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김경재 칼럼] 가상현실과 삶의 철학: 베르그송, 딜타이, 함석헌을 중심으로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혜암신학연구소 편집고문)

입력 Dec 22, 2021 10:10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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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1. 폭풍우 같은 IT문명도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빗겨갈 수 없다

오늘의 칼럼에서 주제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삶의 철학(Philosopie der Lebens)" 이다. 필자는 솔직히 말해서 컴퓨터 문명에서 뒤쳐진, 그래서 활자문명과 아날로그적 사고에 더 익숙해져있는, 사라져가는 노병세대(老兵世代)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현대문명사회와 우리 삶을 폭풍우처럼 휘몰아가며 뒤덮고 있는 '가상현실'로 상징되는 컴퓨터와 모바일에 갇힌 유폐된 삶을 직시한다. 컴퓨터혁명과 모바일혁명으로 상징되는 IT문명의 실용성과 효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사람이기에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고파 삶의 철학을 다시 독자들과 함께 되새김 하고자 한다.

현대인류가 큰 자긍심을 갖고 누리는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상징되는 IT문명이라는 삶의 양식이 놀랍고 편하기는 하지만, 플라톤의 대화록 중 『Politeia』 가운데 비유로 나오는 '동굴의 비유'가 지적하는 핵심처럼, 21세기 인류도 결국은 IT문명이라는 기술과학적 '동굴' 속에 갇혀있는 것 아닌가 우리 자신을 성찰하자는 것이다.

회고하건데, 필자가 1980년대 중반기 무렵 미국 클레아몬트 대학원에서 세계적 석학 존 힉(John Hick)과 존 캅(John Cobb, Jr) 교수에게서 종교 간의 대화 신학과 과정신학을 배울 때, 과학선진국이라는 미국대학교 교무처 사무실 직원들의 극히 일부분이 컴퓨터를 만지고 있었고 대부분은 전동타자기를 가지고 사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20년이 채 못 되어서 서기 2,000년 무렵엔, 지구촌 모든 사무실은 컴퓨터를 사용하고 지식정보는 갑자기 그 이전 시대보다 2배로 늘었다.

더욱 놀라운 변화는 개인 휴대전화 모바일 문명이다. 들고 다니기에 버거운 컴퓨터의 하드웨어도 집에 놔두고, 노트북 사용도 뒤로 제치고, 인류문명 진화사 시기 구분에서 '호모 사피엔스' 시대와 구별하는 '모바일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라는 신조어까지 등장 하였다. 이제 인류는 IT 기술과학문명 발전에 힘입어, 인간의 두뇌와 오관의 감각 인지능력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확장하는 IT 기술문명시대에 돌입하였다. 주위를 살펴보자. 초중고등 학생은 말 할 것도 없고,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보아도 중년 남녀여성들이나 노년층까지 모두 손바닥 크기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웃고 즐기며, 멀리 떨어진 사람과 대화하고, 금융 은행 결제를 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새로운 최신정보를 얻고, 심심풀이 전자기기 놀이에 빠진다.

핸드폰으로 백과사전처럼 검색해보면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 reality)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상상에 따른 공간과 사물을 컴퓨터에 가상(假想, virtual)으로 만들어, 사이버 시공간과 사건을 현실 실제처럼 체험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자 인공현실이다." 그런데 가만히 '가상현실'이라는 문자를 들여다보면 두 개의 어휘가 표상하는 개념이 상호모순적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상(假想)'은 '현실(現實)'이 아니다. 현실적 실재물이 아니다. 그것은 IT기술이 인간의 감각기능을 속이고, 홀리고, 몰입시키는 '생화학적 약물' 없이 엑스타시에 빠지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철저히 인간을 감각적 쾌감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반응하는 '생물학적 기계'라고 보는 대전제를 가지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컴퓨터와 핸드폰을 통하여 IT문명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은 좋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가 폭풍우처럼 몰아닥치는 '가상현실'에 갇혀서 학교 등하교 길가에 피어있는 들꽃의 신비로움이나 만나는 진짜 생명체들의 희비애락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거나 감정이 둔감하게 된다는 현실이다.

'생각하는 기능'을 핵심 특징으로 하여 인류 진화사에서 승리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왜 이렇게 스스로 자기자신을 생각함을 잃어버리고, 자기자신 대신 생각하는 기계인간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로 변모하게 되었을까? 지나간 300년 인류정신사를 잠깐 성찰해보면 그 원인이 밝혀진다.

