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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동서종교사상의 화합과 회통

동서종교사상의 화합과 회통(한국동서종교철학회, 원광대, 201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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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종교사상의 화합과 회통(한국동서종교철학회, 원광대, 2010.6.5.)

주제: 동서종교사상의 화합과 회통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1] 종교의 다양성은 기회이자 위기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

인류문명권이 서로 교차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던 사실은  문명이 동튼 이후부터 점진적으로  이뤄져 왔지만, 본격적으로 깊은 차원에서 상호만남, 상호배움, 상호협동, 그리고 배움을 통한 창조적 자기변화를 경험하게된 것은 20세기 후반기 부터 였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서구문명권에서 큰 영향을 끼쳤던 ‘아브라함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오랜 배타적 태도를 반성하고 대화와 협력의 시대로 전환한 문명사적 사건은 제2차바티칸 공의회(1962-1965)였다 한국천주교 중안협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특히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과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참조.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발행, 1969); Hans Kung, Christianity and the World Religions( Doubleday & Company, 1986);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대화ㅣ를 넘어 서로 배움으로』(맑은울림, 2003); John Cobb.Jr., Beyond Dialogue: Toward a Mutual Transformation of Christianity and Buddhism(Fortress, 1982). 솔직하게 말한다면, 동아시아 세계종교들의 현자들과 철인들이 일찍부터 당연시하던 그런 성찰에 도달하기 까지, 서구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종교는 무려 2천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종교인들이나 철학자들의 자발적인 각성의 결과라기 보다는 지구문명사회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였다.  지구촌의 교통․통신수단의 발달,  타문화권에로 여행의 자유, 원전언어로읽는 이웃종교의 경전연구, 다국적 기업으로 표현되는 지구경제권의 광역화, 성숙한 현대인들의 인식론적 한계성에 대한 해석학적 통찰등이 ‘독선과 단죄’의 시대에서  ‘대화와 협력’시대 에로 변화를  이끈 큰 동인이 된 것이다.
  포스트모던니즘(Postmodernism)이라고 총칭하는 세계관, 실재관, 가치관에서 주장하는 ‘철저한 상대주의’가 지닌 해체주의적 철학이념에 빛과 그림자가 있고 찬반양론이 있겠다. 그렇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차이’와 ‘다양성’을 지구 공동체가 함께 공존해 가는데 있어서 위협이나 갈등으로만 보지 않고, 도리혀 축복과 기회로 볼 수 있도록 현대인들의 안목을 열어준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한 일이다. ‘축복과 기회’로까지 생각하지 않더라고 최소한 ‘관용과 배려’의 필요성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 것이다.
  한국사회는 전형적인 종교다원사회 이다. 그만큼 충돌의 위험이 될 것인가  창조적 협력을 통한  자기변화 계기가 될 것인가, 그 두 종류의 기회가 공존한다. 비록 아직도 이웃종교에 대한 몰이해와 배타적 태도가 상존하지만, 한민족이 당면한 공동과제 앞에서 상호 관용, 대화, 협력의 기운이 점차로 고조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한민족이 당면한 공동과제란, 전쟁위기를 평화시대로 견인해가는  민간차원에서 북한을 돕는 인도주의적 경제 ․ 의료협력,   민주주의가치와 인권옹호를 위한 정의사회 구현의 과제, 특히 생태계보존과 생명가치 창달을 위한 노력등에서 종교계의 실질현장에서는 놀랄만한 대화와 협력이   점증되고 있다.
  금번 학술대회에서 우리는 “동서종교사상의 화합과 회통”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인류문명과 한국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두 현상 중에서, 종교간의 대립갈등을 극복하고 화합과 회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그 당위성과 타당성을 좀더 학문적으로 해명하는 과제에 집중하려고 모인 것이다.  기조발제에서는 세가지 기초사항을 다시 점검할 것이다.

첫째(제2장), 왜 인류사회에는 다양한 종교가 발생하고 현존하는가?
둘째(제3장), 종교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축복으로 볼 수 있는 인식론적 전환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해석학적 눈뜸’을 거쳐야 하는가?  
