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1. 종교를 허물어 버리는 신앙인 함석헌
신천 함석헌(信天 咸錫憲,1901-1989)은 종교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가 남긴 글들을 매개로하여 이해하려는 것이 본 논문의 과제이다. 한국 현대사 20세기에서 함석헌의 독특한 자리매김은 여러 가지 색깔로 후학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재야 역사철학자, 종교사상가, 시인, 비폭력 시민운동가, 탁월한 문필가, 고전 연구가, 평화운동가 등등이다. 그 다양한 면모 밑바탕을 관통하면서, 그 다양한 면모를 생동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그가 신앙인 이라는데 있다. 함석헌의 아호에는 ‘바보새’, ‘씨알’, ‘신천옹’등이 있지만, 필자는 함석헌의 함석헌됨을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늘을 믿은이, 신앙인’ 이었다는 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사실 필자는 주어진 논제를 받아들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고민은 세가지 이유에서 온다. 첫째, 일반적으로는 ‘종교인’이나 ‘신앙인’은 큰 차이를 두지 않고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함석헌에게서 종교와 신앙의 구별은 윌프레드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씨가 ‘축적적 전통’으로서의 외적인 ‘종교’(religion)와 내면의 주체적 체험으로서의 ‘신앙’(faith)을 구별하자는 주장보다 더 철저하다. 함석헌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는 ‘축적적 전통으로서의 종교’(religion as a cumulative tradition)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그런 종교를 해체 부정함을 통해서 살아숨쉬는 종교 곧 신앙이 되살아나기를 촉구하는 신앙인 이었다.
논제가 지닌 난점의 둘째원인은 ‘함석헌의 종교이해’라고 했을 때, ‘이해’라는 단어가 지닌 해석학적 문제이다. 정신과학에서의 ‘이해’가 자연과학에서의 ‘설명’하고는 성격을 좀 달리한다는 것은 납득되지만, 인간 심령의 지성소 안에서 체험한 그만이 아는 그 체험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시 이해문제에서 이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함석헌의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각자가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사실은 각각 자기의 시를 짓는 것이다. 우리가 함석헌은 종교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추구 할 때도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논제가 내포한 셋째 어려움은, 함석헌이 비록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그의 종교관과 신앙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서 정통적 기독교 울타리를 벗어났고, 세계 고등종교들은 ‘하나의 진리’를 드러낸다는 신념에 이르렀지만, 그는 ‘보편적 종교인’이 아니라 정통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선 그리스도교적 신앙인이라는 점이다. 이 한계점은 함석헌의 종교이해의 내용을 해석학적으로는 보면 제한시키지만, 종교학적으로 보면 더욱 살아 숨쉬는 신앙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장점이 된다.
함석헌의 종교이해의 서론격으로 두가지 명제만을 우선 주목해야 한다. 첫째, “종교는 사람살림의 밑둥이요 끝이므로 이것이 문제중에서도 가장 긴한 문제이며,.....역사에 무슨 변동이 있어도 종교는 없어지지 않을 터이요 도리혀 역사적 변동의 원인이 종교에 있다”는 신념이다. 둘째, “종교는 변치 않으면서 또 변해야 하는 것, 늘 그대로 있으면서도 늘 새로워야 하는 것이다. 종교의 운명은 찰나적이다”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첫째 명제를 달리 간단하게 말한다면, 사람이 다른 영장류 동물과 구별되는점은 다름아닌 ‘종교인’(homo religius)이라는 말이다. 종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사항이거나 호불호의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기존의 종교들을 모두 부정 하거나 비판 할 수는 있으나, 그렇게 부정하고 비판하는 비판자의 궁극적 이유와 근거가 사실은 ‘종교의 존재론적 지반’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뜻, 진실,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인 한, 거짓을 타파하고 진실을 찾거나 밝히려는 관심을 가는 한, 그러한 ‘궁극적 관심’(폴 틸리히)이 실질적으로 종교적 실존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반종교인, 무신론자는 될 수 있으나 ‘비종교인’이 될 수는 없다.
