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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4):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글 · 파울로 연세대학교 신학박사(Ph. D.)

입력 Oct 04, 2021 07:38 PM KST

4.2 신 안에서 자기를 확인하고픈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신 안에서 만족하고자 하는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를 확인하고픈 갈증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지성의 차원에서 만난 신은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성적 차원에서의 투사를 통해 신을 필연성에 근거해 지성적 존재로 옹립하기는 했어도 지성의 특성, 즉 사유가 지닌 구별성이라는 속성 탓인지 영원성, 전능성을 지닌 신 안에서 자기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인간의 자기 확인 욕구는 의지의 형태를 띠기에 이르게 되고 급기야 의지의 차원에서 도덕적으로 완전한 본질로서의 신을 그려내기에 이른다. 이는 지성적 차원에서 투사된 신이 장구한 세월 고중세 철학과 초중세 신학을 장식한 데에 따른 종교개혁가 신학의 기존 신관에 대한 도전이란 의미로도 새겨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포이어바흐의 관점에서는 인간 자기 자신의 대상화 작업에 불과했다. 인간이 제 아무리 기를 써봐야 투사의 불가피성,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편 너머에 있는 저 편의 것을 말할 때 이 편의 그 무엇(혹은 대상)을 거치지 않고서는 저 편의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투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도덕적 완전자로서의 신을 인간의 도덕의 이념이 실현된 것으로 보는 포이어바흐의 아래와 같은 언명에서도 확인된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본질로서의 신은 도덕의 이념이 실현된 것, 도덕률이 인격화된 것, 인간의 도덕적 본질이 절대적 본질로서 정립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본질이다...그것은 또한 인간 자신의 양심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어떻게 신적 본질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스스로를 질책하며 신적 본질을 자기의 가장 내재적 사상이나 심성의 판관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기독교의 본질>, 120-121)

의지의 차원에서 인간 자신의 양심의 소리야말로 도덕적 완전자로서의 신을 투사해 낸 비밀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그런데 이렇듯 의지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의 도덕적 완전성에서 인간은 자기 확인을 통해 종교적 안정을 찾고자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소외였다. 적어도 지성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은 그의 영원성이나 전능성을 인간에게 닮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인간과 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의 도덕적 완전성은 인간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러한 요구 혹은 명령은 인간에게 율법으로까지 의식되기에 이른다.

도덕적 완전자로서의 신은 이처럼 인간에게 자신을 모방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은 자기 자신과 스스로 투쟁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본질로서의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윤리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일러주지만 문제는 그 당위성이 일종의 율법이 되어서 인간 스스로를 억압하며 동시에 현실과 당위 사이에서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와 분열과 갈등을 겪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아가 현실과 당위 사이의 괴리감으로 인간은 죄의식의 늪에까지 빠지게 된다. 결국 인간의 배타적 자기긍정 욕구 때문에 투사의 준거가 지성적 차원에서 의지적 차원으로 옮겨졌건만 도덕적 완전성을 표상으로 하는 신 안에서 인간은 자기 확인을 통한 자기만족을 누리기는커녕 "아버지의 온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3)는 도덕적 완전자의 요구 아래 죄의식만 가중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청교도적 지론들은 이러한 점을 잘 뒷받침 해주는 역사적 증거로 남아있기도 하다.(정재현, <신학은 인간학이다>, 345)

의지적 차원에서 투사된 신과 인간의 관계

그러면 이처럼 의지적 차원에서 투사된 신은 투사하는 인간과 각각 어떤 모습을 취하며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일까?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인간의 소망이 극도로 표출된 사건인 초자연적인 기적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적인 대상이며 신앙의 내용에 해당한다. 의지적 차원에서 투사 주체인 인간의 행위 속에 내포된 종교적 소망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의 기적 신앙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은 지성 혹은 감성적 차원에서는 이해 불가하며 오직 의지의 차원에서만 이해 가능한 것인데 이는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선천적인 시각장애자와 청각장애자 그리고 절름발이를 치료하며 사람을 생명의 위협에서 구해내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부모나 형제 자매의 간청에 따라 되살리는데 이가 의지적 특성을 지닌 종교적 소망에 기인한다고 포이어바흐는 보고 있다.

