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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광섭] 기독교 미학: 감성을 통해 읽는 기독교 신앙

2010년 제 7회 기독교문화 학술 심포지엄 발제문

심광섭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조직신학/예술신학)

1.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우리는 예술에 대한 통찰, 예술적 감성과 신앙의 감성이 한국의 개신교에서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모였습니다. 선언문처럼 보이는 이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날 신학과 교회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 감성을 통해 표현되는 신앙을 그만큼 절실하게 느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미학'(美學, Ästhetik)으로 번역되어 통용되는 이 용어를 그리스어 어원에 따라 옮기면 감각적 지각에 관한 이론이다. 미학의 물음은 고대 희랍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18세기에서야 비로소 철학의 한 분과로 다루어지게 된다. ‘미학’의 개념은 지성의 인식과 감각적 인식 사이를 구분한 바움가르텐(A.Baumgarten)에 의해 세워진다. 칸트(I.Kant)는 판단력비판에서 미학 이론을 처음으로 높이 세운 사상가로 평가된다. 계몽주의 시대에 미학 이론이 정립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감성과 감정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인식능력과 한계에 대한 물음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특히 낭만주의자의 큰 관심사였다. 감성과 감정(정감)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신학에서는 슐라이어마허(F.Schleiermacher), 조나단 에드워즈(J.Edwards), 존 웨슬리(J.Wesley), 윌리엄 제임스(W.James) 등에 의해 주목받게 되나 신학의 주류에 의해 외면당해 왔다. 근대 미학은 반성적 감각지각에 관한 이론과 생산적인 상상력 혹은 환상에 관한 이론, 자연과 예술에서 느끼는 감정들과 아름다움의 이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근대의 전형적인 현상인 삶이 각 영역으로 독립되고 분할되는 경향에 따라 예술도 문화의 고유하고 자율적 영역으로 분리됨으로써 근대 예술은 종교적인 콘텍스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게 되었고 고전 형이상학의 해체와 더불어 하나님 개념 안에서 진․선․미(眞․善․美)가 통합되었던 것도 해체되기에 이른다.
 
‘기독교 미학’을 말하려고 할 때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이후 전개된 신앙과 예술의 소원한 관계로 축소될 수 없다. 대부분 기독교와 예술의 관계를 다룬 서적들이 교회와 예술의 소원하고 불편한 관계를 지적한다. 힐러리 브랜드는 예술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를 한 마디로 “개신교의 역사에서 너무나도 빈번히 강조된 것은 예술의 기쁨이 아니라 예술의 폐해였다”고 딱 잘라 판정했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의 기독교는“기독교의 합리성”(존 로크,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95), “신비적이지 않은 기독교”(존 톨랜드, Christianity not mysterious, 1696)에 이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칸트, Religion innerhalb der reinen Vernunft, 1793)로 축소되었고, 자유주의 시대인 19세기에 기독교 신학은 특히 독일에서 변증법적 이성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나갔다. 감성과 인간의 경험이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종교개혁 원리 중에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전통은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비평을 만나 성서의 역사비평으로 발전되었고, 한국교회에서는 선교 초기부터 성경읽기, 성경쓰기(필사), 성경공부 등을 통해 성서원칙이 “하나님 말씀” 강조의 신앙으로 독특하게 계승되었고, 신학적으로는 20세기 칼 바르트(Karl Barth) 등 신정통주의자들의 ‘말씀의 신학’의 영향으로 감성과 경험 배제의 신앙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기독교의 역사에서 예술과 미를 제한적이지만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씨름한 역사도 만만치 않다. 예술 혐오자요 엄격하고 금욕적인 기독교를 조성한 자로 알려진 존 칼빈조차 심미안이 결여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꽃의 아름다움에 우리의 눈이, 향긋한 내음에 우리의 오관이 끌리게 만드신 주님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그것들에 도취하는 것이 죄란 말인가? [...] 주님은 실로 단순한 필요를 넘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을 많이 만드시지 않았던가?”
 