둘째 명제가 강조하려는 본 뜻은 무엇인가? 종교란 결국 절대와 상대와의 관계인데, 종교를 포함해서 역사속에서 출현한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인데, 자기가 절대를 상대하고, 진리자체를 말하는 엄무를 담당한다는 이유로 착각하여 , 종교가 지닌 지고한 가치들의 축적물과 거룩한 전통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여 마침네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함석헌의 종교이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유적 표현은 이렇다: ”종교는 구슬이 아니요 씨다. 썩어서 새싹으로 나와 자라서 열매맺어 퍼져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 역사적 종교들은 어느 종교이든지, 그 종교가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인류의 과거 문명창달에 공헌했다고 자부하면 할수록, 자기 종교를 진주보화 같은 진리의 구슬들을 많이 저장하고 있는 궁궐처럼 여긴다. 자신을 봄이 될 때 마다 새 싹을 움터내는 살아있는 큰 나무라고 여기지 않는다. 함석헌에 의하면, 신성한 경전, 교리, 교학체계, 수행방법과 조직체계등이 아무리 신성하고 절대적인 듯 해도 ”이것은 절대다“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종교는 이미 화석화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물상화 (物像化, reification) 단계를 거쳐 우상화되고, 권력화되어 인류문명 속에서 가장 추악한 냄세를 풍기는 독극물이 될 위험을 안는다.
함석헌은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 문제를 가지고 평생 신앙인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싸운 사람이며, 그 자신의 신앙의 여정 자체가 그것을 보여주었다.
2. 참종교 혹은 새시대의 종교는 ‘환하게 뚫려비취는’ 이성적이고 인격적인 것
위에서 함석헌이 종교란 인간이 된 연후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거나 취향물처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임과 사람됨의 필요충분조건임을 강조한다는 것을 보았다. 종교는 사람이 의식하든 아니하든 물리학의 중력장이나 전자기장처럼, ‘진리자체’라고 할 ‘궁극적 실재’와 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인간이 생물체로서 진화발전 단계에서, 현재 호모사피엔스로서 자기성찰의 인격적 현존단계, 비판적 자기초월의 이성적 정신단계에 도달해 있기 때문에, 종교체험을 하거나 종교의 의미를 말하고 듣는 자리는 이성적 정신과 도덕적 인격에 있다. 이 두 기능을 통전하는 인간학적 용어가 ‘심령’ ․‘마음’․ ‘청정심’ 이라고 부른다.
밝히 말하자. 하나님은 하늘 아닌 하늘, 우리 혼 안에 있다. 절대의 하나님 그 자체야 우리가 이러니저러니 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맘에 있다. 정신에 있다. 인격에 있다. 고로 맘이 청결한자 하나님을 본다 하였다. 맘은 자주 껍질을 걷어내야 맑을 수 있다.
위 인용구를 통해서 볼 때, 함석헌의 종교이해는 매우 이성적이요,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책임을 매우 강조하는 종교관임을 주목해야 한다. 함석헌은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 할 때가 오나니, 아버지께 예배하는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 할 지니라”(요 4: 21,24)는 구절에서 기성종교의 종언을 보고, 신약성경의 영성의 최고 정점을 읽음과 동시에 새 시대 종교의 참 모습을 읽는다.
위 인용성구에서 ‘종교의 종언’을 본다는 뜻은 장소에 매인 종교, 건물에 매인 종교, 교권과 사제집단의 중개로써 영위되는 종교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영성의 최고단계이며, 새 시대의 종교모습’이 드러났다는 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en pneumati kai aletheia / in Spirit and Truth)라는 말로서 참종교와 미래의 종교는 인간의 감상적 종교와 차거운 교리적 종교를 넘어서, 이성과 인격이 그 주체성을 십분 발휘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돌파하는 ‘황홀한 이성’(틸리히)체험을 한다는 말이다.
