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4 그렇다면 ‘인간’은?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Jun 24, 2015 07:03 AM KST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앞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독실한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당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교회를 앞세운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그것도 내가 속한 교회만이라 하니 자기절대화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교회나 그리스도교라는 범주를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얼마나 심각하게 자아내는지를 진솔하게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성경도 무슨 법전인양, 휘두르는 칼처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이 아직도 생소하거나 여전히 꺼려진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인간을 스스로 살펴봅시다. 나 자신을 보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교회, 그리스도교, 성경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우리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비/의도적으로,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렇게 깊이 깔려서 작동하고 있는 ‘자기라는 인간’에 대해 새삼스럽지만 당연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되돌아보는 길에는 여럿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서 나누었던 일련의 관계에서 살피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나님’이라는 관계에서 자기라는 인간은 어디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면, 한 그리스도교인은 개인으로서 교회에 속합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교회보다 앞서 가장 작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만 속해 있지는 않습니다. 교회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은 이 교회 저 교회 옮겨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고 가나안 교인들도 점차로 많아지지만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한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교회 밖이 교회 안보다 훨씬 더 클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교회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거기에 더 크게 작동하는 가치와 목적들을 부여하며 살고 있습니다. 166:2라는 공식이 이걸 가리킵니다. 하루 24시간에 7을 곱하면 일주일 168시간인데 그 중 2시간 정도 교회 안에 머물고 나머지 166시간을 교회 밖에서 교회 밖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차가 상당하게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교회 안에서 쓰고 있는 말들이 교회 밖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공개된 비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생활의 연조가 길고 깊을수록 교회 안과 밖 사이를 넘나드는 일에 익숙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능숙해지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주의자가 됩니다. 상호소통불가의 영역을 넘나들면서도 이 사이의 거리에 대한 느낌이 점차로 희미해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교회 안에 깊숙이 속한 것처럼 느끼면서 살지만 실상은 교회 밖에 더 크게, 더 많이 지배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인간이 교회 안에만 속해 있지 않은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울러 바로 이런 이유로 교회 안과 교회 밖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는 새삼스럽지만 정직하게 주목해야 합니다. 그 거리를 망각하면 교회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은 당연하게도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 사이의 실랑이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한 인간이 하나의 종교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무슨 망발이냐?’고 대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종교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은 하나의 교회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것보다 더욱 분명합니다. 겉보기에는 한 교회에 속해 있어도 한 종교에만 속해 있기는 어려우니 말입니다. 한 인간의 종교성을 분석해 보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니 새삼스럽게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한 인간 안에 여러 종교 전통들이 신념체계를 포함하여 사고방식에서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넓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종교상황이 사회적으로만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까지 이른다는 말입니다. 한 개인 안에 여러 종교들이 겹치고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의 제목을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라고 했는데 세계만이 다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한 인간도 개인적 차원에서 이미 다종교적입니다. 물론 이는 동양종교문화권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황하문명권에서 보면 유교-불교-도교가 한 개인 안에서 얽혀 있고 인더스-갠지스문명권에서는 힌두교-불교-조로아스터교 등이 그렇게 뒤얽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서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그리스도교 배경이라는 서양에서도 근세초기까지는 이러했다고 합니다. 어느 지역이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다 그러합니다. 그러던 것이 정치적-경제적 목적으로 경계 짓기를 하고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구별하고 분리하면서 다른 것을 밀어내려고 했던 것이 최근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까지 원래의 모습은 구별될 수 없는 여러 흐름들이 그렇게 얽혀 태동되고 형성되고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종교라는 것이 원래 교리-체제적 제도라기보다는 일상적 삶의 내용이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신념이나 행동양식을 어떻게 나누고 자르고 쪼갤 수 있겠습니까? 