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광야에서 발견한 은혜

입력 Jun 21, 2021 05:32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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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예레미야 31:1-6, 에베소서 2:2-8, 사도행전 20:22-24

우리 시대에는 자존심은 센데 자존감은 약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서로 다릅니다. 자존심(自尊心, self-pride)은 '다른 사람과 경쟁 혹은 비교하여 나를 높이려는 마음'입니다. 핵심은 타인과의 경쟁입니다.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에겐 이 마음이 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존감(自尊感, self-esteem)은 '자아존중감'의 줄임말로 '외부 환경이나 상황 혹은 평가에 상관없이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준비한 무대를 당일 실수한 나머지 심사위원들의 혹평을 받아도, '다음엔 더 제대로 준비해서 나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려야지!'라고 말하는 마음입니다.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의 자기심리학에 의하면, 자녀의 자기애적 욕구를 공감적으로 반영해주면서 건강한 자기애로 승화해주는 소위 '자기대상'의 역할을 잘하는 부모에게서 자존감이 높은 자녀들이 나옵니다. 자기대상(selfobjects)이란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내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주는 대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공감적인 자기대상의 역할을 하지 않고 너무 엄격하고 높은 기준에 자녀들이 맞추도록 요구하고 또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 비난과 책망을 쏟아내면 자녀들의 자존감은 한없이 낮아집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섭고 엄격한 부모처럼 무섭고 엄격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진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자기가 누구인지 또 자기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게 해주는 자기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적 대상'(rejecting object)이 됩니다. 그리고 한없이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을 만듭니다. 여기에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깊은 오해가 작용합니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두 다른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며 마치 정의와 사랑이 갈라치기 할 수 있는 이항대립적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섭고 두려운 징벌의 신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아가페 사랑의 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는 아예 구약성서를 버리고 신약성서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구약성서 전체가 증언하는 온전한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명한 구약성서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그의 책 『하나님, 이웃, 제국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동선 창조』(성서유니온, 2020)에서 구약성서 안에도 고대 근동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징벌적인 신 이해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학자들은 이런 신 이해를 '공통신학'(common theology)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거의 모든 고대 세계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학에 따르면 지고(至高)한 신, 즉 지극히 높은 신은 자기의 뜻을 거역하는 죄인은 징계하고 복종한 자는 포상합니다. 이 신은 죄인에겐 정의롭지만 순종한 자에겐 자비롭습니다. 그러므로 이 신에게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가 한 백성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구약성서의 신명기에도 이런 하나님 이해가 나타납니다. 신명기는 특히 복(福)과 화(禍)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는데 복에 대한 언급보다 화에 대한 경고가 더 많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명기 30:15-18) 이 본문은 '만일 ~하면 ~될 것이다'(if~then)라는 두 개의 조건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이 '공통신학'의 대원칙은 '단순 동등 보응(報應)'(quid pro quo)의 원칙, 즉 순종에는 상, 불순종에는 벌이라는 단순명료한 대갚음의 원칙입니다.

구약성서 예언자의 심판 담화에도 이 원칙이 나옵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호세아 4:1-3)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은 가혹한 징벌로 이어집니다. 심지어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잠언에도 이 원칙이 적용됩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자녀]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자녀]이니라."(잠언 10:4-5) 특정한 행위는 반드시 특정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학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패망은 결국 이스라엘 역사 내내 반복된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불순종 탓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런데 단순 보응의 원칙은 여전히 건재하고 우리 곁에 살아있습니다. 만일 내가 사회적으로 뒤처지거나 실패했다면 그것은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견책과 징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번영과 성공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신의 뜻에 순종했기에 복을 받은 것입니다. 단순 보응의 신학은 이렇게 체제유지적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탄절이 되어도 우리는 이런 보응의 신학이 숨어 있는 어떤 노래를 즐겨 부릅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크리스마스 캐럴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의 끝은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고 우는 아이에게는 석탄 한 덩어리를 줍니다. 징징거리면서 우는 아이처럼 열심히 일해서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 노력하지 않고 어깃장을 부리는 이들은 결코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주전 587년 이후, 그러니까 유다가 완전히 패망하여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후 구약성서에서 이 공통신학은 더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삼하 7:14-16, 시 89:39-51, 왕상 8:12-13) 이스라엘은 모든 희망을 상실합니다. 민족쇠잔의 절망과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놀라운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가능성과 희망이 말살된 포로기 시절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갑자기 이렇게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입니다.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먼 곳으로부터 와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예레미야 31:2-3) 저는 이 구절이 구약의 하나님 이해의 대전환점(great turning point)라고 생각합니다.

광야(廣野, wilderness)는 포로로 끌려감을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거기선 아무런 기대도 솟아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계시리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고통스런 기억의 광야는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시는 희망의 장소로 변모합니다. 광야에서는 오직 전갈과 마주치리라고 예상했던 이스라엘은 거기서 뜻밖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영원한 사랑'(hesed)으로 끝까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랑은 더 이상 보응의 원칙에 매어있지 않습니다. '만약 ~하면 ~될 것이다'라는 조건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이 순종할지 아닐지의 여부와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일방적으로 사랑과 복을 선포합니다. 오늘의 구약 본문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예레미야 31:4-5)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를 주시는데 더는 조건이 없습니다. 저주의 경고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신실하게 응할지 아닐지 이젠 개의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만 애타게 호소하고 기다립니다.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예레미야 3:12, 22) 포로기의 이사야도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이사야 55:6-7)

