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이른바 탈근대주의 (Post Modernism) 담론에서 “역사는 없다”고 단언하는 말이나 글을 대하게 된다. 4,50년 전만 해도 “모든 학문은 역사학이다”라고 단언한 역사학자가 있었고 역사 없는 학문이 없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데 최근 학계에서 “역사는 없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을 들으면, 고개가 갸우뚱해 진다. 아리송하기도 하고, 설득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농담이겠지’하는 생각으로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하나님은 없다”라고 무신론자가 말하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역사는 없다”라는 말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리가 경험한 것들을 말하고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생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들도 역사적인 자료들이 있고, 역사를 쓴 학자들이 그 자료들을 기초로 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여 후대인 우리에게 말해 주고 기록해 주어서 그 기록들을 믿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역사적 사실(들)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그 역사적 사실(들)이 있었다.” 혹은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나는 알고 있다”라고 한다. 역사적 사실들은 믿음이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과 지식의 문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다’ ‘없다’하는 신학적 담론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믿음의 문제이고, 역사적 담론들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문제로 구분한다. 하나님이나 신에 관해서는 무신론도 가능하고 백보 양보해서 ‘불가지론’도 가능하지만, 역사와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무역사론’은 물론, 웬만해서는 ‘역사불가지론’을 펴는 일은 보기 드물다.
그런데 왜 첨단 역사학자들이나 거의 모든 부분의 학자들이 역사적 유물들을 캐면서도 “역사는 없다”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 혹은 이러한 역사에 대한 회의론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저술문제가 불거지면서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좌편향 역사 교과서’는 무엇이고 ‘우편향 역사 교과서’는 무엇인가? 왜 이런 말들이 난무하고, 왜 이런 말들이 생겨났는가? 그리고 ‘좌편향’은 무엇이고 ‘우편향’은 무엇인가 (내가 이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는 ‘우편향’이라는 글에 빨간 밑줄을 치고 있는데, 아마 이 말이 입력이 아직 안된 모양이다. 2005년 판 아래아 한글은 이 말을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우편향’, ‘좌편향’이란 말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우’다 ‘좌’다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 자체와 그 사실을 해석하는 시각과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령 4.19라는 역사적 사실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학생들이 일으킨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었고 이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이 퇴진하였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4.19 학생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의 공적을 폄하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도전한 폭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4.19는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결국 5.16 군사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4.19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놓고 해석이 여러가지일 수 있을뿐 아니라 해석에 따라서 그 평가 역시 달라진다.
그렇다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 그 자체인가, 해석인가, 평가인가? ‘역사적 사실’ 그 자체만 가지고, 그리고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1960년 4월에 대학생들과 중고등 학생들이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서 시위를 하고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경무대 방향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이 쏘아 댄 총알에 맞아서 학생들 가운데 희생당한 학생들이 있었다라고 교과서에 기록하면, 가장 정확하고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공정한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학 입시 시험에는 4.19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이렇게만 쓰면 ‘정답’인가? 그러나 이런 사실 기술만으로 ‘역사’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다. 역사학자가 아니더라도, "왜 4.19가 일어났는가?" "4.19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그 주역은 누구들이었나?" "4.19를 반대한 세력은 누구였는가?" "4.19의 결과는 무엇인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한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배우는 것이고, 그 사건을 평가하여 오늘과 미래를 위해서 교훈을 얻는 것이라고, 우리는 배워 왔지않았는가?
우리는 일본 정부의 지도자들이나 교육 공무원들과 역사가들이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한국 식민지 침략행위라고 하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그 사실 조차도 ‘침략’이라는 말 대신에 ‘진출’이라든가 심지어 ‘해방’이라는 말로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항의하여 왔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미화할 수도 있고 왜곡할 수도 있으니, 그 사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중구난방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식민지화를 미화하는 일본 정부 지도자 뿐 아니라 우리 한국 역사학자들 일부 역시 한국 식민통치는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바 크다고 말한다. 이런 말과 평가는 한국 침략에 대한 해석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실과 해석과 평가는 모두 다른 것이고, 이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은 은폐되거나 미화되거나 왜곡된다. ‘은폐’ ‘미화’ ‘왜곡’이라는 말 역시 평가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배경과 이해관계 등이 얽혀 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여기에는 일본사람의 입장이냐, ‘가해자’의 시각인가, 아니면 ‘피해자’의 시각인가? 아니면 ‘근대화’ 혹은 ‘산업화’라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이념적 혹은 철학적 시각으로 평가하는가 하는 숱한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게다가 ‘근대화’로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미화’하는 사람은 ‘친일파’의 자손들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이미 학문과 역사 담론을 넘어서 인신공격의 폭력을 휘두르는 지경까지 된다.
역사는 한 가지 사실을 놓고도 분쟁이 생기고 사회 분열을 불러 오기 십상이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하나 만으로 벌써 ‘좌’와 ‘우’로 갈린다. 역사적 사실에 좌와 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에 좌와 우가 있을 법하다. 그러나 해석은 어떤 절대적인 혹은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 배경, 시각, 이념, 종교적 신앙 등 복잡한 삶의 자리에서 나오는, 하나의 의견, 소견, 아니면 일종의 믿음, 혹은 신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역사는 없다’고 하는 불가지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있었는지 몰라도, 역사는 없다는 말은 역사란 결국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댜양한 입장과 주관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유신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산업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와 같은 말은 "누구누구의 생각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내가 그렇게 믿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유신이 없었더라도 우리나라 산업화는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도 학생들이 듣게 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말들이 모두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만일’,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에는 '만일'이 없다."라는 말은 널리 통용되는 ‘잠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없다"고 한다면, 역사책을 쓸 필요도 없어지고 역사교육도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역사는 없다"라는 말을 허무주의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생을 이어가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자신이 역사이고 우리는 역사를 만들고 있고 그 역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고 평가할 때 나의 해석만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라고 고집할 수 없는 것이다. 탈현대주의 (Post Modernism)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문화의 다양성이고 다원주의인 만큼, 역사 해석과 평가에는 다양한 시각과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근본주의적인 자기해석 만이 옳다고 하는 절대화나 독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해석과 평가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는데 있어서 가장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역사적 진리를 학자들에게 제시할 수도 없거니와 한 가지 해석만을 강요하는 것은 학문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권력의 남용이다. 여기에는 비학문적인, 이념적 혹은 정치적 의도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탈 근대화 시대에 있어서 정부가 권력의 힘으로 한 가지 역사적 해석을 절대 진리로 국민들과 학생들에게 학습을 강요한다는 것은 비민주적이고 반근대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오늘날, 근대를 넘어서 탈 근대의 시대에 있어서의 역사교육은 역사해석의 다양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교육의 중심은 다른 교육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스스로 옳고 그른 해석을 가려내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이성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역사는 없다고 하는, 어떻게 역사를 강요할 수 있겠는가?
* 약력
서광선(徐洸善,78)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 신학석사(M.Div.)
미국 벤더빌트 대학원 철학박사(Ph.d.)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1964∼1996)
이화여자대학교 교목실장, 대학원장 역임
세계 YMCA 회장(1994∼1998)
미국 유니언 신학대학원 및 드류 신학대학원 초빙교수(1996∼2001)
미국 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재단 이사 및 부총재(2001∼2007)
現 이화여대 명예교수
現 미국 유니언 신학대 석좌교수
現 남북평화재단이사
現 베리타스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