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운명과 자유(시편 56:1-4; 로마서 8:31-39)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올해 첫 월요일에 있었던 KBS'TV의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점이 뭐길래"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마침, 여러분들이 기억하시는 대로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대학입시 본고사를 시행하고 있는 날이었는데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들의 긴장감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서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점, 사주, 궁합, 역학 등에 관한 이 말 잔치는 그 어느 TV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돋보이는 프로그램 같았습니다. 거기 출연한 분들의 증언들은 주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실제 겪은 바의 이야기를 마치 "신앙간증"을 하듯이 확신을 가지고 간증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발언대에 나온 어느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처녀 시절에, 궁합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양가 집안에서 모두 반대하는 혼사를 과연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든 중에, 어느 점술가의 "지금 사귀는 남자와 결혼하면 6년 이내에 그 남자가 죽는다"는 아주 나쁜 점괘의 말을 듣고는, 한편으로는 오기도 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6년밖에 못산다는 그 남자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어, 차라리 이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나 하나 낳아서 만일 6년이 되어 남편이 죽으면 그 자식을 희망 삼아 재혼 않고 혼자서 한 평생을 살면 그것이 내 팔자에 어울리겠지 생각하고는 무리한 결혼을 오히려 급히 강행을 하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놓고 보니, 점괘가 용하게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듯, 이 남편 성질이 너무 고약하여 부부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용한 점술가가 6년밖에 못산다고 했으니까 6년만 참으면 되겠지 하고는 기왕 6년만 살고 죽을 사람이니 웬만한 것은 내가 참자고 생각하면서 꾹 참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6년이면 죽어야할 남편이 6년이 다 되었는데도 전혀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싱싱하고 멀쩡하게 살아 있어서, 살아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대견하고 감지덕지하여 이 부인은 그저 늘 감사한 마음으로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에 남편도 마음 잡아 열심히 일도 하고 또 돈도 잘 벌어오고 하여 결혼한지 3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별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점"이라는 것은 도무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노라고 그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매우 확신에 차서, 아주 차분하고도 강력하게 열변을 토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가 체험한 바,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TV 카메라 앞에 담대히 서서 점치는 일, 그것은 공연한 짓이고 또 미신에 불과한 일일뿐이라고 확신에 차서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이 곧 뒤이어 나왔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다른 한 부인이 역시 같은 자리에 서서 TV 시청자들을 향하여 매우 확신에 찬 모습으로, 그의 체험담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이 부인은 젊어서 결혼한 후 약 15여년 동안 열심히 살아 보겠다고 남편과 힘을 모아서,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사양 않고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시작했다하면 재기하기 힘들 정도로 실패를 하고 또 실패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부인의 남편은 마침내 실의에 빠져서 늘어나는 것은 술뿐, 그저 술만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경찰서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남편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어서 경찰서에 잡혀와 있는데 부인이 속히 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재앙이 겹친다고 생각한 이 부인은 황급히 달려나갔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길거리 노상에 앉아서 사주를 보는 노인네의 사주 보는 상을 엎질러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쁜 경황 중에서도 그것이 너무 미안해서 흐트러진 책들을 빨리 주어 상위에 올려놓아 주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라고 거듭거듭 사과를 하였는데, 갑자기 그 사주를 보는 할아버지가 자기 손을 덥석 잡으면서 "손등에 푸른 점이 있는 것을 보니 아주머니 손이 열두 가지도 넘는 재주를 가진 손이여, 장차 큰 일 하겠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엉겁결에 "그러면 제가 무슨 일을 하면 성공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할아버지 말씀이, "머리 만지는 일이나 옷 만드는 일을 하면 성공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인은 그 당시에는, 남편 일로 너무 경황중이라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또 복채도 못낸체 그냥 경찰서로 달려만 갔었는데, 모든 일이 다 정리된 다음, 정신을 가다듬고는, 그 점치는 노인장 말씀대로 용기를 내어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재산을 다 정리해 가지고 여자 머리 만져주는 미용사 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도 만만치 않아 기막히게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기는 했지만, 그러나, 신념을 가지고 꾸준히 일을 했더니, 마침내 그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미용사가 되었고 또 자른 머리털로 온갖 실내장식품을 만드는 유명한 국제 산업 디자이너가 되었노라고 하면서 전시회 장면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아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부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점"은 미신이 아니라 매우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나의 과학과도 같은 것이라고, 강변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점치던 노인을 혹 만날 수 없을까해서 또 만나면, 그 때 복채 못드렸던 것을 마음껏 보상해 드리고 싶어서 그 곳을 지날 때마다 그 거리를 살피지만 그 분은 끝내 못 만났노라는 간증을 하였습니다. 