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영 (한신대 신학과 여성신학·조직신학 교수)
Ⅰ. 시작하는 말
생명문화와 양성평등문화 라는 담론들이 전문적인 또한 대중적인 수준에서 폭넓게 유포되고 연구되고 있으나,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통찰에 이르게 되었는지, 또한 정확한 개념과 정의들이 무엇인지 하는 문제들이 매우 모호하다. 우선 생명운동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보자면, 생명운동이란 현대문명이 가져다준 환경 및 생명의 파괴현상을 유기농법운동, 생태적 공동체운동 등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간략한 서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흔히 “신과학운동”으로 불리는 동양사상접합론의 주창자들인, 미국 버클리대 원자물리학교수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등은 뉴턴의 고전물리학처럼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과 세계를 합리적인 인과율에 의해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상호연관 되고 보완적인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며, 물리학의 영역을 벗어나, 제반학문분야로 까지 확대되어 생물학, 의학, 철학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환경운동, 반핵운동, 여성운동과 결부되었고 녹색당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생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들과 운동가들의 글에 의하면, 생명운동이란 생명에 대한 직접적 위협에 저항하는 일로서, 반전평화운동, 기계적 산업사회를 넘어서서 유기농업 혁명, 생태생명 산업의 육성, 대안적 에너지 산업 육성을 추구하는 일이며,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에 맞서는 바,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이 지닌 문제들에 대한 비판운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편 사전적 의미에서 양성평등(gender equality)의 의미는 여성과 남성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동등한 참여를 보장받고 동등한 지위에서 동등한 권리와 이익을 향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 여성부, 여성정책용어사전에 의하면, 양성평등이란 남녀가 완전한 인권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동등한 조건을 가지며 그 결과 동등한 수준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해는 사실상 여성해방이론과 운동들 중에서 소위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과 거의 유사한 주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성평등연대 혹은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할 것이다. 즉 양성평등연대 혹은 운동은 오로지 헌법 정신에 근거한 ‘기회의 평등’만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며, 기존의 여성운동이 사회변혁의 문제의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의식 혹은 규명 없이 한국의 기독교대한 감리교 교육국에 양성평등의원회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으며, 그 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기존의 여성위원회를 양성평등위원회로 개편하였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시 양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하여 활발하게 운영해 나가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또 일상적으로 논해지고 있는 생명문화와 양성평등에 관한 담론들을 여성신학적 전망에서 부터 다룰 것이다.
Ⅱ. “생명문화” 에 관하여
1. ‘생명문화’ 라는 주제에 이르기 까지
20세기 말 생명의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관심에서 부터 생명에 관한 연구가 여러 학문 분야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기 시작하였으며, 신학분야에서 생명의 신학(Theology of Life)이 논해지기 시작하였다. L. 라스무센에 의하면 생명의 신학은 WCC가 “정의·평화·창조의 보전”(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JPIC)과정의 후속작업의 일환으로서 착수한 것이며, 또한 JPIC를 화해의 과정으로서 지속시키기 위한 형식을 “생명신학과 생명문화”라고 명명하였다. S. 맥페이그에 의하면, 우리 시대의 도덕적 이슈는 그리고 우리가 부름 받은 소명은, 우리와 다른 종(種)들이 살아남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제대로 살 것인지 하는 것인데, WCC는 이러한 소명을 JPIC의 슬로건으로써 총괄한다는 것이다. JPIC는 1983년 뱅쿠버 대회에서 하나님을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생명에 대한 위협들”과 죽음의 세력들에 대한 저항에 주목하였다고 한다. “생명의 신학” (theology of life) 이라는 용어를 누가 언제부터 썼는지 모른다고 하는데, 생명의 문화 혹은 생명문화라는 용어도 또한 이에 대한 정확한 정의도 행해지지 않은 채 이렇게 저렇게 그러나 매우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WCC가 이러한 생명에 대한 위협과 죽음의 세력들에 대한 저항에 주목하게 된 계기들에 대하여 라스무센을 비롯한 사람들이 대체로 거의 보도 해주지 않는다. 생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생명과 생명 사상과 신학에 대한 무수한 글들이 발표되고 있으나 대체로 자신들이 이러한 연구에 이르게 된 통찰들을 어디서부터 획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들이 미흡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오늘날 우리 인류가 생명 혹은 생명문화에 대한 각성과 통찰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환경문제, 생태계 위기, 더 나아가 인간 생명뿐 아니라 동식물을 비롯하여 무생물 전체에 가해지는 위기와 심각성에 대한 각성에 이르게 된 것은 생태학(Ecology)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찍이 1869년에 에른스트 헥켈은 생태학(ecology)을 생명체와 그것의 환경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하였다. 이처럼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연과 인간관계를 둘러싸고 다양한 형태의 생태학적 논의들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전(全) 지구적 공동 노력을 촉구하고 있는 환경위기, 생태계 문제에 대한 의식과 통찰에 이르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부터 활발해졌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몇 인물들이 있다.