이 같은 종교적 소망의 특징은 결코 제한이나 법칙이나 시간에 속박되지 않고 또 순식간에 그 필요가 채워지는 것이라야 한다. 병자가 건강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단순한 명령에 따라 찰나의 순간에 건강하게 되는 것은 기적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기독교의 본질>, 227) 그런데 굶주린 배를 채워주거나 병을 낫게 하는 것을 넘어 죽은 나사로를 되살리기까지 하는 일련의 기적 사건이 일제히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목적을 수단 없이 실현하고 소원과 성취의 직접적인 통일이 나타나게 하는 데서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영속성, 즉 불사를 확인하고자 할 따름이다.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는 위력 안에서는 그 어떤 인간의 소원도 모두 충족될 수 있기에 그렇다. (<기독교의 본질>, 228) 기적을 통해서 인간이 최종적으로 성취하길 바라는 것은 죽음조차도 이겨내는 자기 확실성이란 점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정재현, <신학은 인간학이다>, 355) 이렇듯 초자연적 기적 신앙을 통해 인간은 자기 확인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인간의 자기중심성 기대에 부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지적 차원에서 자신의 영속성을 희구하는 인간이 위에서 언급한 대로 기적 신앙에 도취되어 있다면 같은 차원에서 투사된 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의 기적 신앙에 부응해 나타나는 신의 모습은 "무에서의 창조"를 원천으로 하는 섭리와 기적의 전능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신의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영속성의 희구를 가장 잘 보장해 주는 것이기에 그렇다.(정재현, <신학은 인간학이다>, 355) 먼저 자연계의 질서에 매이지 않고 초자연적 권위로 연제든 자연법칙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의 의지가 확고하게 드러나는 신의 섭리는 신의 기적의 전능성을 풍부하게 담아낸다.

특히 섭리의 원천인 "무에서의 창조"는 전능의 최고 표현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 이 "무에서의 창조" 신앙은 기적과 동일한 것으로 섭리와 일치하는데 그것은 섭리의 이념이 기적의 이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기독교의 본질>, 193) 전능한 의지의 작품으로서 "무에서의 창조"가 이처럼 기적의 동일한 범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포이어바흐는 "시간상으로만 뿐만 아니라 서열상으로도 제1의 기적이며 모든 기적을 계속해서 생성시키는 원리"(<기독교의 본질>, 192)라는 점을 들고 있다. 세계를 "없음"에서 "있음"으로 만드는 신의 무제한적이고 전능한 의지를 뜻하는 신의 섭리 안에서 인간은 세계의 허무성과 신의 전능성을 함수관계에 넣어 세계의 허무성은 내리깔고 신의 전능성은 드높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정재현, <신학은 인간학이다>, 355)

순간적이면서 자의적이며 "신뢰하기 어려운 실존"(<기독교의 본질>, 191)으로서 세계는 깎아 내리고 신의 권위를 보장하는 신의 전능성에는 찬사를 마다않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의 이면에는 도대체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교적 이기주의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라는 게 포이어바흐의 지적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신이 동물을 위해 동물이 되었다든가 또는 신이 동물이나 식물을 위해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기독교의 본질>, 194) 신이 인간화되는 것은 기적이지만 신이 동물이 되는 것은 불가할 뿐더라 그것이 설혹 가능하더라도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렇듯 기적 혹은 섭리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만 관계될 뿐이며 인간에게만 속한 것으로 인간을 세계 전체의 연관에서 따로 떼어놓는 일종의 특권 의식마저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기독교의 본질>, 195)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섭리는 인간이 자기실존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갖는 확신이며 섭리에 대한 믿음 조차도 결국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에 불과하다.<기독교의 본질>, 195-196) 인간의 배타적 자기 긍정 욕구에 의해 투사의 준거가 지성에서 의지로 옮겨진 곳에서 인간과 신이 만나는 근거가 인간의 자기를 믿는 신앙, 즉 자기중심주의적인 이기주의적 신앙임을 확인시켜줄 따름이다. 섭리 또는 기적 신앙은 불사를 꿈꾸는 인간의 영속성 희구 등 소망의 표현에 해당하는 것이란 설명이다.(정재현,<신학은 인간학이다>, 356)

"신이 나를 걱정해준다.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다. 신은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나도 역시 똑같은 것을 원하나. 그러므러 나 자신의 관심은 신의 관심이며 나 자신의 의지는 신의 의지며 나 자신의 궁극 목적은 신의 목적이며 나에 대한 신의 사랑은 나의 신격화된 자기애에 불과하다."(<기독교의 본질>, 195)

외형적으로는 신의 전능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이면에는 인간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자기중심주의에 부응해 자신의 영속성 추구에 급급한 인간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는 포이어바흐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인들의 비위를 건드리며 적잖은 반감을 불러 일으켰음에 틀림 없다. 신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니 신을 거룩하게 모셔온 이들에게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일 것이다. 더욱이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신의 섭리의 초자연적 실재성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지의 차원에서 인간의 불사에 대한 소망이 신의 전능성을 믿는 기적 신앙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투사하는 인간과 투사된 신이 만나는 교차점에 그 어떤 다른 대상이 아닌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의지적 차원에서 투사된 신과 투사하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는지를 살펴봤다. 지성적 차원에서 이질감을 맛본 인간은 배타적 자기긍정 혹은 자기 확인 욕구에 의해 의지적 차원으로 투사의 준거를 옮겼고 의지의 형태를 띤 도덕적 완전자로서의 신을 그려냈다. 그러나 도덕적 완전성을 요구하는 율법적인 신과의 대면으로 인간은 현실과 당위 사이의 깊은 괴리감 속에서 죄의식만 가중되는 경험을 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 안에서 자기를 확인하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 같은 평안을 누리기 위해 시작된 투사는 본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차원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일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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