점술의 초능력은 분명히 믿을 수 있는 과학과 같은 것이라고 그 부인은 강하게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점술은 그 무슨 신접한 자의 초능력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잠재 능력으로서, 점술은 일종의 "과학"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성서 도처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점술은 허황된 미신에 불과한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인류 역사는 그 처음과 끝이 이미 조물주에 의해서 처음부터 무슨 사주단자처럼 판에 짜듯 미리 만들어 놓은 어떤 숙명적인 것일까요? 기독교 교회가 줄곧 말해 온 소위 "예정론"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운명의 틀 속에 엄격하게 들어 있는 그런 것일까요? 첨단 과학에서도 숙명적인 것, 운명적인 것, "숙명"이라는 말과 "운명"이라는 말이 서로 다른 말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운명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대한극장에서 상연되었던, "시간 기계" 즉 "타임 머신"이라는 영화는, 다분히, 인간 역사를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또 제 2의 아인슈타인이라고 부르는 영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호킹 박사도 최근에 와서는 자신의 옛 이론을 수정하여, 인간이 과거로도, 미래로도 왕래할 수 있다는 견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물리학에는 전혀 문외한이라서,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물리학적 개념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식도 말씀드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근자에 자주 이야기되고 있는 무슨 "과학신학"이라는 것의 한 이론을 소개하는 것조차도 전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야기가 오늘 설교의 핵심 또는 주요 관심일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설교라는 문맥 안에서라 할지라도 이렇게 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것의 물리학적 본질은 무엇인가? 또는 도대체 "영원"이라는 것이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늙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리고 다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천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천국"이라는 것은 과연 물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것인가? 그리고 우주란 무엇인가? 무중력의 저 망망대해의 우주는 과연 어떤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수퍼노바의 신비는 무엇인가? UFO의 잦은 출현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인가? 우주는 과연 얼마나 넓은 것인가? "속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운명이라는 것은 과연 있는 것인가? 2000년, 2000년 하는데 왜 2000년대라는 시기가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가나 점술가들이나 휴거론자들의 종말 예언과 그토록 자주 연관되고 있는 것일까? 그 "때"와 그 "시"는 과연 아들 예수도 모르는 것이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특수장치로 숨겨둔 비밀인가? 컴퓨터나 바·코드는 어떤 묵시적 또는 악마적 징조일까? 요한 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묵시문학적 숫자인 888은 무엇인가? "운명"은 과연 창세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인가? 관상이나 수상은 정말 운명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우리는 신앙의 문맥 안에서도 한번쯤은 던져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1800년대 사람들이 아니고 1900년대와 2000년대 사이의 특정한 시기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뜻밖에도 이렇게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하고, 도와주면서 살 수 있다는, 기적 같은 일들은 실로 그 모두가 "운명"이라는 고리에 모두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 어떤 운명적인 것일까? 아니면 어떤 불가해한 종교적 신비에 속하는 것일까? 아니면, 고차원의 물리적 운동에 불과한 것일까? 인생이라는 것도 "우주"라는 신비한 망망대해에 외롭게 떠 있는 이른바 태양계라는 궤도 안에 있는 지구라는 돛단배를 타고 조물주 신이 만들어 놓은 운명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매우 외롭고 고독한 나그네에 불과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서 성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서는 분명히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야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단지 거기에 그저 있게 된 것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태초에는 하나님만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로소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있으라"하니까 있게 되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그 운명을 걸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서적 맥락에서 볼 때 "참"이며,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밖>이란 것은 단지 "이를 갈고 슬피 울 곳"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숙명적인 것이고 운명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한마리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성서는 증언하였습니다. 성서의 맥락에서 보면, 이것은 요지부동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지부동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뿐입니다. 설혹 손오공이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있을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장중으로부터는 그 어느 것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감히 이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여 자신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뿐이며, 인간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예외 없이 숙명론적 운명론에 매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요, 꼭두각시요, 인형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사실, 언뜻 들으면, 우리의 신앙의 심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매우 좋은 은혜스러운 말로도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성을 100세에 얻은 외아들까지도 하나님을 위해서 번제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그런 반도덕적 만용행위에서부터, 즉 비윤리적 살인행위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성을 찾는 어리석음만큼이나 어리석은 잘못된 교조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그것이 정녕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숙명론자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미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 결정되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어떤 고대 바빌론 신화가 말하고 있듯이, 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어떤 초능력의 신접자, 무녀, 박수, 점술가, 역술가, 사주쟁이, 예언가, 초인, 半神半人의 영웅 등을 통하여서 매우 드물게 겨우 그 비밀이 조금씩 조금씩 밖으로, 인간세계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신의 숙명론적 섭리와 계획과 신비 속에 우리의 역사는 철저히 종속되어 붙박혀 있다는 그런 말입니까? 