셋째(제4-5장), 동서종교의 유형적 특성은 무엇이며, ‘화합과 회통’을 지향하는 자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2] 종교의 다양성이 발생하는 이유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난해한 종교규정으로부터 우리의 대화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종교의 규정은 지구촌에 존재하고 있는 역동적인 종교의  숫자만큼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본질규정보다는 좀더 현실적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성숙하고 건전한 종교인들의 삶의 현상적 모습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옳은 것 같다. 종교전통에 따라서 상징체계가 다르고, 교리 ․ 교학이론이 다르고, 수행방법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양할 지라도, 깊이 접촉해서 만나보면 성숙한 종교인, 제대로 된 건강한  종교인들에게서 3가지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첫째, ‘자기중심적 존재자’(self-centered being)로서 살던 사람이 '실재지향적 존재자’(Reality-oriented being)로 변화된 삶을 살아간다.(‘실재’(Reality)란 종교전통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다. 진리, 생명, 대자연, 하느님, 도, 천명, 브라만등)
  둘째, 일체의 집착, 독선, 두려움에서 벗어나 걸림이 없는 자유인(無碍人)이 된다(소유적 존재불안, 탐진치 삼독, 선행의 성취욕망,  죽음의 두려움 등)
  셋째, 조건없는 자비행(慈悲行), 인애(仁愛),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며 봉사를 기쁨으로 느끼며 산다.

  진정한 종교인들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공통적 특징을 발견하게된다. 그 공통점은 종교간의 상징체계. 교리 교학체계, 수행방편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을 협력하게하고 회통시키는 근본적 힘이 되고 있음을 본다. 각 종단에서 아무리 높은 직위를 갖고 있더라도, 어떤 최고 학문경력과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어떤 종교적  초능력을 갖고 있더라도,  위의 세가지 필요충분조건에 미흡한 종교인 사이엔  진정한 대화, 소통, 협력, 회통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종교들 혹은 종교인들 사이에  위에서 언급한 공통적 삶의 지향성(志向性)과  자유인으로서의 존재양태(存在樣態)에 있어서 서로 통하고 공명하는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는 왜 다양한 종교들이 발생했고, 신념체계와 상징체계에 있어서  뚜렷한 특징적 차이를 지닌 종교들이 존속하는 것일가? 세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 할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첫째, 종교인들이 찾고 귀의(歸依)하는 ‘궁극적 실재’(窮極的 實在)의 무궁성(無窮性) 때문이다. ‘궁극적 실재’를 무엇이라고 호칭하던지( 眞理, 道, 法性, 하느님, 無極, 太極, 空, 無) 그 실재는 개인이나 특정 공통체가 완전히 포촉할 수 없는 무제약자(無制約者)이며 텅빈충만(妙空)이기 때문이다.
  둘째, ‘궁극적 실재’를 체험하거나 인식하거나 관계맺는 인간존재 그 자체의  ‘삶의 체험’과 ‘실존물음’의  다양성(多樣性)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는 ‘호모사피엔스’로서 동일한 존재이지만, 구체적인 삶의 체험과 실존적 문제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종교란 ‘실존적 물음’에 대한 해결을 ‘궁극적 실재’에서 얻어 ‘구원’(자유,해탈, 불멸, 영생)을 얻는 사건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셋째,  구체적 종교는 그 시원(始原)에 대한 주장과 관계없이, 현실적 실재로서의 ‘역사적 종교들’은 어김없는  ‘문화현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적 구성소로서 해당공동체의 지질기후풍토, 생존조건과 생산양식, 역사적 공동체험, 그리고 특히 언어에 의해 특징이 형성된다. 아무리 ‘계시종교’임을 주장하더라도 인간에게 받아지고 체험되고 이해된 것으로서 종교는 ‘문화현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Religion is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form of religion)라는 유명한 문화신학자(틸리히)의 명제도 깊이 보면 종교란 ‘문화현상’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종교현상 또한 인간적 문화현상으로서의  숭고한 삶 체험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문화로서의 종교’는 문화를 구성하는  제반 구성소들이 다양하므로, 다양한 종교들이 지구상에는 존재하게 된다.   지구촌의 다양한 종교들, 구체적으로 보편적 진리종교라고 흔히 일컫는 힌두교, 불교, 그리스도교, 유교, 도교, 천도교, 원불교 그 어떤 이름을 지닌 종교라 할지라도,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종교구성소에 의해 그 유형적 형태가 다양한 진주 조갯살 속 보석처럼 그 결정체(結晶體)가 형성되었다.
