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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분신 50주기] 노동자의 인간선언과 그 신학적 메아리
한국민중신학회장 회장 최형묵 목사

입력 Nov 13, 2020 05:47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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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사진 = 이활 기자 )
2020년 11월 13일은 한국노동운동의 상징 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주기를 맞는 날이다.

2020년 11월 13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 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주년을 맞는, 사뭇 뜻깊은 날이다. 고 전태일 열사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그의 죽음은 신학적 성찰을 일깨우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와 관련, 지난 5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선 '전태일 50주기 개신교 심포지움 - 한국교회, 전태일을 기억하다' 행사가 열렸다. 이번 심포지움에서 한국민중신학회 회장인 최형묵 목사는 ‘노동자의 인간선언과 그 신학적 메아리'란 제하의 발제에서 고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민중신학을 탄생시킨 결정적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최 목사의 발제문 중 중요한 대목을 발췌해 싣는다. 편집자 주]

전태일 사건은 한국 민중신학을 탄생시킨 실질적인 출발점이었다. 민중신학의 선구인 안병무와 서남동이 그 신학적 성찰의 얼개를 엿보인 것이 1975년이었지만, 그 성찰의 맹아는 1970년 전태일 사건 바로 그 순간부터 비롯되었다. 바로 그해 1970년 12월 <기독교사상>에는 당시 청년학생들과 함께 했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총무 오재식의 의미심장한 글 한 편이 실렸다. "어떤 예수의 죽음 - 고(故) 전태일씨의 영전(靈前)에"라는 글이다.

이 글은 정작 본문에서는 ‘전태일' 이름 석 자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채 예수의 삶과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자살한 이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보수교회의 교리주의에 맞서, 죽음이 예견되는 길을 스스로 나서 맞이한 예수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는지 반어법으로 되물으며 오히려 사회적 타살로서 전태일의 죽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 의미는 전태일의 삶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예수의 삶을 회상하는 내용에서 더욱 증폭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13). 전태일이 죽음 앞에서 어머니에게 전했던 그 말씀의 의미를 환기시켜 주고 있다.

민중과 예수의 동일시를 핵심 요체로 하는 민중신학적 통찰은 바로 그 착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가 스스로 민중과 동일시하였다는 것은 복음서의 증언이 확인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예컨대 마태복음 25장 등), ‘예수운동'이라는 개념이 시사하듯 예수의 삶을 당대 민중운동의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수용하는 기왕의 신학에서도 인정되어 왔다. 민중신학의 특이성은 오늘의 민중에게서 재현되는 예수를 발견한 데 있다. 그것은 곧 오늘의 민중사건을 구원사적 의미를 지닌 예수사건과 동일시한 것을 뜻한다.

(중략)

전태일 사건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형성된 민중신학은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것은 민중의 고난을 증언하는 데서 나아가 역사의 주체이자 메시아적 역할을 수행하는 민중을 주목한 것이다.

안병무와 함께 또 다른 민중신학의 정초자인 서남동은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의의를 이렇게 집약하였다. 곧, 민중은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온 실질적 주체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ㆍ억압되어 천민ㆍ죄인으로 전락했"지만,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外化物)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리고 하나님의 공의 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하도록 되었다" 는 것이다.
한 노동자의 인간선언으로서 전태일 사건의 메아리는 이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사건이 함축하는 뜻을 이보다 더 심원하게 펼친 경우가 있을까? 그것은 그의 삶과 죽음이 갖는 숭고함을 간파한 신학적 혜안의 결과였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했던 주인공의 외침은 헛되지 않았다.