우리의 운명은 이미 오랜 전부터 다 정해져 있었다는 말입니까? 미래로 날아가는 "타임 머신"을 타고 얼마간 날아가 보면 우리는 무덤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미리 다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형태로든 "자유"라는 것, 또는 "자율"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창세 전부터 이미 가롯유다는 스승을 팔 사람으로 아예 지정되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회개의 기도조차도 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나는 너를 이토록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또 너도 나를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모든 사랑은 다 거짓이거나 아니면 이 사랑 고백과 사랑 노래는 아주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이 다 써 놓은 하나의 정해진 각본이었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악한 원수들의 무신론적 교만이 하늘같이 높아져서 의인을 압박하기를 마치 떡 먹듯하고 있는데도, "심판은 무슨 심판,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하는 냉소적인 무신론적 오만이 판을 치고 있는데도, 재난과 질병과 죽음이 무질서하게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게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위협하고 있는데도, 이 모두가 다 창세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신의 예정된 각본이었고 우리는 그 신의 대(大) 서사시 드라마의 각본에 적혀 있는 하나의 정해진 배역에 불과하다면 이건 좀 너무한 것이 아닐까요?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또 이 "우리"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러나, 우리의 인간 역사는 결코 그러한 숙명론적 예정론의 틀 속에 요지부동 붙박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성서의 진정한 대답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중대한 물음에 대한 성서의 답변은 분명히 역설적입니다. 그 역설은 풀기 어려운 논리를 교묘히 피해 가는 어떤 임기응변의 역설이거나 궤변은 결코 아닙니다. 성서적 답변은 명료하고도 확실하며 또 이중적입니다. 오늘 읽은 우리의 본문, 시편 56편과 로마서 8장이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듯이, 그 대답은 분명 이중적입니다. 첫째 모든 것의 시작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태초의 태초부터.... "홀로" 우리의 인간세계를 지배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은 역시 태초부터 시작하여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하여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물음의 신비를 푸는 열쇠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은 저 아득한 옛날 그 태초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또한 계속해서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이 증언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주장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태초에도 작용하였지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때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또한 역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이 한마디가 지금까지 우리가 잘 못 생각해 온 모든 우리의 운명론적 사고의 결정적 오류를 다 뒤집어엎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시편 121편 4절이 말하고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은 이미 창조가 끝났는데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쉬임없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활동은 태초 6일만에 다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은 아득한 과거, 그 태초에, 한번, 유일회적으로 작용하고 그 때 모든 것이 다 결정되고 그 때 모든 것이 다 완결된 것은 아닌,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전적으로 현재적이며 역동적인 성격의 것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 역사가 비록 하나님이 그의 확고하고 굳은 의지로서 시작하신 바로 그 하나님의 세계 역사이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의 그 세계 역사는 어디까지나 그의 굽힐 수 없는 굳은 의지로서 아직도 계속하여 미래를 향하여 완성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 역사 속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는 해도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은 위험, 칼, 죽음, 삶, 천사, 권력자, 과거, 현재, 미래, 높음, 깊음 등등이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점술가나 박술객이나 예언가나 철학자나 역학자가 말하는 운명론적 역사관과 그리고 성서의 역사관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즉 성서가 말하는 역사, 성서가 말하는 시간, 성서가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 성서가 말하는 영원은 무슨 활자화되어 있는 것, 즉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되어 있는 易術的인 것이거나 숙명론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소 어려운 표현이긴 하지만, 영어로 표현해서 이 역사는 결코 정적인 being이 아니라 역동적인 becoming이라는 것입니다.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죽음, 삶 이 모두가 부동의 being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하나의 becoming이라는 것입니다. 즉 숙명론적 운명이 아니라 그 속에 무한한 자유가 포함되어 있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운명"은 장차 내게 일어날 일을 결정해주는 어떤 괴이한 힘이 아닙니다. 