로서 참여를 강요당한다.
소비사회의 신화와 자본의 형이상학과 상품의 가치론에는 ‘시장의 선’이라는 미명하에 죄의 본질과 악의 차원이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죄란 바로 자본이 인격화되고 시장이 신성화되어 인간이 상품과 교환되는 가치의 전도(顚倒)이며, 이것을 조장하는 소비주의가 바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악은 바로 개인적 차원에서는 소유와 소비의 탐욕이며, 집단적으로는 상품과 자본에 대한 우상숭배에서 초래되는 비인간화이다. 소비주의는 하나의 세계관이며 자본주의의 종교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소비사회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며,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 윤리적 한계를 다시 인식하는 것, 곧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공동체의 현실이다.
3. 광고읽기를 통한 소비사회의 비판
: 로고(LOGO)신화/상품숭배/소비의 성사
-광고는 “advertising" >ad vertere, 즉 "마음을 어디로 향하게 하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오늘 날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광고는 ‘대량 소비를 위한 소비자 창출 메커니즘’을 통해 모든 산업의 생산과 소비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
-광고의 기원은 3000년 전 현상금을 걸고 도망친 노예를 찾는 파피루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 된 격투기 경기를 알리는 글이 쓰여 진 검투사 그림, 아테네 거리의 광호인(crier) 부터 중세의 십자군 모병(募兵) 광고를 비롯해서, 근세의 활자 발명 이후에는 대량으로 찍어 낸 성서를 판매하는 광고도 있었다. 본격적인 광고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 특히 17세기 신문의 발간과 함께 급격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현대 광고는 20세기 초 산업자본주의의 과잉생산으로 인한 광범위한 소비 계층의 창출이 필요하였기에 나타났다. 그리고 초기부터 매체 지향적 대중문화의 한 형태로 발전 되었다.
-광고가 제공하는 은밀한 자기실현적 예언: 상품소비가 사랑, 젊음, 쾌락, 즐거움, 성장, 행복, 사귐, 안전, 건강, 매력, 성공, 예방, 안녕, 부, 명예, 존경, 우아함, 영웅적 이미지 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광고는 현실의 자아와 광고 속의 가치 사이의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일치의 욕망을 부추기고 끊임없이 소비를 충동질 한다. 광고는 소비를 통해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결핍을 메울 수 있다고 약속한다.
-자본주의의 다신주의적 성격. 브랜드 상품의 물신화는 소비를 의식(cult)으로 만들고, 자본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충족시킨다. 고대의 원시종교 사회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신들에 대한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은 오늘 소비사회에서 나이키(Nike), 리바이스(Levi's), 맥도날드(Mc Donald), 애플(Apple), 코카콜라(Coca Cola)와 같은 로고에 대한 기벽(奇癖)으로 재등장하였다. 이것을 상품숭배의 다신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인간은 ‘상표와 유행의 다신교’에서 살고 있다. (로고/브랜드의 신비체계)
-광고는 소비사회의 신화를 생산해 낸다. 롤랑 바르트는 기호학을 도입하여 기호의 의미작용을 분석하고 외연적 의미와 다른 내포적 의미의 2차적 작용을 통해 신화가 형성된다고 하였다. 신화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지배적인 사상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광고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다. 광고는 현대사회의 무수한 신화의 저장고이다. 광고비평은 비신화화 또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기능을 수행한다.
-광고는 소비자에게 단순히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개인이 욕구하는 삶의 스토리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충족할 수 있다고 암시하고, 그것을 위해서 제품이 가진 이미지와 문화적 체험을 구매하라고 충동질 한다.
-산업사회에서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통해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었다. 그 이후 등장한 것이 문화소비자인 대중의 욕구를 확대 재생산해내는 문화산업이다. 광고는 바로 이러한 문화산업의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에서 볼 때 광고는 허위의식을 체계적으로 조작함으로써 대중을 상품과 문화의 진정한 향유로부터 소외시킨다. 대중은 광고의 마법에 걸리면 우중(愚衆)이 된다. 그들에게 언제나 광고는 옳다. 현실의 상품 소비에서 느끼는 결핍의 원인은 광고가 아니라 상품 자체에 있거나 또 다른 상상적 욕구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광고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지탱하는 소비자 창출의 메커니즘으로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여 상품과 돈의 순환을 돕는다. 광고산업의 확대는 자본주의의 번영과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며 그 결과인 셈이다.
-광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광고 텍스트를 수용자에게 나르는 매스미디어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광고비평은 매스미디어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오늘 광고비평은 주로 매체적 근접성과 광범위한 대중적 영향 때문에 TV, 라디오, 잡지, 신문의 기존의 매체비평에 집중 되어있다. 그러나 위성 TV, 인터넷사이트, 블로그, 모바일 등을 이용한 뉴미디어의 광고도 관심의 영역이 되고 있다.
