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42)
대학과 스콜라주의 학문

입력 Nov 29, 2010 02:30 PM KST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8장 대학과 스콜라주의 학문

1. 대학의 발달

AD 500년에서 1000년에 이르는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었으나, 1050년에서 1350년에 이르는 동안 웅대한 교회당 건물들이 많이 건축된 것과 더불어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들을 길러낸 학문운동의 열풍이 일어나 중세교회의 전성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제5장에서 언급된대로 수도원이 중세교육의 처음 학교였다. 8세기 중엽 이래로 왕과 귀족의 자제들의 수도원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점차 고등학문까지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샤르망 대제의 문예부흥운동이 수도원 학교 교육을 더욱 강화시키고 발전시켰다.

실로 중세 초기 암흑시기에는 교회 신부들이 일반적으로 불학무식하여서 라틴어로 쓰인 성경과 예배서와 기도서를 읽지 못할 정도였는데 교회의 감독이 감독관에서 신부가 될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감독(성당)학교가 교육의 발전을 도운 것이 되었다. 이 성당학교에서는 소년들에게 기초교육부터 시작하여 인문과목을 비롯하여 성경과 신학을 가르쳤다. 9세기경부터 교회의 각 교구에는 교육담당자가 있어서 교사(라틴어로 scholarum, school master) 노릇을 하였는데 그는 감독 다음가는 성직급이었다. 이 성당학교 교육이 널리 보급되면서 12세기에 교육의 부흥이 일어나서 성당학교 외 학교가 생겼다. 선생과 학생이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기숙학교, 칼레지(college)가 형성되었고 이 칼레지들이 연합하여 다양한 학과목 교육을 실시하게 된 유니버시티(university)가 형성되었는데 여러가지 학문의 장(場)이란 뜻이다.

이 칼레지 학교 제도대로 서양의 학교들이 기숙사를 짓고 운영하게 되었고,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비를 지불하였다. 이 학교의 교사들 대부분은 근처 농촌에 있던 교회의 신부들이었다. 당시 인간교육은 신부가 하는 일로 되어 있었다. 고등교육은 성당의 감독학교에서도 수도원에서와 같이 일곱 가지 인문과목 외에 신학과목이 있었다.

중세기에 학문을 하는 사람은 라틴어를 알아야만 했는데 이것은 동북아시아에서 한문을 알아야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과 같았다. 성경을 비롯하여 신학서적과 교회가 사용하던 모든 문서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왕 알프레드(Alfred, 849~899)가 라틴어로 된 교회역사책과 종교서적들과 시편을 영어로 번역하여 자기 신하들과 그리고 학교 아동들이 읽을 수 있게 했다.

동로마제국, 곧 비잔틴 지방의 희랍교회는 성경을 비롯하여 교회의 모든 문서와 예배의식이 희랍어로 되어 있었다. 서방 로마교회가 동방 희랍교회도 라틴어 예배의식을 사용하도록 요청하여 한때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시리아의 교회는 일찍이 2세기 후반에 시리아역 구약과 이어서 신약을 가졌고 시리아어로 성찬식과 예배의식을 드렸다. 그런데 로마가톨릭교회의 중세기 선교사들이 몽골지방에 와서 선교하면서 예배의식을 라틴어로 진행하게 한 것이 있었는데 13세기 몽고지방으로 여행하던 몬테코르비노가 그것을 본토 말로 번역해주었다. 로마가톨릭 선교사들은 어디로 가서 선교하든지 라틴어로 된 로마가톨릭교회 예배의식을 그대로 가르쳐서 사용하게 하였으므로 중국과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라틴어 예배의식을 따르게 되어 본토민들에게 불편한 것이 되었었다.

중세 대학은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먼저 발달하였다. 유럽 각국에서 학생들이 대학에 모여들어 기숙사에서 교수들과 같이 살면서 학문을 하였는데 그들은 다 라틴어를 알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파리대학(솔보노 대학) 거리는 별명이 라틴어 거리’(Latin Street)였다. 그리고 교수들도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어서 그들이 길드(guild)를 조직하여 자기들의 권익과 안전이 보장되게 하였다. 일종의 교수조합이었다. 그리고 개체 칼레지들이 여러 개 연합하여서 대학(종합)을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대학 중에 일찍 생긴 것이 이태리의 볼로나(Bologna)대학인데 이 대학은 법률학 교육으로 유명하여 법률을 전공할 학생들은 이 대학에 많이 모여들었다. 신학 교육으로 이름난 대학은 파리대학이었는데 이 두 대학이 다 12세기 초반에 생겼다. 이러한 대학들이 성장하여 높은 수준에 도달하면 황제가 헌장을 만들어서 대학 승격을 인정하였다. 파리대학은 1200년에 황제 필립 아우그스투스의 인정을 받았다. 학생들은 유명한 교수가 가르치는 대학을 선택해서 모여들었다.

