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2일 합일합방조약이 체결되기 보름 남짓 전, 전남 광양출신의 매천(梅泉) 황현(黃玹)선생은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국치(國恥)를 통분히 여기며 음독(飮毒) 자결하였습니다. 선생은 마지막 <자식들에게 남기는 글(遺子弟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년에 국가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황현 선생은 관직에 나가는 대신 초야에 묻혀 시를 짓고 역사를 저술하던 문장가였습니다. 망국(亡國)의 직접적인 책임을 질 관직에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작 당시의 집권 벼슬아치들과 식자(識者)들은 일제의 강제 병탄(倂呑)에 협력하여 나라를 송두리째 가져다 바친 공(功)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일본 귀족과 유사한 공·후·백·자·남의 작위를 수여받고 작위에 따른 하사금을 받아 챙겼습니다.
<조선총독부관보> 제38호에 따르면 1910년 8월 22일 강제로 한일합방조약 체결에 성공한 일제는 그 해 10월 7일 대한제국이 망하는데 공을 세운 76명의 조선인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주었습니다. 수작자(授爵者)는 바로 왕실과 집권노론의 벼슬아치들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던져도 시원찮을 집권자들은 이렇게 일제가 던져준 고깃덩어리나 물고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정작 초야에 묻혀 때 묻은 사서(史書)나 벗을 삼고 있던 황현 선생은 망국(亡國)을 통분히 여기고 국치(國恥)의 책임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가 남긴 절명시의 한 대목입니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온 세상이 이미 가라앉아버렸구나(槿花世界已沈淪)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년의 세월을 돌아보니(秋燈掩卷懷千古) 인간 세상에 식자노릇하기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라는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말은 1808년 프랑스 정치가이자 작가인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회지도층인 ‘노블레스(귀족)’은 누리고 있는 명예만큼 ‘오블리주(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인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이 천년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터지면 황제와 귀족들부터 앞을 다투어 최전선에 나가 싸웠고 공공시설이나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는데 자신들의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이 귀족의 덕목이었고 자랑스러운 명예였습니다.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황현선생의 이 탄식은 국가존망의 위기 앞에서조차 그저 개인의 안위와 가문의 영달만을 쫓을 뿐 마땅히 져야 할 국가수호의 책무를 내팽개쳐버린 당시의 사회지도층을 향한 통분이 담겨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선생의 여섯 형제는 식솔 사십 여명을 거느리고 온 집안이 만주로 이주하였습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저서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 의하면 이회영 선생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10대 후손으로 이항복으로부터 시작해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李裕承)에 이르는 동안 무려 6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린 호화명족(豪華名族) 중의 명족입니다. 그럼에도 ‘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냐’며 이회영의 여섯 형제는 당시의 전 재산을 팔아 그 돈을 들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집단 망명을 하였습니다.
이회영 형제들이 가산을 팔아 마련한 돈은 쌀 한 섬이 3원 하던 당시 40만원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오늘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800억 정도 됩니다. 그 돈으로 이회영 일가는 만주에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1911년) 그 후 1920년에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10년간 무려 3500명가량의 독립군을 양성해내었습니다.
뤼순감옥에서 옥사(獄死)한 이회영 선생을 포함해 다섯 형제들 모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문으로 죽거나 극심한 가난 속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오직 다섯 번째 이시영(李始榮) 선생만이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이승만 정부의 초대부통령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호족(名門豪族)으로서 차라리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이회영 선생이 형제들에게 만주로의 집단망명을 설득하며 했다는 말입니다. 조선망국의 캄캄한 어둠 가운데 찬연히 빛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9년 행정안전부에서 조사한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수’는 100점 만점에 26.48점에 불과합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집권세력을 포함한 사회지도층들을 보십시오.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집권당대표, 장차관들, 권력을 잡고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 어쩜 하나같이 병역기피,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탈세의 이력이 그리도 똑같은 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입에선 안보강화와 공정사회건설의 구호가 넘쳐납니다. 지금 우리사회의 위기는 염치(廉恥)의 실종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염치를 회복하고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리는 명예에 걸맞은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글: 김성 목사(예수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