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스크랜튼 선교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한국의 대표적인 여자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는 그 전신 이화학당이 설립된 지 120년이 넘었지만 설립자에 대한 연구는 변변치 못했다. 설립자는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1832~1909) 선교사로, 그의 전기가 국내에서 처음 발간된 게 겨우 2년 전이다. 그러나 2차 사료의 편집에 지나지 않았다.
신간 <한국을 사랑한 메리 스크랜튼>(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은 스크랜튼 연구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이덕주 교수(감신대)가 미 감리교 해외선교부 보고서와 스크랜튼 가족의 글 등 1차 사료를 통해 스크랜튼이 선교를 결심한 배경과 여성 선교·교육에 힘쓴 현장을 생동감 있게 그렸고, 이경숙 교수(이화여대)가 스크랜튼의 여성교육정신이 이화여대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살폈다. 재야 연구가인 엘렌 스완슨은 내한 이전 스크랜튼의 삶과 가계(家系)를 추적했다.
이들에 따르면 졸업생 17만 명을 배출한 국내 최대 여자대학의 설립자는 1832년 12월 9일 매사추세츠주 벨처타운(Belchertown)의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20세에 결혼하여 40세에 사별한 남편 사이에 외아들이 있었는데, 혼자 아들을 뒷바라지하는 가운데서도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후원과 기도를 통해 국내외 여성선교를 지원했다.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스크랜튼이 작성한 ‘Woman’s Work in Korea’라는 문서에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여성해외선교회의 한국 선교는 1883년 9월 오하이오주 레베나라는 작은 도시에서 출발했다 할 수 있다…그날 강연사의 마음에는 아직 문호를 개방하지 않은 한국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나이 많은 부인의 마음과 눈을 주님께서 움직이고 열어주심으로…그는 일어나 말하기를 자신에게 돈이 조금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노라 했다. 한국이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그 돈을 선교회에 맡기겠다고 했다…이때로부터 이 암흑의 나라를 향한 기도가 시작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덕주 교수는 “스크랜튼이 이 모임에 참석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익명의 한 노인이 기부한 한국 선교 기금에 대한 이야기는 스크랜튼에게도 기도제목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후 스크랜튼은 여성해외선교회로부터 한국에서 선교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받았고, “처음엔 나이 때문에 사양했으나 결국 끈질긴 설득을 받아들여 52세의 나이로 한국에 개척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 내외, 아들 내외, 그리고 손녀딸과 함께 역사적인 한국행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 여성들은 “다가가기만 하면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고 이덕주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스크랜튼은 실망하지 않고 “도망치는 한국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 애썼고, 만나되 남성보다 여성을, 여성 가운데 딸보다도 어머니를 만나려 했다.” 여성 차별에 대한 유교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외국인 여성으로서 남성을 만나기란 불가능했고, 딸들을 가르치려면 먼저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화학당 초기 학생들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이화학당의 시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3개월 만에 떠난 첫 학생에 이어 두 번째 학생은 집이 너무 가난해 먹일 것이 없던 어머니가 맡긴 경우였고, 세 번째 학생은 전염병에 걸려 서대문 성벽 아래 버려진 여인의 딸이었다. “이처럼 그는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으로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경숙 교수는 스크랜튼을 선교사 만든 여성해외선교회가 “남성 선교사의 보조로 만족하지 않고 여성들만의 자신감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성취하겠다는 미국 감리교 여성들의 의지의 결실”이라며 “그 정신이 현재까지 가장 잘 살아있는 곳이 한국의 이화여대”라고 말했다. “시대와 지역은 다르지만 두 기관 모두 남녀평등을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라고 보고, 여권 신장이나 여성의 지위 향상을 예수의 가르침과 결부”시켰다고 말했다.
밑바닥의 소녀들을 데리고 시작된 역사는 “사회복지학과와 특수교육학과 설치, 장애학생을 위한 시설 등”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책은 2009년 10월 스크랜튼 서거 100주기 기념학술대회 때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