13세기경부터는 대학에서 희랍어 교육이 성세를 보였는데 십자군 운동으로 동방 희랍문화가 서방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희랍의 고전철학과 과학과 기타 학문이 라틴세계에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하여 희랍의 고전서적들을 읽기 위해서 희랍어를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는 옥스포드(Oxford)대학이 파리대학보다 조금 늦은 1185년에 설립되었고 차차 파리대학 다음으로 유명한 대학이 되었다. 캠브릿지대학은 1233년에 설립되었다. 유럽과 영국의 대학에서 가르친 교수들은 다른 나라 대학의 초빙을 받기도 했고, 각 나라 대학들 사이에도 교수간 교류가 있었다.

중세 대학의 학생들은 대개 14~15세 때 대학에 입학하였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전에 감독학교나 수도원에서 7, 8세 때부터 3학 4과, 즉 문법, 수학, 음학, 수사학, 논리학, 윤리학, 천문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대학원에는 법학(교회법과 민법), 의학, 신학의 세 분야가 있었고 이 대학원 졸업생들은 중세 사회에서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최고의 대우와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3학 4과의 과정을 다 마치면 B.A.와 M.A. 학위를 받는다. M.A. 학위는 교사자격증이었다. 신학의 대학원 과정을 끝내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사람은 별도의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고 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신학박사를 받은 사람은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신학교육으로 유명했던 파리대학은 가장 큰 대학이었는데 학생 수가 3,000명 정도였다. 그 당시 파리시민은 약 50,000명이었으므로 파리시 인구의 약 6분의 1이 대학생이었다는 말이다. 이 무렵 중국 원나라에서 바그다드의 동양교회를 방문했다가 서방 그리스도교계의 시찰원으로 갔던 라반 사우마(Raban Sauma)가 파리대학을 돌아보고 학생 수가 30,000명이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은 대부분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어서 학생들은 자기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조직체를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시민과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고, 또 학생들 중에는 밤거리에서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다가 경찰에 잡히는 일도 있었다.

2. 스콜라주의 신학자들

스콜라주의 학자란 많은 학교(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중세에 가장 높임을 받은 학문은 신학이었다.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는데, 다른 모든 학문의 방법은 각기 다를지라도 그 결론은 교회의 학문인 신학의 심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모든 학문의 진리가 교회의 진리와 신앙에 어긋나면 용납될 수 없게 되어 있었고, 그 교회의 신앙을 다루는 학문이 신학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연과학이 우주의 모든 운동을 설명하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가르치는 성서의 가르침에 일치되어야만 했다. 신학은 교회의 신앙을 설명하고 변호하여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이었다. 중세의 철학은 종교철학과 같은 것이어서 희랍철학을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였다. 중세에 유명한 신학자들이 많았지만 그 중 네 사람만의 주요 사상을 진술하고자 한다.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본래 이탈리아인 수도자로서 수도원 교사로 있다가 영국 칸타베리 대주교가 된 안셀무스는 중세신학의 대학자였다. 그의 학문생활의 표어는 성 어거스틴의 생각을 따라 “나는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서 아는 데 이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는 신비하여 이성으로 알 수 없고 다만 믿어서 알게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구원의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알 수 있는데 그의 계시는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으로 계시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데 믿기만 하고 두는 것은 어린 신앙이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와 계획을 자기의 이성의 힘으로 증명하는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성 어거스틴이 회심 이전에 「독백」과 「대화」라는 두 가지 논설을 저술한 것처럼 같은 논제로 두 가지를 썼다.

안셀무스는 그의 「독백」(monologium)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무에서 창조하실 때 피조물이 어떠한 것이 될 것인지 생각하시고 지으셔서 피조물이 다 하나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고 말한다. 즉 모든 피조물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피조물에는 아름다운 미가 있고 미에도 종류가 있어 각각 다르게 보이지만 그 모든 미의 근원과 본체가 그것들을 지으신 창조주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 선에도 종류와 차이가 있지만 그 모든 선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은 창조자에게 있는 선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든 선과 미와 가치의 근원이며 완전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만물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의 이론이다. 이 이론도 안셀무스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그의 믿음에서 나온 이성적, 추리적 이론이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느냐?」(Cur Deus Homo)라는 책에서 자기의 이성의 힘으로 구속의 은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성경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하는데 하나님 곧 신이 육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하나님 편의 그 절실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이다.