근대 개신교 교회와 신학의 교부인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종교를 심미적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에게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며, “무한자에 대한 느낌과 취향”이다. 그는 종교를 지식이나 윤리가 아닌 제3의 독립적인, 미학적  범주를 사용하여 정의한 것이다. 이것은 이성이 학문과 사회의 유일한 입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에 나온 통찰이라 더욱 새로운 정의라 할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예술과 종교 사이에서 유비적 관계를 보았다. 낭만파 시인 슐레겔(F. von Schlegel)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 카스퍼 프리드리히(Caspar D.Friedrich)의 관계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앙론』 3절에서 기독교 신앙(경건)을 지식(Wissen)이나 행위(Tun)가 아니라 감정(Gefühl)혹은 직접적 자기의식(unmittelbares Selbstbewußtsein)의 규정성으로 정의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있는 공동체로 교회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여기서 경건은 “감정의 규정성”으로서 교회의 처음과 나중이다. 감정의 규정성이란 감정의 정조를 말하는 것으로서 감정이 어떠어떠한 상태의 색체를 띄고 있다는 것이다. 감정의 근본규정성이란 감정이 자기 자신, 하나님 그리고 세계와 만나 울리는 모양의 근본구조를 말한다. 감정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직접적 자기의식”을 목표로 하며, 감정이 직접적 자기의식 안에서 세계와 만나면 자유와 의존의 상호작용의 모양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현실을 수용하는 의식이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감정의 규정성으로서의 경건은 원칙적으로 지식과 행위에 앞서는 것이긴 하지만 경건을 지식과 행위로부터 분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의 본래적 자리를 앎과 행위가 아닌 감정으로 제시함으로써 경건을 교리 및 윤리적 행위나 합리적 가르침과 동일시하려 했던 정통주의나 계몽주의자들과 거리를 둔다.
 
종교적 경험을 신학, 특히 구원론에 연관시켜 전개한 탁월한 신학자는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이다.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을 경험의 차원으로 명백하게 연결시킨 최고의 인물이다. 테오도어 러년은 서양 신학사에서 웨슬리의 독특한 공헌으로 “정통경험”(orthopathy), 곧 바른 종교경험을 꼽는다. “바른 종교경험”은 웨슬리의 신학적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만든 신조어로서 “정통교리”(orthodoxy)와 “정통행위”(orthopraxy)와 대비되면서 이들을 보충하는 개념이다.
 
정통교리란 바른 믿음을 의미한다. 교회사는 바른 믿음을 얻기 위한 논쟁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바른 믿음을 얻기 위한 논쟁은 초기 교부시대와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 정통주의 진영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단에 맞서 교회를 지키고 세울 필요성이 있었던 고대 교회나 교단의 고백을 공고히 하려고 했던 종교개혁 이후의 고백주의와 정통주의에서 정통교리를 강조했다면, 정치신학이나 최근의 당양한 해방신학 운동에서는 정통교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정통행위를 강조한다. 복음의 수위성은 사회의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질병을 드러내 알리고 그것을 바로 잡아가기 위해 실천하는 정통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정통행위의 강조는 분명 오늘의 신앙과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근거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있으며, 신앙은 사회적, 생태적 실천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일깨웠다.
 
웨슬리는 종교인이 된다는 것,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지적 차원에서의 교리적 승인이나 실천적 차원에서의 선행과 자비행 이전에 일어나야 할 존재의 사건, 곧 하나님의 영이 일으키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경험을 포함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럴 때에만 신앙이 살아있는 실재가 되고 생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험은 그것이 올바르게 해석되고 전달되기 위해서 정통교리의 말씀이 필요하며 세상을 성화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정통 행위의 실천이 필요하다. 그러나 말씀과 행위는 그것을 이끌어내는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지고 충격을 받아야 하며 더 나아가 경험을 통해 매개되고 수용되며 소통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죽은 정통교리’를 통렬히 비난하면서 살아있는 종교의 자리를 이렇게 제시한다.