 지금도 살아 숨쉬는 종교라면, 보석진주의 크기와 모양과 색상이 자라나듯이 ‘과정적 실재’ 로서 종교 또한 삶의 맥락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용어로 ‘과정 속에 있는 종교’(religion in process)이다. 만약 고정되고 완결된 종교라면  역동성 없는 죽은 종교요 ,  문화유산적 관광자원으로서의 화석화 된 종교일 뿐이다.

[3] 다양한 종교들 사이의 화합과 회통을 위한 ‘해석학적 개안(開眼)’

  현대사회에서 종교간의 ‘화합과 회통’을 위해서 ‘정신과학의 꽃’이라 일컫는 인간존재의 ‘해석학적 제약성과 초월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구촌의 종교문화를 어느 특정 종교가 독점하거나 그 우월성을 독단적으로  주장하기 어려울 만큼  현실종교세력의 지형분포도가 ‘화합과 회통’을 강요하기 때문만 아니다. 종교 휴매니즘 정신의 발로에 기초하여, 종교의 구경목적은 투쟁이나 갈등이 아니라 평화요 생명을 생명답게 지키고 실현시키는 일인즉, 종교간의 성숙한 배려와 관용과 협력이  계몽된 인간들의 덕스러운 태도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인류가 당면한 지구촌의 ‘지속가능한 문명사회’의 존립을 위하여 지구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과 수단으로서의 힘의 결집과 협동의 필요성 때문만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이유가 물론 매우 현실적  이유이긴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점증하는 종교간의 ‘협력과 회통’의 당위성은 더 깊은데 원인이 있다.   계몽시대를 거쳐서 진정으로 성숙한  현대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인간의 ‘자기이해’ 측면에서 ‘해석학적 회개’ 혹은 ‘해석학적 개안’을 경험한 사람이여야 할 것이다.
  첫째, 인간정신의 자기비판적 성찰능력 곧  ‘정신의 자기초월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문화-역사적 동굴’속에서 형성된 일정한 ‘해석학적 패러다임’에 의하여 자신과 세계와 진리를 이해하는 존재다.
  둘째, 이러한 ‘해석학적 패러다임’은 사물과 세계와 진리를 ‘어떻게’(How) 보고 이해 할가를 결정할 뿐 아니라 ‘무엇을’(What) 보고 이해할가를 결정지어 준다.
   셋째, 역사 속에서 출현한 모든 가치체계들과 상징체계들은 일정한 삶의 맥락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그 것 자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이며 인간의 진리체험은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  절대적인 것을 체험하고 지시한다. 지시하는 대상이 위대하면 위대할 수록, 특히 역사적 종교에서 보듯이, ‘역사적 종교체계’를 ‘진리자체’와 동일시 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넷째,  인간이 ‘해석학적 존재’라는 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진리이해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진솔하게 만들고, 다른 ‘해석학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과 열린맘으로 대화 ․ 협력함으로서 ‘삶체험과 진리체험’이 확대심화 됨을 뜻한다.
  다섯째, 이웃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웃종교’의 패러다임 속으로 일단 건너가서 이웃종교의 ‘해석학적 눈’을 가져볼 때라야만 가능하다. ‘머리’로서 이웃종교를 이론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큰 한계가 있다. ‘가슴’으로서 이웃종교를 이해하려면, 이웃종교에 대한 열린마음 만이 아니라, 이웃종교적 삶의 ‘맥락’ 속에로 들어가서 그 종교의 표층이 아니라 심층에 도달할  때 가능하다.