오늘 부른 개회찬송이 떠오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 하려나."(찬송가 528장 1~2절) 짧으면 기다림이 아니라고 하지요. 간절한 기다림은 기다랗다고 합니다. 그런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애타게 부르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이는] 안다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사랑하는 이여 /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드디어 죄악과 징벌로 이어지던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졌습니다. 단순 동등 보응의 사슬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끊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끊으셨습니다. 자식과 같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규칙을 위반하셨습니다. 더는 주고받는("give-and-take") 관계에 안에 갇혀 계시지 않고 백성들을 살리시려 새 길을 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뀌지 않으니 하나님 당신이 스스로 바꾸셨습니다. 포로기 이후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그래서 꼭 사고뭉치 십 대 아이를 둔 부모와 진배없습니다. 경험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부모는 자녀가 뉘우치기를 한없이 기다려야 하고, 때론 전전긍긍하며 기리다가 새우잠을 자야하고, 아니 아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애간장이 녹습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결국 아이가 행실을 고치겠다는 기약 없는 기다림을 접고,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그저 얼싸안아 주어야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꼭 이런 가련한 부모를 닮았습니다. 패망한 이스라엘을 향해 무섭게 질타하시던 하나님은 갑자기 그 목소리를 거두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으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세아 11:8-9)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이사야 54:7-8)

사람이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걸 못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애끓는 자비가 하나님 안에 불타는 진노를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심중(心中)에 커다란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은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아직 이스라엘이 잘못을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그에 상관치 않고 일방적으로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예레미야 31:34) 용서하시고 심지어 잊어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용서는 정말 일방적이고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가혹한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으로 바뀌셨습니다. 스스로 변화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건 하나님께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저는 평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애송(愛誦)하는 시편 23편에서 궁금한 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3) 도대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이 말이 하나님의 높은 자존감(自尊感)의 표현이란 걸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단순 동등 보응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뜻을 거역한 죄인을 징벌해야 하는 하나님이 왜 용서와 은혜의 하나님으로 바뀌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에스겔 36:22, 32)

우리 하나님은 여리고 물러터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저지른 온갖 가증한 짓으로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하나님의 명예를 땅으로 떨어뜨려 열방의 조롱거리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존감의 높이는 인간의 척도로 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바빌론의 먹잇감으로 던져 주는 방식으로 당신의 명예를 회복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거꾸로 그 이스라엘을 회복시킴으로써 당신의 명예를 회복하려 하셨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더럽힌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당신이 변화하기로 하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 앞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출애굽기 3:14), 즉 자존자(自存子)라 자신을 밝히신 하나님은 자존심, 즉 누구와 경쟁 혹은 비교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아니라 자존감, 즉 어떤 상황과 변화 속에서도 당신의 '영원한 사랑'(hesed)과 '은혜'(hanan)와 '긍휼'(raham)로 신실하게 세상을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integrity)이 그의 자존감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찬양한 것처럼 진실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사무엘상 12:22)입니다. 당신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라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실 겁니다.

경애하는 이화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질책보다 사랑입니다. 용서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비가 있고, 혼자서는 절대로 넘기 어려운 고통과 고독이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짙고 깊은 목소리로 영혼을 위로하는 배미향 씨의 『쉬면서, 길에게 길을 묻다』에 이런 좋은 글이 나옵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잘 해낼 거예요. 힘을 주고 용기를 얻는 건, 언제나 그런 작은 마음이었습니다. 더 나아지겠다는 다짐도, 더 잘하겠다는 열정도, 잘 해낼 거라고 믿어준 당신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실패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나를 믿는다고, 내가 잘 해낼 거라고 그렇게 믿어주시는 하나님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있기에 우리는 변화하지 않을까요. 그 눈빛이 바로 은혜(hanan)가 아니겠습니까.

한국인들은 '카리스마'라는 말을 참 좋아하지요. '많은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자질'을 뜻합니다. 막스 베버가 그의 저서 『경제와 사회 Wirtschaft und Gesellschaft』(1921)에서 전통적이고 법률적인 권위와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권위를 가리켜 카리스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어원이 신약성서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그 은혜의 어원이 바로 카리스마((χαρισμα, charisma)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카리스마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 그리고 다시 거두어가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을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의 장발장을 변화시킨 것도 그 무서운 사법 집행관 자베르 경감의 체포나 구금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뼛속까지 변화시킨 힘은 장발장이 훔쳐 간 은그릇들을 자신이 준 것이라고 감싸준 미리엘 신부의 용서의 은혜였습니다. 그런 은혜를 구약성서는 '하난'이라 부르고, 신약성서는 '카리스마'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 은혜의 하나님은 신약의 동일한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두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1년 반, 코로나로 모두가 숨죽인 이 고통의 시간은 꼭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배지의 시간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백신 접종이 빨라지면서 어쩌면 곧 평화로운 새 일상이 찾아올 것만 같은 기대를 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음 달에 백신을 맞을 차례입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만 같은 이 '코로나 포로기' 시대에 오늘 구약성서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나 이렇게 선포합니다.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옛적에 여호와께서 [먼 곳으로부터 와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예레미야 31:2-3)

오늘 신약서신 말씀처럼, 우리는 이전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에베소서 2:3-8)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사도행전 20:24)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여러분 앞에는 진노가 들끓던 하나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모든 분노는 썰물처럼 밀려 나가고 그 자리에는 영원한 사랑과 은혜와 자비만이 남아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라고 말씀하시는 이 하나님은 필시 자궁의 모성애를 품은 어머니요, 긍휼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이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자기대상'(selfobjects)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시는 나의 영혼의 거울이며 나의 자존감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시련과 재난을 이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먼 곳으로부터 광야에 와서 여러분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광야에서 발견한 이 은혜,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셔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포로기 이스라엘처럼 저희가 날로 수척해지고 메말라갑니다. 이 재난과 환난 속에서 희망을 잃었습니다. 주님, 염치없지만, 오직 성실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이제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편 6:1, 2, 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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