윌리엄 제임스가 ‘신비체험’의 특징으로 열거하는 4가지 특징들(ineffability, noetic quality, transiency, passivity)중에서 특히 ‘ 노에틱 특질’(noetic quality)이라고 표현한 것과 관련된 것이다. 종교체험의 특징은 고양된 감정상태와 유사하지만, 단순한 감정흥분 상태이거나 산만한 지성의 불명료성과 다른 것이다. “조명과 계시의 상태, 의미충만한 상태, 존재하지만 표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함석헌의 종교이해에서 오해하기 쉬운점은 그의 종교관이 임마누엘 칸트의 “이성의 한계안에서의 종교”를 말하는 종교관과 같은 입장이라고 오해한다는 점이다. 함석헌의 종교관은 인간편으로서 이성이 파헤치고 물을 수 있는 최고의 한계까지 도달하려 한다. 경전연구에서모든 비평적 연구방법을 개방적으로 모두 수용한다.
만약 생물학자로서의 생명진화론자와 소위 말하는 ‘창조과학회’에 속한 종교적 과학자가 ‘진화론’에 대하여 논쟁하는 자리에 동석했다고 가정하자. 그런경우, 함석헌은 생명체가 진화하여 오늘의 현상에 이르렀고 종(種)의 다양성을 이루었다고 설명하는 ‘진화사실’ 그 자체에 있어서는 주저하지 않고 생명진화론자의 편을 적극 지지한다. 함석헌은 진정한 신앙 혹은 종교는 이성과 충돌하지 않고 이성을 자기초월하게 하면서 이성을 온전케 한다고 믿는다.
함석헌은 도리혀, 종교들이 일반대중에 영합하려고 값싼 감상주의나 기복신앙으로 대중의 지성을 흐리게 하고 ‘기적을 추구하는 종교’에로 변질되는 경향성을 매우 위험하게 본다. “이성은 그 자체대로 완전한 것이 아니요, 위로부터 오는 영의 빛을 받아서야 정말 밝게 될 뿐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빛을 받는 것은 이성이지, 이성 아니고는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런 경지의 마음상태를 함석헌은 “맘이 뚫려비치는 상태”라고 일컫는 것이요, 그런 상태에 이르를 때, 주객구조의 분별지 상태에서의 ‘영과 육의 갈라짐’ ․ ‘안과 밖의 막힘 ’ ․ ‘자율과 타율의 갈등’ ․ ‘자유의지와 은총의 긴장’ ․‘대속과 책임’의 갈등이 역설적으로 통전되면서 화해된다.
여하튼 함석헌의 종교이해에서, 종교가 바르게 숨쉬고 빛을 조명받는 본래적 자리는 인간의 내면적 영성이요 진리로 고양된 이성과 윤리적 인격의 지성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가치를 외양적인 교세의 크기․ 성전건물․ 교리적(교학적) 체계․ 객관적 종교의례의 웅잠함과 황홀함에서 찾는 것은 종교의 본질에서 이탈하여 종교가 타락한 상태이거나 생명력이 이미 고갈된 종교의 말기현상 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함석헌이 개인적으로는 장로교 교회에서 종교를 접하고, 일본유학시절 우찌무라의 무교회 성서모임에 영향을 받았고, 말년에 퀘이커에 가입했지만, 퀘이커 종파에 메인 것은 아니고, 앞에서 언급한 그의 종교이해에 가장근접한 형태를 거기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함석헌은 기독교를 예로들어 증거를 대고 말한다. 종교가 생기발랄한 생명력을 잃고 쇠퇴해 가거나 병든 경우 다섯가지 증상을 보인다. 첫째는 교리를 완성하고 교리적 명분으로 진리를 독점했다고 착각한다. 둘째, 종교가 점점 제도화되고 교권주의가 발달하여 인격적 피돌기가 그친다. 셋째, 새로운 시대사조에 대하여 방어적이고 수세적이 되며 독단적 공격성을 나타낸다. 넷째, 종교의 구경적 목적을 피안적인데 둔다. 타계주의적이거나 몰역사적 종교로 변질한다. 다섯째, 자체 안에 내분이 자주일어나 분파작용이 심해진다.