2. 계몽주의 시대정신의 변질과 배신에 대한 저항으로서 낭만주의와 삶의 철학

필자는 지난번 칼럼에서 칸트가 이해하는 계몽주의의 본질을 강조한바있다. 칸트에 의하면 "계몽이란 인간이 성숙한 성인이 되는 것"이다. 성인은 책임적 주체의식을 가지고 각자가 자기 인생에 책임성과 자유를 가지고 각자가 자기답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필자는 계몽주의의 핵심 단어 이성(理性)의 4가지 기능을 폴 틸리히 지론을 따라서 존재론적 이성, 직관적 이성, 비판적 이성, 추리(推理)계산적 이성 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런데 계몽주의시기(17-18세기)의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이성 기능의 4가지 중, 존재론적-직관적 이성 기능을 무시하고, 비판적-수리적(數理的) 이성 기능만을 발전시키고 중요시했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이나 종교철학적 관심과 예술이나 문학적 시(詩)에 관한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이성의 비판적 기능과 수리적 종합분석 능력만 발전시켜왔다. 그 결과 대학에서 자연과학이 정신과학을 압도하고 무시하면서 진리, 학문, 세계, 인간, 생명 등등 이해를 '합리적 기계론' 입장에서 설명하는 문화정신 풍토가 조성되고 말았다. 우주, 생명, 인간의 실체를 거시적 혹은 미시적 '다소 복잡한 정밀기계'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는 기능은 '물질과 정신'으로 구성된 인간 본질 중에서 모든 것을 분석종합하거나 비판해체 시키는 인간의 주체적 정신 곧 비판적-계산적 이성이 수행한다고 확신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의 탈선, 기계론적 세계관, 생명의 신비와 외경을 짓밟는 생물학적 인간 이해 등에 "아니야!" 라고 반기를 든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로망주의(Romanticism)와 삶의 철학(philosopie der Lebens)인 것이다.

3.낭만주의(로망주의) 운동이 주장하는 것

기대했던 계몽주의가 오만과 탈선으로 흘러가면서 인간, 생명, 사회, 세계에 대하여 굳어진 철학적 체계나 경직된 기계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삶 전체를 포위하고 억압할 때, 18세기 전반기에 질풍노도 운동과 함께 일어난 문화사상 조류가 낭만주의 운동이다. 슐레겔 형제, 쉘링, 슐라이에르마허, 노발리스, 시인 휄더린과 실러, 그리고 유명한 괴테가 그 대표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인간 이성을 존중하되 계몽주의 세계관이 만들어 놓고만 굳어지고 닫혀지고 기계적이고 생명력이 없는 기계론적-무신론적 합리주의 계몽사조를 반대한 것이다. 이성과 함께 감성, 의식과 함께 무의식, 기계와 함께 유기체, 자연과학 지식과 함께 시와 예술이 함께 숨 쉬는 미학적 세계관과 인간다운 삶을 주장하였다. 오늘 우리의 주제는 삶의 철학이기 때문에, 그 삶의 절학의 전단계 시대사조이자 뿌리가 된 낭만주의 특성에 대하여서는 다음같은 4가지 특징만 열거함으로서 삶의 철학 대두의 준비고찰로 만족하기로 해야 하겠다.

첫째 낭만주의 운동은 사상사적으로 18세기 전후로 하여 일어났는데, 특히 합리주의를 표방하고 나온 계몽주의가, 인간 이성의 미학적 감성능력, 존재 깊이를 감지하는 초월적 영성능력, 예술적 창조 능력, 그리고 유기체인 자연의 능산적 힘과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려는 종합적 정신 운동이다. 줄여 말하면, 낭만주의는 경직화된 합리주의와 유물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반대하고 일어난 운동이다.

둘째, 낭만주의 운동은 특히 인간의 미학적 직관 능력과 예술과 문학에서 창조적 능력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낭만주의자들은 확신하기를 모든 자연과 학문은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근현대적 인간 삶이 모래알처럼 분산되고 통일성을 잃은 것은 시(詩), 미술, 음악으로 대표되는 예술적 미감각을 잃어버리고 자연과 인간과 생명체를 기계부품조각들의 합성물 정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각각 개인의 삶은 아직 미완성적인 생성단계이며 유기체적 공동체 문화와 예술과 교육 안에서 도야(陶冶)되고 완성되어야 할 존엄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낭만주의 사상은 모든 사람들이 전문적인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의 참 의미는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친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일상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 인간의 감성을 교육하고 도야하는 것이다."(노발리스)