-최근 친환경, 인간적 가치, 평화 등 글로벌 트랜드를 중시하는 광고는 점차적으로 기업의 윤리성과 사회적 신뢰성을 부각시키는 성격을 띠며, 더 나아가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상품의 가치를 선택 받으려는 감성 마케팅을 시도하고 있다.
-오늘의 광고는 단순한 마케팅 차원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텍스트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하나의 텍스트는 그것이 생산, 유통, 소비되는 특정한 사회 문화적, 정치 경제적,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 분석적 관점에서 광고는 한 시대의 다중(多衆)이 품은 이상과 다양한 가치의 스펙트럼을 반영하기에, 광고비평은 그 시대의 바닥에 깔려 있는 대중의 욕망과 그것을 자극하고 조작하는 일상의 권력을 읽어내는 ‘문화읽기’라고 할 수 있다.
‘문화’라고 이름 할 수 있는 ‘일상의 삶’(Everyday Life)의 영역들은 결코 신학이 비켜 갈 수 없는 인간의 삶의 의미가 소통되고,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이 산출되는 못자리이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이 대중문화의 텍스트를 읽어내지 못하면, 신학은 대중의 삶이란 텍스트와 일상적 세계라는 실천의 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광고는 ‘상품의 미학’이라는 미명하에 바로 인간의 일상적 삶에 작용하는 소위 “소비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은폐하고 있다. 따라서 광고 속에 감추어진 대중의 욕망과 충족의 체계와 그것을 매개하는 헤게모니로서 자본 권력의 함의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현대 세계에서 ‘신학 함’의 새로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4. 광고와 신학하기 그리고 가치 찾기
: 반물신적 공동체 신학/타자의 한계윤리
4.1. 반물신적 공동체 신학과 타자의 한계윤리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복음(福音)은 명백히 물질의 소유에 근거하며, 교의(敎義)는 주로 상품소비에 의해서 욕구가 충족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일찍이 상품의 물신숭배(Commodity Fetishism)에서 자본주의에 살아 움직이는 물신의 성격을 규명한 이래, 오늘의 소비사회에서 브랜드 상품의 마케팅은 우리를 ‘실천적 다신교 숭배자들’(a practicing polytheist)이 되도록 유혹하고 있다. 새로운 다신교에서 구원은 다음 세상에서가 아니라 쇼핑가의 다음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다. 브랜드 상품은 소비자의 일상 속에 들어와 마법의 힘을 발휘하는 성사(sacrament)가 된다.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위용을 자랑하는 수많은 자본주의의 신전에 가득한 상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aura)의 세례를 받는다. 성령은 상품 속에서 그 기를 발산하며 사람들의 생활을 변화시킨다. 이와 같이 비유적으로 묘사한 상품과 광고의 세계는 분명 종교 이후의 종교, 신 없는 세계의 종교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우상숭배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여기에서 전통적 의미의 종교적 가치와 도덕적 규범은 이단이 된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신 없는 자의 우울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만들고 다른 것을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일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서 타자는 발붙일 곳이 없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소비인간은 고독 속에서 소비와 성적 욕망과 같은 자기집착에 사로잡히고, 내면에서는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분열을 경험한다. 소비인간은 상품 속에 투영된 자기 모습(avatar)에서 개인화된 나르시시즘에 빠지지만, 그의 상품 욕구는 영원한 불면을 낳는다. 그러나 그 불면은 타자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상품 숭배, 실천적 다신교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공동체가 보이는 것이다. 비로소 타자를 보게 되고, 환대하고, 존중하게 된다. 나의 필요보다는 타인의 필요를 먼저 충족시켜주고자 하게 된다. 타자는 스스로 나의 욕구를 희생시키고 고통을 짊어지게 하는 절대적 힘이다. 모든 도덕의 원천은 자기로 부터가 아니라 타자로부터 나오는 힘이다. 이것을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타자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단순한 타자로서 또한 내 옆에 서 있어 나를 제한하는 자로 인식하는 것과, 또 나와 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타자의 기원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로 인해 타자를 사랑하고 또 그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는 나로부터 나온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아담에게 그의 한계를 보다 가볍게 만들고, 그것을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짊어지게 하는 한계의 육체적 현재화이다. 타인은 나에게 하나님이 정해 주신 한계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같은 이유로도 침범해서는 안 될 대상이다.
