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신학적 위기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김희헌 목사(한신대 강사) ㅣ 한국기독교장로회 제공

“나는 이단의 침탈로부터 기독교 제국을 수호하는 대大종교재판장이신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성스러운 복음을 바라보며 그 위에 손을 얹고 맹세하노니 성스럽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가 주장하고 설교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항상 믿어 왔으며 지금도 믿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도움으로 앞으로도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움직일 수 없으며 또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잘못된 주장을 완전히 철회할 것이며 구두로든 저술로든 간에 전기의 잘못된 이론을 어떤 식으로든 주장하거나 변증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성스러운 교회의 권고를 받은 후에도, 나는 전기의 재판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다룬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였고 또한 그 이론은 지지하는 논증들을 발표하였기에 나는 이단 학설을 주장하고 믿었다는 혐의로 재판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 대추기경과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마음 속에서 나에게 올바르게 적용된 이 강력한 혐의가 지워지기를 바라면서 나는 진정한 마음과 거짓 없는 신앙으로 전술한 잘못들과 이단 사설들을 철회하며 또한 그것들을 저주하고 혐오합니다.”

이 글은 1633년 6월 22일 아침 로마의 한 수도원에서 70세의 갈릴레이가 했던 자기변론 내용의 일부이다. 서양의 지성사는 이 사건을 기독교 진리의 승리 혹은 노학자의 학문적 변절로 평가하기보다는 몽매한 종교적 신념이 뿜어낸 독선과 해악을 폭로하는 사건으로 기록하였다. 겉으로는 과학이 종교에 의해 정죄된 형세지만, 실제로는 과학이 종교로부터 독립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제공된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독립은 근대라는 정신이 무신론적인 과학과 철학을 낳아 종교를 본격적으로 위협할 수 있게 된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200년이라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다.

갈릴레이 사건을 단지 종교개혁이 몰고 온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일어났던 트렌트 공의회라는 단속과 검열의 시기에 가톨릭측이 어이없이 범한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의 핵심에서 빗나갔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루터의 측근이었던 멜랑히톤이 나중에 개신교 대학이 된 비텐베르크 대학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의 후견인 노릇을 해주었고, 갈릴레이가 “당신과 같은 사람이 더 많았다면 내 사상들을 발표하는 모험을 감행했을 것”이라고 고백한 편지를 받은 케플러가 개신교인이었다는 점에서 개신교는 가톨릭이 저지른 우매한 종교적 과오를 함께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갈릴레이 사건의 역사적 교훈은 책임소재의 공방에 있지 않다. 이 사건의 진정한 교훈은 종교와 과학, 영성과 지성의 유기적 상호관계가 깨질 때 오는 파국에 관한 신학적 감수성과 관련되어 있다. 신학의 눈으로 보면, 이 사건은 종교가 세속적 성취를 향한 고의적인 변질의 때만이 아니라 불변하는 신념의 신앙이란 이름에 갇혀 새롭게 자라나는 과학적 이성을 외면할 때에 얼마나 무모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할 것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회가 출발한 지도 500백년이 넘었다. 그 사이 많은 갈래의 개신교파가 등장하였고, 그보다 더 무수한 개신교 신학사상이 등장하였다가 사멸하였다. 여기서 제기할 가장 일차적인 물음은 이렇다. 과연 종교개혁의 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개신교가 맞은 오늘의 위기를 말한다. 종교개혁의 ‘개혁’ 전통을 강조하는 신학과 교회는 많아졌지만, 도리어 스스로를 개혁하라는 요구가 커져가고 있다. 안팎으로 터져 나오는 이 개혁의 요청은 단지 한국 교회의 윤리적 행태의 문제를 넘어서,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신학적 내용에까지 이르고 있다. 여기서 다시 바꿔 묻고자 하는 질문은 이렇다. 한국 개신교가 강조해 온 개혁주의 전통신학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위에서 제기한 두 질문, 종교개혁 신학의 오늘날의 유효성과 그 종교개혁 전통의 계승을 표방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에 대해 묻는 이 글의 사실상의 목적은 끊임없이 변화해 온 과학적 세계관과의 관계에서 종교개혁 신학의 전통이 지닌 신학적 함축성이 어떻게 의미 변화해 갔는지를 추적해 보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소위 개혁주의 전통신학이 이제 자신의 신학사상을 개혁 해야만 하는 새로운 요청 앞에 서 있음을 밝혀내는 일이다.