나는 이들 중에서 먼저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을 제시하고 싶다. R. 카슨은 박사도 학계인사도 아닌, 미국 어업국 소속의 평범한 공무원 출신 여성 작가였으나, 1957년 강력 살충제 DDT 문제가 미국사회의 논쟁거리로 등장하자 DDT 폐해를 알리는 책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1962년에 출판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무분별한 살충제와 화학약품의 살포가 지속된다면 봄이 도래한다고 해도 새들의 노래가 사라져 침묵의 봄이 될 것임을 경고한 책이다.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케네디 대통령의 지시로 환경자문위원회가 구성·조사에 나섰을 뿐 아니라 환경보호청(EPA)이 설립되었다. 거대한 화학제품 회사들과 농약회사들에 의한 압력에 맞선 논쟁에서도 R. 카슨은 DDT의 해악이 과학적으로 규명됨으로써 압승을 거두게 되어 DDT 사용금지를 이끌어 냄으로써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는데 이바지하였다. 미국의 부통령을 역임하고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엘 고어는 『침묵의 봄』의 출판이야말로 현대 환경운동의 출발점이라고 까지 말할 정도로 극찬하고 있다.
두 번째로 언급하여야 할 인물은 생물학자인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이다.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매사츄세츠 대학의 저명한 지구과학 교수인데, 지구별만큼 정교하고 신비한 시스템인 세포를 연구하면서 지구와 세포는 장구한 세월을 함께 진화한 존재라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마굴리스는 국제적인 진핵세포(핵을 가진 세포)연구자인데, 원시의 독립적인 세포들이 합쳐져서 진핵 세포로 진화했다는 학설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공생생성(symbiogenesis)이 진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생명체는 단순히 환경에 적응만 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환경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이다. 마굴리스는 진핵세포의 진화와 구조연구, 과학의 대중화에서 보여준 탁월한 업적과 능력, 그리고 환경문제의 대변자로서 널리 알려진 여성과학자이다.
세 번째로 주목해야할 인물은 화학과 의학 두 분야의 박사학위를 지닌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이다. 그는 40대 중반부터 영국의 한 시골마을에 저택 겸 연구실을 마련하고 독립적인 과학자로 출발한 사람으로서 환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1960년대 미국의 항공우주국(NASA)에서 잠시 연구하는 동안 “지구의 모든 생물이 마치 하나의 초생물체(Superorganism)처럼 함께 행동하면서 지구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자연 현상과 물질 순환 과정을 주도한다”는 획기적 사고에 이르렀다. 그는 지난 30억년 동안 대기권의 원소 조성과 해양의 염분농도가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는데, 만약 생물의 존재가 지상에 출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구를 구성하는 탄소, 인, 질소 등의 주요 원소들이 대륙과 해양을 오가며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규명해내었다. 놀랍게도 그 메커니즘이 전적으로 생물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물체의 능력에 착안하여 이 지구가 “생물과 무생물의 복합체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고 단정 짓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지구의 실체를 일컬어 ‘가이아’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통찰은 1970년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로서 처음 제안되었으며 1979년에 출판된『가이아』(Gaia: A New Look at Life on Earth) 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가이아가 대단한 자기 조절능력을 발휘하는 거의 불멸의 존재로 간주하나, 동시에 가이아는 환경적 재난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열대우림 지역을 지구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으로 간주하는데, 열대우림의 손상은 핵전쟁보다 더 가이아에게 끔찍한 재앙이라고 경고하며 지구온난화의 추세가 열대살림의 파괴에 덧붙여 질 때 인류를 포함한 생물권 전체에 엄청난 재난을 초래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그의 저서 『가이아』는 지구과학, 환경과학, 진화 생물학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과학에서의 새로운 통찰들은 생태학, 생태신학, 생태여성신학, 생명 문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세포연구를 통하여 하나의 상호 연동된 유기체로 작동하고 있는 마이크로존재들(microentities)로 부터 진화의 역사를 재서술 함으로써 전통적인 과학의 관점을 해체해 나가고 있다면,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대기층들과 하나의 자기 조절적인 매크로시스템(macrosystem)에 대한 탐구로써 생명에 관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 양자는 생명체들이 모두 경쟁적인 개별체로서가 아니라 상호작용적인, 창조적인 통일체들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적이다.