  여섯째, 종교적 체험에는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비합리적’(irrationality) 차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실재는 ‘반합리적’(antirational)이 아니고 ‘초합리적’(transrational)이기 때문에 종교간에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개방된 진리담론 광장에서 서로 이해되고 소통 되어야한다.  아무리 신비적 체험일지라도, 윌리엄 제임스가 신비적 의식상태 4가지 특성으로 열거하는 언표불가능성(ineffability), 순수지성적 특질(noetic quality), 일시성(transiency), 수동성(passivity) 중에서 특히 ‘환하게 뚫려비취는 이해’가 동반된다. 언어적 논리정합성에서 ‘설명’할 수 없을 지라도 순수지성적 맑은 맘을 지닌 사람 누구에게나  ‘이해’되어야 한다. 흔히 ‘계시적 종교’임을  강조하는  종단사람들 중에서 독단적 진리를 전유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초자연적 계시진리’라는 명분을 내걸고 독선적 진리주장을 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일곱째, 내가 귀의하고 있는 종교진리에 실존적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는 ‘전적위탁’(commitment)의 자세는  이웃종교에  ‘개방성’(openness)을 가지는 일과 충돌되거나 갈등관계로 귀착되지 않는다. 역설적 체험이지만, 진정한 종교인들간의 심도깊은 대화, 협력, 회통은 자기종교에 깊이 귀의하여 자기종교의 정체성을 성실하게 견지하면서도 이웃종교에  열려있어서 자기가 귀의하는 역사적 종교보다 더 큰 진리 앞에 겸손 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여덟째, 그 결과 성숙한 종교간의 대화, 협력, 회통은 설익은 ‘지구적 보편종교인’으로 자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정체성 없는 ‘종교혼합주의’에로 전락하지도 않는다., 무지개의 일곱색상이 하나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듯이 혹은 관현악단의 다양한 음색갈의 조화처럼, ‘화이부동’(和而不同) 진미를 맛보게 된다.

[4] 동서종교의 유형론적 특성

학문연구에서 ‘유형론적 접근’(類型論的 接近方法, typological approach)이란 문화인류학, 고고학, 사회학, 비교종교학들에서 어떤 공동체의 삶의 현상들을 비교함으로서 특정사회적 삶의 본질을 좀더 확연하게 이해하기 위한  비교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특정 집단의 삶의 현상들을 관찰하고, 다양한 속성이나 특성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지속성을 지닌 특성을 추출하여 표상화 함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진 특징들로서 압축한다.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 보면,  유형론적 접근은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은 앞서 말한대로 비교하려는 다른 종교와 다른 특성을 확연하게 파악하도록 돕는 기능이 있다. 단점은 다양한 특성들을 대표적 특성 한두가지를 가지고서 ‘단순화’ 함으로써 해당종교의 다른 특성을 사상(捨象)해버릴 위험이 항존한다. 공통의 특징을 뽑아내기 위하여 낱낱의 특수한 성질을 고려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오류를 범 할 수 있다.
 유형론적 접근방법의 장단점을 감안하고서, 우리는 동서종교들 중에서 유형적 특징이 확연하게 구별되면서 한국사회에 살아숨쉬는 종교로서 불교, 유교, 그리스도교를 유형적으로 잠시 고찰하려고 한다. 원불교는 불교와 같은 종교유형으로 보았고,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는 동일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유형에 포함됨으로 구별하지 않았다. 천도교는 유불기독 삼교의 장점을 고루 갖춘 통전적 종교로 보았다.
 불교는 아트만과 브라만의 근원적 일치를 깨닫는 인도계 신비종교(神秘宗敎)의 절정이다. 유교는 천지인 삼재의 통전을 확신하는 중국계 성인종교(聖人宗敎)의 절정의 꽃을 대표한다. 그리스도교는 무한자와 유한자의 질적차이를 강조하며 절대자의 뜻을 받아 삶의 전 영역에 구현하려는 셈족계 예언종교 (豫言宗敎)의 절정에 핀 꽃 중 하나이다.

 (1) 불교
 불교의 실재관은 인연생기론(因緣生起論)이라는 말로 압축 할 수 있다. 그래서 법(法, 다르마)을 본자는 연기(緣起)를 본자요, 연기를 확철한자는 해탈한자 깨달은 자가 된다. 인연생기론이야말로, 불교를 그 이전의 브라만종교, 그리스도교, 심지어 유교로부터 구별해주는 불교적 종교의 유형적 특성이다. 진여(眞如)의 실상은 공(空)이라고 본다. 대승불교  화엄사상에 이르러 진여계(眞如界) 와 생멸계(生滅界) 상호관계의 불일불이론(不一不異論)이 또렷하게 확립되지만, 불교는 삼라만물이 일심(一心)의 연기적 현상이라고 본다.
 불교적 실재관인 인연생기법을 확철하지 못함으로서 인간실존은 허상에 대한 집착과 그결과 온갖 고(苦)가 발생한다. 불교는 실존적 인간이 비본래적 상태에서 집착과 그 결과 고해에서 허덕인다고 본다는 점에서  실존은 ‘구원받아야 할 존재’ 이다. 그러나, 그 구원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안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위로부터도 아니고 아래로부터도 아니다. 자아와 만물이 ‘인연생기적 실재’임을 확철함으로서만 구원이 온다.