안셀무스가 찾은 그 이유는 간단하고 명백하다. 즉 사람이 범죄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예가 훼손되고 추락했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그 훼손된 영예를 회복해야만 했고, 또 동시에 자기의 영예를 떨어뜨린 인간이 자기 죄값을 반드시 치르게 되어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엄연한 정의(正義)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값은 인간이 치러야 하는데 인간은 이미 범죄하고 타락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줄 만한 값어치 있는 변상품, 제물(祭物)이 될 가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반역하고 범죄했으며 어디까지나 사람이 치러야 할 제물이 되어야 했기에, 하나님은 부득이 자기 아들이 사람이 되어 사람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하는 대속 제물이 되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고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인 자기 아들의 희생의 죽음을 보시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정의도 회복되었고,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사랑도 회복하시게 되었다는 이론이다.

이것이 안셀무스의 유명한 ‘성육신 이론’인데 이것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이론적으로 납득시키는 한 설명이다. 신학자들이 안셀무스의 성육신 이론을 ‘만족설’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자기의 정의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모두 만족스럽게 된 이론이라는 말이다. 더러는 안셀무스의 속죄론이 하나님을 너무 법적이고 조건적인 분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설명한 일종의 합리적 설명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셨으며 그가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안셀무스가 말하기를 :

“하나님밖에는 누가 이러한 만족을 만들 수 있고 사람밖에는 누가 그 죄값을 치르겠느냐? 그리하여 하나님-사람(God-man)이 그 값을 치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이해력을 두고 숭고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어느 정도는 내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주의 진리를 이해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안셀무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으로 믿는 신-인 신앙을 심어주었다.

피터 아벨라드(Peter Abelard, 1079~1142)

아벨라드는 프랑스인 신학자이다. 한때 파리대학의 그의 명성을 듣고 국내의 수많은 남녀 학생들이 모여들어서 그의 파격적이고 새로운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는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학자의 소신과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놀랄만한 선언에 학생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박수와 환성을 보냈다. :

“여러분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된다. 다만 이성으로 그것이 진리라고 승복되기 때문에만이 믿어라.”

아벨라드는 자기 선생이 되는 안셀무스의 생각과는 달랐다. 두 사람 모두 이성의 힘으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해보려 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아벨라드는 이성이 아니다라고 할 때에는 아닌 것으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저서 중 하나는 「예와 아니오」(Sic et Non, Yes and No)인데 이 책에서 그는 과학, 윤리, 종교문제들을 제시하고 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성경과 초대교부들의 저서를 참고하여 이끌어내면서 ‘예’ 할 것과 ‘아니오’ 할 것을 명기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어떠한 질문거리에도 간단히 ‘예’ 또는 ‘아니오’라고 할 수 없으며, 같은 질문거리에도 ‘예’ 또는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였다. 즉 같은 문제에도 상반 또는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가 이성적인 논리를 중요시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성을 신앙보다 높이는 것이 아니었고 둘을 다 인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의 설명에 있어서 아벨라드는 안셀무스와 달랐다. 안셀무스가 하나님에게 두 원리, 곧 용서하고자 하신 마음과 만족할 만한 율법적인 조건의 마음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면서 아벨라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켜서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감화구원론을 편 것이다. 즉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하되 그 구원은 우리들의 주체적인 감격과 감화가 없으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교의 구속론 또는 구원론의 두 가지 이론 즉 만족설과 감화설이 이때 생겼다.

아벨라드는 우리의 신앙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아담이 범죄한 것을 믿되 그의 죄가 후손에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유전된다는 원죄이론을 아벨라드는 수용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죄는 어떤 것이든 본인이 짓고 책임지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 일반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다. 그의 이론은 어거스틴과 대립하였던 펠라기우스의 이론과 비슷하였다.

파리대학에서 아벨라드의 강의는 인기가 많아, 수많은 학생들로 교실이 가득 찼었다. 그 중 헤로이제(Heloise)라는 한 여학생이 아벨라드를 극진히 존경하여 그와 서신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세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던 남녀의 연애 사건처럼 알려졌다. 아벨라드는 그녀의 미모에 매혹되었다. 헤로이제는 파리의 한 성당의 사제의 질녀였다. 그는 그녀의 개인교수가 되어 그녀의 숙부 집에서 동거하고자 하였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녀가 원치 않았는데 아이도 태어났다.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비밀에 부치기로 하고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숙부는 그들의 관계와 결혼을 반대하여 문제가 생겼다. 아벨라드는 헤로이제가 수녀가 되도록 권하였으나 그녀는 그의 청을 거부하였고, 아벨라드는 자신은 수도사가 되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게 되었다.

아벨라드의 신학을 반대한 적수들이 1140년에 그를 교회공의회에 고발하여 그의 삼위일체론과 속죄론, 자유의지론, 원죄론 등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아벨라드가 헤로이제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름다운 글이 많았다. 헤로이제가 후에 수녀가 되어 수녀원에 들어가 있었을 때 아벨라드는 찬송가가 될 수 있는 시를 모아서 헤로이제와 그녀의 수녀원의 수녀들을 위해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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