레비나스(E. Levinas)가 타자와의 관계의 전형을 ‘성적관계’에서 찾은 것과 유사하게, 본회퍼 역시 성(性)을 ‘서로 다름’에 기초하여 ‘서로에게 속함’(Einandergehören)의 궁극적인 실현 가능성으로 본다. 가장 원초적 형태의 공동체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고 따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된다. 다만 성에 대한 병적욕망으로 인해 사랑의 공동체가 깨어지는 곳에서 타자는 나의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성적욕망과 소비욕구는 두 개의 바퀴처럼 소비사회를 움직여 간다. 바로 여기서 타자가 한계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지고 나의 행동을 제약하는 한계 윤리가 요청된다고 볼 수 있다.
4.2. 광고와 선교
자본주의의 리얼리즘이 지배하는 소비사회에서 광고와 신학은 경쟁적 관계에 있다. 광고는 자본주의 신화를 생산하고 그 가치를 유포시키며, 상품에 대한 대중의 생각과 주의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로잡고, 대중의 소비욕구를 조작하고 소비행동을 교육시키기 까지 한다. 반면 신학은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부단히 소통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 난해하고 지루한 의미소들의 집합만을 양산할 뿐, 거룩함의 약호(code)와 이미지(image)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초월적 실재의 비주얼한 경험적 인식의 통로였던 의식이나 예배 역시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상품에 대한 광고의 상징 가공과 전달력에 비교가 안 된다. 물론 소유와 소비에 대한 욕망의 충족을 약속하는 광고의 설득적 커뮤니케이션과 정신적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적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하게 비교하여 그 우위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멀티미디어의 등장과 새로운 미디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광고와 신학 간의 ‘전달과 수용’의 소통 능력의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종교의 주변화와 의사종교의 중심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비사회에서 물신에게 빼앗긴 인간의 마음을 재영토화하기 위해서는 종교 역시 대중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중이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물음에서 대중의 욕구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사회적 돌봄과 공동체적 나눔의 소중한 가치를 알려주고, 진리에 대한 관심, 선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며, 생명을 고양하는 종교적 영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선입주견을 버리고 광고의 긍정적 기능을 활용하는 영성 마케팅의 필요성이다.
한 예로 최근 한국에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에 비해 엄청난 수적 성장을 이룩했다. 그 배경에는 트랜드(Trend) 파악/브랜드 가치창출/감성-영성 마케팅 ⇒한국 가톨릭의 부활로 이어지는 대중화 과정이 있다고 본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각 종교, 종파의 선교, 포교 활동을 종교 마케팅으로 보면, 가톨릭의 성공과 개신교의 침체는 브랜드 가치 면에서 가톨릭은 급상승하고, 개신교는 하락한 점에 기인한다. 최근 한 중앙 미디어의 심층 취재 기사를 보면, 그 원인을 한국인에게 가톨릭의 이미지가 매우 좋고, 따라서 가톨릭의 브랜드가 가지는 신뢰성, 친밀성, 선호도가 매우 높다는 데서 찾고 있다: “맑은 영혼을 향한 목마름”, “신자들의 성심, 신심에 감동을 받았다. ... 가톨릭 성직자, 신부, 수녀는 매우 성직자답다. ... 미사가 거룩하고 성스럽다. ... 피정 같이 고요 속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묵상의 종교이다. ... 성당의 엄숙함과 고요함이 마음에 든다.” 오늘날 기업경영 전략 연구는 도덕성과 영혼이 있는 기업만이 소비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의 브랜드 마케팅과 상품 광고가 ‘감성 마케팅’, ‘구애(求愛)마케팅’으로 소비자의 영혼을 울리고 감성을 자극하여 선택되고 사랑받는 상품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하는 것처럼, 한국의 개신교 교회도 무언가 오늘 한국인의 심성과 욕구에 맞는 브랜드의 이미지 제고(image-up)와 영성 마케팅을 하지 못하면, 결국 비종교인 과 타종교인은 물론 개신교 신자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
나오는 말
소비사회는 상품의 소비를 통한 욕구 충족과 의사욕구(pseudo-needs)의 파생으로 인한 결핍이 동시에 일어나는 불만족스러운 사회다. 따라서 소비사회의 인간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분열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광고는 바로 상품이 제공한다는 과잉실제의 약속을 통해 소비자의 욕구를 끊임없이 동원한다. 그래서 욕구는 자기 자신의 실현과 욕망의 충족을 지향하고, 지칠 줄 모르는 탐욕으로 바뀐다. 이것을 교정하는 것이 한계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한계는 타자에게서 나와 나의 욕구를 제한하는 도덕적 힘이다. 욕구와 한계의 변증법적 지양(止揚)과 지향(指向)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