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트모스>, 2007-이네 실바 |
지난 3월 5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사망했다. 라틴아메리카에 또 한 번 변화가 올 것인가? 차베스의 죽음으로 민중이 무대의 전면에 올라선 지금, 시장경제 속의 좌파는 자신들의 모순과 직면하게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사우디아라비아 왕, 덴마크 총리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나라와 면적, 인구수, 국부(國富) 면에서 비슷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들을 확률이 높아진다. 전세계 주요 언론이 그의 사망 소식을 앞다퉈 전하고 55개국의 정상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차베스가 이렇게 유명해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1998년 베네수엘라 대선 때 한 정치 분석가는 "투표날이 되기도 전에 차베스는 잊힐 것"이라고 단언했다.(1) 당시 보수당 후보인 이레네 사에스가 베네수엘라의 엘리트들도 민중의 요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름대로 보여주었지만 지난 20년간 17%였던 빈곤율이 50%에 육박할 정도로 남미에서 심각한 경제침체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사에스 후보가 내건 '지속성' 슬로건으로는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었다. 뭔가 다른 조치를 취해야 했다. 1981년 미스유니버스 출신인 사에스 후보는 머리끈을 질끈 동여매기로 했다.
하지만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고 차베스가 승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지만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막바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지형은 화가 이브 클랭의 모노크롬처럼 단색 일변도였다. 멕시코의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1988∼94)은 110개가 넘는 공기업을 팔아치웠고, 브라질의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1994∼2002)은 외국 자본에 레드카펫을 깔아주며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1989∼99)은 국제통화기금(IMF)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안달하는 '모범생'이었다. 1998년 베네수엘라에서 대선이 시작될 즈음 제2회 아메리카 정상회의가 4월 18∼19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성황리에 열리고 있었다. 그때 찍힌 사진을 보면 빌 클린턴 대통령 양쪽으로 쭉 늘어선 남미 정상들의 얼굴은 알래스카에서부터 티에라델푸에고까지 아우르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창설하기로 한 결정으로 흥분돼 있었다.
유럽에서는 15개국 중 13개국이 '좌파' 정부였다. 하지만 '노동자가 승리하는 그날'은 멀게만 느껴졌다. 프랑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민영화의 황태자였고,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개혁' 정책으로 유럽 우파의 아이돌이 되었다. '제3의 길'을 주창한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스페인의 우파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전 대통령 재단으로부터 마거릿 대처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받았다.(2)
하지만 자유주의 경제를 주창한 시카고학파의 추종자들이 오래전부터 충실하게 작업을 하고 있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신호탄은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터졌다. 1989년 IMF가 제시한 구조조정 계획에 반대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무자비한 탄압으로 3천 명 넘게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카라카소 (Caracazo) 봉기'라고도 불린다. 3년 뒤 정권 타도를 기도한 두 번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차베스가 주도한 것이다.
에콰도르, 볼리비아, 멕시코 치아파스 지방에서 일어난 원주민과 민중의 봉기에서는 대대적인 민중의 결집을 부르짖었다. 자유주의라는 땅에서 민주주의를 캐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일한 해결책은 존 홀로웨이의 2002년 저작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3)의 제목처럼 권력 쟁탈을 벌이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우파가 더 자유롭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차베스도 처음에는 권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선거로 정권을 잡는 전략은 재앙으로 끝날 수 있고 또 '시스템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4) 하지만 이런 생각에 처음으로 변화가 온 것은 '시스템'에 대한 중산층의 분노를 확인하면서부터였다. 중산층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와 헌법을 개정할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시스템의 함정'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20년 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도 무장투쟁 전략을 포기한 바 있다. 칠레의 지식인 마르타 하르네커의 지적처럼 "기독교 민주주의는 중·상위 계층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사이에서도 엄청난 무게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인민연합(아옌데도 좌파 연합인 인민연합을 지지했다)은 감히 제헌의회 구성을 제안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만 기존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5)
하지만 차베스에게는 자신을 지지하는 군이 있었다. 다른 남미 국가와는 다르게 베네수엘라군의 장교들은 모두 상류층 출신은 아니었다. 이는 남미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것으로 선거운동을 하면서 차베스가 '혁명'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도 무엇보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나왔지 상대적으로 미온적인 정책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내건 공약은 스스로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야만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그쳤다.