 불교적 구원의 방편은 참자아의 진리등불을 밝히기 위해 정진함으로서 스스로 득도함에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삼보(三寶:佛法僧)에 귀의하여 해탈하고 극락왕생한다는 대중적 신앙체계는 불교적 실존이해의 변용태요 심하게 말하면 변질형태이다. 수행정진을 통한 자기진면목의 깨달음, 이것이 불교적 구원의 방편이다. 수행방편으로서 ‘定慧雙修’는 불교의 커다란 자랑거리 이다.
 불교적 시공간이해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칸트인식론적 절대시공간 개념은 부정된다. 순간 순간 인연생기적 ‘현실세계’가 화엄세계로서 꽃피고 지는 것이다. ‘지금-여기’에서의 ‘연기적 실재 및 생명 現成’이 있을 뿐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은 한생명체의 십이연기단계(十二緣起段階)를 거대담론으로 추상화한 것이요, 그것의 통속화가 윤회론(輪廻論)일뿐, 시간이나 역사는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지속도 아니다. 역사엔 목적이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이다.
 불교적 실천윤리는 ‘보살행’(菩薩行)이라는 한마디말로 압축되는데, 이것은 깨달음으로서 참지혜(프라주나)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보살행’은 깨달은 자의 시혜도 아니고, 의무도 아니고, 구원의 방편도 아니다. ‘깨달음’과 ‘보살행’은 동전의 앞뒤관계요 손등과 손바닥 관계다. 보살행은 먼저 깨달은 자가 주위를 돌아볼 때, 아직 미망에서 해매는 중생들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큰 슬픔’(大悲)을 느끼는 자로서 자연스런  실천적 행동이다. 고해에 있는 중생들에 대한 큰 슬픔과 그들의 고통을 건져주려는 애씀으로서의 보살행이 동반되지 않는  일체의 현학적 불교는 ‘역사적 종교의 유물로서 전통’의 답습에 불과하다.
불교의 총괄적 상징어는 니르바나(涅槃)이다. 대승불교가 꽃핀 한국불교 안에서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을 통한 불국토실현 이다. ‘니르바나’ 는 만유(만물과 만인)의 평등한 존귀함과 ‘존재함’ 그 자체를 긍정하고 누리는 비움과 충만의 역설적 일치이다. ‘영원한 현재’를 모든 중생이 누리는 막힘없는 자유의 화엄세계다.  그것은 더 이상 분별지도 없고, 극복되어야 할 소외도 없고, 실현해야할 당위적 목적지향성이 없다. 니르바나를 현실적으로 향유하는 길은 불평등하고 불의에 가득찬 현실세계를 개혁하고 혁명하는 행동을 통해 쟁취하기 보다 중생들의 눈을 덮고 있는 무명(無明)의 백내장(白內障) 걷어내는 일 곧 ‘깨달음’을 통해서 온다.  그러면, 언제나  니르바나는 이미 거기에 실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2) 유교

 유교적 실재관은  중국문화를 근본적으로 중국문화답게 만드는 생명론적 자연주의 사상이다. ‘생명론적 자연주의’ 사상은 근대서구사상의 ‘기계론적 자연주의’와 대립되지만, 자연을 고대자연관의 현대판인 ‘지구 가이아론’이나 19세기초 유럽의  낭만주의적 자연관과 다른 개념임을 우리는 주목한다.  유교적 실재관은  다음몇가지 근본신념을 특징으로서 나타내 보인다.
 첫째, ‘능산적 자연’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살아있는 궁극실재이다. 자연은 변화하지만, ‘무로부터 창조’된 바도 아니고, 공(空)에로 환원하여 결국 무화(無化)될 가현적 실재가 아니다. 자연은 건실하고, 모든 인간의 종교와 도덕과 가치관과 생명의 근원이 된다. 
 둘째, ‘능산적 자연’은 무질서하거나 혼동적 실재가 아니라, 합리성을 지니고 변화의 패턴을 지닌 질서의 세계이다. 능산적 자연은 수학적 합리성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초합리성을 지닌다. ‘천지인’삼재로 표상되는 대자연의 세가지 범주는 혼동불가적 실재이며 동시에 분리불가적 실재로서, 서로 회통하고 삼투한다.  특히 인간은 ‘천지인’ 삼재의 회통과 삼투의 매개체로서 정위되며 인문주의적 색깔을 강하게 지닌다.