운명은 내 자신에 의하여 만들어진 내 자신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운명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유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서 맨 첫머리는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의 자유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자는 운명에 매이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은혜"라는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은혜"는 이른바 태초부터 있었고 뿐만 아니라 또한 현재와 미래에도 작용하는 역동적인 그리고 무한히 자유하신 "하나님의 뜻의 본질" 그 자체였다는 말입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를 시작시키실 때의 "하나님의 뜻"은 결코 맨 처음에 모든 것을 단번에, 일시에 완결시켜 놓은 어떤 고정된 도식행위나 주역이나 고정된 사주팔자의 그래프는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히 자유로우신 뜻은 전적으로 그가 창조하신 창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 어머님의 다함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분의 그 사랑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분의 그 사랑이 또한 세상을 지금까지 지켜오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의지는 운명이나 숙명이 아니라 역동적인 사랑의 자유였던 것입니다. 결코 그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끝없이 샘솟는 그 사랑이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또 지금도 완성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라는 말입니다. 운명이 아니라 자유라는 말입니다.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죽음 등의 어떠한 불의의 재난도 결코 결정론적이고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그런 정적인 것 즉 being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중단 없는 운동, becoming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운동의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서 능히 이겨낼 수 있고 또 이겨내어야 할 것들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유를 가진 자만이 그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시편 56편의 시인은 담대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즉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하며 또 교만스럽게 나를 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었은즉 나는 그 무엇도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선생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조차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분이 어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택하신 자들을 누가 감히 소송하겠습니까? 누가 능히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죽임을 당합니다. 하루에 열두번도 더 죽습니다. 우리는 도살당한 양과 같이 늘 천대를 받습니다만, 그러나 진실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분 창조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승리하고 또 승리하고 그리고 또 승리하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주관자들이나 과거 일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사주나 팔자나 그 밖에 그 어떤 운명론도 숙명론도 주역의 역학원리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에서부터는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태초에 뜻이 있었습니다. 태초에는 하나님만이 계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뜻이, 그 말씀이, 그 사랑의 자유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역시 그 뜻이, 그 말씀이, 그 사랑이, 그 자유가, 그 때 그 태초에 한 번에 결정되고 한 번에 결론지으시고, 단 한 번에 끝이 나고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뜻은 현재와 미래를 향하여 영원히, 끝없이, 변함없이, 결정되고 결론지으시고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Being이 아니라 becoming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안에는 여전히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죽음, 사주, 팔자, 숙명, 운명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 세계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니 누가, 그 무엇이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분이 어찌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 그분이 어찌 우리를 사주나 팔자나 숙명이나 운명에 맡겨 두어 버리시겠습니까? 그 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계시고 지금도 쉬지 않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그 무엇이 이러한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랑이 이토록 지극한데 우리가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 어떠한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 지극한 사랑에서부터 우리를 끊어낼 수는 없습니다. 운명은 사랑의 자유로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분은 오직 "자유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늘 이기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숙명과 운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로 능히 충분히 극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시는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분명히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요 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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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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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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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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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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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5]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보다는 출발이 좀 늦었으나 곧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주축이 되어 착실하게 발전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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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4] 카르타고 학파의 거침없는 변증과 교회론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을 오늘날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들의 신학은 현실적이고 참여적이고 실존적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