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만우 송창근 목사의 납북 6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고자 주재용 박사(한신대 전 총장)의 기고글 ‘만우 송창근의 성빈의 삶과 사상’을 총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경건과신학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주 박사는 그의 제자 장공 김재준과는 달리 연구 및 평가에 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송창근을 오랜 기간 연구, 지난 2008년 말에는 송창근 평전 『벽도 밀면 문이 된다』(송우혜 저·생각나눔)를 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편집자주
결론
▲주재용 한신대 명예교수(한신대 전 총장) |
송창근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엄격한 것 같으면서도 정이 많았고 대범하면서도 세심하고 자상하였다.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해학적 인간이었다. 어떤 틀에 얽매이기를 원치 않았으며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며 항상 개방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참 마음, 생각을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에게 감격하여 조선을 사랑했고 교회를 사랑했으며 사람을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분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요즘 천하공지하는 바에 조선교계에도 무슨 당이 있다, 누구의 파가 있다 하야 서로 놀여 보고 못 믿업어 하는 터이요. 게다가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핏줄이 서로 다은 내 동족인데도 北놈 南놈 하야 스스로 갈등을 일삼으니 이엇지 함인가, 北놈이 잘되고, 南놈이 잘못되어도 조선이 亡하는 것이요, 北놈이 꺼꾸러지고, 南놈이 勝한대도 결국은 조선교회가 亡하는 것 외에 소득이 없을 터인데 그래도 피아의 성찰이 부족한 듯하니 오십년 禧年이냐, 오십년 噫年이냐, 이 얻더한 교계의 비극이냐 슬프다 누구를 허물하랴. 바로 생각하면 모두 다 나의 허물이요 나의 죄책이 아니런가”
그는 또 조선 사람의 생활태도에 대해서 한탄하였다.
“오늘 우리 조선 사람의 생활을 들여다 보느라면 그래도 무슨 됨즉한 것이 보여야 할 터인데 각개인 개인의 사생활을 보나 집단과 집단의 생활을 보나 서로 물고먹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와 악독으로 일관한 것 밖에 다른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이 무삼 까닭이오니까?”
송창근은 남북의 통일이 민족사적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정권적 차원에서 통일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남과 북의 정치 지도자들과 교권주의, 지역 패권주의에 의한 교회 분열이 더욱 극심해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오늘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살아 계셨다면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낳은 멋진 지도자요 경세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송창근을 ‘성빈과 화해사상의 민족 목회자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감격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성 프란시스의 삶이 “마음과 마음의 감격이오 인격과 인격의 감격이오 영과 영의 감격뿐”이라고 했으며 신앙의 근본문제는 “생명과 생명의 감격”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에 감격했고 하나님의 현존에 감격했으며 예수의 인격에 감격하였다. 이 감격에서 그는 경건과 성빈의 생활을 하려고 하였다. 이 감격은 오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국난을 이겨나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힘을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송창근이 김대현, 김재준과 함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의 주춧돌의 하나인 것이다. 이 대학의 설립이념 즉 교육이념은 송창근의 삶과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휴양 겸 학교 후원금 모금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고혈압으로 졸도하여 몸의 움직임이 불편해 진 상태에서 귀국한 송창근은 교우와 학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귀국 인사를 했다.
“여러분, 나는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 왔소이다. 그러나 일년동안 미국에서 병을 얻어 누어 있으면서도 열심히 기도하고 염려한 것이 우리 신학교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소가 되자고 하고 싶습니다. 평생토록 열심히 일하고 죽어서도 고기요 가죽이요 뼈요 할 것 없이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소야말로 우리의 승엄한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소와 같은 심정으로 이 신학교를 위하여 마지막 하나까지 바치는 정성을 가지렵니다. 내 생명을 건지시어 다시 고국에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도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학교를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서 6‧25 전쟁 때 피난 가는 것도 거절했고 내 시체를 학교 정문에 묻어 학생들이 밟고 다니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었다.
한신대와 기장이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김재준의 자유사상과 송창근의 경건, 김재준의 학문적 머리와 송창근의 뜨거운 가슴이 모자이크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전자가 학문과 신앙의 조화로 한신과 기장의 얼을 심었다면, 후자는 경건과 학문의 조화로 한신과 기장의 얼을 심었으며, 전자가 머리로 한신과 기장의 방향지표를 예시했다면 후자는 몸으로 방향지표를 예시했다고 할 것이다. 장공의 학문의 높은 봉과 만우의 은혜의 깊은 골 가운데 그 어느 하나라도 간과되든가 부정되면 한신과 기장은 튼튼하게 발전되어 갈 수 없을 것이다. 한신과 기장의 정신은 김대현의 ‘필헌사상’, 김재준의 ‘자유사상’ 그리고 송창근의 ‘경건한 성빈사상’으로 조성되어 있음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송창근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