어쩌면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개혁주의 신학 전통은 그 안에 부단한 ‘자기갱신’이라는 숭고한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해, 개혁주의 신학은 스스로의 변화를 전제한 자기초월의 내부논리를 지닌 역동적 신학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과정은 그렇지 않았다. 계몽주의적 이성이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진화를 거듭하며 자기 진영을 넓혀간 반면, 개신교 신학은 싸늘하게 식은 종교개혁 사상을 도그마로 바꿨을 뿐 새롭게 다가오는 과학적 세계관에 맞설 때 한없이 “퇴각전”만 펼쳤다. 그 결과 개신교 신학사상이 합리적 세계관과의 대화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은 점점 축소되어 왔다.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는 종교개혁을 통해 표출된 개신교 정신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비록 루터가 새롭게 일어나는 사회운동(농민운동)을 저주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대하여 “그 멍청이는 천문학 전체를 뒤집어엎으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할지라도 (「좌담」, 1539), 루터가 가진 신앙의 진실은 또 다른 차원의 시대정신을 충분히 의미 있게 반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종교개혁의 정신이라 말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성서 전통의 부활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던 루터의 신학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재강조였다. 우리의 의로움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수동적인’ 의義일 뿐이라는 그의 주장 역시, 신앙 윤리의 능동적 책임성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참된 의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다.

칼빈의 예정설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세상의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며, 세상의 전진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할 뿐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다시 말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철저하게 관철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나아가 구원받을 자와 구원에서 제외될 자도 이미 신적 선택(Election)에 의하여 예정되어 있다는 칼빈의 주장은 결정론과 숙명론에 대한 철학적 교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에서만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신학적 강조였다.