1972년 로마클럽(Club of Rome)이 생태학적 파국에 관한 보고서『성장의 한계』(The Limits of Growth)를 출판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생태계 위기에 대한 경종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생태문제에 대한 자각과 이에 따른 환경운동이 우리나라에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라고 볼 수 있다. ‘심층생태학’, ‘에코페미니즘’, '사회생태학’과 같은 개념들이 1970년대 초 이래로 발전되어 왔지만 그런 제목들을 가지고 출판된 영어 서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기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중심적 사고 혹은 생명 이해에서 부터 모든 생물의 생명, 혹은 더 나아가 무생물과 지구나 자연 생태계 전반의 존립 자체와 위기의식에 대한 통찰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된 것은 결정적으로 환경·생태계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관심에서 부터 촉발된 것이며, “생명 문화”라는 우리의 주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부터 논해져야 할 것이다.
2. 환경운동과 생태(여성) 신학은 생명문화를 지향한다!
우리가 오늘처럼 생명에 대한 관심 혹은 통찰에 이르게 된 계기들과 관련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특정 계급에 국한되지 않는 환경 운동, 평화 운동, 여성해방 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신사회 운동(New Social Movement) 혹은 신좌파(New Left)의 영향력이다. 즉 1970년대에 환경 운동과 반핵 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급진좌파운동이 구미에서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전통적 사회 운동이 노동자의 계급투쟁 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신사회 운동은 환경 및 생태 운동, 여성 해방운동, 지역자치 운동, 평화운동이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초계급적 참여하에 추진되면서 운동 참여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민사회의 생활양식을 변화시키고자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신사회 운동 혹은 신좌파의 대두는 1960년대 후반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래의 권위주의 정치를 끝장내려는, 즉 정치 권력을 획득하지 않은 채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전 세계적으로 분출시킨 ‘68혁명’의 영향력을 말해준다. 홀거하이데의 “68혁명과 독일 대안신문 ‘타츠’”라는 글에 의하면, 68세대는 자발적으로 조직한 대안프로젝트 안에서 협동 정신과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형태에 기반한 자기들만의 일터를 조직하려 했으며, 불법 점유로 마련한 삶터를 지키거나 핵발전소 건립에 맞서기 위해 수만명의 활동가들이 모였다는 보도를 전해주고 있다. 독일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대중운동은 1976년 말 거의 10만명이 참가한 핵발전소 건설 터를 점거하려 했던 ‘브로크도르프 투쟁’에서 정점에 달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인류역사상 최초로 핵폭탄을 투하한 이래로 동서 이데올로기 대결이 고조되던 냉전시대에 미·소 양대 초강대국들은 군비경쟁을 통해 인류전체와 지구를 절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 경쟁을 벌여왔다. 1950년대 서구 지식인들이 시작한 반핵평화운동은 1970~8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어, 런던, 암스테르담, 베를린에서 수만명이 핵무기를 폐기하라며 시위에 나섰다. 1950년대 말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핵무기 금지를 촉구하는 강력한 대중운동이 일어나 핵 위협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유럽에서 반핵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시기는 1979-87년이다. 1980년 3월 “지구의 여성과 생명: 80년대의 에코페미니즘에 관한 회의”라는 최초의 에코페미니스트 회의에 수많은 미국 여성들이 애머스트에서 모였는데, 이는 미국 최초의 핵발전소 사고로 기록된 스리마일 섬(Three Mile Island)에서 원자로 노심이 용해되는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80년 12월 인도 보팔(Bhopal)에서 발생한 유니언 카바이트 살충제 공장의 유독가스 방출사건, 1986년 4월의 체르노빌(Chernobil) 원전 방사능 유출 참사 등은 기술과학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고조시켰다. 독일의 사회학자 마리아 미스와 핵물리학을 공부하다가 환경운동에 투신한 인도의 반다나 시바가 공동 집필한 『에코페미니즘』의 보도에 의하면, 인도 보팔 소재 유니언 카바이트사에서의 저 사건은 40톤의 유독가스 방출로 인해 당시 3천명이 사망했고, 40만명이 죽어가고 있고 그 고통은 아직도 지속 중이라 한다. 이 사고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이들은 여성이었고 가장 끈질기게 정의를 요구한 것도 여성이었다고 한다. 또한 여성들은 시칠리아에서 핵 미사일 기지 건설에 반대하였다고 하는데, 독일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 반대운동에 추진력이 된 여성들이 모두 의식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아니었다고 한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이후 한 러시아 여성은 “남자들은 생명을 생각하지 않아요. 자연과 적을 정복하려 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서 여성해방운동과 평화운동이 결합되기에 이르렀고 반핵• 군축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에 “소년들로 부터 (총이나 칼과 같은) 장난감들을 제거하라” (take the toys away from the boys) 는 페미니스트 반전운동의 슬로건들이 유행했다. “총체적 성령론”을 표방하고 있는『생명의 영』의 머리말에서 J. 