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김이곤 명예교수 |
그러나 그의 이러한 해석은 그것이 매우 탁월한 규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석에 대한 교회 교리화 때 생긴 “오해”로 인한 그 폐해도 또한 매우 컸다고 하겠습니다.
그 오해의 치명성은, 다음과 같은 말씀, 즉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퍼졌느니라’].”(롬 5:12)라고 한 사도 바울의 그 말씀이 “죄의 생물학적 유전성을 가진 원죄이론”으로 잘못 해석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위 “유전적 원죄이론”은, 본래는 사실, 기독교가 “아니라” 후기 유대교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서, 외경(外經) “제4 에스드라스”(4 Esdras 7:118)에 나오는 “아담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죄를 범한 것은 너일지라도 타락은 너의 것만이 아니고 네 후손들인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라는 말씀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마침내 해석상의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었던 바울의 창세기 3장에 대한 해석”을 거쳐서, 소위,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유전적인 원죄이론”으로까지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의 의도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담의 “죄”를 “생물학적 유전성을 가진 <원죄> 교리”로 확대해석한 초기 기독교의 그 해석학적 오류는 하나님의 인간창조를 “볼썽사나운 실패작”으로 만드는 신성모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출 34:6)을 왜곡시키는 불충도 또한 저지르는 “원치도 않는 불행스러운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성서해석자들이 이러한 오류를 잘 인식, 파악하고, 한결같이, 한 목소리로! 창세기 3장 기록과 사도 바울의 창세기 3장 해석을 “유전적 원죄 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을 강력반대하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한 인류의 <죄의 역사>를 분명 <죄의 생물학적 유전>현상으로가 아니라! <죄의 퍼짐 현상>으로만, 즉 일종의 “전염현상”으로만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반복적인 표현인 “왕 노릇”이라는 표현들(롬 5:14,17,21)을 통하여 강력한 부동의 확신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즉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그런]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그리스도)의 모형(=동형)이라.”(롬 5:14)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였던 의도는 매우 분명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이러한 아담의 장차 오실 모형이라고까지 말한 것에 이르러서는 그 의도가 더욱 분명하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는 유전적인 것, 이른 바,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죄”는 생물학적 유전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염성”을 가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는 하나님의 경고 명령(토라!?)이 “범죄 이전의” 첫 인간 아담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것 그 자체가 또한 “죄”라고 하는 것이란 본래부터! 결코 그 무슨 운명적이고 숙명적이며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맡겨진 실존적이고도 책임적인 것, 즉 인간이 자기 의지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고 하겠습니다.(이런 점에서 “운명”과 “자유”는 대극 관계에 있다고 말한 파울 틸리히의 말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놀랍게도(!), 창세기 4:7에서는 야훼 하나님께서 동생(이웃)을 살해한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향하여 살인죄를 추궁하며 심문하실 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맹수처럼]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나, <새 번역 본>]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죄”는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결단의 자유”를 가지고 맹수를 제압하듯이 제압하고 “다스려야”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즉, 창세기 3장의 <인류의 첫 범죄기사>에 관한 해석을 통하여, <첫 인간 “모형” 아담>과 함께 인간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그 죄의 <통치역사>와 그리고 이<죄의 통치역사>를 “종식시키고”(!) 그 대신에 새로운 제2의 역사, 즉 그리스도의 <은총과 사죄의 역사>를 시작 시킬 그 <둘째 인간 “모형”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역사> 사이를 “동형론적으로”(!) 평행시킨 후, 저 “둘째 아담” 예수를 통하여 메시아적 구원시대(=사죄의 은총시대)를 기대하였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이러한 동형론적 문맥 안에서 첫 인간 아담 시대 대신에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즉 사죄와 은총의 시대를 여는 그 “둘째 아담”이 바로 다름 아닌 인자(人子)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전서 15:47-49에서 “<첫 사람[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예수 그리스도]>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도 입으리라.”라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분명, 이 <동형론>(typology)은 두 시대 사이의 “동형론적 전이(轉移)”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생물학적 유전 전이(轉移)”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고린도 전서 15:45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사도 바울은 “첫 인간”(=“생명을 얻게 된 생물”)과 “둘째 인간”(=“생명을 주는 영”) 사이의 절대적 “질적 <차이>”와 “외형상의 <닮음>” 사이를 유비적(類比的)으로 설명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범죄 기사를 통하여 우리는 그 무슨 “생물학적이고 유전적인 죄, 즉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원죄교리”를 추론해내어서는 안 된다고 하겠습니다. 19세기부터 현대 성서주석가들이 줄기차게 말해온대로, 창세기 3장은 결단코 “죄의 기원” 또는 “악[악마]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한 본문은 “아니”였습니다. 사실, 창세기 3장은 그 어디에서도 서구 신학계에서 거의 정설처럼 통용된 저 “타락”이라는 그런 용어조차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유전적 원죄이론“은 창세기 3장의 본문이 의도하는 바와는 너무 동떨어지고 그 논리가 매우 부정확하여 신뢰하기 힘든 논리라고 하겠습니다. 실로, 창세기 3장은 죄 또는 악의 “기원”에 관심한 것이 “아니라!” 