이래서 우리가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종교 단위가 아니라 인간으로까지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도 추상적인 인간개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는 구체적인 자기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한국인의 종교적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파란만장한 20세기 역사를 겪어왔고 군사독재시절에는 정부가 체제 정당화를 위해 정신문화원과 같은 기관들의 건립을 통해 작위적으로 ‘민족 주체성’이라는 것을 부각시켰지만,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도 유구한 세월을 통해 형성된 종교적 형질은 매우 중층적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바닥의 심층적인 데에는 무교적인 요소가 많고 의식적으로는 유교적인 것이 많다고 합니다. 불교가 꽤 다른 색깔을 지닌 종교이지만 심층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국의 종교학자들이나 사상문화연구자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를 보입니다. 한국의 기본적인 종교적 정서는 무교와 유교라는데 이들 사이에 큰 이의가 없습니다. 이랬을 때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라는 신의 이름이 덜컥 받아들여진 내적 동기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돌이켜 볼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이 고백의 뜻을 새기지도 않은 채 자기가 조작한 것이 아니니 자기의 믿음이 아주 순수하다고 착각합니다. 마치 아무런 배경이나 전제, 토양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앞뒤를 살피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면서 결국 자기로부터 역사가 무전제적으로 시작한 줄로 착각합니다. 이런 경향이 특히 한국 개신교인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한국사회에 대한 개신교의 엄청난 공헌에도 불구하고 호전적 전도와 반전통적 선교가 ‘생각하는 백성’의 문화적-정서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몰역사적 자만 때문입니다. 
그래도 감이 안 잡히십니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일입니다. 한국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나 자신을 생각해봅시다. 나 자신은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교적입니까? 유감스러워할 것도 없이 아직은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것보다 엄청 많습니다. 성분 분석을 해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용어를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포장해서 그렇지 실상이 이럴 소지는 다분합니다. 나 자신 안에 여러 종교들이 뒤얽혀 있습니다. 이름은 하나지만 실상은 여러 개라는 말입니다.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솔직히 보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니라고 버텨봐야 솔직하지 못한 것이니 결국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 안에 문화적이고 정서적으로 여러 종교들이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이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게 문제인 것은 솔직하게 보지 못하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에서 시작하더라도 이렇게 인간으로 파고 들어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적으로, 한국 그리스도교인의 종교적 품성을 분석해보면 100중 50 이상은 무교적 정서가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유교적인 관념도 상당하게 끼어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유교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인들만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찰하지 않으면 몰역사적 자만이 자아도취를 더욱 부추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무교와 유교뿐이겠습니까? 그밖에 다른 종교와 문화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한국 그리스도교인은 그 토양 위에 그리스도교를 얹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특정한 그리스도교를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그러한 영향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교회용어와 성경구절을 쓰지만 그 탈을 벗겨내면 실상은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걸 부정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놓고 하늘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인간의 얽혀진 얼과 생겨먹은 꼴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나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나의 대부분을 모르고 사는데, 모르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없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착각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누누이 반복했듯이 그 편안은 수렁입니다. 물론 그 수렁 안에는 친숙하고 우호적인 우상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의 이름은 ‘하나님’입니다. 나의 편안한 앎 안에 갇혀 있는 하나님은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각도를 달리해 말해보겠습니다. 많이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여러 군데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실험을 했습니다. 두 명의 그리스도교인과 한 명의 불자를 모시고 그들에게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 대해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절대자가 제공해주는 궁극적 경지에 대해서 읊어보도록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절대자는 하나님이고 궁극적 경지는 구원일 것입니다. 불교의 경우 절대는 불타이고 궁극적 경지는 해탈일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전도할 목적으로 서술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각자 종교의 고유한 용어가 아니라 일상용어로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랬을 때 겪은 문제는 종교언어를 일상 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막막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와 현실 사이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결국 공통개념을 중심으로 용어사전을 만들어 실험을 계속 했습니다. 그랬더니 더욱 주목할 만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절대와 궁극적 경지에 대해 두 명의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의 차이가 한 명의 그리스도교인과 불자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큰 경우가 아주 흔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을 한 데 묶어 같은 종교인으로 분류합니다. 결국 같은 것은 이름일 뿐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름만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름만 다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정도로 종교의 이름이 그 종교에 속한 개인의 종교적 정체성을 실제로 정확하게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름으로 정체성의 내용을 규정할 수 있는 듯이 경계를 짓습니다. 