 셋째, 유교적 실재관은 ‘생명론적 실재관’으로서 ‘생명’ 가치를 궁극적 가치로 삼는다. 대자연은 생명을 낳고 기르며 육성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유교는 천인합일적 자연조화사상을 지니지만 인간의 주체적 역량과 책임을 매우 강조한다. “天行이 健하니 君子도 自强不息 한다” 는 말에서 보듯이,  유교적  인간이해는 불교나 그리스도교에 비하여 가장 긍정적이고 적극적 인간론을 갖는다. 
  유교 인문주의는 인류문명의 차축시대를 통과한 성숙한 문화형태이기 때문에, 능산적 대자연의  공동창조자로서  ‘인간 ․ 자연의 동형동성론’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그 책임을 감당하려고 성실하게 노력한다. 그리하여 유교적 영성은 ‘우주신인론적 영성’(cosmotheandric spirituality/ R. Panikkar)을 특징으로서 지니게 된다.
  유교의 실존인간 이해를 인간본성의 성선설이나 성악설로 단정지으려는 양자택일적 발상은 유교적 관점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예들면,  인간심성의 ‘사단론’(四端論)은 사람이 이미 인의예지(仁義禮智) 덕을 완성형태로 품수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의 심성은  ‘인의예지’ 현실태로서 발현될 수 있는  가능태(씨앗)로서 측은, 수오, 사양, 시비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긍정적 믿음일 뿐이다. 여기에서, 유교는 인간실존을 이해하되 수행을 통하여 ‘충서’(忠恕)의 원초적 본성을 구현하고 확충심화시켜야 한다는 당위적 수행종교로서  면모를 지닌다.
 유교적 구원방편은 ‘초월적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탁한다거나, 인간자신이 진리와 도덕의 궁극적 근원자 및 규범자로서 스스로 ‘신’이라고 자처하는 태도를 갖지않는다.  유교경전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한다” 말할 때, 명(命)은 타율적 명령이거나, 인간본성에 인과적 관계에서의 밖으로부터 운동작인(運動作因) 개념이 아니다. 하늘이라는 초월적 차원의 어떤 것이 인간심성의 내면 안에서 ‘성자신해’(性自神解)로서의 자기초월의식을 갖는다.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 용어로서 말하면 ‘존재’(초월)가 인간심성에 현존함으로서 인간은 ‘현존재’(Dasein)가 되고, 존재의 부름에 성실하게 응답하고 행동함으로서 ‘군자’ 곧 구원을 성취한자가 된다.
 문제는 현실적  인간체험에서 볼 때, ‘천명’(天命)에 충분하게 응답하여 ‘충서’(忠恕)로서 자기 삶의 생활을 일이관지(一以貫之)했다고 자신만만한 ‘군자’가 과연 몇명이나 있는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수행을 통해서, 진지한 스토아적 도덕영웅주의자가 양산될 수 있지만, 잘못하면  도덕적 자기합리화를 도모하는 도덕위선자가 되거나 ‘성인’(聖人)의 경지에 끝내 이르지 못하는 ‘절망’을 느낄때, ‘은총의 질서’나 ‘용서의 치유능력’을 쉽게 용인하지 못하는 유교의 인본주의적 종교는 다만 ‘성실하려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途上의 존재자’(自强不息)가 될 뿐이다.   
