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사무엘상 12:22-24, 고린도전서 4:1-5, 누가복음 10:38-42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도 마르다와 마리아의 (그리고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오늘 본문은 그것과는 다른 결로 읽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일행이 길을 갈 때의 일입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그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누가 10:38) 했습니다. 우리 번역에는 '그를'이 빠졌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다 초대한 것이 아니라 '그를'(αύτον), 곧 예수님만 초대했습니다. 누가가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라고 말하는 걸 보면, 마르다는 평소에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랬습니다. 마르다는 친분이 있는 예수님을 초대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누가가 강조하는 '초대'입니다.
기독교에서 초대(招待)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구원과 생명으로 부르시는 은혜의 초청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초대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 그리고 낯선 이방인 등 모두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문이었습니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의 교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런 초대를 마르다가 실천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성서의 환대(歡待)의 전통을 실천했습니다.
이렇게 초대의 주체는 마르다임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칭찬'(?)은 동생 마리아가 받는다는 점에서 오늘 누가가 전하는 이야기에는 하나의 반전이 있습니다. (사실 누가는 이런 반전을 즐깁니다.) 갑자기 손님을 집에 모셨으니 얼마나 할 일이 많았겠습니까. 마르다는 아마 요리책을 넘기고, 물을 끓이며, 채소를 썰고, 분주하게 식탁을 준비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39절)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나이가 얼마나 어린 동생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잠시 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자기의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경황이 없던 마르다는 결국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40절) 사실 이 요구는 부당한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식탁을 차리고 나중에 함께 말씀을 들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르다는 이 요구를 직접 동생에게 하지 않고 예수님께 합니다. 불만의 대상은 여동생만이 아니었습니다. 일에 지친 마르다는 자신이 초대한 손님인 예수님도 은근히 비난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절)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하며 두 번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은 상대방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나 친밀함을 보일 때입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깊은 사랑과 계획을 드러내실 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혹은 "모세야, 모세야"처럼 그들의 이름을 두 번씩 부르곤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혹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시거든, 긴장해서 응답하십시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현대인의성경으로 다시 읽어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아무에게도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먼저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라는 말씀에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동생 마리아가 언니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택했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좋은 편이 아니라, "이 좋은 편"(개역개정), 곧 '자기에게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비교급이 아닙니다.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에서는 그냥 '좋은 편'(good)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언니 마르다가 선택한 봉사보다 동생 마리아가 선택한 말씀 듣는 일이 더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각자의 선택은 모두 나름대로 좋은 것이었고, 그 선택은 우열의 문제가 아닙니다. '봉사'와 '말씀'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언니 마르다도 저렇게 총총걸음으로 봉사하는 일을 하지 말고 자신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게 해달라고 요구했다면 예수님은 아마 마르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은 말씀을 마리아에게 하셨을 겁니다. '마르다는 자기에게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아무에게도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평가가 아닙니다. 성서는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린도전서 4:5)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언니 마르다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개역개정)라고 하셨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현대인의성경)라고 하셨습니다. 꼭 필요한 것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마르다는 정작 무엇을 놓치고 있었습니까?
어느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다가 그만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합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숨이 막혀 죽다니요! 무슨 일이었을까요? 이유를 찾아보니, 악보에 쉼표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성악가는 악보를 성실히 따라가다 그만 숨이 막혀 죽은 것이었습니다. 쉼표도 음악의 일부입니다. 사실 쉼표가 없는 음악은 소음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크고 멋진 화음 사이 잠깐의 멈춤과 정적이 듣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하지 않습니까. 쉼표는 여백입니다. 그런 여백이 없는 악보, 쉼표가 없는 악보는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숨 막히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은 다름 아닌 마르다였습니다. 마르다의 초대와 영접으로부터 예수님과 사귐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대의 목적은 사귐입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자신이 한 초대의 목적을 잊고 있었습니다. 좋은 것으로 잘 환영해야 한다는 근심과 염려가 환대의 척도가 되자 마르다는 자신이 초대한 그분에게 더 이상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많은 일로 염려하고 들떠서" 행사를 위한 행사와, 회의를 위한 회의와, 정신 나간 잔치와, 단지 단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계획한 일들의 늪에 빠져서 교회의 본질을 잊고 삽니까. 교회를 교회로 존재하도록 부르신 그분이 교회의 목적이 아니라, 주객이 전도되어 그분이 교회의 프로그램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맙니까.
마르다의 문제는 그의 마음이 "많은 일'(diakonian)로 염려하며 들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봉사 일을 즐겁게 하면 되는데,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일의 성취도를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예수님에게 동생 마리아를 책망해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마음이 분주하다는 말은 마음이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짜증이 난 마르다는 기쁨으로 초대한 예수님을 결국 비난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쓴 "택시 기사"라는 칼럼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칼럼에서 어느 공항에서 만난 한 택시 기사를 언급했습니다. 한 시간 걸리는 여정에 그와 그 택시 기사는 모두 여섯 가지 일을 했다고 합니다. 택시 기사는 택시를 운전했고, 휴대폰으로 통화했고, 비디오를 시청했습니다. 그 사람은 택시를 타고 있었고, 자신의 랩톱으로 작업을 했으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한 시간의 여정 동안 모두 여섯 가지의 일을 했습니다. 칼럼의 저자는 우리의 인터넷 시대의 병이 '지속적인 집중의 결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이것은 오늘 인터넷 시대의 병만은 아닐 겁니다. 이 병은 늘 우리와 함께 있어 왔습니다. 집중하지 못하는 원인만 바뀌어왔을 뿐입니다.
