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스가랴 9:9-10, 고린도전서 1:22-25, 마가복음 14:3-9
설교문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난 다음이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요한 13:33) 제자들은 당황했고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요한 13:36).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닙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알았기, 꼭 그 길로 가셔야 하느냐 물은 것입니다. 왜 그 길로 가시려고 하느냐 물은 것입니다. 그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느냐 반문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처음 가르치셨을 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가 8:31-33, 마태 16:21-23) 하며 꾸짖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다시 물었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죽는 줄 알면서 왜 이 길로 가시나이까. 꼭 이 길로 가셔야만 합니까. 이 길 말고도 딴 길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부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지상 마지막 여행을 떠나시면서 주님은 아셨습니다. 이 길의 끝이 죽음이라는 걸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군대가 합작하여 자신을 죽일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앞장서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마치 다 큰 어른이 어린이용 삼발이 자전거를 탄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구약성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일부러 그런 모습을 연출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보무당당한 말이 아니라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당신이 '전쟁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평화의 임금'으로 오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스가랴의 예언이 또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평화를]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스가랴 9:10) 전쟁과 폭력에 찌든 삶을 살던 예루살렘 백성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가 11:10)라고 환호했습니다. 평화의 연호(連呼)였습니다.
다음 날인 월요일,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요한 2:15) 그리고 "그들에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누가 19:46)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강도'(lestes)라는 단어는 좀도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조직적인 강탈자'를 뜻합니다. 돈 바꾸는 사람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배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난(Hanan)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자기의 일가친척으로 예루살렘에 '대제사장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 일족은 성전의 상권을 장악하여 지정한 짐승과 화폐가 아니면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만들어 막대한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종교를 팔아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대제사장 하난(안나스) 가문에 채찍을 가하셨습니다.
다음 날인 화요일, 반격이 시작됐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루 종일 예수님에게 논쟁을 걸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그리고 "모든 계명 중에 제일가는 계명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빼고 나머지 모든 질문은 정교한 덫이고 함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하는 자들의 자기모순과 위선을 폭로하시고 꾸짖으셨습니다.
다음 날인 수요일 저녁, 예수님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다. 당시 이 병에 걸리면 그 사람은 추방되거나 제명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들은 친히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이는 엄격히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죽음도 불사하는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주님은 자꾸 왜 이러시는 걸까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왜 자꾸 이 길로 가시나이까.
예수님이 식탁에 계실 때 한 여인이 다가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부었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사실 이 여인은 당시 금지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배우고 토론하는 것은 남자들의 일이었습니다. 여성은 그 틈에서 요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누가 7:38) 그렇자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한 12:3) 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 자신의 지정된 자리를 일탈했습니다.
당시 여성은 언권(言權)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지각이 없는 존재'라 여겨 말할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남자들의 시중만 들어야지 말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온 집을 향기로 진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향기가 그 여인의 언어였습니다. 발언권이 없던 그 여인은 그 향기로 예수님을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멀리 네팔에서 수입한 고귀한 나드(Nard) 향유 전체를 깨뜨려 자기의 아픔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아니, 책망했습니다. 그 여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 여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여인도 알았습니다. 지금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았습니다.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남에게 짓밟혀 본 사람은 압니다. 여인은 예수께서 어떤 형벌을 받게 되실지 알았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금기를 깨뜨린 결과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높은 분들은 절대로 자기들의 질서와 이권에 도전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게 여인은 주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았기에 아무 말 없이, 눈물로, 향기로, 사랑으로 그분의 마지막 여정을 축복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처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따위의 물음을 묻지 않았습니다. 못 가신다고 앞을 막지도 않았습니다. 참 메시아의 길을 알았기에 눈물로, 사랑으로, 향기로 그분의 가시는 길을 예비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이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마가 14:8)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을 알고 그 길을 예비한 여인을 가리키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로 인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가 14:9, 마태 26:13) 축복하였습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의 넷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음 날인 목요일, 주님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시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알다시피, 유대 도시들은 불결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오물과 먼지와 쓰레기를 비껴갈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발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위생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자유민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아내와 자녀와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자기의 발을 씻기시려는 예수님에게 그렇게나 놀랐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여, 주께서 [노예가 아닌 주님이!]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요한 13:6) 베드로는 충격으로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웅얼거렸을 겁니다. '주님, 아니... 세상에나!' 그렇게 주님은 인간으로서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마가 10:45, 현대인의성경)