이쯤하면 한 인간이 한 이름의 종교에만 속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교회보다 작기도 하지만 더 크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에만 속해 있지 않으니 이보다 더 크기도 합니다. 이래서 인간으로까지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좀 길어졌지만 이 대목에서 종교라는 단위에 대해서는 한 마디 더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여러 종교들 중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자체로 들어오면 그저 ‘하나의 종교’라고만 할 수 없다는 것을 기독교인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존불가한, 아니 서로 충돌하는 그리스도교들이 하나의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교와 오늘날의 그것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변화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본질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20세기 초까지 신학계에서도 이런 주장을 한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역사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의식의 결여, 즉, 주제파악의 망실에서만 나올 수 있는 생각입니다. 사실 몰역사적 본질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서만 떠오르는 발상입니다. 이래서 인간으로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만이 아닙니다. 공간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시대라고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천차만별입니다. 아니 한 지역에서도 양립불가한 그리스도교들이 같은 이름을 쓰면서 아웅다웅합니다. 이름만 같을 뿐인데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교는 동일하고 단일하다는 의미에서의 ‘하나의 종교’는 아닙니다. 이런 것을 ‘종교적 격의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달랑 한 종교에만 속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성서와 관련해서 우리를 살펴봅시다. 그런데 역시 이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무슨 불경스러운 말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래도 접수가 안 된다면 앞서 성서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됩니다. 성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사건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 말입니다. 앞에서 상세히 논했으니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이토록 성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서를 구성하는 장면의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다가오시지만 다른 편에는 무수한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간들이 성서의 주요구성 요소입니다. 신실한 인간도 있고 배은망덕한 인간도 있습니다. 위대한 고백을 했었는데 돌아서서 곧 배신하기도 하는 인간의 모습이 여과 없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순적인 간격이 우리 같은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엄청나게 넉넉한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서의 역설적인 위대함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성서를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이제 인간은 성서와 하나님 사이에 위치하기도 합니다. 성서 안에 인간이 들어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성서를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인본주의나 인간중심주의 따위를 말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들린다면 자신 안에서 성경주의적 우상이 똬리를 틀고 있지 않은지 살필 일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를 봅시다. 앞서 하나님은 성경 안에 갇힐 수도 없는 분이고 그래서도 안 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건대, 그 이유는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큰 존재’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물론, 무한자라는, 감도 잡힐 수 없는 표현은 가장 크다는 말로는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크기 때문에 어딘가에 담기거나 갇힐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늘도 새롭게 들이닥치시는 사건이요 움직이시는 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갇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기도 하고 불현듯 맞닥뜨리기도 하시는 우리 인간은 또 어떤 꼴일까요? 바로 앞서 말했지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인간이 돌아서서 바로 그 주님을 배신합니다. 그만 그럴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사실 우리에게 엄청 큰 위로를 줍니다. 그래도 좋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또 받아들이신다는 점에서 위로입니다. 그러나 고백하는 인간과 배신하는 인간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백도 하고 배신도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인간은 동일성(identity)에서 정체성(identity)을 구해왔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언제나 같은 항시-불변적 동일성의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가 넉넉히 품어주는 것처럼 인간은 비동일성이 잔뜩 들어있는 정체성(non-identical identity)입니다. 자기동일성이라는 이념에 오랫동안 기만당해왔지만, 이제 나 자신이 같음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할 수도 있는 여러 다름들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대 사상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혼종성’ 또는 ‘구성적 상대성’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상대성과 상대주의는 전혀 다릅니다. 아니, 심지어 반대말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필요한 대목에서 이를 다시 다루겠지만, 하여튼 ‘자기라는 인간’을 진솔하게 보는 일은 이토록 소중합니다. 되돌아보지 않은 자기가 기준이 되어버리면 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나님의 관계가 그저 같아 보이지만, ‘자기라는 인간’에 진솔하게 눈을 돌리면 이들 사이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종교세계의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더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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