“한 사람이 모든 점에서 정통이어서 바른 의견을 신봉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열심히 변호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우리 주님의 성육신에 대하여 또는 영원히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교리에 대하여 바르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세 가지 신조 모두 -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이라고 호칭되는 것 -에 동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유대인, 터키인 혹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전혀 종교를 갖지 않았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종교,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웨슬리는 정통교리보다는 정통행위에 우선성을 둔다. 그렇지만 웨슬리는 올바른 것을 승인하는 것과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도 기독교적인 ‘믿음’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제삼의 것을 찾았고, 그것을 러년은 ‘정통체험’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정통체험이란 “진정한 믿음의 표시인 영적 실재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과 그것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20세기 이후 넓은 의미의 하나님 말씀의 신학은 미학적 경험에 대한 신학적 이론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으로 지시된 하나님 말씀과의 실존적 만남의 경험은 감각적으로 중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의 말씀, 곧 몸이 된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선 감각적 지각을 전제한다. 몸을 얻지 못한 말들은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고 말뿐이다. 기독교조차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의 물질적 측면을 단지 그것이 물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연의 실재 한 조각을 취하여 행위와 접합시켜 의식과 물질성을 이음매 없는 구조로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능력이 있다. 인간을 통해 자연은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 없으면 말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은 종교 개념과 종교 심리학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과 거부를 재고해야 한다. 기독교 미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뿐만이 아니라 언어 외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의 지각가능성과 현상의 형태를 통해 나타난다는 점을 새롭게 주시해야 한다. 여기서 기독교 미학은 풍경이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우렸던 창조론의 한계를 넘어 감성과 아름다움 일반에 대한 신학적 반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최근 한국 기독교 안에서 예술과 신앙, 미학적 경험, 신학적 미학에 관한 저술이 국내외 안팎에서 저술되거나 번역되고 있음을 눈여겨본다. 기독교 신앙은 지정의(知情意)로 받아들이고, 지정의를 통해 다시 표현되어야 한다. 개신교회와 신학은 신앙의 참(眞)과 선(善)을 설교하고 신학화하는 일에만 주력하였지 신앙의 아름다움(美)을 깊고 넓게 성찰하지 못했다. 아름다움이 없는 세계에서는 혹은 최소한 “그것을 더 이상 발견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도덕적 선도 또한 왜 그러해야 하는지의 자명성과 매력을 잃게 될 것이다."
 
중세의 신학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안셀무스 이후, 신학과 교회는 1,000년 동안 이 명제를 금과옥조로 받들면서 성서와 교회를 통해 전승된 기독교 신앙을 개념적이고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며 해석하는 데 일방적으로 주안점을 두었다. 그 결과 신앙을 삶을 통해 느끼고 실천함이 없어도 바르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만 있다면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의 교리적 진술에 치우쳐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윤리적이 됨으로써 공동체의 감성을 소홀이 하거나 간과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새로운 시대에 펼쳐가야 할 신앙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 “感性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sensum), “광적(廣的) 감성의 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과 신앙이 하나로 묶이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도래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 걸어야 할 새로운 방법론, 곧  “예술적 방법론”이다. 들음과 이해의 신앙에서 통전적 봄과 통합적 느낌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나는 기독교 미학의 새로운 명제로서 “아름다움을 찿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을 제시한다. 이 명제는 안셀무스의 명제인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보완하고 넘어서 신앙의 구체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드러내기 위함이다.
 
학문분류와 명칭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사색과 연구가 필요하지만, 나는 기독교 미학을 신학적 미학과 미학적 신학으로 구분하여, 신학적 미학은 한 그리스도인이 예술과 실재(實在)의 미적 차원을 바라보는 방식 즉, 예술과 미적인 것은 기독교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탐구하는 분야로 정의하고, 미학적 신학은 예술적 사유를 통해 기독교(기독교 신학)를 알고 표현하는 과제를 담당한 분야로 정의한다. 본 글에서는 “기독교 미학”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할 것이지만 우리는 다음 절에서부터 엄격하게 말하여 미학적 신학을 전개할 것이다.


