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예레미야 30:12-17, 갈라디아서 6:14-18, 요한복음 20:24-29
설교문
요한복음 20장에는 약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고(19-23절),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24-29절). 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났지만, 그 중심에는 동일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의혹 속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사건입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요한복음 20:19) 그들은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누구겠습니까? 제자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 있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문을 굳게 닫고 숨죽인 채 모여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닫힌 문을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입을 여셨습니다. "에이레네 휘민!"(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 요한복음 20:19, 21)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건네신 첫 번째 메시지는 바로 평화, 곧 에이레네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요한복음 20:20)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없던 제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도마(Thomas)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지만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복음 20:25) 그 순간부터 도마에게는 하나의 별명이 붙습니다. 바로 '의심 많은 도마'입니다.
여드레가 지난 뒤,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 20:26) 보십시오. 장면이 똑같습니다. 여전히 문은 닫혀 있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도마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한복음 20:27) 그 순간 도마의 입에서 절규와도 같은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한복음 20:28)
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도마는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세 번 등장합니다.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요한복음 11장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이 그에게로 가자고 하실 때였습니다. 상황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시나이까?"(요한복음 11:8) 그때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한복음 11:16) 이 말에서 우리는 도마의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용감하고 대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마가 다시 등장하는 장면은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하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또 그분을 보내야 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황망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한복음 14:1-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말씀하시자 도마가 불쑥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까?"(요한복음 14:5, Lord, we do not know where you are going. How can we know the way?)
당돌한 질문입니다. 어찌 보면 눈치 없는 질문입니다.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죽음과 이별을 예고하시는 말씀 앞에서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데, 도마는 서슴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질문 때문에 우리는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 하나를 듣게 됩니다. 예수께서 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선언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위대한 선언을 이끈 사람은 바로 의심 많다는 도마였습니다.
도마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대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마로부터 '정직한 신앙', 그리고 '질문하는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이랬던 도마가 왜 부활절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누구보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할 정도로 도마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도마에게 더욱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홀로 비탄 속에 잠겨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슬픔과 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그러나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했습니다. 자기 손가락을 예수님의 못 자국에 넣어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다시 전합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요한복음 20:26) 들으셨습니까? 여전히 문들은 닫혀 있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여전히 두려움 속에 떨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드레 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조차 여전히 불안 속에 있었습니다.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마는 달랐습니다. "직접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말했던 도마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 서는 순간 이렇게 절규하듯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My Lord and my God!)
여러분, 이 고백이 요한복음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퀴리오스)'이시고 '나의 하나님(데오스)'이 되신다는 것, 이것이 요한의 신앙고백이며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그 고백이 우리가 흔히 '의심 많은 도마'라 부르는 도마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사실 도마는 믿음을 거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지하게 믿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문으로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짜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부활이 정말로 사실인가?"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는가?" 도마는 이 질문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마음속 의혹은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정직함 때문에 그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가장 깊은 신앙고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7) 지금 무슨 장면입니까? 어떤 모습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은 도마에게 눈부신 영광을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의 군대를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건 단 하나였습니다. 십자가의 상처 자국이었습니다. 손에 남은 흉터와 옆구리에 남은 흉터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여전히 그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깊은 진리를 보여 줍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지워 버리는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상처를 지워 버리는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상처를 품고 이루어진 생명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먼 밖에서 그것을 멀찍이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못 자국을 그대로 지니신 하나님입니다. 사랑했기에 얻은 그 흉터를 그대로 지니신 하나님입니다. 도마는 바로 그 상처를 보고 그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절규하듯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장엄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어느 한 사람이 이 진리의 선언을 자기 입으로,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말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태초에 계시던 그 말씀이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성서에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의 비슷한 고백을 듣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맨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라디아서 6:17)
여기서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stigmata)입니다. 낙인, 상처 자국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수없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채찍에 맞았습니다. 돌에 맞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모든 상처가 그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그 상처는 그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확고한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구원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도마는 그 상처를 보고 믿었습니다. 바울의 몸에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흔적을 몸에 지니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다가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다가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다가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다가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상처를 경험합니다. 그 상처들은 때로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흉터가 돼라. 어떤 것을 살아 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네이이라 와히드, <흉터>)
흉터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흉터는 한 사람이 인생 속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꺾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흉터는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생명력의 증거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흉터들이 있습니까? 어떤 상처의 흔적이 있습니까?
상처 많은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고 하지요. 우리나라에 전주장(全州欌)이라는 전통 가구가 있습니다. 전주장의 아름다움은 좌우대칭을 이루는 나무의 무늬, 즉 용무늬에 있습니다. 용무늬는 용목(龍木)이라는 나무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이름의 나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느티나무에서 간혹 발견될 뿐입니다.
용목은 심하게 상처받은 느티나무입니다. 병이 깊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몸의 한 부분이 옹이 지고 뒤틀린 나무입니다. 오랜 세월 가슴에 병을 품고 안으로만 또 안으로만 상처를 다독이고 견디느라 다른 부분보다 더 단단해진 부분을 지닌 나무를 용목이라 합니다.
그런데 목공예 소목장(小木匠)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나무의 물방울무늬를 최고로 칩니다. 이런 용목은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따로 없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합니다. 돈이 있어도 사기조차 어렵습니다. 평생 나무 구하는 일에 바친 소목장들도 생애에 몇 번 구할 수 있을까말까라고 합니다. 나무의 무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전주장은 옻칠도 하지 않습니다. 무늬 자체가 아름다움을 다 표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상처 없는 나무는 평범한 나무일 뿐입니다. 그러나 상처를 견디며 자란 나무는 어느 날 놀라운 무늬를 드러냅니다. 우리 인생의 눈물과 고통과 상처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아름다운 무늬가 됩니다. 향나무도 상처가 있어야 향기가 납니다. 도끼로 찍어 상처를 낼수록 향기는 더욱 짙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여전히 못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상처를 지워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는 가장 위대한 사랑이 남긴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처는 실패의 흔적이 아닙니다. 그 상처는 우리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도마는 바로 그 상처를 보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상처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흔적이 남아 있습니까? 세상 성공의 흔적입니까? 아니면 사랑하며 살았다는 흔적입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받은 상처, 정직하게 살려다가 받는 상처, 믿음을 지키다가 받은 상처, 진실을 말하다가 받는 상처. 그 상처들은 결코 헛된 것들이 아닙니다. 그 상처들은 실패의 흔적이 아닙니다. 그 상처들은 내가 무엇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았는지를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의 "그 손과 몸의 상처가 영광 중 빛[납니다]. 하늘의 천사도 그 영과 보고서 고난의 신비 알고자 늘 흠모[합니다]."(찬송가 25장 2절) 못 자국의 흉터가 있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시는 분, 그 분이 바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도 십자가의 상처를 지닌 채 나를 찾아오시는 그분 앞에서 도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터져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면서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 자국 만지십시오. "어둠 속을 걸어갈 때에" 그 손 못 자국 만지십시오. 나의 "죄악의 짐 무거울 때에" 그 손 못 자국 만지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지키며 인도하실 것입니다.(찬송가 456장) 그리고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우리의 삶에 남은 그 많은 상처가 부끄러운 흉터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았다는 아름다운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가 세상을 구원한 하나님 사랑의 흔적이었듯이, 우리 삶의 상처들도 그리스도를 따라 살며 남는 사랑의 흔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 인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못 자국 난 그분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살았노라고, 그리고 못 자국이 있는 그분의 손을 붙잡고 평생을 살았노라고. 아멘.