현대인들은 일(business)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주함(busyness)에 마음이 분산되고 찢어져 있습니다. 영어로 '일'과 '분주함'의 차이가 알파벳 하나라는 게 특이합니다. 교수, 학생, 주부, 사업가, 정치인, 그리고 성직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며 툴툴댑니다. 급기야 분주함은 이제 하나의 강박관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내몰리고 있습니다.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조바심을 냅니다. 은퇴한 이들조차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고 입을 모읍니다. 우리는 바쁘지 않을 때도 남들 앞에서 바쁜 척하고 하고, 실제로 일을 열심히 하지 않거나 분주하지 않으면 죄의식까지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분주함은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키고 찢어서 진짜 세상과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게 합니다.
예수님도 무척 바쁘셨습니다. 많은 군중이 서로 밀쳐 대면서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와 치유를 청했습니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을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틈만 나면 광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광야란 단지 식물이 살기 힘든 뜨거운 모래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헬라어(그리어) '헤레몬'(heremon)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고독한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40일 밤낮을 물러나 지낸 곳도, 이른 아침에 기도하러 가신 곳이 바로 헤레몬이었습니다.(마가 1:35)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열두 사도를 택했습니다.(누가 6:12) 산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는 먼저 그분을 따라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초기 기독교 수도자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찾아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사막으로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헤시키아'(hesychia), 곧 마음의 침묵을 실천했습니다. 이 전통은 지금도 동방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나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하려면 우리에게는 이런 침묵과 고독,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의 악보에 쉼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멀티'에 능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리책을 넘기고, 물을 끓이고, 채소를 썰며, 분주하게 식탁을 준비하는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길 가시던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영접하고 환대하는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과 사귀기 위해서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만남과 사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전 존재를 기울이는 인격적 만남과 사귐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도 하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유도 이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생활은 그저 스침입니까, 아니면 만남입니까? 여러분에게 봉사는 그저 성취해야 할 일입니까, 아니면 주님과 깊은 교제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종으로 만나지 않으시고, 친구로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한 15:15)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을과 내 집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즐겁고 귀한 일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의식하거나 흘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은사를 따라 즐겁게 주님과 사귀며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요한복음 15;5) 거하는 깊고 신비한 우정 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언젠가 탤런트 김수미 씨와 김혜자 씨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살아생전 탤런트 김수미 씨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동료들에게 몇백만 원씩 돈을 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김혜자 씨가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 넌 왜 나한테 돈 빌려 달라는 소리를 안 하니? 추접스럽게 몇백씩 꾸지 말고, 필요한 돈이 얼마나 되니?' 그러면서 김수미 씨에게 자기의 전 재산이 든 통장을 줬답니다. '이거 내 전 재산이야. 나는 돈 쓸 일 없어. 다음 달에 아프리카에 가려고 했는데, 아프리카가 여기 있네. 다 찾아서 해결해. 그리고 갚지 마. 혹시 돈이 넘쳐나면 그때 주든지.'
김수미 씨는 빚을 청산하고 난 후에 김혜자 씨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김혜자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언니, 언니가 아프리카에서 포로로 납치되면 내가 나서서 포로 교환하자고 말할 거야. 나 꼭 언니를 구할 거야.' 참 부러운 우정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친구는 한 사람이면 족하고 / 두 사람이면 많고 / 세 사람이면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친구 하나 있을까요? 진정한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늘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며" 삽니다. 걱정을 안고 삽니다. 심지어 우리 말에는 "걱정을 사서 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필이면 걱정을 '사서' 하다니요. 안 해도 좋을 걱정을 스스로 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예수께서는 그것을 '염려'라고 하셨습니다. 성서에서 염려라는 말의 뜻은 '마음이 나뉘다/쪼개지다/조각나다'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할 내 마음이 어제의 그 일에, 내일의 불안에 가 있는 것이 염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기도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내 삶의 악보에 쉼표 하나 찍는 것입니다. 분주하기만 한 내 삶의 한가운데에 여백을 만드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 침묵과 고독과 멈춤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히 만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사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한 가지가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현대인들은 일(business)에 매여 있습니다. 분주함(busyness)에 마음이 분산되고 찢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생기는 만족감입니다. 기도한다는 말은 하늘 향해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한 가지가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매우 부족합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사무엘상 12:24)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마르다는 마르다의 모습으로, 마리아는 마리아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은사로 하나님을 섬기며 서로를 기뻐하며 우리의 눈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와 깊고 뜨거운 우정을 나누십시오. 이 뜨거운 여름보다 더 뜨거운 우정과 사귐을 나누십시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 했습니다. 열은 열로 다스려야 합니다. 이해인 수녀의 <여름 노래>처럼 말입니다. 참 시원한 여름 노래입니다. "아무리 더워도 / 덥다고 / 불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차라리 / 땀을 많이 흘리며 /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 일하고 사랑하고 / 인내하고 용서하며 / 해 아래 피어나는 / 삶의 기쁨 속에 // 여름을 더욱 사랑하며 /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이 여름보다 더 뜨거운 여름이 되어 일하고 사랑하고, 안내하고 용서하며, 주님과 뜨겁게 사귀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로 이 여름 이기고 시원한 수박 같은 삶의 기쁨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