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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3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에 대하여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교회보다 그리스도교가 더 크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성서에 갇혀 계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럴 수 없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말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이 구호는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뭘 어떻게 생각해? 당연한 거지!”라고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착실히 하시는 분들에게 교회와 구원의 분리불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언제나 옳고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라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할 이유도 없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사에서도 이런 구호는 꽤 일찍이 등장했습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중세 초기인 7세기의 키프리우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꽤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구호라고 하겠습니다. 이교도들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중세 절정기인 13세기 교황 보나파시오가 교회의 치리를 목적으로 이 구호를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대의 전환이 근세로, 현대로 넘어오면서 세상이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듯이 보이자 교회는 다시 빗장을 걸어 잠그듯이 이 구호를 재천명했습니다. 현대가 시작할 무렵인 1860년대에 열렸던 가톨릭교회의 제 1차 바티칸공의회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그로부터 100년 뒤인 1960년대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이 고전적 구호를 폐지하고 현대로의 전환의 길목에서 근대적 방식으로 정책을 바꾸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호는 가톨릭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니 개신교회의 경우도 이 선언은 포기할 수 없는 기조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회가 이 구호를 오히려 더욱 목청 돋우어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교회가 전권을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은 옳은가요? 교회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성경, 나아가 하나님까지 모두 같다면 이 구호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보다 그리스도교는 훨씬 크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지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성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분이라면 구원을 교회에만 묶어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단도직입적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어떤 종교개혁자가 인간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셨다고까지 주장했을까요? 이에 대해 시중에 황당한 오해들이 많이 있지만 이는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는 과도함을 불사하고서라도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려는 갸륵한 충정에서 나온 발언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확언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정설에 관해 자가당착의 오해들이 꽤 팽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우선 시중에서 이 예정설을 문자 그대로 새기면서 절대적 진리인 양 읊조리시는 분들이 빠지는 자가당착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대체로 자기는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듯합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그 주장을 그렇게 애써 반복할 이유가 없기는 할 터이지요. 그러나 예정설은 한 마디로 구원의 여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을 것인가의 여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일 터입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이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바로 이걸 가리키는데 그러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게다가 태어나기 전부터 천당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풀어버리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본인 자신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니 도대체 전도하고 선교할 이유도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예정설은 문자대로 풀어낼 일이 아니라 그 취지에 주목하여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과도한 수사’로 새기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과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에서 더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랜 세월 교회의 제도적 권위 안에 머물러 있다가 이로부터 벗어난 민중들이 문화적-종교적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기에 이에 대한 처방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실하게 새기려는 애달픈 뜻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했지만 사실 예정설에 대한 설명을 위한 표현이고요, 보다 적절하게는 ‘은총’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은총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도 좌우될 수 없는 무조건적인 것임을 가리키고 따라서 믿음을 포함하여 인간의 어떤 것보다 앞선다는 뜻에서 선행적인 것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무조건적이고 선행적인 은총이니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만의 것도 아님은 물론 성경에만 갇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하는 말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믿고 있었고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으며 성경을 믿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교회나 그리스도교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믿음을 서로 나누고 격려하며 뜻을 도모하는 자연발생적 공동체이고,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믿음을 사회와 역사 안에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계도할 필요성으로 엮어진 문화전통이며,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과 이어주는 믿음의 지침서로서의 위치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이 모두는 믿음의 대상이나 주체가 아니라 이를 가리키는 보조적인 요소들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믿음의 원초적 대상이고 궁극적인 주체이십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돌아본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그런데 눈앞에 보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들의 본능과 욕망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성경과 동일시하여 성경주의로 빠지고, 그리스도교와 한데 묶어 기독교주의라는 종교주의로 빠지며, 결국 믿음의 공동체일 뿐인 교회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교회주의로 빠지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계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여러 형태의 주의로 빠지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이니 우상숭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성경주의도 내가 읽고 받아들이는 대로의 성경주의이고, 기독교주의도 내가 파악하는 대로의 기독교주의이며, 교회주의도 내가 속한 교회를 기준으로 하는 교회주의입니다. 