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코로나19 이후 종교에 대해 성찰하는 박일준 박사(감신대)의 '코로나19와 종교' 기고문을 세차례에 걸쳐 연재해 싣는다. 이 기고문에서 그는 상당수 종교가 "위로와 격려를 미끼로 경쟁주의적 세계관을 정당화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신격화 보다 정확히는 우상화를 정당화한다"면서 종교의 우상화 경향을 비판했다.
작년 말 중국 우한에서 초기 발병하여 지금 전세계로 확산 중인 'covid19 바이러스'는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불리며, 대한민국을 불안과 공포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으며, 경제를 비롯한 사회의 주요부분들이 준 마비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전국 대학은 이미 2주간 개강연기를 시행한데 이어, 늦은 개강 이후 최소 3-4주간 비대면 강의로 학기를 시작해야 하고, 초중고의 입학도 연기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처음인 것 같다.
전국교육기관들이 개강을 연기하는 사례 말이다. 홍수나 재난으로 지역적으로 학교가 기능을 잠시 멈춘 적은 있어도, 전국의 학교들이 개학을 연기하는 일은 아마도 대한민국 역사 상 처음있는 일인 듯 하다. 그 만큼 이 일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폐렴은 epidemic단계를 넘어 pandemic 단계로 진행되고 있다고 세계보건기구는 경고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 우한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유행하며 창궐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적어도 두 개 대륙 이상의 지역에서 전세계적으로 감염이 번져가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도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광범위한 사람들을 감염시키며 퍼지는 병은 몇 종류가 되지 않으며, 더구나 발달된 현대과학기술문명의 덕택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간 질병은 아마도 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폐렴이 최초가 아닐까 싶다.
이제 이 질병의 감염을 막기 위한 격리조치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시행되면서 여러 생산활동들이 지장을 받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전세계 경제의 퇴행이 예견되고 있다. 이런 때, 미디어에는 이 어려운 시기를 잘 헤쳐나가자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보다는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그래서 사회를 분열시키고 붕괴시키는 메시지로 넘쳐나는 대한민국의 주류언론들을 바라보며, 오히려 시민들보다 미디어를 염려하게 된다.
이 유례없는 코로나 사태의 아이러니를 유발 하리리의 『호모 데우스』(2015)를 읽을 때 아주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거기에서 하라리는 이제 '전염병, 기근, 전쟁'의 시대는 종식되었고, 이제 행복과 영생을 추구하는 호모 데우스의 시대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종식되었다던 '전염병'이 하라리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균·쇠』(2005)에서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그 어떤 질병보다도 광범위하게 지구촌 전체를 향해 퍼져가고 있는 중이다.
'호모-데우스' 시대에 종식되었다던 전염병이 범지구적으로 확산 창궐하게 되는 모습을 보고 하라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인간도 '알고리즘의 집합들'과 같아서, 다른 동물 유기체들의 행동반응과 다르지 않고, 아날로그 알고리즘과 디지털 알고리즘은 '알고리즘'의 작동원리는 통하기 때문에 디지털 인공장치들과 더불어 연동하는 초연결사회에 '호모-데우스'가 빅데이터의 모습으로 출현할 것이라 예견한 하라리는 전염병이 '알고리즘'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일까? 인간이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허탈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일 것이다.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 상에 있는 존재이다. 대략 단백질 외피와 DNA나 RNA코드로 구성되어 있는 바이러스는 생명의 신진대사를 위한 기간들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아서, '기생생물' 축에도 전혀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단백질 외피의 구성을 조정하여 세포 내로 침입한 후, 숙주의 세포 핵에 자신의 DNA를 복제하여 삽입한 후, 대량으로 바이러스 DNA를 생산하는 생산공장으로 숙주의 세포를 활용하면서, 숙주의 에너지를 강탈한다. RNA 코드로 구성된 바이러스는 RNA로부터 DNA를 역으로 복제하여 숙주의 DNA에 삽입하는 기술을 갖고 있어서, 생명공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중이지만, 가장 유명한 이 리트로-바이러스가 바로 AIDS 바이러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바이러스들이 마치 지능을 가지고 환경의 조건에 맞추어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들이 너무도 치명적이면, 유행성 감염병이 될 확률은 낮아진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나 개체에게 옮겨지기 전에 숙주가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바이러스가 연약하면 숙주가 자체 백혈구를 통한 면역기제를 발전시켜 버리기 때문에 생존할 가능성이 낮아질 것이다. 바이러스는 그 절묘한 균형 사이를 뚫고 출현한다.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covid19 virus)가 이렇게 널리 번지게 된 것은 이 코로나 바이러스 변종의 치사율이 극히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숙주가 이동하면서, 여기 저기 바이러스를 옮기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지능적인 생존전략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숙주'는 자신의 행동, 즉 '재채기나 가래침 뱉기' 같은 행동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탓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개체들이 단독으로 살아가는 생물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생명체들과 더불어 공생하는 생명체이다. 그 '공생'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기생하는 생명체들이 전체 공생공동체를 이롭게 하여, 전체가 잘 살아가게 하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이익만을 도모하다 공생공동체 자체를 붕괴시켜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지에 달려있다. 인간도 많은 기생생명체들과 더불어 함께 몸을 구성하지만, 그것들은 인간과 더불어 전체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공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이러스나 기생생명체는 숙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어떤 방식으로 공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체가 더불어 공생하는 생명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도, 전체를 공멸시키고 파괴하는 치명적인 인자로 작동할 수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영향을 받은 우리의 생활방식을 보면 우선 이 바이러스는 외형적으로 전체 사회의 삶의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인간 개체들은 바이러스에 영향을 받은 숙주가 된 줄도 모르고, 그저 자신들이 신앙이 그리고 그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고 무모하게 사회생활을 강행하다, 전체 공동체를 감염시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저 생물학적 알고리즘에 따라 산다. 알고리즘에 따라 살 때, 그 생물학적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설치된 것은 당시 진화적으로 이유가 있었던 일이지만, 그 알고리즘이 달라진 환경에서 '오작동'(misfiring)할 경우, 알고리즘을 따르는 맹목적인 삶은 매우 위험하다.
특별히 그 맹목성이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자신의 생존본능과 이기심을 '구원'이라는 말로 포장하게 되면, 그러한 신앙인들의 삶은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코로나 사태의 한복판에서 절감한다. 기독교 신앙이 포스트휴먼과 호모 데우스의 시대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가장 예증적인 장면이라 생각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