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베리타스 DB |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에 무덤 자리를 보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종말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민간 신앙 때문이었는데, 종말의 날에 남들보다 한 걸음이라도 앞서서 부활해 보겠다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처사였다. 따라서 너도나도 예루살렘 가까이 묻히려 했을 테니, 결과적으로 주변에 수없이 많은 무덤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문제는 순례 기간 중에 발생했다. 13세가 넘은 이스라엘의 성인 남성들에게는 매년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할 의무가 있었다(누가 2,41-52 참조). 하지만 그때마다 예루살렘 성 외곽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무덤들 덕분에 볼 성 사나운 광경이 순례객들의 눈 앞에 펼쳐지곤 했다. 이처럼 순례객들이 무덤을 봄으로써 ‘부정’을 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가 바로 ‘무덤에 회칠’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정기적으로 무덤들을 아름답게 꾸며서 그 속에 들은 더러운 내용물들을 가려보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무덤에 새롭게 회칠을 함으로써 오히려 먼데서도 무덤을 쉽게 알아보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눈 가리고 아웅’식의 속셈이 보기 좋게 드러난 꼴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입에 담겨진 ‘회칠한 무덤’이란 겉으로는 그럴싸하나 속은 썩을 대로 썩은 사람, 즉 위선자를 은유적으로 일컫는 표현이며 당시에 흔히 쓰였던 말이다. ‘독사의 새끼’도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독사’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귀여움을 자아내는 표현인 ‘새끼’의 합성어이고, ‘뱀 같은 자’와 ‘위선자’도 이들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들이다. 마태 3,7과 누가 3,7에 보면 세례자 요한 역시 같은 말(‘독사의 새끼’)로 위선자들을 질책하는데, 이것이 예수 당시에 통용되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탄’은 마귀들의 괴수를 일컬으며, ‘개’는 흔히 이방인을 낮춰 부르는 별명으로 사용되었고, ‘여우’는 간교한 자를, 그리고 ‘어리석은 자’와 ‘악한 세대’와 ‘눈먼 길잡이’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는 말들이다.
예수는 여자를 음흉한 마음으로 쳐다보기만 해도 이미 간음죄가 성립되었다며, 그런 경우에는 차라리 ‘그 눈알을 쏙 빼어 던지라’고 하며, 오른 손이 죄를 지었다면 ‘그 손을 뚝 잘라 버리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인자를 배반하느니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 것이고’(마태 26,24), 세상의 종말이 오면 악인들은 추려져 ‘불가마에 던져질 텐데, 거기서 울고 이를 갈게 될 것’(마태 13,49)이라고 하며, 남을 죄짓게 했을 때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져 목숨을 끊는 편이 낫다’는 말씀도 한다(누가 17,2). 대단히 감각적이며 하나같이 머리칼이 쭈뼛하게 만드는 말씀들임이 분명하다. 독설가로서 예수의 면모는 바로 이런 식의 충격적인 표현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