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손규태 칼럼] 존엄사의 문제의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인간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존재라고 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서 병들고 그리고 죽는다. 오늘날 과학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은 삶의 전 과정에서 이전과는 달리 많은 혜택을 누린다. 발달된 현대의학을 통해서 태어날 때부터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고 성장할 때도 건강한 신체를 갖게 되며 늙고 병들어도 다양한 치료기술을 통하여 쉽게 질병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현대의학이 발달되었어도 인간의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는 없으며 특히 암과 같은 불치병들로 인해서 환자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 여러 가지 사고로 인하여 뇌사판정을 받거나 식물인간이 되어서 오랫동안 병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환자들의 문제는 단순히 환자 자신과 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 전체 공동체 내지는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놓고 안락사니 존엄사니 하는 논의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안락사(Euthanasis)란 말이 있은 것으로 봐서 이 논의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 같다. 엄격하게 말하면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안락사의 문제는 존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삶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죽을 때도 고통스럽게 죽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그 삶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죽음에 있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의 문제, 특히 치유 불가능한 질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나 뇌사판정을 받은 사람들, 그리고 식물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배려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오늘날 우리들의 공동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안락사문제는 이미 네덜란드 등 선진국들에서는 법으로도 허용되고 있다.

2008년 11월 28일 서울 서부지방법원 민사 12부는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러한 판결을 계기로 해서 한국에서도 안락사 혹은 존엄사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필자는 여기서 안락사, 존엄사 등의 개념구분이나 안락사에서도 소극적 안락사니 적극적 안락사니 하는 내용구분을 통해서 허용과 반대로 나누어지는 그동안의 토론 내용들을 반복해서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안락사나 존엄사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이 갖는 존엄성을 둘러싸고 찬반으로 갈라지는데, 문제는 그 존엄성을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고려할 때 안락사니 존엄사의 문제는 그것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럴 경우 어떤 종교적 계율과 같은 객관적 원리에 따라서 안락사나 존엄사를 찬성하거나 반대해서는 안 된다. 천주교회에서처럼 “인간의 고통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그 자체로서 그리고 고의적으로 죽음을 가져오는 행위나 부작위”로 정의되는 안락사는 하나님의 법에 위반된다고 하는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 국가가 형법을 통해서 안락사나 존엄사를 살인으로 규정하는 현재 한국이나 다수의 국가들의 법률체제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종교나 국가가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은 존엄한 것이어서 자의적으로 처리되거나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의 존엄성을 말할 때 고려해야 할 것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사람의 생명의 존엄성을 말할 때 가장 중심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고통이 심각한 불치병이나 뇌사자나 식물인간이 된 환자의 소원이나 그 가족들의 고통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존엄성은 종교의 교리나 국가 혹은 법률이 규정할 수 없는 보다 높고 깊은 차원의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나 국가 혹은 법률이 생명은 존엄하다고 정의해서 그것이 존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은 그 자체로서 존엄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권이나 죽을 권리는 일차적으로 살거나 죽고자 하는 사람의 권리이지 종교나 국가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종교나 국가는 개개 인간의 삶과 죽음의 결단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종교나 국가는 오히려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엄하게 살도록 돕고 고통이나 다양한 이유로 죽고자 하는 사람들은 존엄하게 죽도록 도와야 한다.

둘째 사람의 생명의 존엄성을 말할 때 고통 받는 환자나 삶의 존엄성을 상실한 뇌사자나 식물인간들 그리고 가족들의 존엄성을 고려해야 한다. 암과 같은 불치병에 걸려서 매일같이 고통에 시달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은 더 이상 존엄한 삶이 아니다. 또 뇌사자나 식물인간처럼 인간으로서 희로애락을 상실하고 아무런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을 갖거나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삶도 더 이상 존엄한 삶이 아니다. 또 의료보장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우리나라와 같은 후진국에서 경제적 능력이 없는 환자의 가족들이 소극적 존엄사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법제도 아래서 고통당하게 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인간적 존엄성에 반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종교나 국가는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이름으로 고통당하는 불치병 환자들이나 죄사자와 식물인간들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야 말로 비인간적이고 존엄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인간다운 죽음을 선택하도록 제도적 법적 장벽을 철거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동시에 국가나 종교가 걱정하는 것과 같은 안락사의 오용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국가나 종교가 더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할 것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답게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려서 죽어가는 수천만의 어린이들, 강대국들의 침략전쟁에 내몰려서 무고하게 죽어가는 젊은이들, 부유한 나라 안에서도 공적 의료제도가 미비하여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오늘날 종교나 국가는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이름으로 안락사나 존엄사를 반대하기 전에 이들 힘없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생명의 존엄성에 더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약력

손규태(성공회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신학대학교 졸업
연합신학대학원 및 한신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사학위
現 성공회대 명예교수
現 베리타스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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