죄 또는 악이 생겨나는 그 “현실”이 무엇이며 그 현실이 또한 어떠했는지에만 전적으로 관심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진상은 대강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우선, “죄” 또는 “악”은 창 3장의 문맥상 “나-너-그것” 사이의 <상관관계 안에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그 무엇보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점입니다. 즉 “죄”/“악”은 스스로! 생겨나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 활동”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나→나 자신, 나→너 그리고 나→그것(그이)> 사이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뱀(동물)” 사이의 관계도, 심지어는 “나”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식물)” 사이의 관계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유혹자 “뱀”의 경우, 그 “뱀”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 생물들 중의 하나”(창 3:1)이지 결코 그 이상은 아니라는 점을 특히 유념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격화된 그 뱀을 그 무슨 하나님과 필적할만한 “최고 악신”(사탄)의 변신으로 보는 그런 “이원론 따위는 마땅히 퇴치되어야 할 ”이단사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 무슨 “뱀”이 가져온 것이거나 악마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나(하와)-너(하나님/아담)-그것(뱀/지식의 나무) 사이의 “관계 작용” 안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라 하겠습니다(그러므로 그 무슨 “性慾”이 -인간의 그 어떤 구성요소가- “원죄”라는 추론은 전혀 적절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2)둘째로는, “죄”가 가진 “도전성”(공격성, 유혹성)을 지적하여야 할 것입니다. “죄”는 결코 “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창세기 4:7이 말하듯, “죄”는 “자기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자신을 노려보는 “맹수”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뱀”은 여인 “하와”를 향하여, <“참으로?”/“정말로?” 하나님께서는 동산 안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고 질문하며 불신조장의 “덫”을 놓습니다.(cf. 욥 1:9-11; 2:7) 이러한 “죄의 덫”은 일종 비무장지대(DMZ)에 매설된 폭발물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뱀”의 그 “참으로? …”라는 불신조장의 유혹에 굴복한 하와는 즉각 불신하는 마음에 전염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말씀하셨다”(창 3:3)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창 2:17)을 부풀려 왜곡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불신”이라는 악은, 창세기 3장의 본문이 분명하게 밝혀주듯이, “유전”된 것이 아니라 매우 빠른 속도로, 예컨대 구제역의 전염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염”되어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아담도 그래서 죄를 심문해 오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 그가 그 나무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을 뿐입니다.”(창 3:13)라고 말함으로 금령을 어긴 그 책임을, 적반하장으로, <하나님>과 <여자>에게로 전가시켰던 것입니다. 실로, “죄”의 전염성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절묘한 해학(諧謔; 창 3:9-19)으로 응징 받았던 것입니다.
(3)셋째로는, “죄”가 가진 그 “파괴적 효력”이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본래는 먹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되었었던”(창 2:9,16-17) 그 “생명나무 실과”가 죄를 범한 그 인간에게“만”은(!!) 접근 금지된 사실(창 3:22,24)을 강조함으로서 이 이야기가 마무리된 그 것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범하지 않는 자에게는(“토라”를 범하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닫혀 있지 “않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cf. 창 3:22-23). 바로 이 점이 고대 중동 지역에 회자되었던 신화를 근본적으로 극복한 구약성서의 신학적 위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가메쉬(Gilgamesh) 신화에서는 “금단의 나무”가 아예 “생명나무”였습니다만, 구약의 에덴 기사에서는 동산 중앙에 “두” 나무가 있었고(창 2:9), 그 두 나무 중 생명나무는 본래는 금단의 나무가 “아니”였고!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만”이 금단의 나무였으며(창 2: 17), 다만, 인간이 죄를 범하고 또! 그 범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창 3:20-21)를 입고서도 끝내 회개하지 않아 마침내 낙원에서 추방된 그 후에야(창 3:22-23) 비로소!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다고만! 증언하였던 것입니다(창 3:24).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것도 -인간의 그 사멸적 본질(창 2:7)과는 별개로!- “죄”와 더불어 인간세계 속으로 “쏘는 독침의 재앙”을 가지고(호 13:14b; 롬 15:55-56) 들어와 위협적으로 인간세계 위에 군림하게 되고 “왕 노릇”(롬 5:17)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성서적 이해도 창세기 2:7,17과 3:19(cf. 시 90:3)에 대한 올바른 주석과 사도 바울의 편지(롬 5:17)에 나타난 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동형론적 관계>가 가진 의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가장 선명하게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죄”와 “죽음”은 본질적으로 “유전적이고 숙명적인 것”은 결코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온 <실존적 성격을 띤 “위협적이고 전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죄”와 “죽음”은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실존)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죄”의 생물학적이고 유전적인 성격의 운명론에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죄”의 그 뱀과도 같고 맹수와도 같은 <유혹과 위협>에 맞서서 “죄”를 <다스리는 능력>을 우리 주 예수로부터, 즉 “죄와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이 우리 위에 군림하여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유전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러므로 운명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전적이고 운명적인 “원죄”는 -그런 그 어떤 허황된 교리는 거기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성서의 세계에서는 그런 “유전되는 운명적인 원죄”라는 것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