2. 기독교 미학의 인식론: 영적 감각론

1) 하나님 경험과 영적 감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미 항상 세계경험과 연관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계와 관계하며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세계관계성 속에 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행동하였고, 행동하고 있으며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경험가능하고 경험 가능해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모든 가르침과 교리들 중 어느 것도 반 경험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가령,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 예수의 성육신과 부활 등의 가르침은 경험 가능한 행위이며 가르침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을 세계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행위는 세계의 일상적인 경험 밖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경험 속에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세계의 한 대상이나 한 사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고립된, 별도의 특별한 세계영역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 전체 안에서 만나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경험되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도 종교의 본질에 관하여 말하면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한 하나님의 행위로서 표상하는 것, 그것이 종교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일부 사건이나 혹은 특정한 대상이나 특별한 순간에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경험 가능하다. 위르겐 몰트만(J.Moltmann)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라는 물음의 대답을 변형시켜 이렇게 답한다. 몰트만의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으로 서술된 답변을 통해 영적 감각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이어주고 서로 교감하고 사귀게 하며 하나님과 온 피조물이 서로서로 거하게 하는 매개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활동들의 리듬과 눈들의 광채와 포옹들과 느낌들과 냄새들과 형형색색의 이 창조의 소리들을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을 내가 사랑할 때, 나는 모든 것을 껴안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피조물들 속에서 나는 나의 모든 감각들을 가지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나를 기다립니다.
 
오랫동안 나는 당신을 내 안에서 찾았고, 내 영혼의 달팽이 집 속으로 기어 들어갔으며, 접근할 수 없는 장갑차를 가지고 나를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바깥에 계셨으며, 내 마음의 좁은 데로부터 나를 삶에 대한 사랑의 넓은 영역 속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 밖으로 나왔으며, 나의 영혼을 나의 감각들 안에서 발견하였고, 내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의 경험들을 더 깊게 하였고, 그것을 위축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나는 더욱 더 여기에 있고 싶습니다. 내가 보다 더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여기에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더욱 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의 무한한 원천을, 삶의 영원을 느낍니다.”

몰트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온갖 피조물 속에서 모든 감각들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내면적 인간 영혼의 비좁고 견고한 달팽이 집 속으로만 들어갈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 바깥으로 나와 찬란하게 펼쳐지고 끊임없이 생성하는 삼라만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하는 감각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접촉점을 찾으라는 것이다. 인간의 일상적인 형편은 영적 실재에 무감각하며, 영적 감각에 둔감하며, 신적인 실재에 무지하고 한마디로 이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찬란하게 펼쳐지고 끊임없이 생성하는 삼라만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하는 감각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일상적인 경험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을 하나님과 연관된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 감각이다. 기독교 미학에서 감성의 복권을 진지하게 수용하는 이유는 신적 실재를 머리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느끼고 표현함으로써 신앙의 생동성과 역동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신학은 전통적으로 거론되었던 영적 감각을 통해 감성의 복권을 시도할 수 있다.
 
영적 감각이란 무엇인가? 시편 115편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 생활하던 시기를 반영하고 있는 본문이다. 이방인들은 어마어마한 신상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랑한다. 그러나 이들 신상에는 감각이 없다. “신상은 입은 조각해놨지만 말하지 못하며, 눈도 그려놨지만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니라”(시 115: 5-7). 그렇게 크고 웅대하고 화려하지만 보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살아있는 감각이 신상에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상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라는 것이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 그와 같으니라”(시 115:8). 성서에서 무감각은 우상이고, 따라서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결국 감각이 죽어있고, 감각이 죽어 있으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예수께서는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고친다(막 7:31-37). 귀먹은 것이 고쳐짐으로써 그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말더듬이가 고쳐짐으로써 그는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이제 그는 세상과 방해받지 않고 소통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자기 힘으로 그리면서 살 수 있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감각을 회복시킴으로써 한 사람을 생동감 있는 인격이 되게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란 세상과 살아있는 소통을 할 수 있는 감각과 감성이 살아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육신의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한 때 제자들에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막 8:18)고 책망하신 적이 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대개 일반 사람들은 새로운 실재를 보지 못한 채 사는 데 그것은 “마음의 완악함”(막 3:5)과 “마음의 둔함”(막 8:17)때문이다. 그들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감각, 곧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예수께서는 육적인 감각만이 아니라, 영적인 감각이 열리길 원하고 있으며, 영적인 감각은 믿음을 통해 열린다는 것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자라도 보게 하고, 불신은 보는 자라도 맹인이 되게 한다(요 9:39).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의 말씀 안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각할 수 있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2) 기독교 미학과 기독교 윤리