3. 종교는 인격으로 영글은 개체정신이 자기 안에 전체를 느끼고 전일화 하려는 존재론적 갈망
무릇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에게서도 찾아 볼수 있는 원리이지만, 특히 생명의 원리로서, 생명중에서도 인격적 단계에 이른 인간생명의 제1원리로서 함석헌은 ‘일즉다, 다즉일 원리’(一卽多, 多卽一 原理)라고 말한다. ‘확산-수렴의 원리’는 이 제1원리의 변화음이다. 생명의 제2원리는 ‘자유와 통일의 원리’이며, 제3의원리는 ‘삶과 죽음의 원리’라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이 생명은 개체적이고 개별적이면서도 ‘하나’를 지향하려는 운동이다. 반성적 사유능력을 그 본질로 하는 인간정신현상에서 단순히 과거 행위를 반성하며 되돌아 봄만이 아니다. 짐승도 먹이사냥에서 실패한 어제일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부분적으로 반성하면서 어제일을 뒤돌아보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질적 특징인 ‘반성적 사유능력’이란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자의식하면서 되생각하는 자기초월적 정신할동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지론에 의하면 인간생명은 ‘자기통전’ 운동의 절정에서 인격을 전제로하는 도덕의식을 낳고, ‘자기창조’운동의 절정에서 새로운 것을 창발시키는 문화를 낳고, ‘자기초월’ 운동에서 존재의 모순과 한계를 돌파하려는 종교를 낳는다.
함석헌의 종교이해에서도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본은 스스로함이기 때문에, 인격의 본질은 자기초월적이라는 점이며, 종교란 결국 인격단계에 이른 생명이 자기가 나온 근본을 돌아보는 자기초월적 반성작용에서 가능한 것으로 본다. 인격의 자기초월운동이란 개별자로서 영글은 인간생명이 자기 생명이 거기에 이르도록 이끌거나 형성한 전체․ 하나․근원 을 추구하면서 ‘개체이면 이면서 전체’라는 역설적 통전성을 확철하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과정이 ‘인연생기’(因緣生起)의 깨우침에서 오거나, 도심(道心)의 본연지성(本然之性)에로 극기복례함으로써 오거나, 성령의 거듭나게하시는 중생체험(重生體驗)을 통해서 오거나, 참종교와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자기와 전체의 불가분리적인 ‘하나임’의 체험이다.
함석헌에 의하면, 물질계에 만유인력이 있어서 우주가 혼돈의 부스러기로 흩어지지 않고 질서를 지닌 사물체로서 우주(cosmos)가 존재하듯이, 정신계에서 만유인력같이 개체아의 독립성을 보존해주면서도 하나의식․전체의식을 통하여 하나를 지향하는 ‘한 뜻’을 고양시켜나가는 것이 종교이다.
함석헌은 현대인의 주체적 자아철학에서 ‘자아’를 절대적으로 독립된 실체로서 ‘자아의식’에 대한 자기긍지는 일종의 ‘우상’이라고 본다. 함석헌에 의하면, 인격적 주체의식 자체가 타자와 관계성에서만 이뤄지며, 절대자와의 대면의식에서 절정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종교이해에서 ‘하나 지향성’은 그의 종교이해를 매우 역동적이고 관계론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는 화엄종교에서의 ‘성자신해’(性自神解), 선불교의 ‘공적영지’(空寂靈知), 성리학의 ‘허령불매’(虛靈不昧)를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면서도, 전체의식을 망각하거나, 타자와의 관계성을 이탈한 실체론적 혹은 유아독존론적 ‘자아의식’을 경계한다.