셋째, 낭만주의 운동은 거칠어지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자들이 대체로 종교를 멸시하거나 인간의 신비체험이나 직관능력을 무시하는 태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다. 참된 성숙한 이성은 종교를 멸시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슐라이에르마허의 명저 『종교를 멸시하는 지식인들을 위한 강화』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설익은 지성인들은 이성인임을 빙자하여 흔히 종교를 덜 계몽된 무지, 미신, 민중의 아편, 극복되어야 할 환상이라고 폄하하거나 오해한다. 낭만주의자들은 굳어진 교리주의적, 교권주의적 종교에 대하여는 비판하지만, 인간에게서 종교적 영성은 일종의 선험적 존재지반에 대한 직접적 감정이며 무한한 창조력의 원천이 된다고 보았다.

넷째, 낭만주의 특징은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열리게 된 개인의 자유와 대체 불가능한 인격의 존엄성을 지속하면서도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 공동체적 삶, 유기체적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개인이라는 인격체가 소라껍질 속에 들어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위 자연과 인격체들과 소통하면서 영향을 받으면서 나무의 나이테처럼, 누에고치처럼, 형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단자화(單子化)도고 파편화 되어있어서 진정한 의미에서 공동체적 삶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혼자 살면 외롭고 함께 누구와 같이 살면 괴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 안에 전체를 품고 있는 인격적 존재이다. 공동체적 삶 경험 안에서 인격성도 성숙해간다. 개인의 실존성 장에 이미 공동체성이 들어와 있다. 개인주의란 허구적 망상이다. 그가 혼자 듣는 모차르트 음악, 혼자 모바일폰으로 보는 영화가 모두 공동체 삶의 결실물이다. 천재와 수재를 따로 떼어 놓아 교육하는 제도는 결국 사회를 무한경쟁의 사닥다리구조와 양극화현상을 가속화 할 뿐이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낭만주의 시대사조 운동이 18세기의 기계론적 합리주의에 대한 생명저항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기계론적 시대 조류, 기술공학문명, 굳어진 실증주의적 유물론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낭만주의자들의 비전과 꿈이 너무 컸다. 그래서 세계 지성인들은 낭만주의 정신을 바탕에 깔지만, 좀 더 섬세하고 이성적인 새로운 '삶의 철학'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19세기 후반기에 일어나서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다시 한번 인류사상계를 일깨운 철학이 '삶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4. 삶의 철학을 다시 되살려내야 한다.

지면의 제한으로, '삶이 철학' 사상가 중에서 앙리 베르그송(1859-1941)과 빌헬름 딜타이(1833-1911) 두 사람을 살피고, 삶의 철학을 한국 땅 20세기를 살면서 한국적으로 펼쳐내었던 함석헌(1901-1989) 사상의 핵심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삶의 철학자 중 대표적 인물로 베르그송을 생각한다. 그를 세계적 사상가로서 인정하게 만든 명저 『창조적 진화』 속에 나타나는 핵심적 열쇠말은 인간의 기억이나 의식의 본질을 경험이 반복되면서도 누적(累積)되어간다는 '지속'(持續)이라는 개념이다. 자동차 바퀴는 회전운동을 반복한다, 굴러가면서 원운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지속(持續)이라는 독특한 개념은 단순히 반복, 계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거의 모든 체험들이, 혹은 삶의 흔적들이 오늘의 생명 속에 쌓이고 응축되어 보존되면서 반복한다는 개념이다. 비유하자면 눈사람 만들 때 눈덩이가 구르면서 커나가고, 나무의 나이테가 계절 따라 불어가고, 진주조개가 수만 번 바다물결의 들고 나감을 반복하면서 속살은 자라고 진주알 크기가 점점 커나가는 형국을 생각하면 지속(持續)의 개념을 다소 이해할 수 있다.