기독교 미학은 오늘날 더 이상 진(眞)과 선(善)과 형이상학적으로 통일선 상에 있는 깨어지지 않은 미(美)의 이론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근대 형이상학의 근본 위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름다움의 범주는 기독론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종말론적 개념이다. 자연 역시 직접적으로 소박하게 하나님의 좋은 창조로서 경험될 수 없으며 유의미성과 무의미성 혹은 반의미성의 모호한 경험의 원천이다. 창조로서의 자연의 경험을 그리스도의 창조 중보직(요 1:3; 고전 8:6; 골 1:16f.; 히 1:2. 계 3:14)에서처럼 기독론적으로 정초할 수 있는 것처럼 창조의 미학도 십자가의 신학으로부터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노래로부터 그리스도를 해석했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한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형이상학적인 전체성의 미학과는 달리 예수의 삶과 정신은 십자가의 고난에서 “추(醜)의 미학”으로 인도된다.
 
우리는 십자가의 아름다움에서 “미학을 미에 대한 학설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아도르노(Th.Adorno)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는 만일 “미학이 아름답다고 칭해지는 것들의 체계적인 목록일 뿐이라면 그것은 미의 개념 자체 속에 포함된 생명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철학자 헤겔이 말한 것처럼,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을 쓰고 형장으로 십자가를 끌고 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순교적인 죽음의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의 미의 형태로는 표현할 수 없다.”
 
왜 인간은 추한 것을 표현하는가? 침묵이 때로는 위대한 발언인 것처럼, 아름다움의 부정인 추함이 어떤 것에 생기를 주는 표현적 서술일 때가 있다. 추함이 아름다움의 배경 또는 둘레가 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직접 미적 존재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이 주는 쾌감은 언제나 자유로운 자기활동의 감정을 주지만, 추한 것이 주는 불쾌감은 자기충동의 감정을 준다. 예술은 미적인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숭고, 비극 그리고 희극과 같은 성격적인 것(das Charakterische)을 포함한 미적인 것을 말한다. 십자가의 추는 비참하고 참혹한 현실, 죄악과 한과 폭력에 저항하는 예술적 형상화일 수 있겠다. 아도르노는 히틀러의 참혹한 통치를 몸소 겪은 다음 이런 말을 했다: “예술의 형태는 인간역사를 문서보다 더 합당하게 기록한다. 참혹한 형식은 참혹한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 일이 없다”. “예술은 추한 것으로 배척당한 것을 자신의 사안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와 같은 것들을 통합하거나 온건하게 만들거나 혹은 가장 역겨운 것을 유모를 통하여 그것의 존재와 화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이 그림으로 창작하거나 재생산하는 세계를 그러한 추를 통해 단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십자가 밑에 드리운 어둠과 침묵에서 어떤 빼어난 은유와 상징으로도 그릴 수 없는 현실을 만난다. 시인 송경동은 2007년 10월 11일 일산 주엽역 태영프라자 앞에서 일어났던 노점상 철거에서 죽음에 이르게 한 붕어빵아저씨 고(故) 이근재 선생님 영전에 바친 詩에서 어떤 그럴듯한 표현으로도 그릴 수 없는 삶, 어떤 그럴듯한 은유로도 보여줄 수 없는 현실, 어떤 아름다운 수사로도 형상화 할 수 없는 그 밤, 어떤 상징으로도 새겨줄 수 없는 그 아침을 이런 말로 노래한다.