루터와 칼빈이 관심하였던 하나님의 <주인 되심>은 우주론에 관한 형이상학적 사유의 결론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밝히고자 하였던 것은 세상으로부터 초연한 아퀴나스의 하나님(aseity)이 아닌, 구원의 의지를 갖고 세상으로 들어오신 ‘우리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신학적 관심은 뒤이어지는 개신교 신학이 기계론적 사유와 초자연주의적 이원론과 결합되면서 이신론(deism)이라는 일그러진 신학사상으로 굳어져버리는 운명을 맞는다. 동시에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함축된 신학적 의미 역시 변화되고 만다. 그럼 이 과정이 종교개혁 이후 3세기 동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신과 세상의 관계를 탐구하는 우주론의 견지에서 보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는 논리적으로 그 반대편에 피동성만을 특질로 지닌 ‘세상’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이 우주론적 상관관계가 종교개혁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의 ‘과학자’들에게는 사물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철학적 전제요 신학적 보호막이 되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중세의 전前계몽적 세계관을 이미 넘어서고 있는 17세기의 과학자들에게 세상은 신이라는 우주적 주권자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라는 이해는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또 이들 과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신의 창조와 섭리를 증거 하려는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주권사상과 물질의 수동적 원리를 전제한 기계론 과학/철학은 친근한 관계를 맺으면서, 18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뉴턴주의라는 과학적 세계관에서 합류한다. 이때까지 신학과 과학은 서로 갈등하지 않고 같은 이해를 표방하였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사물의 운동법칙은 신이 부여한 질서라는 생각에 모두가 공감하였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과 과학적 세계관이 나눈 밀월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계론적 세계관이 그 초기에는 유신론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 사유의 이면에는 사물이란 하나님 없이도 (신이 부여한) 자기법칙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무신론적 유물론의 요소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과학은 신성의 비밀을 옹호하는 지지자가 되기를 거절하고, 그 지적 관심을 이동하여 자연의 비밀을 통찰하는 이성의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전에 신의 활동 영역으로 여겨졌던 부분들이 이제는 인간의 지혜에 의해 밝혀지는 (신의 간섭 없이 진행되는) 사물의 기계적 법칙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상의 지형에서 18세기에 형성된 기독교 세계관이 이신론(Deism)이다. 이 신관神觀은 신이란 세상을 창조하여 세상이 저절로 움직일 수 있는 질서를 부여한 다음 더 이상 세상에 (여간해선) 관여하지 않는다는 우주론을 표방한다. 이러한 이신론적 이해에서, 신의 주권적 활동으로서의 신의 세상 창조행위는 인정되지만, 세상과 지속적으로 교감하는 신의 섭리활동은 거의 제거되고 만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의 주제 중에서 창조론은 고수되지만, 섭리론의 내용은 뒤바뀌고 만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 속에서 행해지는 신의 자연스러운 활동으로 이해되었지만, 이신론적 세계관에서 신은 초자연의 저 높은 세계로 퇴각하였고, 따라서 세상에 당신의 뜻을 관철하려면 이젠 세상의 질서/법칙을 흩트리는 방식으로 밖에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신론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신의 간헐적 간섭을 가리켜 ‘기적’이라 말하며 자신의 섭리론을 채우고 스스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이신론적 세계관으로 진행하는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상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우리’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더 이상 담아낼 수 없었다. 칼빈이 칼빈주의자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신론에서 그려진 신은 우주적 군주요 세상의 심판자는 될 수 있어도, 긍휼의 마음으로 세상 속으로 화육하여 세상을 치유하며 구원으로 인도하는 구세주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의식한 기독교 일각에서 경건주의로 일어나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찾아나섰지만 큰 흐름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신론적 기독교 세계관은 분명히 당시의 과학적 세계관에 응답하려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다른 방식, 즉 이 양대 세계관의 간격이 더욱 벌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8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서구 기독교 국가 내의 과학은 더 이상 신학에 충성하지 않는다. 두 세대 전 뉴턴이 혹성과 위성의 기하학적 배치를 신의 섭리에 관한 믿음으로 이어간 반면, 라플라스는 ‘성운가설’을 제창하며 태양계의 특유한 배치의 직접적 원인으로 신의 필연적 존재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자연 질서에 개입할 수는 있으나, 반드시 개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의 존재의 확실성을 자연에 관한 연구에서 직접 귀납적으로 결론지으려는 것은 헛되다”고 달랑베르는 말한다. “자연은 신의 설계의 산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만큼, 또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고 모페르튀는 말한다. 그리고 흄은 기적에 대한 믿음을 조롱한다. 이신론에 기반한 기독교 신학이 세상을 초월한 신을 강조할 때, 과학은 같은 이유로 세상에서 필요 없는 신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과학적 이성은 이제 세상이 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은 다만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운동할 뿐이며, 따라서 과학이 그 법칙을 밝혀내기만 하면 사물의 움직임을 거꾸로 환원시킬 수 있는 방법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된다. 유신론적 기계론이 무신론적 환원론으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장소로 여겨진 생명활동 마저도 기계론적 과정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믿는 생물학적 기계론이 등장하게 된다. 생명활동을 이기적 세포의 물리적 운동의 결과로 보면서, 고등동물의 마음의 기능도 영적 원리가 아닌 물질운동의 부차적 현상일 뿐이라고 간주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사상가들이 등장할 수 있는 지적 배경이 마련되었다. 포이에르바하, 맑스, 다윈, 니체, 프로이드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 모두 기독교 전통에서 출발하여 무신론에 이르렀다.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세상에서 신을 몰아내는 동안 기독교 신학의 주류, 즉 소위 정통신학은 보다 더 완고하게 이신론을 자신의 신학적 세계관으로 고수하였다. 이것은 종교개혁 정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신학적 사유의 포기를 의미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신론의 신은 18세기 중엽부터 이 세상에 관여할 부분을 빼앗기며 퇴각하다가, 19세기 중엽 무신론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심리적인 영역으로 거의 후퇴하여 세상 밖으로 나올라치면 비이성(irrational)이라는 누명을 쓸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계몽주의 세계관과의 대화가 단절되어가는 것을 경험한 (이신론적 토대에 선) 개신교 신학은 이제 자연신학을 거의 포기하고 계시신학만을 주요 과제로 삼게 되었다. 이것은 신학이라는 학문이 신앙이 관심하는 궁극적 문제에 대한 포괄적 세계관의 구성이라는 작업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변증학이나 교의학 또는 목회신학 정도로 축소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과학적 이성에 기반한 세상의 합리적 세계관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은 점점 차단되어갔다. 그리고 이 과정은 개신교 신학이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이나 불가지론과 결합되면서 절정에 이른다. 근본주의가 종교개혁 신학의 열렬한 신봉자들 사이에게 튀어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등장은 기독교 신학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고체계로 변질될 수 있는지 보여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묻자.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이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에 뿌리박고 있는가?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오겠지만, 대부분의 개신교회의 신학이 근본주의 신학과 과히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제 한국 개신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합리적 판단을 중지해야만 하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필자가 경험하기에, 근본주의 신학의 다섯 명제로부터 자유로운 개신교회의 강단을 발견하기 힘들다. 우리 기장도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제외한 다른 네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열려진 영성으로 막힘없이 신학적 사유를 키워가는 사람을 만나면 차라리 고맙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15년 전부터 한국 개신교회 내에 신학검열이란 불길한 열정이 타올라 아직 꺼지지 않은 것 같다. 신학적으로는 보수주의를 경쟁하고, 교회의 행태로는 세속주의를 서둘러 도입하는 듯하다. 그런데 교회의 외연은 조금도 넓혀지지 않고, 내적으로 한 몸의 각 지체를 이룬다는 신앙공동체의 의식마저 파괴되어 교회가 교회를 잡아먹고 있다. 교회가 이제 세상과의 소통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직감하고 제 각각 살 길을 찾아 나섰다고 봐야 할까?

종교개혁의 정신이 들불처럼 일어나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 이 과제 속에 개혁주의 신학이 표방해 온 전통 신학사상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 작업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개신교 내에서 소위 ‘전통적인’ 믿음으로 이해되어 온 ‘이신론적’ 신학 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거치지 않고선, 우리의 신학이 오늘날의 합리적 이성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학문과 경건은 기장의 정신이다. 학문이란 합리적 이성을 넓혀가는 행위요, 경건이란 신비적 영성을 높여가는 행위이다. 이 둘은 하나님께 입고 나갈 신앙의 옷을 짓는 데 사용되는 씨줄과 날줄이다. 이 전신갑주의 옷을 가리켜 몰트만은 “지혜”라고 하였다. 어떻게 이 지혜의 옷을 입고 교회의 위기를 헤쳐 나갈 것인가?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신학자와 신앙인의 이야기를 다음 몇 회에 걸쳐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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