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오늘날 이 시대를 지식정보시대라고 말하지만 좁은 남한 땅의 한 작은 개신교 교계에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정보매체, 즉 교계신문과 잡지와 인터넷사이트들이 생겼는지 실로 놀랄만하다. 교단들은 교단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관지를 만들고 신학교육기관들도 나름의 필요에 따라 기관지를 만든다. 어느 기관이나 교단에 속하지 않은 자유언론매체의 경우 아마도 전 교계의 소식을 그대로 보도하여 알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일반 사회 언론들과 마찬가지로 계몽과 함께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교계 여론을 선도한다는 정치적 목적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장 큰 불교계와 기독교 종파로서 가장 큰 한국의 천주교는 한국 개신교계만큼 언론매체가 많지 않아도 개신교보다 평화롭고 일치를 이루고 있다. 개신교 언론들은 그동안 교계의 부끄러운 소식을 가감없이 보도하여 신도들의 신앙 사기를 떨어뜨리고 나아가서는 개신교회의 사회적 위상을 떨어뜨려 언론의 역기능의 한 몫도 담당한 셈이다.
우리가 개신교 언론매체가 많은 것을 탓할 필요는 없고 다만 그 많은 매체들이 내는 나팔 소리가 어떤 것인가가 문제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고린도전서 14장 8절 이하) 나팔을 불 때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한다고 경고했는데,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교회에 덕이 되게끔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나팔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며 그의 나팔 소리가 어떤 효과를 내어야 할지를 가르쳐주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나팔을 부는 사람이나 교회의 책임이 큼을 또한 가르쳐주었다. 이것이 기독교 언론매체들이 받아들여야 할 궁극적 사명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팔 소리는 말을 미디어로 하여 전파되는데, 그 말이 때로는 노랫소리나 연극의 동작이나 또는 TV의 영상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고 그 모든 매체의 시동은 말을 하는 사람의 혀의 움직임에 있다. 즉 말은 혀가 없이는 말이 되거나 발음될 수 없다. 그리하여 성서는 혀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교계 언론들에게 있어서는 글을 쓰는 사람들의 말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옳은 것은 옳다 담대하게 말하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며, 나아가 한 혀로 두 가지 다른 말을 해서 마치 한 우물에서 단 물과 쓴 물을 한꺼번에 내는 것과 같은 혼돈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교계 언론매체들도 사회의 일반 언론매체처럼 한 지면에 한꺼번에 좋은 일과 궂은 일, 기뻐할 것과 슬퍼할 것, 성공적인 것과 실패한 것, 잘한 것과 잘못한 것들 등을 섞어서 시민이나 교인, 국가나 교회의 나날이 되어가는 일을 보도한다. 그러나 국민이나 교인들은 언론으로 인해서 오히려 국민과 국론이 분열되고 교인과 교회들이 분열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신학의 문제에서도 우리 교계는 지금도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복음주의라는 기치를 들고 한국교계의 단합을 꾀하면서 교계 일치의 반경을 좁히려 하고 있고, 진보주의 진영에서는 에큐메니즘, 즉 세계주의의 기치를 들고 교회 일치의 반경을 넓히려 하고 있는데, 이 이슈를 가지고 교계 언론의 분열이 생기고 있다.
그런데 보수진영에는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 반면에 진보진영에서는 사두개파적인 세속 또는 극단의 현실주의자들이 있어서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정치적인 이슈에서도 보수진영의 헤롯당적인 권력지향적인 사람들과 진보진영의 열심당적인 행동주의자들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한국 개신교 언론단체들 가운데는 아예 사지(社旨)를 보수 또는 진보로 못박고 있는 곳도 있을지 모르지만, 언론이라는 것은 단순 보도의 노릇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토론의 광장이다. 그리하여 공개토론을 통하여 정반(正反)에서 합(合)으로 이끌어갈 사명이 언론에 있다.
언론은 이 사명을 위해 신문지나 인터넷에 보도할 재료를 수집하고 선택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말 중에서 그리스도의 나팔소리다운 말을 담은 글을 골라서 토론의 광장에 추천해야 할 것이다. 중립의 자리에서 어떤 극단의 소리(말)도 소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언론으로서의 책임 회피이다. 지난 날 한 교계 주간신문은 한국의 한 기독교윤리학자가 쓴 원고를 그대로 보도했는데, 그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옹호하고 선군정치의 최악의 도구인 핵 보유를 비호하였다. 그런데 그 글에 대한 반론을 편 글이 그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언론매체에 실린 글은 한 번 읽고 휴지통에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안일하다. 그 글을 쓴 사람도 언론이 한 번 실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는 데서 그치고 언론사도 한 번 보도하면 그만이고 누가 시비하면 또 그 글을 실어주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다. 사람이 혀를 놀려서 한 말은 그것을 듣거나 또는 그것의 글을 읽는 사람이 있든 없든 이 우주공간에서 사라지지 않아서 누가 예민한 수신기를 가지고 그 소리(말)을 포착할 수 있다. 그보다도 무서운 것은 인간의 수신기보다 더 예리한 하나님의 귀가 있어서 그가 다 듣고 또 기억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혀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형제를 미친놈이라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듣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예수는 가르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