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2017년 2월 12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입력 Feb 20, 2017 02:33 PM KST

성경본문

요8:12-20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못하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비록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심판하면 내 심판은 참되다. 그것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율법에도 기록하기를 '두 사람이 증언하면 참되다' 하였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대하여 증언하여 주신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나의 아버지도 모른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궤가 있는 데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를 잡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아직도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교문

* 캄캄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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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제 환하게 떠오른 대보름달을 보면서 어둠이 지극한 이 땅에도 저런 환한 빛이 깃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곤고한 나날입니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어둠이 지극합니다. 정치를 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안정된 세상일 텐데, 우리 사회는 그런 외면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근 석 달을 이어온 탄핵 정국이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불신의 장벽이 점점 높아가면서, 싸늘하게 마주보는 두 진영 사이에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길은 점점 막히고 있습니다. 1부 예배 때 김수진 집사가 연주한 곡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평화가 들불처럼/사랑이 햇빛처럼/하나님 주신 생명 보듬어/희년을 향해 함께 가는 길/주의 약속 굳게 믿으며/일곱 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약속을 굳게 믿으며". 희년을 향해 함께 가는 길의 사람들이 이곳에 있습니다. 참 고맙고 든든합니다.

마종기 시인의 '의사 호세 리쟐의 증언'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시인은 마치 한가로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9세기말에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스페인의 식민지, 아시아의 태평양에 섬나라가 있었다. 그 섬나라에 호세 리쟐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시제는 과거형입니다. 시인은 실존 인물인 의사 호세 리쟐에 대해 매우 제한적인 정보만 제공합니다. 그는 파리, 마드리드, 하이델베르크로 떠돌다가 조국인 필리핀에 돌아가 환자도 보고 <사회의 암>이라는 소설도 쓰다가 설흔 다섯 나이에 총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산문조로 이렇게 호세 리쟐의 짧은 인생을 소개한 시인은 어투를 바꿔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호세 리쟐이 진단한 사회의 암은 우리였네.나태한 우리와 타협해서 쉽게 사는 우리,의타심에 눌려서 눈치로 사는 우리,작패로 싸우고 죽이고 이간질하는 우리,암세포로 썩어 가는 나라의 병은우리도 볼 수 없는 우리들 마음에 있었네."

여기서 '우리'는 비단 필리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닐 겁니다. 시인은 호세 리쟐의 말을 빌어 대한민국 사회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나태한 우리, 눈치만 보며 사는 우리, 파당을 지어 싸우고 죽이고 이간질하는 우리가 바로 나라의 암세포더라는 말입니다. 너무 쉽게 미워하고 쉽게 죽이면서도 돌아서면 쉽게 은총을 비는 사람들을 보며 시인은 탄식합니다. "한 세상의 귀함은 헐벗은 맨발 걸음뿐,/세상을 어려워하라./걷는 자도 말탄 자도 큰 짐을 진 듯/어려워해야만 살리라."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신발을 벗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열기 위해 조심조심 걷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어둠이 너무 짙습니다.

세월 탓일까요? 거리를 걷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자꾸 찬송가 84장을 흥얼거리게 됩니다.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그 빛나는 영광 나타나 온 세상 비치었네/영광 영광의 주 영광 영광의 주/이 세상의 빛은 오직 주 예수님". 이 고백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어둠의 행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 따르는 자라야 빛을 안다

오늘 본문은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이야기 바로 뒤에 나옵니다. 살기를 띠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현장을 떠나고 그 자리에 둘만 남았을 때 주님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여인을 바라보십니다. 수치심과 모멸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여인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은 아마도 시린 마음을 감싸안는 외투와 같이 포근했을 것 같습니다.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기준을 들이대는 것보다 더 긴요한 것은 그 여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따뜻한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여인의 마음에는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그 빛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솟아났던 태초의 빛이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 용서의 말 한 마디는 수천 마디의 훈계보다 더 큰 울림이 되었을 겁니다.

이 이야기에 바로 이어서 나온 구절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입니다. 앞 단락이 빛의 암시였다면 본문은 빛의 선포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 빛입니다. 그 예수의 빛 가운데서 걸어야 세상의 어둠에 삼켜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교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일러 無明(avidya)이라고 말합니다. 깨달음이 없는 상태이기에 불각不覺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출세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빛과 만나지 못해 우리 삶이 어둡고 무겁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이 담대한 선언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로 이어집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산다는 뜻입니다. 가련한 사람의 벗이 되어 주고, 우는 이의 곁에 머물고, 배고픈 이를 먹이려 할 때 우리는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됩니다.

며칠 전 모처럼의 미담을 듣고 마음이 훈훈해졌습니다. 한 젊은이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노인정에 들어가 쌀과 김치를 여러 차례 훔쳐 먹었습니다. 그는 죄책감 때문인지 깨끗하게 설거지를 하고 또 청소까지 해놓고 떠나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딱한 사정을 들은 경찰은 그를 입건하지 않고 오히려 밥값 3만원까지 쥐어준 채 훈방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후 그 젊은이가 경찰서를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자기에게 삶의 용기를 주었던 경찰관의 돈을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경찰관의 따뜻한 마음씀이 그 젊은이의 마음에 빛을 밝혔고, 절망의 어둠 속에 있던 한 사람이 그렇게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의 마음에도 한 줄기 빛이 비쳐들었습니다. 빛은 그렇게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 경찰관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종교가 무엇이든 그는 잠시나마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빛 안에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고, 주일이면 교회에 다닌다고 다 신자가 아닙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그분의 빛 안에서 걸어가는 사람이라야 진실한 신자입니다.

