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대화문화아카데미가 새해부터 이사장을 새로 맞이하게 됐다. 신임 이사장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이삼열 박사이다. 그는 군사독재시절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해외에서 반독재 투쟁을 했고 파독 광부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했다. 민주화 시대 이후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의 후진국 지원에 열성을 다했다. 신임 이사장을 만나 아카데미 운영의 포부를 들어보았다. 대담은 2월 12일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 집무실에서 진행됐고 본지 서광선 회장이 주재했다. 대담 내용은 2부로 나누어 전재한다.
서광선: 새해에 중책을 맡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이라는 직함은 들었는데 나는 크리스천아카데미가 제일 귀에 익숙합니다. 대화문화아카데미는 강대인 선생이 시작했고, '여해와 함께'는 박종화 목사와 연결된 것 같습니다만, 이 세 기관에 대해 독자들에게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삼열: 원래는 강원용 목사님이 1965년에 크리스천아카데미로 시작했는데, 95년에 대화문화아카데미로 바뀌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명칭이 대화운동을 하는데 다소 제약이 있다는 의견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5년에 50주년이 되면서 재단법인 이름을 '여해와 함께'로 정했습니다.
서광선: 크리스천들이 대화를 잘 못하잖아요, 하하.
이삼열: 하하. 기독교가 시작했는데 '크리스천'이라는 명칭을 못 쓰는 것이 유감스럽기는 합니다. 애초에 독일의 기독교아카데미를 모형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원도 받았는데, 90년대 말 우리나라가 OECD 국가가 되고 독일 원조가 끊어지면서 자립을 해야 했던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지원단체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사회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게 하는 것이 그 동안 노동문제, 농촌문제, 여성문제 등을 주로 다루었던 이력을 확장시킬 수 있겠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일 겁니다. 제 생각에는 타당한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대화문화아카데미로 이름을 바꾼 이후에도 평신도 교육과 같은 기독교 활동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대화문화아카데미가 있고, 기독교 내의 교육운동이나 신학적 운동을 맡은 크리스천아카데미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생태계를 연구하는 '바람과 물 연구소'라는 '배곳'(배우는 곳)이 경기도 가평에 있습니다. 이 세 기관이 법인 '여해와 함께'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지요. 저는 대 사회적인 평화포럼이나 교육문제나 사회문제, 민주화 문제 등의 프로그램을 주로 수행합니다.
서광선: 이 박사님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전문 간사로 일을 시작하셨지요? 어떻게 그 일을 맡게 되셨습니까?
이삼열: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장교를 4년 만기제대하니까 67년이었습니다. 그해 연초부터 일을 하게 됐습니다. 군에 있을 때 사회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요. 한일회담반대, 통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등등... 당시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갈등이 심했는데다가, 북한 책 한권 읽었다고 10년이나 징역을 살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철학을 전공했으니까 글을 쓰려고 마르크스 책을 한 권 빌리려고 해도 문교부장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었지요. 이런 시대를 거치면서 제가 몸담고 있던 보수적 신앙에 사회적 돌파력이 필요하다는 각성을 했었습니다.
원래 저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장신대에 입학했었습니다. 아버지 명령도 있고 제가 목사 아들로서 고등학교 때부터 목사가 될 결심을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신학교를 다니지는 못하고 군대를 갔습니다. 제대한 뒤에 신학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마음먹었었지요. 그런데 군대에서 그런 사회적 사건들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신학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우연히 『기독교사상』 잡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저는 박형룡 박사와 칼빈신학 밖에 몰랐는데, 거기서 강원용 목사님의 글을 접했습니다. 강 목사님이 크리스천아카데미를 소개한 글이었는데, 거기서 "교회와 사회와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회문제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려는 운동을 하려고 한다"라는 문장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겁니다. 아, 기독교에서도 이런 것이 가능하구나!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혹시 내가 신학교를 가더라도 여기 가서 몇 달 훈련이라도 받고가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떠나지 않고 이런 기독교운동을 하는 곳이 있다면 목사가 안 되고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경동교회 찾아갔지요. 우여곡절 끝에 강 목사님을 뵙고 저의 상황을 말씀드린 뒤에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서광선: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도 받은 사람이 신학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범상한 일은 아닌데, 고등학교 때의 결심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등학교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요?