당신의 죽음 앞에서
어떤 아름다운 시로 이 세상을 노래해줄까
어떤 그럴듯한 비유와 분석으로
이 세상의 구체적인 불의를
은유적으로 상징적으로
구조적으로 덮어줄까
[...]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보다 잔인하진 않았으리
이렇게 일상적이지는 않았으리
이렇게 보편적이지는 않았으리
이렇게 평범하지는 않았으리

 송경동,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 중에서


기독교 미학은 은유와 상징 등 그 어떤 수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불모지인 십자가에서 나타난 참혹한 형식인 ‘추’를 예수의 수난사를 통하여 읽고자 한다. “수난” (Passion)이라는 단어는 고통(고난)과 열정, 격정, 열애 곧, 열정적 사랑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하나의 큰 수난, 한 열정적인 사랑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는 박해와 고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밟는 것이 교회의 교리가 정한 배교일지언정 그 분이 행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버리는 것이 아닐 것이며,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과 나의 주님이 다름”을 한 성직자 페레이라의 고백을 통해 이렇게 증언한다. “그것은 신부가 오늘날까지 포르투갈이나 로마, 고아, 마카오에서 수없이 보아온 그리스도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위엄과 자랑스러움을 지닌 그리스도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름답게 고통을 견디는 얼굴도 아니었다. 유혹을 물리친 강한 의지의 힘을 보여주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의 발치에 놓인 그분의 얼굴은 바싹 마르고 지쳐 빠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밟은 탓으로, 동판이 박힌 판대기에는 거무스레한 엄지발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도 너무나 밟힌 탓에 움푹 파이고 마멸돼 있었다. 움푹 파인 그 얼굴은 고통스럽게 신부를 쳐다보며 호소하고 있었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괜찮다. 너희들에게 짓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하고 있다.’”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은 사실 예수의 삶 전체를 수놓았던 삶이다. 미학이 지각능력과 판단능력에 관한 이론이라면 기독교 미학은 예수의 미의식에 기초해야 한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고 이러한 판단을 내린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보고 옳고 그름, 온당함과 온당치 못함에 대해 내리는 판단을 미의식 혹은 미적 판단이라고 한다. 가다머(H.-G. Gadamer)에 의하면, “건전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란 특수한 것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는 한 구체적인 사건을 보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판단을 내린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모든 사람들은 관습, 전통, 조상이나 본인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이렇게 일반적인 관점에서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는 가장 중요한 것, 사물의 근본을 보고 판단한다. 그에게서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 그것이 예수의 미의식이고 미적 판단이다.
 
성서는, 특히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영광’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나사로의 병을 보고도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요 11:4) 영광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용어이다. 영광이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는 능력과 힘이다. 그 영광은 그와 하나가 된 아들 안에 나타나며, 아들을 통하여 교회에 전달된다. 영광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일을 드러내는 집약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미학적인 개념이다. ‘영광’이란 말의 일반적인 뜻은 찬란, 찬연, 휘황하게 빛난다는 뜻이다. 영광이란 ‘아름다움’이란 말의 성서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기독교 신앙의 지고의 아름다운 경지를 본다.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고, 말과 행위로 표현하고 그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산다. 요한은 주님의 영광을 이렇게 설파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요 1:14)
 
예수는 세상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는 심미감을 갖고 있다. 예수의 그 같은 미적 판단은 그의 아가페적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다시 『침묵』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증언한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들 중 그리스도가 찾아 헤맨 것은 가버나움의 하혈병 앓는 여인이라든가, 사람들에게 돌로 얻어맞는 창녀처럼 아무 매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존재였다. 매력 있는 것,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린다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빛이 바래 누더기가 다 된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사랑이다.”
 