생명이 회복되는 사건은 예수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일어났습니다. 병자들은 치유받았고,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온전해졌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어둠 가운데 유폐되어 살던 사람은 빛 앞으로 나왔습니다. 인색했던 사람들은 나누기 시작했고,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고, 자기만 알던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아끼는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적대시하던 사람들은 화해의 악수를 나눴고, 낯선 사람까지도 환대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고백이 진실하려면,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삶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따름이 없는 고백은 공허합니다.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법입니다(갈5:6).

* 삶으로 하는 증언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주님의 선언에 대해 바리새파 사람들이 딴죽을 겁니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못하오"(13). 상식적으로 보면 이 말이 그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상식에 기대 예수를 부정하려 합니다. 어떤 증언이 가치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두세 명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잘못이나 어떤 범죄라도,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판정할 수 없습니다.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만 그 일을 확정할 수 있습니다"(신19:15). 신명기에 나오는 이 규정은 사실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한 조치입니다. 증언의 확실성은 증인들을 통해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힘 있는 이들이 거짓 증언을 교사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청문회나 국정조사에 나오는 증인들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우리는 참 많이 봤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증언이 참되지 못하다는 지적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비록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14a). 사실 이 말은 아무도 설득할 수 없는 말입니다. 증언이 참되다는 증거로 내놓는 말은 더욱 기이합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14b). '내 증언은 참되다'라는 구절과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인과관계가 성립하지를 않습니다. 종교적 언어는 때로 인과관계를 뛰어넘을 때가 많습니다. 선불교의 공안公案이라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선종禪宗에서 수행자의 마음을 연마하기 위해 부과하는 시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제자가 스승에게 '부처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마삼근麻三斤'('내가 입고 있는 삼베옷이 세근이라네') 하고 대답한다든지, '뜰 앞의 잣나무' 하고 대답하는 식입니다.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지만 깊이 새겨가면서 근본을 생각하라는 뜻이겠지요.

지금 우리는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깊이 새겨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우리 인생의 근원과 완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는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제 사무실에는 지저 쾨더(Sieder Koder, 1925-2015) 신부의 '근원으로부터 완성으로'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화면의 아래쪽에는 지구처럼 보이는 구형 위에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의 머리가 보입니다. 주위는 온통 다채로운 꽃들이 만발해 있습니다. 그리고 화면의 위쪽에는 검은 머리의 남자와 흰 머리의 여자가 부둥켜 안고 있는 게 보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온전함을 상징하는 원처럼 보입니다. 그 사방으로 붉은 색 장미꽃이 만발해 있습니다. 마치 햇빛이 번져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화가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었던 것일까요? 저는 둘이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 곧 진실한 사랑으로부터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이 탄생한다는 뜻으로 새겼습니다. 인간의 근원도 사랑이고 지향해야 할 목표도 사랑입니다. 아주 강력한 이미지의 그림입니다.

* 인간이 된다는 것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주님은 자신의 기원과 목표를 분명히 알고 사신 분입니다. 이론이나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체득하셨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 생명의 기원과 목표는 하나님입니다. 지거 쾨더 신부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오직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런 우주적 사랑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무거워 허덕이다보니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고 삽니다. 철학자들은 현실 세계에 깊이 빠져서 자기의 존재 목표를 잃어버린 채 사는 삶을 '퇴락頹落'(Verfallenheit)이라 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하자면 '타락'일 겁니다. 존재의 목표라고 해서 괜히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 곧 애린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상의 삶에서 성취해야 할 영원의 흔적입니다. <어린왕자>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생 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아주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돌멩이 하나를 놓으면서 세계를 건설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나와 무관해 보이는 세상의 비참함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걸었던 인생의 길입니다. 뜻을 알고 사셨기에 주님의 증언은 참됩니다. 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직 그런 자리에 당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자신과 더불어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당신에 대해 증언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묻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계십니까?"(요8:19a)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몰랐던 것입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 그 착각에 근거해 다른 이들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요?

요한은 주님이 이 모든 말씀을 하신 것이 헌금궤 앞이었다고 말합니다. 헌금궤가 있는 곳은 성전 마당입니다.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만의 빛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온 세상의 빛이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고 자부했던 자기들의 편견과 무지가 은연중에 폭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예수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아직도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한마디가 참 강력합니다. 주님의 생애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때'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 '때'는 주님이 보내신 분의 뜻을 다 이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때이며, 영광을 얻는 때입니다. 주님은 그날을 바라보며 사셨습니다.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삶은 당당합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 뒤를 따르고 있습니까? 우상 혹은 거짓 신들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혼신의 힘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이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이 헛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영원한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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