그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일종의 부채의식이라고 할까? 그 부채의식은 연대의식으로 발전했고, 민중의 시대를 열어갈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노동자 자신들에게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된 것을 필두로 노동자의 각성을 바탕으로 하는 노동조합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 일련의 변화는 1970-1980년대 민중의 시대를 이끌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50년, 그처럼 놀라운 각성과 성과가 있었지만 정작 노동자의 인간선언은 과연 성취되었을까?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사회 여러 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지만, 놀랍게도 정작 ‘노동자의 인간선언'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중략)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로 이어진 촛불항쟁은 새로운 노동체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에도 그간 강고하게 지속되어 왔던 노동배제체제로부터 노동포용체제로의 전환, 곧 ‘노동 없는 민주주의'에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기대되었다. 1987년과 달리 사실상 촛불항쟁을 촉발한 주역이 노동자들이었고, 항쟁과정에서도 노동의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촛불항쟁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 역시 그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다. ‘사람이 먼저다'를 내세우며 ‘노동 존중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그 의지를 밝혔다. 일자리 정책, 차별해소와 비정규직 노동 정책, 노동기본권 및 노사관계 정책 모두 이전 정부들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확대,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과 상시 지속 업무의 직접 고용 원칙, 공공 부문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특수 고용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최저임금 인상 등 모두 반길 만하였고, ILO 핵심 협약 비준을 통한 노조 조직률 제고, 산별교섭 등 기업단위를 넘어선 단체교섭 촉진제도 도입, 근로감독 강화, 노동 인권 교육 의무화 역시 노동계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한국형 사회적 대화 기구를 만들어 노동존중 사회의 기본 계획을 수립하겠다는 것도 기대되는 바였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너졌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일 뿐, 아직까지 그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의 추세로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난망해 보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태일 사건 50주년인 지금 ‘전태일 3법'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현재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아직도 노동배제체제는 지속되고 있고, 노동자의 인간선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는 노동자 인간선언의 의미

하나의 불꽃이 되어 자신의 몸을 사르며 외친 노동자 전태일의 인간선언에 대해 당대의 신학적 반향은 놀라웠다. 바로 그 사건에서 구원사적 의미를 발견하였으니 신학적 반향으로서는 더 다다를 수 없는 최고의 수위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그로써 새로운 신학, 곧 민중신학이 탄생하였고 교회를 각성시켜 민중연대와 민중선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였으니 그 영향은 한국 기독교 신학과 교회에 아로 새겨져 있다 할 것이다. 물론 노동계와 사회 전반에 대한 영향 역시 두말할 것 없다.

그 사건의 영향이 그렇게 기념비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건만 정작 그가 외친 노동자의 인간선언은 어찌하여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못한 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일까?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50년 아니, 그보다 앞선 시간을 포함하여 70년에 걸친 노동배제체제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강고한 노동배제체제를 역사적으로 서술한 것만으로 어째서 노동자의 인간선언이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지에 대한 답이 찾아진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역사적 현상태만을 기술한 것뿐이다. 그렇게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만 해명한 것일 뿐 그 원인에 대해서는 다시 캐물어야 한다.

특별히 전태일을 기억해 왔고 기억하고자 하는 교회들이 그 현실을 직시하여 복음을 구체화하는 과제로서 오늘의 인권선교에 나서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고귀한 형상을 부여해주었다는 진실, 마침내 하느님이 인간이 된 진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 복음의 진실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마땅히 오늘의 인권실현, 여전히 노동 현장에서 울려
한 노동자의 인간선언, 곧 50년 전 전태일 사건에서 구원사적 의미를 통찰한 민중신학의 메아리는 기존의 교회들에 너무나 충격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소수의 교회들만이 그 메아리에 반응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보편적 인권의 요구와 노동자의 기본권 요구는 오늘 세계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교회와 신학의 마땅한 과제로 여겨진지 또한 오래이다.

한국교회는 그 역사 안에 인권선교의 귀중한 유산을 이어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당대의 인권 문제에 무심하다. 우리사회 구성원 절대다수가 노동자로서 일상의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는 엄연한 현실 가운데서 50년 전 한 노동자의 인간선언, 아니 ‘기독청년' 전태일의 절규를 다시 듣고 응답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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