기독교 미학이 포괄적인 신앙의 지각의 이론이라면 그것은 윤리적 지각의 이론을 포함한다. 신앙의 말씀은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응답과 책임을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예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마 7:24), 다시 말해, 말씀에 따라 살고 행동하는 자라야 지혜 있는 사람이다. 신앙의 응답은 “예-예-남발”, “주여-주여-부르짖음”이나 “입술고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며 마음으로 믿으며(롬 10:10), 이에 상응하는 몸짓과 삶의 행위로써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행하는 자여야지 듣는 자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약 1:22). 이러한 인식은 바로 신학적 미학에 속한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린다”(약 1: 23-24).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가 없다면 이 신앙은 새로운 자기 인식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망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 기독교 미학의 근본개념 :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미학과 윤리는 삶을 영위하는 태도와 삶의 형식을 보는 두 가지 형식이다. 이 두 형식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섭하거나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될 수 없으나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는 미학과 윤리의 상호관계를 고린도후서 3장의 예를 통해 서술하면서 기독교 미학의 근본개념을 제시하려고 한다.
 
바울의 편지들은 처음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바울은 후기의 복음서와 달리 예수에 대하여 거의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의 삶과 사역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에 더 역점을 두어 서술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2절에서 고린도의 남녀 그리스도인들을 사도를 위한 편지(추천서)요 심지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의 텍스트인 바, 그 텍스트의 저자는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 살아 있는 편지는 모세가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이 차이는 영과 문자의 차이이며 복음과 율법의 차이이다. 벗어야 할 수건은 옛 계약 문서에 덮인 수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덮인 수건이다. 그리스도인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러나 구약이 가릴 수 있었듯이 우리의 복음도 가릴 수 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4-6). 구약의 텍스트, 다시 텍스트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사이에 해석학적 순환이 결성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상을 우리에게 펼쳐 보임으로써 구약성서의 궁극적 의미를 완성한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구약성서가 설명하고 찬양했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모상이다. 이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빛난다. 하나님의 영광에 감촉된 신앙은 인식론적 과정만이 아니라 감성적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접촉되고 설득당하고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전체를 붙잡는다. 복음의 말씀 속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는 자는 그 자신 그리스도 상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할 것이고 그 상으로 변할 것이다. 말로 선포되고 문자로 기록된 복음의 의미는 인간의 삶 속에서 만나는 역사적 결단 속에서 마침내 완성된다. 복음을 듣고 읽는 행위는 삶의 실현 속에서 완성된다. 성서로 문자화된 그리스도의 초상이 그의 실재의 모방이듯이 신앙의 삶은 그리스도의 모방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권면한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은 곧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얼굴이다(갈 3:1).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 그러나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자연적인 초상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는 부활의 빛에 의해 조명된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신앙은 십자가에 달린 자를 다른 눈 곧, 밝은 눈으로 관찰한다. 신앙은 눈앞에 전개된 사실 너머를 본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예수의 삶과 인격의 부분적 특징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와 사역 그리고 죽음이 신앙에 새로운 빛, 즉 새로운 창조의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16-17). 신앙의 눈으로 보는 그리스도상은 단지 발명품이나 종교적 환상이 아니라 신앙인에게 인상을 주고 감동시킴으로써 그 삶을 변화시키고 참되게 만든 발견된 진리이다. 미학적 성경 읽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찬반(贊反)에로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자 앞에서 새로운 삶으로 변하기를 원한다.
 
‘영광’은 성서와 신학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 때 나타난 현상과 경험을 제시하기 위한 개념이기 때문에 기독교 미학의 근본개념으로 삼아도 좋다고 본다. 기독교 정통주의의 마지막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난다. Soli Deo gloria!(오직 주님께만 영광!) 웨스트민스터 간추린 교리문답이 말하듯이 인간의 중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를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인간의 이기적인 삶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 존 웨슬리에게 이것은 마음과 삶의 성화로 전개된다. 사실 초기 교부들 이래로 신학 전통은 항상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임을 말해 왔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요, 인간의 최고의 목적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향유하는 것, 이것이 인생과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모든 열락(悅樂)의 궁극 원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부름을 받는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보며 이 빛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가운데 비추었다고 말함으로써 영광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고 그것을 새창조론과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는 착상을 제공한다.


