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루터가 예견한대로 현대 인문주의는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만든 세속주의의 조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속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큰 문제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려 하시지 않고 세상에 두고 떠나시면서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아주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걱정하고 노력하지만 어떤 사람은 세상에 속했다가 벗어났다가 하는 생활에 능숙하다.
공산주의 독재의 나라 북한에 가서 자유롭게 활개치고 다니면서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찬양하고 다니는 한상렬 목사는 남한에서도 자유를 누리고 잘 살았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양서류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사실 지금 남한에 38선 국경이 있어도 그것은 한갓 군사분계선으로 되어 있고 남한의 많은 사람들 특히 친북인사들에게 있어서는 38선의 지리적 분계선만이 아니라 정신적 분계선이 없어졌다. 즉 북쪽에 가도 살 수 있고 또 남한에서도 살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니 한상렬 목사만을 문제 삼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한상렬 목사가 북한에 간 것을 교계에서 특히 문제시 하는데 그것은 그가 ‘목사’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산주의가 무신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서류 인간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유신론자라고 자칭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무신론자들과도 친구와 동역자가 되고 유신론자들과도 동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를 일반화 하면 우리 남한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유신론자)이 무신론자인 사람들과 동역하고 공존하여 살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목사들도 감독이나 총회장이나 어떤 자리의 장이 되기 위하여 체면 다 버리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도 엄격하게 말하면 양서류 인간이다.
오늘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양서류 신자들 때문에 신뢰를 잃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어떤 경계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목사들이 정치운동 할 때도 그 경계선을 지켜야 한다. 그 경계선은 나의 양심의 판단으로만 정해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이 서로 만나야 할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너의 양심만이 양심이냐’라는 질문을 기억해야 한다. 한상렬 목사를 비호하는 사람이 그의 양심을 운운할 지 모르나 그의 양심만이 양심이냐고 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