몰트만은 보도하기를, 우리는 1986년 ‘체르노빌’사건과 1991년 아버지 부시가 도발한 ‘걸프만 전쟁’에서 죽음에서 생명에로 전향할 것을 요구하는 재난들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지면과 시간의 제약 때문에 우리에게 소개된 생태신학과 생태여성신학에 관한 모든 문헌들을 제시할 수는 없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미에서 반핵군축운동으로 나타난 평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을 때의 상황을 반영하면서, 미국의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n)은 1982년 미국종교학회의 학회 회장 취임연설에서 종교분야 학자들에게 핵으로 인한 지구의 황폐화에 대처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상기시켰다. 그는 신학자들에게 핵 위기 상태를 당연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런 사고방식과 문화를 저지할 수 있도록 기독교의 중심적 상징들을 해체하여 재구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S. 맥페이그는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카우프만의 기획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응답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러한 응답의 결실이 바로 『하나님의 모델들』 (Models of God, 1987)이라는 저서이다. 맥페이그의 첫 번째 생태학적 저서인 『하나님의 모델들』은 우리 시대를 위한 신학적 신념들을 표명해야 할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로즈마리 류터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생태여성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생태여성신학에 관한 글들을 발표해 왔는데, 그 글들은 류터의 생태여성신학에 대한 소개와 내용 그러나 비판적 평가들이 시도된 글들이다. 특히 나는 류터의 생태여성신학이라는 글에서, 그이의 생태여성신학 문서들에 대한 개관이라는 항목으로써 1971년에 기고한 글에서 부터 시작하여 1992년에 출판한 대표적인 생태여성신학 저서Gaia and God, 그리고 2005년에 출판한 Integrating Ecofeminism, Globalization and World Religions에 이르기 까지 그이의 생태신학에 있어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제시하였다.
한국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들 중에서 우선 박봉랑 교수가 있는데, 그는 1986년에 출판한 저서 『교의학 방법론Ⅰ』에서 매우 짧지만 생태학과 신학이라는 항목을 다루었다(248-258). 이는 김균진 교수가 1999년에 『생태계의 위기와 신학』을, 2006년에 『자연환경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이해』를, 그리고 소장신학자, 임홍빈이 2008년에 『만물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 기독교 생태신학 Ⅰ』을 출판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박봉랑 교수는 생태학과 신학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박봉랑 교수의 저 저서가 출판되기 이미 오래 전부터 강의에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저 생태학에 관한 글은 보다 더 이른 시기의 것일 수도 있다. 이외에 많은 여남 신학자들이 환경문제와 생태계위기 문제를 신학적으로 다룬 생태신학과 생태여성신학에 대한 글들을 통하여 생명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장 여신도회가 한국에서 생태신학이나 생태여성신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논해지기 오래 전부터 생명문화 창조운동을 전개해 왔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말 문제제기와 토론을 거쳐 1980년대에 조용히 시작된 생명문화 창조운동은 선교·교육·사회 3부 위원 훈련(1980년 2월 선교교육원)으로 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오늘의 문화가 죽음의 문화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기장 여신도회는 생명운동이 지향하는 새 공동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그 운동의 전개를 오늘까지 줄기차게 전개해 오고 있다. 기장 여신도회는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라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지니고 생존권 투쟁, 반전반핵운동, 반공해운동, 최저생활운동, 여성해방운동, 평화통일운동을 생명운동의 큰 틀에서 실천해 오고 있다. 이러한 여신도회의 활약과 헌신은 2008년 7월 이명박 정부의 반생태적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발족한 바, 기장의 생태공동체 운동본부의 활동이 비교적 짧은 준비기간을 거쳐 가동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랫동안 축적된 여신도회의 조직과 저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이 환경운동 혹은 생태보존 운동, 그리고 생태신학•생태여성신학은 모두 생명운동을 지향한다.
Ⅲ. "양성평등"에 관하여
1. 남녀 간의 차이인가 평등인가?
우선 우리는 “양성평등”이라는 용어에 대해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양성평등이라는 말은 영어 gender equality를 우리말 번역한 것이다. sex가 남녀의 생물학적·해부학적인 성을 지칭하는데 반하여, gender는 기존의 문화에서 육체적인 것으로 남성 혹은 여성에게 일치시키려는 감정적·심리적 속성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흔히 사회·문화적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을 의미한다. 한편 평등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말해주는 용어로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개념이다. 그는 평등한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구별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평등 개념이 사회적 선(good)으로 자리 잡으면서, 평등을 정치적으로 실현하고자 다양한 투쟁이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특히 평등에 대한 요구는 18세기와 19세기의 인권전통 혹은 운동, 즉 법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원리에 기초해서 금세기의 큰 흐름이 생성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보면, 평등이 정신적·물질적·경제적·성적·정치적인 제 문제의 모든 것에 연관되어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기준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자라났을 때 페미니즘이 등장하였다.