 유교적 시공간이해와 실천윤리는 동시에 고찰해도 좋을 것이다. 농업을 근본삶의 생산양식으로 삼았던 중국문명은 대자연의 순환적 리듬에 민감하였고, 자연의 순환반복에 상응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인간 삶의 변화패턴을 『역경』에서처럼 64괘로 설명하였다. 팔괘를 결합한 64괘가 삼라만상을 표상한다는  역경적 존재론은 대자연과 인간의 생사화복을 운명론적 결정론 시각에서 본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생성론의 실재관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의 스콜라철학이 갖는 작용인(作用因), 의장인(意匠因) 목적인(目的因)등이 능산적 대자연의 밖으로부터 부여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생명이 독립적 시공계(時空界)안에서 연출되는 자연과 분리대립된 역사(Geschichte)적 실재가 아니다. 동아시아 유교적 실재관에서 장점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사중심의 역사주의가 저질렀던 잘못 곧 자연과 역사적 실재를 분리시키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유교는 생성론적 실재관을 지니었기에 ‘극측반’(極則反)의 운동원리에서 전개되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순환리법은 노장사상에서처럼 ‘法自然的 순환관념’을 공유한다. 미묘한 차이는 노장사상에서처럼 궁극적 근원(根源)에로의 단순회귀와 단순반복이 아니라, ‘반복하면서도 자람’이라는 ‘새로워짐’에 대한 지향성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실재관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근원적 ‘새로움의 출현’을 담보한 열려진 무한 개방적  미래성을 긍정하는가, 아니면 64괘로 표상하는 일정한 패턴의 새로운 조합의 변주곡이 있을 뿐인가의 문제는 ‘새로운 창발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적 실재관에서 보면 항상 궁금증으로 남는다.
천인합일과 ‘내재적 초월’을 강조하는 유교의 실천윤리는 ‘조화의 가치’를 중시하여 대지 ․ 몸 ․ 가족 ․ 사회공동체를 통섭하면서 천덕(天德)과 천명(天命)에 응답적 참여자가 되는 것을 삶의 궁극적 이상으로 삼는다.  그것의 가장 이상적  표상은 ‘대동세계’의 실현이다. ‘충서’(忠恕)라는 근본적 사람다움의 구현이 생물학적 혈연공동체를 뛰어넘어 만인에게로까지 확충되기를 가르치지만, 한민족이 실험한 조선조 500년의 유교적 사회공동체는 다분히 생물학적 혈연공동체의 구심력을 벗어나기 힘들었다는 냉철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3)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의 실재관은 불교의 연기설, 유교의 태극이기음양오행설과 대조되어 흔히 ‘창조설’로 대변된다. 제4-5세기 교부 어거스틴(354-430)에 의하여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신학적  해석을 입게 되지만, 구약 창세기 창조설화(창1장)에서는 어거스틴이 강조하는 ‘절대무’(絶對無, ouk on)에서의 창조 곧 ‘비존재’에서 ‘존재’에로의 기적이 아니다.  ‘혼돈과 공허, 흑암과 깊음’으로서 그려지는 ‘상대적 무’(me on)는 아직 존재라고 부를 수 없지만 무질서하고 의미없는  ‘근원질료’를 신화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창세기에서 창조란 잠세테에서 현실태에로, 혼돈적 무질서에서 형태적 질서에로, 무의미하고 공허한  어둠에서 의미충만한 빛에로의 분리되어 드러남이다.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 말하려는 진정한 동기는 존재론적 시원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심이 아니다. 히브리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속에서 경험한 구원체험의 감격, 삶속에서 ‘생명’의 놀라운 신비로움, 예기치않는 새로움의 출현에 대한 감사, 열려진 존재의 개방성에 대한 희망의 찬양인 셈이다. 줄여말하면, 존재한다는 사실과 생명현실이 자명한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며, 만유는 창조주 안에서 기원하고, 창조주와 더불어 지속하고, 창조주를 통하여 완성된다는 신앙고백이다.   불교의 연기설과 유교의 이기설이 존재의 어떻게(How)와 무엇(what)에 강조점을 둔 존재론적 관심이라면 그리스도교는 누가(Who) 왜(Why)에 관심을 둔 실재관이다. 그결과, 그리스도교는 창조주와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자의 ‘질적차이’를 견지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질적차이’가 반드시 분리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창조주의 ‘내재적 초월성’에서도  ‘구별’됨을 고백하는 종교이다. 
 그리스도교의 인간실존이해와 구원의 방편은 선 자체이시며 거룩자이신 영원자 앞에선 실존적 존재의 자기소외를 절감하는 종교다. 비본래적 존재상태에로 전락되어 있다는 자기성찰면에서는 불교나 유교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자기소외를 극복하는 방편에서는 ‘깨달음’이나 극기복례하는  ‘수행’을 통한  ‘聖人化’ 에 강조점이 있지 않았는데, 그 결과 특히 개신교에서 그 해독이 컸다. 동방기독교의 영성신학에서 ‘신화’(神化,deification)의 교리는 주류서방기독교에서는 이교적 사상이라고 이단시 되거나 경원시 되었던 것이다.