그러므로 이 전일화(全一化)하는 인류적 동원령은 절대로 시급하다. 그런데 그것은 세계 역사의 새로운 해석이 아니고서는 안된다.......‘하나’를 어서 의식하여야, 그리하여 각각 서로 한 몸의 지체인 것을 깨달아야, 이 미친 자살적인 경련이 그칠 것이다..... .새종교, 하나의 종교, 참 종교가 필요하다.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살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살리려면 일단은 버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위 인용문에서 기존종교의 완전폐기를 원하지 않고 새로운 재해석과 창조적 변화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종교, 우주적 종교’를 지향해가면서 환골 탈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종교의 중요한 핵으로서의 각 종교의 신성한 경전(經典)은 그 생명이 문자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통주의가 문자주의적 경전해석에 사로잡히면, 그들은 역사를 따라가지 못하여 스스로 역사를 버릴 것이고, 역사 또한 문자를 신성시하는 정통주의종교들을 가차없이 버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함석헌의 종교이해에서 종교는 ‘하나’를 지향하고 ‘전일화 운동’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해서, 개인의 독자성과 개별종교의 고유성을 희생시켜가면서 전체주의적 ‘하나’를 이루자는 것이 아님은 두말 할 필요 없다. 함석헌은 개인적 생활체험과 공동체적 역사체험을 나무에서의 씨와 숲의 상호관계성을 비유로삼아 말한다. 개인적 생활체험을 나무의 씨라면, 역사적 전체의식은 숲이라는 것이다. “씨를 메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마찬가지로, 개별종교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종교를 넘어서는 더 높고 근원적인 ‘진리 자체’에 순명하는 종교만이 진정한 미래의 종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 종교는 보편적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가장 구체적이고 개성적이어야 하는 역설을 지닌다. 함석헌의 종교다원론은 무색무취의 보편성만 주장하는 추상적 종교통일론이 아니라, 개별종교의 특성을 바르게 드러내면서 보다 큰 화음과 아름다움을 이뤄내는 교향악단 연주나 무지개의 칠보색갈과 같은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말한다.
4. 참 종교는 땅에 임한 하늘, 땅 중의 땅인 씨알의 맘에 임한 하늘을 말한다.
어느 종교이든지 표현이 다를 뿐, 종교는 갈라지려는 두차원의 실재를 하나로 통전하려는 운동을 한다. 셈족계 종교의 표현으로서는 그 두차원을 ‘하늘과 땅’이라는 상징어로 표현한다. 종교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예지계/ 현상계, 피안/차안, 영원/시간, 진여계/생멸계, 하늘나라/세계역사, 등등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종교의 구경목적은 후자가 아니고 전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지만, 함석헌은 그 역으로 생각한다.
영계(靈界)를 부정한다거나 ‘초감각적 실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모든 것들도 ‘하나의 실재’의 한 차원일 뿐이며, 종교가 진정으로 관심 가져야 할 자리는 ‘지금-여기’의 현실세계, 역사사건, 민중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일차적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감격한 관조(觀照)나 신비로운 얼빠짐(황홀경)에 빠졌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나’의 현실에 돌아올 것이요, 돌아오면 제 몸이 땅에 붙은 것을 발견 할 것이다.....나는 육신의 사람이요 , 제도의 사람이다. 37도의 체온을 가져야 하는 이상은 어디를 가도, 무슨 생각을 해도, 지구의 한 부분이요, 흙의 아들임을 못 면한다. 몸이 벗겨져야 정말 하나님을 대 할 수 있고, 제도를 버리게 되어야 참 그를 만 날 수 있을 것인데, 이 생(生)에서는 그 것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함석헌은 타계주의적 종교, 몰역사적 종교, 현실부정의 종교를 비판 함은 물론이요, 종교의 존재 목적은 ‘현실의 삶’이 참으로 바른 삶이 되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종교가 ‘현실주의’에 몰입해야 한다거나, ‘지상천국’ 건설에 힘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현실세계는 보다 정신화되고 영화되어가는 종교의 변혁적 힘에 의하여, 현실세계 자체가 끊임없는 혁명을 지속해가야 한다.