페미니즘(feminism)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금세기 들어서인데, 이 말에 대해 사전적 정의는 보통 “남녀평등의 신념을 바탕으로 여성의 권리 주장”이라는 의미로 정의되며, 폭넓은 의미로는 “어떠한 방법이나 이유이건 여성이 종속에 대해 깨닫고, 그것을 마감하려는 사람들 모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R. 류터는 페미니즘을 "공적 삶으로부터 주변화 되게 하는 열등한 그룹으로 여성들을 규정하는 문화적인 그리고 사회-경제적 체계에 대한 비판“이라고 정의한다. “페미니스트란 남자처럼 되고 싶어 날뛰는 성난 여자들”이라는 등의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소문에 맞서, 페미니즘이 반(反)남성주의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임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려는 의도로 집필된 『행복한 페미니즘』의 저자 벨 훅스(bell hooks)는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적 지배와 억압을 종식시키고자하는 운동이며 젠더 차별을 종식시키고 평등을 창출하고자하는 모든 노력들을 끌어안는 투쟁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어쨌든 페미니즘의 제1의 물결로 일컬어지는 18, 19세기 이래의 여권운동(women's rights movement)과 제2의 물결로 일컬어지는 1960년대 이래의 20세기 여성해방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을 거치면서 여성 평등권에 대한 인식은 매우 확고하게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흔히 “여성 문제” 혹은 “여성의 이슈”라는 말로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억압들을 논하여 왔으나, 이제 페미니스트들은 소위 “여성 문제” 혹은 “여성의 이슈”란 단지 여성들만의 문제 혹은 이슈들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들의 문제들로 부터 기인하는 문제요 혹은 남성과 여성들 즉 양성의 문제와 이슈들이라는 인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 이래의 여성해방운동에 있어서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 하에서 남성과의 분리주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자율적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그러나 여성해방운동이란 결코 남성을 배제한 채 성취될 수 없다는 인식과 더불어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폭이 전(全) 지구적으로 확산됨으로써 양성평등적 사고와 실천이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논해지고 있다는 점을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페미니스트 이론들과 행동가들 사이에서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노선과 반면에, 육체적·생물학적 차이를 넘어 인간이라는 종(種)은 하나여서 분리할 수 없고, 양성(兩性)은 모든 점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노선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즉 남성과 여성의 평등인가, 차이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짐으로써 끊임없는 소모전과 혼란을 야기 시키는 양상도 보이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노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또한 이러한 논쟁이 페미니즘에 끊임없는 자양분과 활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이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하여 이를 차이로 혹은 평등으로 볼 것인가를 둘러싼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도 동일한 논쟁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복음주의자에 의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로 복음주의자를 위해서 기록된 것”을 밝히면서 스탠리 J. 그렌츠와 데니스 M. 키에스보의 보도에 의하면, 대부분의 저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입장에 대하여 ‘계급질서적’ (혹은 ‘전통주의적’) 견해와 ‘평등주의적’ 견해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급질서적 입장을 변호하고 있는 몇몇 학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전통주의’ 혹은 ‘계급질서주의’라는 카테고리를 거부하고 상호보완(complementarity) 에 근거한 입장임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상호보완이라는 개념은 동등성과 함께 남성과 여성 사이에 차이는 있으나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모두 내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창조하였으나 남성의 지도력에 여성을 종속시킴으로써 남성을 보완해 주기 위해 여성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과연 상호보완이라 말할 수 있는가를 의문시하지만, 스탠리 J. 그렌츠와 데니스 M. 키에스보는 저들의 견해를 존중하여 ‘상호보완’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상호보완이란 사실상 남녀가 서로 서로를 보완하는 상호보완이 아니라 우월한 남성을 열등한 여성이 보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인데, 사실상 이는 남성을 위한 여성의 일방적인 보완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는 남녀 간의 차이를 그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평등주의가 아닌 차이주의라고 보아야 한다.