이삼열: 제가 고등학교 때 미국 북장로교에서 전 세계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수련회를 개최했었습니다. 여름에 미국 아이오와 주에서 2,000여명이 모여서 대회를 하는데 거기에 5개국 대표가 초청되었습니다. 당시에 일본, 인도, 콜롬비아, 레바논, 한국이 선정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공보>를 통해 대표 선발 공고가 났었지요. 아버지를 통해서 공고 내용을 듣고 응모했었습니다. 14개 노회에서 지원자들이 왔는데 거기서 성경시험도 보고 영어인터뷰를 거친 뒤에 제가 선발됐습니다. 그때가 2학년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석달 간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었는데, 그 중에 에큐메니칼 캐러반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했었습니다. 그때가 57년도니까 미국에서는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철을 탔는데 좌석이 흑인용, 백인용으로 나누어져 있는 겁니다. 식당에 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옐로우는 어떻게 하나 생각했지요. 옐로우는 화이트 섹션에 갈 수도 있겠지만 블랙 섹션에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교육을 하더군요. 그러고선 가는 데마다 학생들이 토론을 하는 겁니다. 흑인 학생들도 있었으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한국전쟁을 놓고서도 공산주의와 전쟁해야 하느냐 아니면 평화공존을 해야 하느냐? 등등 열띠게 토론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죽고 나서 정세가 달라졌잖아요? 교회는 평화공존을 역설했고 그것을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서 이루고자 방향설정을 했었습니다. 당시에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목사가 되더라도 에큐메니칼 분야의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했더랬습니다. 그때가 16살이었지요.
수련회가 끝난 뒤에는 저를 포함한 5개국 학생대표와 미국 고등학생 5명이 인솔자 3명과 함께 미국 동부를 견학했습니다. 그때 워싱턴에 가서는 백악관에서 닉슨 부통령도 보고 뉴욕 유엔본부에 가서는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루스벨트 전 대통령 부인이며 유엔인권선언을 초안함: 편집자)와 전쟁과 평화 등에 관해서 한 시간 동안 대담하기도 했습니다.
귀국하니까 교장 선생님께서 동기생들 앞에서 미국 여행 이야기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조회시간에 15분간 천몇백 명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에큐메니칼은 화해라는 것인데 앞으로는 공산주의와도 어떻게 공존하고 화해를 해나갈 수 있는가 등등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조회를 마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엎드려뻗쳐해서 열 몇 대를 맞았습니다. 미국 가더니 정신이 완전히 돌아서 이상한 애가 됐다고, 어떻게 너가 공산주의 이야기를 하냐고 그러더군요.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발상의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예장 신학교를 보니까 깜깜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에 바로 신학교로 가지 못했던 겁니다.
서광선: 고등학교 때부터 에큐메니칼 정신을 경험하셨군요? 그때부터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일할 준비를 하신 셈입니다. 하하.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이삼열: 제대한 뒤에는 시간강사도 하고 서울대에서 조교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2-3번 정도 파트타임으로 일했습니다. 두어 달 그렇게 일하다가 제가 몇 가지 프로그램을 제안했습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아카데미에 부정부패연구위원회, 교육정상화, 교회갱신 등의 모임이 만들어지고 연구위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한 것은 1년 반 남짓합니다.
서광선: 그러다가 독일로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가셨군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메니칼 장학금을 받으셨지요?
이삼열: 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통해서 신청했는데 선정되어서 독일로 가게 되었습니다.
서광선: 그런데 독일에서 공부만 한 게 아니고, 당시 독일에 파견됐던 간호사들과 탄광 노동자들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셨지요?
이삼열: 제가 독일 생활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하. 괴팅겐대학교에 갔었습니다. 철학과에서 이데올로기와 사회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당시에는 온통 분석철학이 유행했었습니다. 수학이나 논리학도 공부해야 되었는데, 적성에 맞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관심사를 따라 사회학과에서 정치사상사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과의 교수가 권유하는 대로 사회과학 박사학위 과정으로 이적했습니다. 68년도에 갔었는데 72년에 시월유신이 터졌습니다. 3-4년 공부를 한 셈이었지요.
당시는 동백림사건 후유증으로 유학생들끼리 서로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학생이 오면 저건 정보부요원이다, 빨갱이다 추측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한 대학에 한국 학생이 7-8명밖에 없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싶어 독일기독교장학회에다 제안을 했습니다. 한국 장학생들이 귀국하기 전에 세미나를 통해서 한국 정세를 알려줘야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당시로는 큰돈이었던 500마르크를 주면서 조직을 만들라고 하더군요. 그해 여름에 13개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한국유학생 세미나를 조직했습니다. 제가 한국 문제를 갖고 주제강연을 했습니다. 당시 김지하의 "오적"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러한 한국의 상황에서 지식인들이 비판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유신독재가 실시되고 있었으니까 유학생 세미나가 반독재투쟁의 장소가 되어버린 셈이었습니다.
73년이 되니까 박형규 목사님께서 투옥되시고 "반독재 그리스도인 선언"이 익명으로 발표되었습니다. 74년 초에는 긴급조치가 발동되었습니다. 그때 유신헌법 개정운동을 하던 장준하 선생 등에 대해서 중형이 내려졌고 목사님들이 투옥되는 등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지요. 국내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는데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3.1절 데모를 하기로 했습니다. 국내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였지요.