  원시 초대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자기초월적 존재로서 보되 ‘의지적 존재’ 로서 본다. 그래서 ‘메타노이아’(의식의전환, 회개)를 통한 ‘거듭남’(重生)을 강조하는데, 자기정진 ․ 엄격한 수행 ․ 내면적 성찰과 더불어 ‘위로부터 난다’(요3:3-8)는 초월적 빛의 조명과 변화은총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자기초월능력의 밝은 빛과 ‘의지의 반란’이라는 어두운 심연을 동시에 체험하면서 ‘절망’(부정)을 거쳐 ‘존재에로의 용기’(긍정)를 은혜로서 받는다는 종교이다.
 그리스도교의 시공간이해와 실천윤리는 독특한 ‘역사의 지향성에 관심’으로 그 특징이 드러난다. 그 총괄적 상징어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는 영토적 개념이 아니고 주권, 다스림, 현실적 실현을 의미한다. 특히 예언자종교의 혈통을 물려받은 그리스도교는  ‘공의와 사랑’의 온전한 실현을 강조한다. 그 결과, 불의한 역사현실의 변혁지향적 사회윤리의식이 강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실현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강림’이라는 묵시문학적 종말신앙으로 나타난다. 물론 우주질서의 자연파기로서의 종말론은 신화적 표현이므로, 비신화화(非神話化)되어야 한다. 비신화화는 신화의 제거(除去)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존적-정치사회적 해석(解釋)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그리스도교를 발생시킨 ‘예수운동’은 당시 그레코-로마문명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문명질서’와 가치관은 만인을 위한 생명 ․ 정의 ․ 평화가 실현된 나라로서 대치되어야 한다는 변혁의지의 래디칼한(radical) 표출이었다.

[5] 나가는 말:  동서종교사상의 화합과 회통을 위한 5가지 기본테제

매우 거칠게, 그리고 부분적으로 불교와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유형적 특성을 일별하였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는 가장 왼쪽에, 불교는 가운데에, 그리고 유교는 가장 오른쪽에 발생지 본향을 지니면서 인류보편적 종교로서 공헌해왔다. 이 위대한 세가지 유형의 보편종교들이 인류문명의 최종정류지 호수에 비유되는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심층적 화합과 회통을 대망하고 있다. 동서종교사상의 화합과 회통을 위한 기본자세 몇가지를  제시함으로서 나가는 말에 대신하려 한다.

(1) 보편적 세계종교들은 모두 결국은 ‘같다’는 동일성을 강조해서는 않되며, ‘차이와 다름’을 축복으로 인식하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을 견지하면서 심층에서 만날 때 “모든 종교들은 서로 통한다”(會通)고 말해야 한다.
(2) 동서종교간의 대화 ․ 협력 ․ 회통은 지구촌 문제해결의 방편적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종교들이 ‘창조적으로 변화’하는 모험을 무릅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며, 살아있는 참종교는 아직도 ‘형성중에 있는 과정’임을 인지해야 한다. 
(3) 지난 인류문명을 양육해온 세계종교들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진리’ 자체는 더 위대하기에  역사적 특정종교를 상대화시키는 ‘우상타파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구체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서만 절대적인 것을 증언할 수 있다”는 종교체험에서의  역설적 진실에 기초하여,  ‘신앙인의 고백적 사랑의 언어’가 지닌 진지성을 이해하되 독단적 언어에로 변질되지 않도록 지성인들은 해석학적 조명등을 항시 비춰주어야 한다.
(4) 그리스도교는 불교로 부터 연기적 실재관과 ‘비움과 충만의 반대일치’ 진리를 배우고, 유교로부터 능산적 자연주의의 건실함과 천지인 삼재를 회통시키는 성숙한 인본주의 철학의 ‘우주신인적 영성’ 곧  생태주의적 신유학의 비젼을 배워야 한다. 
(5) 한국불교와 유교는 현상적으로 드러내는 일부 개신교의 왜곡된 종교현실과 그리스도교 진면목을 구별하고, 그리스도교로부터 ‘새로움의 창조성’ 강조가 지향하는 바를 배워서 종교의 구경적 목적은 세계를 ‘설명’ ․ ‘이해’ ․ ‘깨달음’에 있지 않고, 세계를 ‘변화’시켜서 만인과 만물이 소외되지 않는 ‘건강한 생명세계’의 실현에 있음을 다시한번 자각해야 한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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