오늘에 이르면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 학계와 정부 정책차원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개신교의 경우 맨 처음에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에 양성평등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그 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기존의 여성위원회를 양성평등위원회로 개편하는 등, “양성평등”에 관한 논의와 정책, 기구화 법제화를 통해 양성평등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남녀 간의 평등 혹은 동등성 보다는 차이를 주장하는 다른 노선과 이론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남녀 간의 차이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남녀 간의 신체적 차이는 인식의 방식과 세계관의 차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남녀 간의 차이를 주장을 하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하면, 종래의 인식은 남성이 이성과 합리성을, 여성이 감성과 직관을 대표하며 이성과 합리성의 측면이 감성이나 직관의 측면보다 우월하다는 견해를 주장해 왔으나. 이런 주장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우월하다고 간주된 남성적 측면보다 열등하다고 간주된 여성적 측면을 오히려 우월한 것을 내세우면서, 관계의 전복 혹은 역전을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은 남녀 간의 다름과 차이를 강조하는 차이주의에 기초해 있는데, 이들을 급진적 페미니스트(radical feminist)들 혹은 혁명적 페미니스트(revolutionary feminist)들이라고 칭한다. 양성평등이라는 우리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고 혹은 전제하고 시작되어야 한다. “양성평등 교육 및 성인지 교육을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진흥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남녀차별적 의식과 관행을 개선하고 성별에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과 소질을 계발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기반의 조성에 기여함”을 그 설립목적으로 하여 2003년 6월에 개원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Korean Institute for Gender Equality Promotion and Education: KIGEPE)의 설립목적을 비롯한 교육과 프로그램들과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마치 양성평등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양성평등이 아닌 양성간의 차이를 주장하는 다른 이론과 실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2. 양성평등의 정의와 내용에 대하여
2002년 11월에 양성평등교육진흥원 설립운영 사업의 예산을 확보(여성발전기금)하여 2003년 6월에 개원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하 양성평등교육원으로 약칭함)의 자료들을 비롯하여 대체로 양성평등에 관한 글들은 여기서 논해지고 있는 개념들에 대한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 유감스럽다.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성평등교육원에서 나온 자료들에 의존하기로 하였다. 우선 양성평등이라는 의미 혹은 개념을 설명하는 송인자의 글에 의하면, 양성평등을 강조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불평등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현재의 성차별에 대한 대안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양성평등은 성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성, 남성이라는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임희숙의 글에도 양성평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조건에서 인권을 존중받고 자아 실현과 사회발전을 위한 잠재력을 개발하여 공동의 발전과 그 발전의 혜택을 함께 누리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개념이다. 양성평등의 초점은 여성과 남성이 서로 상대에 대한 배려와 지원을 통하여 상호 발전과 상호 만족을 얻도록 도와주고, 성차별 문화와 교육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하고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성평등 개념 혹은 이해란 바로 이후에 제시될, 베티 프리던((Betty Friedan) 에게 가해진 ‘수정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혹은 ‘신보수의 페미니스트’라는 동일한 비판을 결코 회피할 수 없다.
양성평등교육원에서 나온 한 자료는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1970년대 이전의 부녀복지행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요보호 여성과 저발전 상태의)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 성불평등 문제를 여성만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식하며, 개발과정에서 배제된 여성을 생산과정에 통합시켜 발전의 혜택을 분배하는 것을 지향하며, 여성중심, 기족계획, 모자가정 지원, 요보호여성의 복지, 여성 보건관리, 출산휴가, 여성교육, 여성노동, 여성소득창출사업등 여성의 실질적인 젠더요구(practical gender needs)를 충족시킨다는 정책을 여성중심 접근(Women in Development : WID)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접근은 여성정책의 주변화와 고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중심적 접근에서 부터 1980년대와 90년대에 이르러 평등의 관점에서 부터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려는 정책으로서 젠더중심 접근(Gender and Development :GAD)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즉, 남성과 여성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며, 성역할의 변화를 통해 (이원성은 다양성으로, 양극성은 복합성으로, 위계성은 평등성으로) 젠더관계의 개편과 여성지위 향상을 위한 전략적 젠더 요구(strategic gender needs)의 증진을 꾀하며, 여성을 배제하는 주류의 남성중심성과 가부장적 질서를 전환시켜 양성평등을 획득하며, 아버지 출산 휴가제ㅡ파파쿼터제등을 추구하는 젠더중심 접근으로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여성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부터 남여간, 즉 양성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은 1985년 제3차 세계여성대회에서 이다.
