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크리스탈교회만이 아니고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큰 교회당이 문을 닫고 팔려서 공회당이나 창고로 전환된 경우가 많았다.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에서는 마치 시장자유경쟁제도의 개인 기업체처럼 목회자 개인의 목회 성공 여하에 따라 교회당 건물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천주교가 사도전승의 신부위계제도 및 교회법과 전통을 가지고 신자들이 교회에 “오게 하는 목회”와 대조적이다.
개신교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people)의 집회(assembly)여서 교회의 성패는 개인 목회자의 목회 능력보다는 교인들의 헌신의 정도에 따라 좌우된다. 개신교회당은 신도들의 집회(예배) 장소여서 예배가 끝나면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목회자는 수시로 신자들의 가정이나 사업장을 찾아다녀야(심방)만 된다. 흩어진 신자들이 때로는 교회를 갈라가지고 따로 모이고 또 새로 교단을 만들기가 용이하다.
천주교의 성당은 교세와 교인들의 헌신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문이 열려 있어서 성당이 폐쇄되는 경우가 없다.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 있는 오래된 성당들은 군주나 영주들의 돈으로 크게 그리고 온갖 종교예술의 미를 갖춘 교회당으로서 영구적인 보존의 가치가 있고, 그리고 그 성당에는 시각으로 개인의 경건심을 야기시킬만한 대상들이 많아서 신부가 없고 미사가 없어도 들려서 기도와 명상을 가질 수 있고, 또 신부가 성당에 상주하여 신자들이 언제든지 신앙고백을 하고 사죄의 은혜를 맛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가 언제나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모이게 하는 교회당” 제도가 앞으로 더욱 현대인의 정신적 갈증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고 교세도 커갈 전망이 크다.
아무튼 개신교에서는 대형 교회당을 지을 필요가 없고, 지어도 장래가 불안하다. 개신교의 신학이나 제도가 대형 교회당을 짓도록 되어 있지 않다. 대형 교회당을 지어서 성공하는 종교는 천주교와 이슬람교이다. 이슬람교는 국가와 종교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어서 이슬람 국가와 세계이슬람연맹과 같은 단체가 세계 선교 전략으로 어디서나 모스크를 지으면 큰 돈을 보내어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이 되게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부국의 원조는 놀랄만하다.
이슬람교의 선교 전략은 사람들을 모스크에 모아 이슬람 신앙과 교리의 교육과 함께 이슬람 문화와 생활양식, 경건의 실천 방법을 주입해서 절대적 복종과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다. 또 모스크는 빈민들의 구호기관처럼 되어서 자선을 일삼는다. 이슬람교에 지금 근본주의자 곧 테러주의자들과 평화주의파가 있어서 의견이 대립하고 있지만 이슬람교의 세계 변화 선교목표에는 일치한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인권과 자유를 보호하는 정책의 도움으로 이슬람교의 선교가 자유로워서 그 교세는 일취월장하고 있다. 반면 57개 이슬람 국가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심한 박해를 받고 있으며, 선교사들이 살해되고 교회당이 피격되고 있다.
지금 세계에 이슬람 인구는 약 15억이라고 하는데 이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인구에 육박해오는 것이고 세계 전 인구의 25%라고 한다. 미국의 이슬람 연구 권위자 윌리암 와그너(Wagner) 박사는 말하기를 2055년경에는 세계에서 출산되는 신생아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교의 모슬렘일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개신교는 “흩어지는 교회”로서 지금 세계에서 가장 나쁜 예가 되고 있다. 그동안 지나치게 흩어져 난립했고, 또 계속 흩어질 징조가 곳곳의 교단 내분에서 보인다. 교계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교권욕과 이권욕과 명예욕의 노예가 된 듯 대립하고 싸우고 있다. 한국에서의 이슬람 종교는 민간에서, 대학가에서, 교회 분열의 온상지대에서 세계 변화를 목표로 하는 선교를 펴고 있는데 한국 개신교는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 교회가 초대의 가정교회와 같은 신앙의 일치와, 한 몸과 같은 교인들의 친교와, 사생을 같이 하는 순교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집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참새가 집을 짓고 제비가 새끼를 칠 수 있는 보금자리 같이 되어서 교회를 떠나고 싶어 하는 신자가 없게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