결국 이러한 주의적 행태의 뿌리에는 ‘나’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으면 옳음이고 나와 다르면 그냥 다름이나 아니라 그름이나 틀림입니다. 결국 성경주의나 기독교주의, 교회주의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 또는 자기절대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절대화라는 문제는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스스로 볼 수 있으면 이미 자기절대화가 아니겠지요. 해서 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도 못하는데 무슨 해결을 기대하겠습니까? 교회사는 이에 대한 무수한 증거들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자기절대화에 의한 문제는 성경이나 기독교, 또는 교회와 관련해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믿음의 원초적 대상이고 궁극적 주체이시라고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자기절대화는 여지없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솔직히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나님’일 터인데 그저 ‘하나님 그대로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나님만을 기준으로 내세웁니다. 허나 이야말로 하나님을 자기방식으로 그려내고 믿으니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그림 속에 갇혀진 하나님, 결국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름은 하나님인데 실제로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그림을 벗어나서 하나님이 나에게 오실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이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라면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듯이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킬 뿐이니 성경을 그 자체로 믿을 것은 아닙니다. 성경문자주의가 오히려 신성모독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종교, 그것도 여러 종교들 중의 한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가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마구 동일시될 수 없으니 하나님 대신 그리스도교를 믿을 일은 아닙니다. 교회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더욱이 죄인을 불러 모으셨다면 이제 교회야말로 서로 허물을 보듬고 격려하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를 꿈꾸는 전위대로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그림을 점차로 벗겨가는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혹여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우상화하고 있지 않은지를 돌아보면서 말입니다.     
이제 각도를 살짝 돌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봅시다. 이 말은 마치 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는 것처럼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무슨 망발이냐?’고 호통 치시려는 분들이 꽤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차분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론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구원이 교회 안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도 교회는 구원의 주권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구원의 주권을 가지면 면죄부 같은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꼭 면죄부를 팔았던 가톨릭교회의 역사만 문제가 아닙니다. 개신교회라고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고 협박하는 교회들이 부지기수라면 그게 면죄부 판매와 무엇이 다릅니까? 사이비종파들과 이단들이 이런 주장에 더 열을 올리는 것은 그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소위 정통교회라고해서 이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게다가 현실모습을 보더라도 교회가 구원을 제공할 위치도 아니고 안내할 자격도 없으며 견인할 능력도 없으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구원을 교회에 귀속시킬 수 있습니까? 도무지 타당하지 않으니 이제는 구원을 교회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께 되돌려드려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본디 하나님의 것인데 되돌려드려야 한다니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불성설이 타당한 말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성경이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혼동하면 ‘범주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넷을 잘 구별한다고 범주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깊은 문제는 아무리 이 넷을 잘 구별해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모두에 철저하게도 인간 자신이 중심적으로 깔릴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필자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성을 넘어서는 신중심적 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거니와 앞으로도 말씀드릴 터인바 필자는 그러한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하나님을 실체로 규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한에서만 성립합니다. 교회, 그리스도교, 성경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역사적 실체로 간주함으로써 교회주의, 기독교주의, 성경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었던 오랜 종교적 본능과 습성이 그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큰 존재로, 가장 높은 존재’로 그리면서 꼭대기로 모셔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하나님을 절대자, 또는 무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가리키는 상징’일 수밖에 없는 이런 표현들이 ‘잡아내는 개념’으로 둔갑하면서 최고위의 고정적 실체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스 형이상학이 그렇게 해 왔고 이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교 고전신학이 그래왔으며 우리는 그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고의 절대적 정점에서 무수하게 다양한 상대적 종교전통들과 관계하시는 고정적인 ‘존재’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이유로,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행위’이고 들이닥치시는 ‘사건’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움직이는 동사보다 고정적인 명사가 더 높은 품위를 지닌다는 명사주의의 관점에서는 어색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런 명사주의를 부추겨온 동일성의 이념이 인류역사에서 지대한 공헌 이상으로 억압적인 폭력을 전개해 온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놓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이 또한 본디 망발인데 이게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성서가 증언하는 사건과 행위로서의 하나님 모습에 가까운 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지 않는 사람에게 신은 명사이지만 예배하는 사람에게 신은 동사이다”라는 어느 종교학자의 말은 하나님을 최고로 모신다는 명분으로 고정적 정점에 가두려는 우리의 유혹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통찰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건이고 행위이시니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교회 안에 머무르시지 않고 길거리를 배회하십니다. 그리고는 신자가 아니라 이를 넘어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役事)이고 인류의 역사(歷史)입니다. 성경은 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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