최후의 만찬은 목요일 자정이나 금요일 새벽 2시쯤 끝났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서셨습니다. 달빛이 형형했습니다. 보름달이었습니다. 서기 33년 4월 3일 금요일, 주님은 어디로 가고 계셨던 걸까요.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꼭 그 길로 가셔야만 합니까.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아시면서 왜 자꾸 그 길로 가십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 12:24)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한 사형 방법 중 가장 잔인한 것입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최대한 느리게 만들어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느끼다 죽게 만든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세로 형틀(pole)은 2미터가 넘지 않습니다. 중세의 성화(聖畫)들을 보면 예수님이 아주 높은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이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 때문이고 실제의 십자가는 높이가 매우 낮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진 장소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곳은 '해골이라는 곳'이라 불렸습니다. 히브리어로는 '골고다'입니다.(요한 19:17) 라틴어로는 '갈보리'(Calvary)입니다. 왜 십자가 처형장에 해골이 많았을까요? 사후에 들짐승들이 시신을 뜯어먹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그렇게 자기를 반대하는 정치범들의 시신도 거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형수들은 몇 날 며칠을 십자가에 달러 죽어갑니다. 서서히 죽어갑니다. 종종 몰약(沒藥, myrrh)이나 신 포도주를 사형수의 입에 찍어줍니다. 목이 마를까 봐 인도적으로 배려해서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사형수의 의식이 혼미해져서 고통을 느끼지 못할까 봐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몰약을 탄 신포도주를 주었으나 받지 아니하[셨다]"(마가 15:23) 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려 계셨습니다. 보통의 장정들은 2~3일을 견디지만, 예수님은 이미 심한 채찍질로 몸이 많이 약해지신 상태였습니다. 어깨가 단단히 묶여있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있는 상태에서, 물 한 방울 마실 수 없는 인간은 서서히 숨이 막혀 죽어갑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 속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는 지상 최후의 여행이 이런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아셨습니다. 그 길이 가혹한 십자가 형벌의 길임을 아셨습니다. 아시면서도 주님은 오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도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습니다. 천군과 천사들을 데리고 일거에 세상을 심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약해집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에게 약해집니다. 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고 말합니까? 부모가 힘이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집니다. 사랑하면 약해집니다. 그리고 정말 깊이 사랑하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줍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죽는 길인 줄 알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셨기에 그 길로 가셨습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셨기에 유다의 배반을 참으셨습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셨기에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누가 23:34) 사랑은 십자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십자가로 귀결됩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요한 3:19) 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악한 세상의 응답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와의 대결을 피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으셔도 됐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요한 2:17, 새번역)이 그분을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의 열정'(passion)이 결국 그의 '십자가 수난'(The Passion)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말에 '숭고하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자로 숭고(崇高, the Sublime)는 높은 '숭'에 높은 '고'입니다. 높고 높은 것이 숭고입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니 은혜 /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이렇게 어머니의 사랑처럼 높고 높은 게 숭고입니다. 십자가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것은 잔인한 형틀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린도전서 1:23)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린도전서 1:24)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으로 모든 악함과 추함마저 삼켜버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저 멀리 푸른 언덕에 그 십자가 위에 주 예수 나를 위하여 못 박히셨도다."(찬송가 146장 1절)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다', 이것은 역사(history)입니다. '팩트'(fact)입니다. 서기 33년 4월 3일 금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위에 주 예수 나를 위하여 못 박히셨다", 이것은 신앙(faith)입니다. 단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흉한 십자가에서 한없는 고통을 이 세상 사람 위하여 당하신 것일세"(찬송가 146장 2절)라고 고백할 때, 이것이 믿음(faith)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찬송가 144장 1절)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고통 당하셨다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백입니다.
십자가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멸시 천대받은 주의 십자가"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그것은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이라"입니다. 이 고백이, 이 노래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이 고백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이렇듯 "그 귀한 주의 사랑이 날 구원하시니"(찬송가 146장 3절)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저 예수님을 보며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고]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고린도후서 13:4) 이런 십자가를 귀에만 걸지 말고, 가슴에만 매달지 말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등에] 지고"(누가 9:23) 주님이 가신 길, 참사랑의 길,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허물과 고통과 악을 불사르신 그 숭고한 '십자가의 길'(Via Dolorosa)를 따라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