‘정교분리’의 근본정신은, 국가권력이 인간의 인격적 양심선택과 심령의 지성소 일거리를 간섭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는 뜻이요, 동시에 타락한 종교권력이 신성을 빙자하여 세속적 권력과 재물에 탐심을 품고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교분리’라는 말은 엄밀한 본래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정치와 종교는 새의 두 날개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몸통이 현실이지만, 현실을 날아가게 하는 날개짓은 두 날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내세우는 모든 종교는 결국 힘의 숭배자요 정치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욧점을 말하자면, 함석헌의 종교이해에서 우리는 매우 예언자적 종교정신의 진수를 읽게 된다. 민중이라 하거나 씨알이라 하거니, 그들은 흙중의 흙이요, 땅 중에서 가장 낮은 땅이다. 기독교의 ‘주기도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라는 기원이 주기도문의 핵심인데, “ 땅에서도”라는 말뜻은 넓게보면 ‘현실세계, 역사, 이세상’이지만, 더 철저하게 말하면 ‘민중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민중의 마음에 천국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힘쓰지 않고, 타계적 천국만 바라보며 역사현실을 방기하는 타계주의 종교는 종교의 제1차적 본업을 스스로 방기한 것이요, 종교의 변질이자 타락이라고 본다.
5. 진주조개 처럼, 고난을 창조적으로 승화·변용시켜가며 영원히 자라가는 종교
마지막으로 함석헌의 종교이해에서 특이한 점은 그의 실재관·하나님관·생명관·종교관에서 ‘고난’이라는 주제와 ‘과정적 사고’이다.
얼른 생각하면 모든 종교는 ‘인간의 한계상황’인 고난을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심지어 특정종교에 귀의하면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원천적으로 면제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함석헌은 간디의 말을 되새김질 하여 받아 “고난은 생명의 제2원리이다”라고 말한다.
함석헌은 고난을 면제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거나 기피하는 종교를 사이비종교이든지, 저급한 종교로 본다. 그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사관자체가 조선민족이 고난의 현실을 지지하게 대면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고난사관’에서 가능했다. 그는 개정판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난의 역사라니 고난 전에도 또 무엇이 있고, 고난 후에 또 무엇이 온다는 말이 아니다. 그져 고난의 역사가 스스로 나타났을 뿐이다. 제가 제 까닭이다. 제(自)가 곧 까닭(由)이다. 그러므로 자유(自由), 곧 스스로 함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생명의 근본원리다. 고(苦)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 고(苦)는 낙지모(樂之母)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상대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거짓말이다. 사뭇 참을 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위의 인용문은 함석헌의 역사이해만이 아니라, 그의 종교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종교사상가로서 생명과 삶에 대한 함석헌의 진지한 통찰은 ‘대중을 위로해주는 종교’가 아니다. 도리혀 오늘날 종교인들의 삶 속에서 ‘숭고함’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고난 기피와 면제를 보장한다는 속화된 종교들의 저속한 상업주의와, ‘재액초복’을 추구하면서 현세와 래세의 복을 담보하려는 ‘보험계약 종교인’들의 물신숭배적 태도 때문이다.
그런데, 함석헌의 견해에 의하면, 생명의 출현 자체가 ‘고난’이라는 대가를 치루고서야만 가능한 기이한 신비이다. 자연물리계를 지배하는 법칙대로라면, 고요함·안정·무감각, 무운동이 편하고 쉬운 것이다. 혼돈의 바다속에서 ‘질서’(cosmos)가 형성되고, 가장 단순한 생명체가 출현하기 위해서 일지라도 물리적 자연법칙을 거슬러 역으로 움직이는 엄청난 노력없이는 불가능하다. 물질세계는 ‘엔트로피 법칙’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직립보행하면서 진선미를 추구하는 정신적 삶과, 거룩을 추구하는 종교적 신행은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동반한다.
고난은 신이 인간을 교육하기 위해서 부여하는 훈련방법이 아니다. 만물의 존재하는 정법을 깨우치지 못한 ‘어리석음’(無明) 때문에 오는 것만도 아니다. 암질병과 불의의 교통재난은 고승에게도 오고 성자에게도 온다. 물론 고난경험을 통하여 인간생명은 정화되고 보다 깊어지고 승화된다. 그러나, 고난 그 자체는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함께 있다. 생물학적 생명단계를 넘어서 정신적이거나 영적 생명현상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더 진하고 강렬한 고난이 동반된다.
인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자연재난에서 오는 고통, 질병과 전쟁에서 오는 고난, 필요한 생필품의 부족에서 오는 고통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고 그러한 노력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 고난은 찬미되거나, 고행주의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도 않된다.