GAD의 전략으로서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가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1995년 제4차 세계여성회의에서 제시된 것으로서 모든 정책분야에 성별문제를 포함시키는 성 정책 전략(gender policy strategy)으로서 지금까지 여성사안은 여성이 문제제기하고 여성이 문제해결의 책임자였다면, 이제 여성과 남성 모두 의사결정과정을 변화시키고, 양성간의 불평등을 해소할 의무가 주어짐을 말한다. 이러한 성 주류화의 3단계는 1. 여성의 주류화(mainstreaming of women)단계로서 여성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의사결정권을 갖는다. 2. 젠더관점의 주류화(mainstreaming of gender) 단계로서 모든 정책 및 프로그램에 젠더관점을 통합시켜, 여성과 남성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는 성별영향평가를 실시한다. 3.주류의 전환(transforming the mainstreaming) 단계로서 남성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사회의 주류문화와 규범을 성평등하게 전환한다. 이외에도 양성평등교육원의 송현주의 글 “국제기구의 성평등 정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양성평등을 논하는 글마다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를 강제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2002년 그 이전에는 ‘잠정적 우대조치’라는 개념이 사용되었으나, 2002년 ‘여성발전기본법’(1995년 제정)을 개정하게 되면서 ‘적극적 조치’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페미니스트 이론들과 행동가들 사이에서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노선과 반면에, 육체적·생물학적 차이를 넘어 인간의 종(種)은 하나여서 분리할 수 없고, 양성(兩性)은 모든 점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노선사이에 벌어진 논쟁, 즉 남성과 여성의 평등인가, 차이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음을 밝혔다. 바로 양성평등이라는 개념과 이것에 기반하여 전개되는 전략들, 또한 적극적 조치라는 것들은 양성간의 차이가 아닌 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말해준다. 이는 1960년대 말부터 조합, 노동당원, 복지 국가와 밀접하게 관련된 대부분의 영국 운동가들의 입장이며, 또한 베티 프리던이 시작한 미국의 전국여성기구(NOW)의 특징이기도 하다. 평등주의는 여성들이 행동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데, 이는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군대만 개방되는 것이 아니라 무장 전투와 죽일 권리도 여성들에게 개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앵글로색슨 국가와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적극적 조치’가 여성의 존엄성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한다. 이 ‘적극적 조치’는 여성들이 특정 직업군이나 정치계에 진출하고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개념이다. 이것을 프랑스식 어법으로 옮기면 ‘긍정적 차별’이 된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미국 여성들을 포함한 또 다른 이들에게는 ‘적극적 조치’가 유용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베티 프리던은 1963년에 여성해방운동에 관한 매우 영향력 있는 저서,『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를 썼으며 1966년에 미국의 전국여성기구(NOW)를 창설하여 1970년까지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1973년에 국제페미니스트의회를 소집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전미 여성스트라이크를 지도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 법 개정 쪽으로 힘을 쏟게 되어 특히 평등권 수정안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모성보다는 임금노동 쪽이 존중되는 사회에서는 참된 선택의 자유 등이 없음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을 완전히 개인적인 자유의 문제로 치부하였다는 점에서 프리던은 페미니즘 이론에서 이탈되었다고 평가되는데 오히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을 적대시 하게 되어 ‘수정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혹은 ‘신보수주의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미 앞에서 지적된 것처럼, 한국의 양성평등교육원의 자료들과 임희숙의 글에 나타난 양성평등 이해는 이러한 맥락과 잇닿아있고 따라서 개인적인 자유의 선택의 차원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여성운동과 이를 뒷받침해 온 페미니스트 사상은 서로 다른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여성운동의 명망가들은 점차 사회와 국가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소수의 여성들이 최고의 직업이나 정부에 새로 준비된 ‘평등한’ 부서로 승진함에 따라 이러한 명망가들은 미국 여성운동의 품질증명이 되었다고 한다. 즉 미국 자본주의는 과거에 여성운동, 흑인운동,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급진주의자들을 체제내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미국 헌법의 평등권 조항은 주류 페미니스트들의 희망이었으나 이 조항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직에 있던 1980년대 동안에 무너지고 말았다고 한다. 지난 몇 십년 동안 미국의 페미니스트운동은 소수의 여성들이 자기 발전을 이룩할 기회는 어느 정도 쟁취했으나, 대다수 여성 노동자들의 몫으로는 가난과 실업, 차별을 남겨놓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의 양성평등 정책이란 여성들, 특히 중산계급에 속한 여성들이 남성들의 주류사회에 끼어들기 혹은 “따라잡기‘에 지나지 않는가라는 비판으로 부터 자유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사회에서 급격하게 널리 사용되고 있는 양성평등이라는 용어, 양성평등의 정의와 내용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특히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남녀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달리 남녀 간의 차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대한 고려 없이 논해지는 양성평등에 관한 논의들의 문제점들을 일별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들은 여성해방운동의 이론과 실천과 결부되어, 따라서 여성신학과 결부되어 논의되는 주제이다.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이제 여성해방을 내세울 때 이러한 해방이 단지 여성만의 이슈가 아니라 여성의 해방은 남성의 의식변화와 실천이 수반될 때 성취될 수 있는 문제임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평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여자와 남자가 함께 이룩해야할 평등임을 보다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을 선호하는 추세라 할 수 있다. 즉 양성평등이란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주창된 여성해방 혹은 여성신학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주제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여성해방을 보다 더 설득력있게 추구하려는 여남 해방운동가들의 적응과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Ⅳ. 마치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생명문화와 양성평등에 관한 담론들이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신학적인 측면들을 고려하면서 논하였다. 생명문화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개념 정의조차 제대로 물어지지 않은 채 두루 두루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생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급증하였고 생명문화라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만큼 인간과 동식물들과 지구라는 행성의 환경과 생명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들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생명문화 운동과 이론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오늘의 생태 (여성) 신학과 생명 신학의 통찰에 이르게 된 역사적 맥락을 제시하면서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동향에 대해 서술하였다.