74년이니까 3.1운동 55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제가 "민주사회건설"이라는 선언문을 작성했고 거기에 55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본(Bonn)에서 베토벤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12시에 3.1운동 55주년 기념식과 함께 반독재 타도를 외치며 대사관 앞까지 행진했습니다. 신문에 보도가 되었지요. 당연히 제가 주동자로 지목되었고 아버지는 정보부에 끌려가셨고 동생들은 유학길도 막혀버렸습니다. 그래서 학위를 해도 귀국하면 구속될 것이니까 한국이 민주화되는 운동을 할 수밖에 없겠다 생각했었습니다. 장기간 투쟁할 것을 결심했지요. 그런데 유학생 신분이라 체류기간에 제한이 있잖아요? 어쩔 수 없이 학위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76년에 학위를 받았습니다.
서광선: 학위를 마치고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을 위해서 일하셨군요?
이삼열: 그 일에 관계한 것은 74년부터입니다. 그때 독일에서 한독교회협의회가 열렸습니다. 강원용 목사님, 김관석 목사님 등 18명의 관계자들이 오셨더랬습니다. 제가 통역을 맡았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들려 있었지요. 대회의 주제가 "재독한인노동자들의 인권문제"였습니다. 그때 저는 광산 밑에도 직접 들어가서 살펴본 뒤 조사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당시 간호원들은 상대적으로 괜찮았지만, 광부들은 참혹했습니다. 그들은 땅굴을 파면서 몸무게와 착암기가 맞지 않아 엄청 힘들어 했고 손가락이 잘려도 배상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기숙사도 작은 방에다 4명씩 엉겨서 자야할 만큼 열악했습니다. 이런 보고 때문에 교회가 한국 광부들을 위한 인권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독일교회에는 사회선교부 산하에 외국인노동자 상담소가 있었는데 한국노동자 상담소는 없었습니다. 그 결의 이후에 한국 광부들을 위한 상담소가 보쿰에 세워졌습니다. 제가 한국인근로자 상담센터의 소장을 맡았지요.
약 3년 정도 일을 했던가요? 그게 79년이었는데 시위가 일어나서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귀국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국내 정세가 안정되지 않아서 교회협의회에서 만류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80년 5월 18일에 광주가 피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14년만에 어머니를 만날 기대를 품고 동경에 와 있었습니다. 대사관에서 귀국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만약 그때 들어갔으면 구속돼서 고문당해 죽었을 겁니다.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울면서 어머니 아버지와 통화했습니다. 그리고 보쿰에 모여 있던 유학생들에게 광주에서 나온 선언문을 전화로 다 읽어주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전화비가 천몇백불이 나왔더군요. 81년이 되니까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서 귀국해도 좋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정치만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서광선: 그때가 마흔 살쯤 되었었나요? 언젠가 저하고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한국사회 문제며 통일문제 등을 함께 논의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숭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지요?
이삼열: 네, 82년도입니다. 교수로 채용될 때 정보부에서 압력이 대단했었습니다. 대학인사위원회에서 저를 통과시키려고 하면 정보부에서 압력을 행사해서 다섯 번이나 재심을 했더랬습니다. 당시에 숭실대 총장과 NCCK에서 협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어쨌든 학기 도중에 임용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독일로부터 원조를 받아서 숭실대학교에 사회봉사관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사회연구소를 설립했지요. 제가 소장이 되었고 거기서 목사님들과 평신도들을 훈련시켜서 사회운동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노동운동, 기독교여성운동, 기독교농민운동 등의 모태가 바로 그 연구소입니다. 사회봉사관이 사회운동하는데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87년도에는 병원노조가 처음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서광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직에는 숭실대 재직 중에 취임한 것인가요?
이삼열: 재직 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의 초대 원장이었습니다. 아시아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화교육센터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지요.
서광선: 그때 김대중 대통령과 평양에 다녀오지 않으셨나요?
이삼열: 저는 유네스코에 있었으니까 유네스코를 통해서 평양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무총장 임기까지 합하면 유네스코의 세 기관에서 도합 12년을 일했군요. 학교는 정년 1년 전에 사직을 했습니다. 이제 야인으로 지내려고 하는데 2012년에 아시아태평양 무형유산센터 소장을 맡기더군요. 그때가 70살이었습니다.
서광선: 아프리카에 다녀오신 건 그때인가요?
이삼열: 제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을 할 때도 에티오피아에 갔었습니다. 대기업에서 출연해서 에티오피아 교사들에게 정보기술 교육도 하고 우간다에서는 교사들을 위한 인권 평화교육도 했습니다. 당시 삼성에서 큰돈을 지원해주었지요.
서광선: 삼성이 좋은 일을 했군요. 하하.
이삼열: 당시에 마이클 잭슨이 내한공연을 하고 유네스코에 3억을 주었습니다. 그 돈에 매칭펀드로 삼성이 7억을 댔지요. 이 돈으로 해외국가를 돕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아프리카 등 후진국을 지원하고 북한도 도왔습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되었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