4. 기독교 미학 : 반(反)하나님 나라에 저항하고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환희

신학함이란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는 온갖 反하나님의 나라의 행태에 분노하고 저항하며 그럴수록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며 그리는 환희(歡喜)와 열락(悅樂), 곧 기쁨과 즐거움이다. 독일의 여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 Sölle)는 하나님을 그리는 이유를 복음에 대한 환희와 反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노로 요약한 바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본래적 언어는 예언자적 저항과 분노의 언어이기보다 기쁨과 평화의 언어이다. 그녀는 저항은 아름다움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덧붙인다. “성 프란치스코나 튜링엔의 엘리자베스 혹은 마르틴 루터 킹의 저항은 아름다움의 지각에서부터 자란 것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위험한 저항은 아름다움에서 태어난 것이다. 월터스토프도 “평화의 가장 고등한 수준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항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미로움과 달콤함의 맛을 가직할 때 단지 파괴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창조로 나아갈 수 있다. 시편에서 ‘기쁨’은 ‘찬양 시’의 직접적인 동기이고, ‘고난’은 ‘탄식 시’의 직접적인 동기이다. 기쁨과 탄식, 이것은 생리적으로 나오는 인간의 대극적 근본 감정이며 열정이다. 감정과 열정을 담아낸 신학의 언어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가 나의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하고 질문했다. 나는 ‘아름다운 힘’을 사랑한다고 답하고 싶다. 성 프란체스코,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고 마르틴 루터 킹의 저항의 힘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체험함으로부터 자란 것이다.
 
개신교인들은 “예술품이 언제나 작가가 믿는 종교의 표현이거나 종교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작가는 자신의 종교를 표현하기 위해 예술을 창작한다는 논제를 개발해 왔다.” 그러나 예술과 신앙(신학)의 관계에서 예술은 단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와 교리를 설명하거나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써만이 아니라 예술 자신만이 가지는 독특함과 고유함으로 신앙(신학)과 관계해야 한다. 신학의 역사가 옛 것, 본질적인 것, 같은 것, 동일한 것을 고수하는 정통의 역사, 동일성의 역사라면 예술사는 새 것, 다른 것, 창조적인 것, 본질의 변형적 표현, 차이를 추구해 온 이단의 역사이다. 신학에서는 이성의 논리를 통해 동일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혔다면 예술에서는 감성을 통해 차이가 배양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미학은 신학과 교회가 예술을 통해 자기혁신의 시각에 눈뜨는데 기여할 것이다.
 
미래의 신학 방법론에는 예술적 감성론이 추가되어야 한다. 인류 문명은 최근 새로운 세계문화(Weltethos)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과 경제개발이 많은 공헌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생태계의 위기와 빈부 격차의 심화, 인간성의 파괴, 생활세계의 파편화 등 인류를 파멸의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인류는 당혹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면서까지 물질적 편리와 풍요를 바라보는 성장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본래적인 인간성의 실현과 성취를 바라보아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그동안 자연과학적 사유는 세계를 대상화, 사물화하고 물질의 표피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었다. 생명공학과 뇌과학 등 고도의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도 인간성을 하나님과 잇대어 이해할 수 있는 전체적 감성으로써 신학하기가 요청되고 있다.
 
계몽주의와 근대화 이후 신학과 교회는 올바르고 지적인 교리의 형성(정통 교리),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분석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행동(정통 행위)에만 지나치게 전념함으로써 전일적(全一的) 기독교 영성 형성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인간, 자연 및 우주의 전체성은 큰 이야기나 이성적 체계로써만이 아니라 작은 이야기, 느낌과 체험, 곧 미학적 감성을 통해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미감적 경험(느낌, 체험)은 물질의 깊이 안에서 생동하는 영을 찾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성례전성이 드러나게 된다. 기독교 미학의 힘은 성령 안에서 역사하는 감수성과 상상력, 이성을 해방하여 기존 리얼리티의 독점을 타파하고 하나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데 있다.

 

출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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