실제로 차베스의 첫 내각에는 잠시 동안이었지만 전임 라파엘 칼데라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했던 마리차 이자기레가 유임됐고, 무상교육·무상의료 같은 1960~70년대 정책을 다시 펴기도 했다.
계급투쟁을 위해 은행가와 건배를
스티브 엘너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전의 급진주의 지도자들은 경제·사회 개혁정책을 펼 때 "국민이 정치적 주체가 되는 것을 경계했다. 지배계급이 급진화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6) 하지만 차베스는 반대 전략을 썼다.
1999년 투표로 제정된 새로운 헌법은 사회정책이 낙하산식으로 정부 부처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고 대신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엘리트들이 참을 수 없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차베스의 이념이라기보다 바로 이 정책이었을 것이다. 국민이 민주주의 사상으로 정치화하면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와 석유 수익에 대한 독점력이 약화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 뒤 벌어진 일은 잘 알려진 것이다. 기득권층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석유회사의 고위 간부들과 엔지니어들이 석유산업을 마비시키고 선거를 보이콧했다. 이 사건은 조그만 양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부르주아의 아집을 잘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차베스가 정책 방향을 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그레고리 윌퍼트의 지적처럼 "차베스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그리고 그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차베스의 운신 폭은 넓어졌고 더 개혁적인 정책이 실시됐다."(7)
언론에는 이런 차베스의 정책 변화가 200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휩쓴 정치적 급진주의 물결의 상징으로 비쳤지만(8) 우루과이의 보수당 대통령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의 견해는 달랐다. 남미의 정치적 선회를 '빨간색'이 아닌 '핑크 빛'에 가까운, 다시 말해 과거와의 혁명적 단절이 아니라 "모순적이고 고통스러운, 그리고 힘겨운 중도로의 이동"으로 본 것이다.(9) 그러니까 차베스가 다시 유행시킨 '국유화', '주권', '반제국주의' 같은 전복적인 용어는 차베스의 야심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좌파가 사상적으로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볼리바르주의자 차베스의 변화는 꽤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98년 대선 때 차베스는 시티뱅크, JP모건, 모건 스탠리 관계자들을 만나 그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10년 뒤에는 "우리의 전투는 계급투쟁의 표현"이라고 선언했다(2008년 11월 30일 연설).
1998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날, 베네수엘라 제1의 부호인 구스타보 시스네로스가 소유한 TV에 출연해 투자자들을 흥분시킬 만한 말들을 쏟아냈다. 카라카스의 증시는 이틀 만에 40% 뛰었다. 그런데 2011년 6월 <월스트리트저널>에는 이제부터 차베스의 심각한 건강 상태가 시장을 흥분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2001년 발표된 '2001∼2007 국가경제사회발전계획'은 '새로운 유형의 사용자 계급 창출'과 '외국 투자자들에 대한 신뢰 분위기 조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4년 뒤 차베스가 '21세기 사회주의'를 추구하겠다고 선언하자 계획은 폐기됐다.
차베스는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과 다른 방향의 정치 행보를 보였다. 베네수엘라에 쏟아지는 관심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국가가 모든 것을 해줄 수 없다"고 설명할 때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국가의 통제력을 회복시켰다. 대부분의 천연자원 개발사업을 국영화했고, 중앙은행과 통화정책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했다. 쿠바조차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골프장을 건설하고 있는데 베네수엘라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골프장을 압류했다.