그러나, 삶이 있는 곳에 고난은 함께 있다는 생명계의 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해서는 않된다.. 현대문명의 취약성과 위기의 증폭은 생명과 삶 속에 엄존하는 ‘고난의 현실‘을 기피하고 거절하려는 잘못된 실재관, 행복관에 기인한다. 함석헌은 고난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대결하고, 사귀면서 삶의 승화기회로 활용할 용기와 지혜를 주는 것이 참 종교의 자세라고 본다.
함석헌의 종교이해의 특징으로서 한번 더 강조해야 할 점은 ‘되풀이와 자람의 원리’에서 역사와 종교를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과정적 실재관’이 나타난다. 젊은 시절 H. G. 웰스의 『세계문화사대계』와 H.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읽고 역사학과 생물학과 지질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말년에 떼이야를 샤르뎅을 만나고 우주천문학이나 뇌과학의 최첨단과 대화한다. 그러나, 이미 1930년대 함석헌의 실재관은 ‘과정적 실재관’임이 나타난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역사의 운동은 차라리 수레바퀴나 나선운동으로 비유하는 것이 좋다.
함석헌의 역사이해만이 아니라, 역사의 핵이되는 종교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도 영원에 이르는 ‘과정중에 있는 종교’이다. 아무리 위대했던 종교들도 이 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세계문명을 이끌어온 보편적 세계종교들, 예들면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유교가 모두 위대하지만 ‘진리’는 더 위대하며, 그 ‘진리자체’를 체험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삶의 체험도 다양해져가고 깊어간다. 진정 위대한 종교라면, 자신을 새로움을 향해 개방하고 변화하려는 용기를 지닌 종교일 것이다. 생명의 진화란 ‘되풀이와 자람’이다. 종교의 성숙해 감도 전통의 되풀이 반복만이 아니라 ‘자람’ 이 요청된다. 함석헌은 그의 종교시 「미완성」에서 그 진실을 잘 노래하고 있다. 그 시의 일부분을 음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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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언제나 완성할 줄 모르는 영감(靈感)의 거장(巨匠)
역사는 영원히 끝 날줄 모르는 절대의 의지.
영원의 미완성,
영원히 자라는 혼의 타는 그 가슴엔
지극히 적은 부분의 불꽃마다 제대로 무한한 즐거움,
끝없이 닫는 영(靈)의 헐떡이는 염통엔
찰나 찰나의 고동의 울림마다 그대로 영원한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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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전형적인 종교다원사회이다. 생명과 환경을 살려내는 선한 일을 위하여 긴밀하게 대화하고 협력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리고, 몇 백년의 시간의 흐름을 통하여, 피차 ‘진리’에 대한 위대한 통찰과 경험을 서로 교류하고 배움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종교를 창조적으로 변화시켜가는 개방성과 용기를 지닌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종교만이 역사의 지층 속에 ‘화석’으로서 남지 않고 지속적으로 미래종교로서 생명을 내뿜는 종교가 될 것이라고 함석헌은 생각하는 것이다.
[참고도서]
1. 함석헌, 『함석헌 전집』, 전20권( 한길사, 1983)
2. 함석헌, 『함석헌 저작집』, 전 30권 (한길사, 2009)
3.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 읽기』(인간과 자연사,2002)
4. 김성수, 『함석헌 평전』 (삼인, 2001)
5. 이치석, 『씨알 함석헌 평전』(시대의창, 2005)
6. 김용준, 『내가 본 함석헌』(아카넷, 2006)
7. 씨알사상연구회편,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씨알 ․ 생명 ․ 평화』(한길사, 2007)
8. 함석헌 선생 팔순 문집 발간회, 『 씨알 ․ 인간 ․ 역사』(한길사, 1982)
9. 박재순, 「함석헌의종교사상」,『민중신학과 씨알사상』,218-245쪽.(천지, 1990)
10.. 오산학교 동창회편, 『함석헌 선생 추모문집』(남강문화재단 출판부, 1994)
11.함석헌 기념사업회, 『씨알의 소리』, 통권200호(2008.12), 통권 203호(200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