여성해방운동과 여성신학은 오랫동안 여남평등 혹은 양성평등을 추구하며 페미니스트들은 제3의 인터내셔널리스트로 호칭될 만큼 여성해방운동 혹은 양성평등운동은 전세계적 현상들로, 따라서 보편적 주제들과 운동으로 대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문화와 여성해방운동 즉 양성평등의 관련성에 대하여 그 핵심적인 논지에 대해 제시할 필요가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분교 교수이며 생태여성론(ecofeminsm)의 전세계적 논의를 촉발시킨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의 저서 『자연의 죽음: 여성과 생태학, 그리고 과학혁명』(The Death of Nature: Women, Ecolog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은 여성과 자연의 유대관계가 문화, 언어, 역사를 초월하여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논하고 있다. 머천트에 의하면, 이 양자 간의 오랜 상호연관성은 최근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두 사회 운동, 즉 1963년에 출판된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로 상징되는 여성해방운동과 1970년 지구의 날이 전국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 생태운동에 의해 극적 모습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들 운동의 공통점으로서 머천트는 평등의 관점을 제시한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남성에 종속시키는 문화 경제적 제약들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며, 생태 환경운동가들은 생태계 파괴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경고하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이 지닌 목표를 결합시킬 때 여성과 자연이 지닌 자원이라는 가치지배에 기초하지 않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지닌 재능의 충분한 표현과 환경과 생태계의 유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가치와 사회 구조를 제시할 것임을 역설하였다. 카타리나 할케스(Catharina J. Halkes)는 머천트의 논지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 생태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은 위로부터 주어진 위계질서적 사고체계에 저항하고, 원인과 결과를 일직선상에 놓으면서 개개 인간과 자연에 내재해 있는 훨씬 더 복잡한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단선적 사고체제를 반대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는 점을 제시한다. 이미 발표한 글들에서 나는 생태학과 페미니즘의 복합어인 에코페미니즘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이를 여성신학에서 논하고 있는 생태여성신학(ecofeminist theology)은 어떻게 여성과 자연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문화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들에 있어서 상호관련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논하였다.
이미 앞에서 제시된 것처럼 환경·생태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은 생명을 추구하는 운동으로서 평화운동의 모습으로 혹은 환경·생태운동, 평화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은 특정계급에 국한되지 않는 신사회 운동으로서 생명운동 혹은 생명문화로 수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논한 것처럼 나는 우리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양성평등이라는 개념과 추구의 명확한 개념 정의와 그 역사적 배경, 이 개념이 지닌 한계들에 대한 인식부족이라는 문제들을 지적했다. 특히 시작하는 말에서 나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시된 바, (양)성평등연대가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 즉 헌법이 보장해 주는 테두리 내에서 ‘기회의 평등’을 추구함으로써 사회변혁에 대한 동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미 (성)평등과 노동 혹은 계급문제와의 갈등과 대결의 양상을 이미 적나라하게 경험했던 바, 1960년대 말부터 조합, 노동당원, 복지 국가와 밀접하게 관련된 대부분의 영국 운동가들의 입장과 페미니즘 운동에 관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저서의 주인공이자 현대 페미니즘 운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베티 프리던이 1970년대 후반부터 법 개정에 전력질주하며 개인적 선택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수정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신보수주의 페미니스트’라는 비판에 직면했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과 이 기관의 정책과 자료들에 많이 의존하여 전개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양성평등운동과 정책은 과연 양성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만을 일단 나는 지적하기로 한다.
그러나 한편 이런 한계를 지닌 양성평등운동이 우리나라에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09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의하면, 남한은 134개국 가운데 115위라는 수치스런 순위를 차지했는데, 종교, 문화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오랫동안 제약된 중동과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우리나라는 꼴찌에 해당하며, 이 순위가 해를 거듭할수록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 분야에서 세계 최하위권을, 경제적 참여와 기회에서도 여성들은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교회 안에서의 성 격차 지수를 추가한다면 그 순위는 더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양성평등 이론가들과 운동가들은 양성평등운동이 지닌 한계에도 불구하고 양성평등이 지향하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의 기회균등이라도 획득하려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양성평등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선진국 진입에 있어서 필수적인 여성인력의 활용도를 높이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국가정책과 남성들의 주류사회 따라잡기 혹은 끼어들기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양성평등운동은 활발해졌고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부응 혹은 동의가 어우러져 한국교계에서는 양성평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여성의 권리주장이라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연과 사회에 있어서의 시장 경제의 운영법(modus operandi)으로 부터, 즉 자본주의로 부터 파생된 경쟁과 침략, 지배의 비용에 대해 페미니즘과 생태운동 둘 다 매우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생명문화운동과 양성평등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한국교회와 신학은 결코 간과하거나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