베르그송에 있어서 인간 삶의 특징인 의식(意識)은 고정불변한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지속, 기억의 보존, 창조적 질적 도약을 거쳐나가면서 역동적인 열려진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물질계의 기계적 운동은 반복하고, 아무리 복잡한 기계조합물이라 할지라도 해체하여 구성부품들로 환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인격적 삶은 과거 그의 삶을 구성하였던 부분들로 해체하여 환원시킬 수 없다. 각각 개체 인격적 생명체 그것으로 유일무이한 고유성과 존엄성을 갖는다. 개체생명 안에는 그 집 안 가문은 물론이요, 지구 45억년 진화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다. 한 인간의 삶을 기계적, 기능적, 수량적, 생산공정의 노동기능적, 화폐가치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빌헬름 딜타이는 독일계 '삶의 철학자'로서 인간 삶의 특징을 '체험'에서 본다. 우리가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그 무엇을 체험하면서 사는 것이다. 사계절의 변화, 전쟁과 기근과 질병,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의 감상,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를 통한 희비애락이 모두 <체험>이다. 삶의 <체험>은 <경험>과 비슷한 어휘이지만 몸전체로 이해하고 경험을 육화(肉化)시킨다는 경험의 내면화를 의미한다. '삶의 체험'은 기계적 환경이 우리들에게 주는 어떤 '물리적 힘'에 의한 영향력이 아니고 '가치와 의미가 주는 내면적 영향력'이다. 좋은 영화나 문학작품을 읽고 나면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정신적 시계(視界)가 이전보다 깊어지고 높아지고 넓어진다. 이것을 삶의 지평확장 이라고 부른다.

<체험>되는 삶의 충격과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사람은 체험의 감동과 영향력을 새롭게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게 된다. 그것이 시, 예술작품, 철학, 등등 정신과학분야의 새로운 결정체들이다. 딜타이에 의해서 요즘 흔히 사용하는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연구대상, 연구방법, 연구목적 등이 분명하게 구별 되었다. 정신과학은 요즘으로 말하여 인문학과 사회과학인데, 인간정신적 삶의 과정, 결실, 그것의 이해와 해석을 다룬다. 자연과학은 연구대상을 '설명'하지만, 정신과학은 연구대상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삶이란 다른 사람의 내면적 <체험>이 <표현>된 총체를 <이해>하면서 이루어져 간다. 줄여서 말하면 인간의 정신적 삶이란 "<체험>-<표현>-<이해>"로서 요약되는 세 단계 정신운동 과정을 항상 새롭게 반복하면서, 새롭게 체험된 삶을 다시 새롭게 표현하고 새롭게 표현된 것을 다시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적 삶은 본질적으로 시간적이기 때문에 딜타이는 인간의 삶의 본질적 특성으로 '역사성'을 중요하게 부각시킨다. 역사성은 인간체험의 시간성을 말하는 것인데, 과거와 미래지평 안에서 현재를 파악하는 정신적 삶이다. 그것 없이는 동물적 삶과 다름없다. 다시 말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 개체생명은 공장에서 대량생산 해낸 고급기계가 아니다. 과거 기나긴 역사적 인간들의 의미있는 삶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는 한그루 나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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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

한국이 낳은 20세기 철학자 함석헌을 삶의 철학자로서 필자는 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다른 글들을 읽어보면 그가 베르그송과 딜타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나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삶의 철학자' 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간략하게 소개한 베르그송과 딜타이의 생각을 함석헌은 <맘>이라는 시에서 다음같이 노래한다. 여기에서 <맘>은 <몸>과 같은 것이며 결국 심신통일체로서 <인간생명체>를 뜻한다.

맘은 꽃 / 골짜기에 피는 란(蘭) /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 맑은 향(香)을 토해...
맘은 씨알/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이글은 가상현실의 쓰나미 같은 폭풍 속에서 날마다 텔레비전, 컴퓨터, 모바일폰에 눈귀와 얼굴을 파묻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진정 45억년 지구역사를 자기 몸속에서 느끼며, 이웃인간과 들풀들과 동물들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사람답게 살고파 돌아보는 영혼의 울부짖음이리라.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기르며 가족식구처럼 입양하여 삶을 살아가는 인구가 1,000만 명에 육박한다는 뉴스가 들린다. 함께 살던 애완동물이 죽으면 그렇게 슬퍼하면서 큰돈을 들여 장례까지 치러주는 가정도 있다. 인간이 가상현실세계로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와의 교감을 그리워 한다는 증좌가 아닐까?

그런데 매우 역설스럽게도, 지구촌과 우리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한 동종 호모사피엔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과 공감능력'은 날로 쇠퇴해가는 것 같다. 삶의 철학을 잊어버리고 우리 문명이 기술공학문명에 압도당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사람 살아가는 진정한 환경은 살아있는 자연이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세계이다. 기술공학적인 가상현실세계의 장점과 공헌이 있지만 그 세계가 진정으로 인간 인격의 성숙과 영글어감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자는 '삶의 철학'의 복권을 다시 주장하고 싶다.

※ 본 글은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혜암신학연구소에 기고한 정기 칼럼입니다.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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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칼럼] 가상현실과 삶의 철학: 베르그송, 딜타이, 함석헌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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