베네수엘라는 빈곤율을 2003년과 비교해 50%, 극빈율을 70% 줄이며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했다(오늘날 베네수엘라는 남미에서 가장 평등한 국가다). 그리고 외교 강국으로도 떠올랐다.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창설을 무력화하고 대신 연대 원칙에 기초한 아메리카볼리바르동맹(ALBA)과 미국에 대해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한 남미국가연합(UNASUR),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국가공동체(CELAC)의 창설을 주도했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부채 상환을 돕고 볼리비아의 의료보험 체계를 지원했다. 미국 스페인어 일간지 <엘 누에보 헤럴드>(2007년 3월 1일자)는 베네수엘라가 "남미 지역의 주요 재정 원천으로서 곧 IMF를 대신할 것"이라고 할 정도였고, 프랑스 일간지 <레제코>(2013년 3월 7일자)는 "차베스는 하늘이 준 선물인 석유 개발로 얻은 수익에 만족하지 않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설득해 유가를 상승시켜 더 많은 수익을 확보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눈을 돌린 시선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먼저 '구정부'로부터 넘겨받은 국가기구를 신뢰할 수 없고 기존 공무원을 대신할 충분한 수의 충성스러운 행정가들을 찾기 힘들었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랠프 밀리밴드가 1970년대에 지적한 것처럼, "혁명적인 전환을 추구하는 정부는 행정 엘리트들로부터 정책을 실행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지지는 말할 것도 없고 '중립성'조차 기대할 수 없다."(10)
"당신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야?"
두 번째는 앞에 언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전략이다. 다시 말해 구체제와 신체제를 공존시키다가 '나중에' 구체제를 전복하는 전략이다. 차베스의 특별자문역이던 마이클 리보위츠에 따르면 "두 개의 체제가 있다. 먼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는다(구체제). 그리고 거기서 출발해 노동자들은 자본에 반하는 정책을 수립해 신체제를 수립한다. 신체제에서는 노동자위원회와 주민위원회가 기본 세포조직이 된다.(11) 출발점인 구체제는 물론이거니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도 신체제로 전환되는 유기적 과정의 일부다. 이는 이행 과정에 두 체제가 공존하고 상호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2) 그런데 새로운 체제 덕분에 그 유명한 '조직'을 성공적으로 구축했지만 관료주의의 답습, 부패 조장, 볼리부르주아(Boli-Bourgeois·차베스 정권에서 부를 축척한 관료들)라는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 같은 문제도 생겨났다. 이들은 대부분 차베스의 측근이었고, 이전 엘리트들만큼 돈에 쉽게 좌우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번째 문제는 차베스의 독재적인 태도였다. 차베스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누구한테 얘기하고 있는 줄 알아? 나는 대통령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행동은 권력의 사유화를 부추기고 자신이 주장한 '참여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것이다. 차베스의 사망으로 독재 문제(혹은 부작용?)가 해결됐다면 치안 불안 문제(13)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또 불평등을 영속시키는 자본세력에 맞서 여러 국가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벨라루스, 이란, 리비아, 시리아 등과 맺은 미심쩍은 동맹관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경제일 것이다. 특히 석유에서 나온 돈으로 수혈받고 있는 경제를 다각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한 분석가는 경제 다각화 노력을 '달리고 있는 차의 바퀴를 바꾸려는 시도'에 비교했다(<시카고 트리뷴>, 2005년 7월 15일자).
1973년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경제와 민주주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경제를 구하는 것이 우리 의무다." 차베스는 여러 가지 정치적 모색을 하면서 종종 키신저와 반대되는 선택을 했다. 그렇다고 차베스를 비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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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 / 임명주
(1) Bart Jones, <¡Hugo! The Hugo Chavez Story from Mud Hut to Perpetual Revolution>, Steerforth Press, Hanover (New Hampshire), 2007에서 인용.
(2) Tom Burns Maranon,
(3) John Holloway,
(4) Bart Jones의 저서에서 인용.
(5) Martha Harnecker, ‘Amérique latine. Laboratoire pour un socialisme du XXIe siècle’(라틴아메리카, 21세기 사회주의의 실험실), Editions Utopia, Paris, 2010.
(6) Steve Ellner,
(7) Gregory Wilpert,
(8) William I. Robinson, ‘Les voies du socialisme latino-américain’(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1월호.
(9) Franck Gaudichaud,
(10) Ralph Miliband,
(11) Lire Renaud Lambert, ‘La participation populaire bouscule le ‘vieil Etat’ vénézuélien’(시민참여 베네수엘라의 ‘구 국가’를 흔들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9월호.
(12) Michael Lebowitz, ‘Socialist Alternative’, 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2010.
(13) Maurice Lemoine, ‘Caracas brûle-t-elle?’(카라카스는 불타고 있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8월호.
[55호] 2013년 04월 10일 (수) 15:31:42 르노 랑베르 info@ilemonde.com
(글·사진: 기사제휴사 르몽드디플로마티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